- 대중음악평론가 이백천의 회고록을 3회에 걸쳐 싣는다. 그는 195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한국 가요 역사의 산증인이자, 일세를 풍미한 포크음악의 이론적 스승이었다. 가수 조영남은 그에게 “통기타 군단의 담임선생님” 이라는 닉네임을 붙여줬다.<편집자>
1962년 ‘민들레 악단’의 드라마센터 공연. 가수는 유주용, 연주자 중 앞줄 맨 왼쪽이 나
누군가 내 사주를 보고 예(藝)와 문(文), 역마(驛馬)와 도규(刀圭)가 있다고 했다. 예는 음악, 문은 글, 역마는 매스컴, 도규는 의사가 되어 칼로 환자를 수술할 팔자라는 뜻이다. 따지고 보면 음악평론도 음악에 칼을 대는 것이니 사주가 아주 빗나가지는 않은 셈이다.
세 살 때 집안은 조금 더 북쪽, 황해도 신계(新溪)로 이사를 했다. 집 앞쪽은 잡화상점, 뒤쪽은 병원이었다. 어머니의 바로 아랫동생인 영배 삼촌이 그때 결혼을 하고 잡화점을 했다. 삼촌의 방에 몰래 들어가 외숙모의 경대 위에 있는 분갑을 열어 냄새를 맡곤 했는데, 숨막힐 듯하면서도 환각적인 그 냄새가 나의 첫 후각적 성체험이 되었다. 그곳에서 처음 쌍날개 비행기를 보고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소리도 들었다. 처음으로 소리에 집중한 순간이었다. 그때 내 별명이 ‘군수영감’. 뒷짐을 지고 느슨느슨 걷는 폼이 그랬던 모양이다.
만 여섯 살에 소학교에 입학했고, 그해 3학기(당시는 3학기제)에 우리집은 다시 전라도 이리(지금의 익산)로 이사를 했다. 물자가 귀해지기 시작한 시기(1940년)라 내가 신을 것이 여자 운동화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싫어 그냥 맨발로 학교에 갔던 기억도 있다. 일요일이면 목상리에서 큰 규모로 농사를 짓는 큰집에 가 사촌들과 어울려 논에서 우렁도 캐고 개울에서 미역도 감았다. 그때쯤 아버지가 라디오를 가져오셨다. 처음으로 음악을 들었다. 다이얼을 돌려 채널을 찾는 일이 신기했다. 음악소리가 너무도 깨끗하고 곱게 들렸다.
3학년 때에는 다시 서울 노량진 본동으로 이사했다. 한강교의 아치가 너무 웅장해 산처럼 높게 느꼈다. 한강교 남단 바로 옆에 제법 큰 요정이 있었는데 이름은 용봉정(龍鳳亭), 그 뒤 계곡에 우리가 살 집이 있었다. 학교는 흑석동의 은로국민학교였다.
전학하고 얼마 후부터 조회 내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길어진 교장의 훈시, 동경을 향한 궁성요배(宮城遙拜), 교육칙어(敎育勅語) 낭독, 대열행진연습, 사열. 여기저기 나붙은 문자도 어수선했다. 국어상용(일본어상용)에 성씨개명, 공출, 징용, 징병, 귀축미영(鬼畜美英), 결사대, 가미카제 특공대(神風特攻隊) 등이었다.
아버지는 李자를 둘로 나눠 목자(木子)라는 성을 만드셨다. ‘기노코’가 창씨개명한 새 성이었다 ‘카미카제’ ‘옥쇄(玉碎)’라는 단어가 자주 들려올 즈음 미군 비행기 B29가 한강교 위를 천천히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러할 무렵 졸업기가 되었고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다. 일차 경복중학 낙방, 이차 중앙중학 합격. 이때가 1945년 4월이었다. 그리고 종전과 해방. 한동안 전차가 다니더니 전력사정으로 운행중단이 되고 역마차가 교통수단이 되었다. 지나가는 트럭이 속도를 늦추면 가방 먼저 던져넣고 올라타던 시절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상도동으로 다시 이사를 했다. 전철을 타려면 노량진까지 고개를 넘어 다녀야 했다. 때로는 전기사정으로 전차가 오지 않아 종로 계동 중앙중학교까지 걸어다닌 적도 있었다. 한강다리 건너 용산, 삼각지, 남영동, 서울역, 남대문을 돌아, 을지로, 종로2가 교동국민학교앞 지나, 계동 휘문중학 지나고 대동중학, 그리고 맨 끝 언덕 위의 학교. “흘러흘러 흘러서 쉬임이 없는…” 이렇게 시작하는 교가의 중앙중학교까지 걸어서 두 시간 거리였다.
1학년, 넉 달 반 동안은 아직 일제치하였다. 어느 날 맨발로 조회 앞줄에 섰는데 선생이 다가와 학교에 올 때는 신발을 신고 와야 한다고 했다. 신발은 있었다. 발바닥 모양의 나무쪽 위에 고무로 띠를 두른 슬리퍼 같은 나무신발. 그것을 학교에 신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강을 건널 때 강물에 던져버렸다.
소문난 호랑이 유경상 선생의 영어시간이었다. 흑판에 필기체의 대문자 ‘I’를 써놓고 읽으라고 했다. 처음에는 ‘J’ 같아서 “제이”라고 했다. “나니?(무엇이라고?)” 무섭게 질책이 날아왔다. “아이데스!(‘아이’ 입니다!)”라고 수정했다. “나와!”라는 호통에 앞으로 나간 나는 종아리를 내밀어야 했다. 회초리로 힘껏 종아리를 치며 “아이까? 제이까?(아이냐? 제이냐?) 아이까? 제이까?”를 반복했다. 종아리에는 뻘건 줄이 죽죽 생기고, 그 날 이후 나의 별명은 ‘제이상’이 되고 말았다.
난고(南鄕) 선생의 국어(일본어) 시간이었다. 키가 작아서 맨 앞줄 책상에 앉은 나는 교과서 밑에 소설책을 깔고 몰래 읽고 있었다. 그것을 본 선생이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느냐고 호통을 쳤다. “소설입니다”라고 똑바로 얼굴을 들고 대답을 하니 잠시 후 하시는 말씀이 이랬다. “기미와 오소로시이 다마고다!(너는 무서운 아이구나!)”
맨발 등교, 제이상, 오소로시이 다마고…. 사춘기의 꿈이라던가 설레임은 전혀 없던 시절이었지만 그렇다고 꼭 암울하다거나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해방 되던 해 가을, 아버지는 생명보험사의 의사직을 접고 서울대 의대 생리학 교실의 무급조교가 되셨다. 그때 아버지는 40세. 가족은 어머니와 3남4녀. 막내동생은 두 살이었다. 상도동 숭실대 정문 맞은편에 아버지가 사두었던 야산 4000평이 있었다. 어머니가 농부로 나섰고 주말이면 아버지, 형 그리고 내가 도왔다. 콩, 마늘, 옥수수, 감자, 고구마, 참외, 수박, 토마토에 벼농사까지 조금 지었다.
집에서 밭까지는 약 2km. 나의 담당은 주로 운송이었다. 재와 인분을 버무린 비료를 리어카로 운반하는 일, 하교후 수확물을 거둬 어머니와 같이 돌아오는 것도 내 일이었다. 쌀, 보리를 제외한 모든 부식을 자급자족했다. 물주고 거름주기, 봄에는 고랑 파고 씨뿌리고 여름에는 잡초 뽑고 가을에는 새를 쫓았다.
형은 의대를 다니고 있어서 환자 볼 손이 거칠어진다고 일을 피하는 편이었고 누이는 하루 종일 밭에서 사시는 어머니 대신 가사를 맡았고, 두 살 밑의 여동생은 누이의 보조, 네 살 아래 남동생은 아직 국민학교 학생이라 노동력이 되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밭에서 아버지가 나에게 물으셨다. 옷도 주고 책도 주고, 먹여주고 재워도 주는 관립철도학교에 가는 것이 어떠냐는, 다시 말해 기관사가 될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장남은 의사, 차남은 기관사….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때(1946년)쯤 학교공부와 밭일 외에 새 일과가 생겼다. 친구 김영대의 권유로 학교 밴드부원이 된 것이다. 연습실은 본관 4층에 있었고 수업이 끝난 후에 모여 연습을 했다. 나의 악기는 가장 사람의 소리와 가깝다는 알토 색소폰이었다. 밤에 집에서 명곡집을 펴놓고 악기를 연주하면 동네 개들이 따라 짖었다. 아주 좋은 연주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해군군악학교 시절
우리 악대는 시가행진에도 참여하고 경연대회에도 나가고 정동라디오 방송에 출연도 했다. 동네 여학생 중 누구의 얼굴이 곱고 누구의 다리와 걸음걸이가 반듯한지 관심을 갖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일과가 더해졌다. 아버지가 내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3년 동안 매일 밤 7남매 중 나에게만 한 시간씩 영어를 지도하셨다. 진도는 하루에 교과서 두 페이지씩이었다. 2학년 때에 3학년 과정을 끝냈고 3학년 때에는 4, 5학년용 교과서를 끝냈다. ‘영어3위일체’라는 책의 해석, 문법, 작문까지도 끝낼 수 있었다.
아버지는 무급조교 기간이 끝나고 강사, 조교수로 올라선 다음에도 7남매의 학비를 대는 것이 힘에 부치셨는지 집에서 밤에만 여는 의원을 운영했다. 밤에 환자도 받고 왕진도 다니셨다. 살림은 조금 나아졌지만 어머니는 계속 밭일을 하셨고 나도 변함없이 운송담당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6·25 사변이 일어났다. 6월28일 새벽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한강교 여섯 개의 아치 중 세 개가 폭파로 강물에 박혔다. 우리집은 강의 남쪽이라 피란에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하룻밤 밭에서 밤을 새고 아침이 되니 어느새 상도동에도 인민군이 들어와 있었다. 병원에 출근하던 형과 간호원이던 누이는 직장과 함께 피란을 했지만 집에 있던 부모님과 동생 넷, 그리고 나는 고구마 감자로 연명하며 9월28일 수복 때까지 버텼다. 그리고 그해 12월5일 해군군악학교 3기생 모병시험에 합격했다. 53명의 동기생과 함께 이틀간 기차를 타고 진해 해군신병훈련소에 도착해 해군 신병 19기가 되었다. 그때 내 나이 만 17년 9개월이었다.
신병훈련소에 들어가서 처음 들은 소리는 “서울 깍쟁이들 왔나, 잘 왔다”였다. 해군은 군기가 셌다. 특히 군악병에 대해서는 훈련조교들이 “이놈들 잘 걸렸다”는 듯이 마구 휘둘렀다. 어느날 훈련소의 대형 목욕탕에서 우리들은 서로의 엉덩이를 보고 놀랐다. 모두가 푸른색이었던 것이다.
신병훈련소를 거쳐 군악학교에 가니 1기 선배들이 우리들을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매일 군기를 잡았다. 구보, 원산폭격, 몽둥이 찜질, 토끼뜀 등 모든 방법을 사용했다. 우리들 3기생은 2기생보다 학력이 높은 편이어서 질투 섞인 기합도 많았다. 청소, 악기 손질, 복장검사, 집합 속도 등 잡힐 꼬투리는 항상 널려 있었다.
5분만에 끝난 아버지의 면회
1·4 후퇴 때 식구들은 이리로 피란을 했다 그 와중에 아버지가 진해 신병훈련소로 불쑥 면회를 오셨다. 훈련중 잠시 시간을 얻어 연병장 풀밭에서 면회를 했다. 아버지는 앉으시자마자 “요새 책 보냐”고 하셨다. 입대할 때 딱 두 권 지참한 책이 있었다. 일본 안파(岩波)문고 출판의 서양철학사 상하권. 마침 한 권이 훈련복 뒷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그것을 꺼냈더니 웃으셨다. 부자간에 별로 더 나눌 얘기가 없었다. 형은 6사단의 군의관으로 강원도에 있었고 가족은 이리에 있으며 그곳에서 조그마한 의원을 차렸다는 말씀이셨다. 면회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가시면서 또 한마디 하셨다. “공부해라.”
신병훈련 2개월, 군악학교 교육기간 1년6개월에 해군 일등수병이 되었고 바로 부산 본부군악대에 배속됐다. 그때는 가족도 부산에 와 있어 형만 빼고는 주말에 모두 만날 수가 있었다. 입대하고 2년이 지났을 무렵 옛친구들을 만났다. 모두 대학생이었다. 등록이 어떻고 수강신청이 어떻고 학점이 어쨌다는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아버지께 꼭 대학에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안 가는 것보다는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부산에 전시연합대학(서울대학)이 있었고 아버지가 그곳에 재직하고 계셨다. 대학입시를 준비했다. 아직 제대는 멀었지만 시험은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서를 내기 전에 한 번 더 아버지와 상의를 했다. “의대에 넣을까요” 했더니 “의사가 뭐 좋으냐”고 하시며 “네가 좋아하는 걸 해라. 음악 좋아하니 음대를 가라”는 말씀을 하셨다.
교수 자제에게는 재직학과에 한해서 배려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문리대 영문과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3년8개월의 복무기간 동안 짧은 휴가를 받아서 시험을 치르는 등 어렵게 학점을 따고 있었다. 1954년 8월 만기제대했을 때의 나이는 스물 하나, 학교는 2학년 2학기를 맞고 있었다.
제대 후 ‘이제는 편히 대학에 다닐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연구교환교수로 독일에 가시게 되었다. 대학에서 월급이 나왔지만 의원 수입이 없어진 만큼 생활은 더 어려워졌다.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군악대 동기들과 악단을 결성하기로 했다. ‘에이톤(A. Tone)’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바로 미8군 클럽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우리 악단에는 외부에서 붙인 별명이 있었다. ‘오단장, 십감독’. 동기생들이니 모두 동격이었고 누가 더 잘나고 못날 수가 없었다. 악단장은 순번제였으며 전부 두 가지 이상의 악기를 다뤘다. 나중에 이화여고 교사를 지내고 서울대 작곡과 교수가 된 김정길말고도 편곡하는 친구가 여럿이었다. 김정태, 김형찬, 김영대, 김성진, 이문용 외에 나중에 입단한 육군군악대 출신의 허린승(외대 러시아어과), 맹원식(전 워커힐악단장), 안건마(테너색소폰, 재미 목사), 정성조(서울고, 서울음대, KBS 악단장)등 모두가 능숙한 편곡자 겸 연주자들이었다.
강사해군군악학교 2기 졸업사진. 앞줄 맨 왼쪽이 나
우리들의 연주곡목은 주로 글랜 밀러 스타일의 스윙이었다. 블루스, 탱고, 트위스트, 차차차, 맘보에 지터벅(지루박)과 당시 유행하는 팝도 연주했다. 클럽 안은 흑인, 백인이 은연중에 구분되는 분위기였다. ‘옐로 로즈 오브 텍사스’를 연주할 때는 남부출신 백인들이 일어나서 환호를, ‘딕시랜드’를 연주하면 흑·백의 북부출신이 일어나 기세를 올렸다. 이역만리 낯선 땅, 삭막한 막사 주변이었지만 댄스파티나 플로어 쇼가 있는 날만은 축제였다.
저녁 8시부터 11시경까지 연주를 하고는 악기를 챙겨 트럭의자에 앉아 서울로 돌아왔다. 운전사가 한 사람씩 집 앞에 내려주었는데 서울의 북쪽에서 돌아올 때는 내가 마지막이었다. 시간은 새벽 한 시나 두 시. 전력이 달려 제한 송전을 하던 시절이어서 집에 들어가 책상 앞에 앉으면 석유등이나 촛불을 켜야 했다. 여름날이면 나방이 몰려들었다. 낮에는 캠퍼스, 밤에는 돈벌이 연주를 했으니 그 공부가 실할 수가 없었다.
시인교수 송욱 선생의 리포트 과제가 있었다. 문리대 본관 앞에는 정원이 있었고 가로지르는 오솔길 가에는 벤치가 있었다. 어느 날 오후, 마침 앞을 지나는 선생께 리포트를 내고는 동기인 유종호(문학평론가), 신우식(전 서울신문사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선생께서 연구실에서 나와 우리 앞을 지나시다 멈추었다.
“학생이지, 아까 리포트를 낸 사람이.”
어조가 심상찮아 천천히 일어섰다.
“이거 안 돼요. 점수 못 줘요. 자신의 생각이 없잖아요.”
그 말만 남기고 선생은 가버리셨다. 유종호가 옆에서 혼잣말을 했다.
“남의 글, 남의 생각이라 안 되면, 그러는 자기는 남과 무관인가?”
송욱 선생에 관해 잊을 수 없는 장면은 또 있다. ‘T.S. Eliot’와 ‘W.H. Auden’에 대한 강의를 들을 때였다. 선생은 ‘T.S. Eliot’에 대해 출제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시험시간 흑판에 쓰신 것은 ‘W.H. Auden’이었다. 학생 중 몇이 항의했지만 선생은 “내가 강의한 건데 그때 학생은 뭘 하고 있었지?”라고 말씀하셨다. 쥐어짜면 몇 줄은 써냈겠지만 그게 내 생각일 수는 없었다. 처음으로 답안지를 안 내고 그냥 나와버렸다.
‘나의 생각’을 찾아서
후에 내가 동양방송(TBC) PD로 재직하던 시절이었다. 영문과 동기인 김규 상무실에서 호출이 왔다. 클래식을 즐겨 듣던 선생이 FM 라디오에 출연차 오셨다가 제자의 방에 들른 것이었다.
“이군. TV에 나오는 거 봤어. 요즘 어때.”
나는 역습의 기회라 생각하고 선생께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생각나세요? 자기 생각 안 썼다고 점수 안 주신 것. 제가 그 후로 얼마나 혼났는지 모르실 겁니다. 내 생각이 뭔지 찾느라구요.”
“내가 언제 그랬지? 그랬을 리가 없어. 안 그랬어.”
우리 세 사람은 같이 웃었다.
서울대 병원, 선생의 장례식에 제자들이 모였다. 조준학, 백승길, 김규, 신우식, 유종호. 우리들은 아주 검소한 유족을 보았다. 장례식 내내 사람들은 말소리가 작았고 서로 눈으로 대화했다. 그날 정적의 고요를 느끼며 우리는 흩어졌다. 송선생을 회상할 때마다 나는 그 기억의 선명함에 놀란다. 선생께서 가르쳐준 ‘나의 생각’은 지금까지 내가 하는 모든 일에 기본이 되고 있다.
대학 시절 내가 가까이 지낸 이는 한철모(방송인)와 백승길(작고, 전 한국박물관협회장)이었다. 어릴 때부터 몸이 불편했던 한철모는 자신과 같이 걸을 때도 보폭을 줄이지 않던 나를 오히려 좋아했다. 그의 집에 간 일이 있다. 책상 위에는 아주 두툼하고 큰 영한사전이 놓여 있었다. 다른 책은 별로 없었다. 다른 누군가가 해설한 책은 읽고 싶지 않다던 한철모는 음성이 아주 맑고 생각이 뚜렷했으며 웃음이 많았다.
백승길의 집은 남영동. 방향이 맞아 자주 어울렸다. 깨끗한 말씨와 냉정한 성격을 가져 아이스박스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여학생과 가까이 지냈지만 맺어지지는 않았다. 졸업 후 ‘코리아타임스’ 기자를 거쳐 평생을 미술평론과 유네스코, 박물관 관계의 일을 한 이 친구를 통해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한국문화를 외국에 알리는 일에 평생을 바친 그는 몇 해 전 작고했다.
동급생 중에는 4명의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설순봉(번역문학가)이다. 누군가가 지은 별명이 ‘하나님의 딸’이었다. 약간 고개를 숙이고 책을 껴안고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캠퍼스를 걸었다. 설순봉 하나만을 놓고 본다면 대학이 아니라 수도원이었다. 누구도 그녀에게 쉽게 말을 붙이기 어려웠다. 그런 설순봉이 영문과 1년 후배와 결혼했는데 낭군의 이름은 김우창(문학평론가, 고대대학원장)이다.
졸업이 다가왔다. 과 주임이면서 총장이었던 권중희 교수가 우리를 모아놓고 말씀을 하셨다. “영문과 졸업이지만 여러분은 아직 작가도 평론가도 아니며 이제 겨우 사전 가지고 영문을 깨치는 것을 배웠을 뿐이다. 전공은 졸업하고 천천히 정해야 할 것이다.”
몇 번의 시험포기가 있어 5년을 채우고 1958년 한 해 아래 친구들과 졸업을 했다. 이상회(전 국회의원, 신문협회이사)와 위에 거명된 김우창의 클래스였다.
“Show must go on!”
또다시 아버지와 상의했다. “대학원에 가볼까요” 했더니 “연구실 생활이 뭐 좋은 줄 아느냐”고 하셨다. 아버지의 생리학 연구실에는 깨끗치 않은 플라스크, 등잔, 액체를 담은 푸른 병들, 녹슨 수도꼭지, 바랜 논문집, 의학서적 등이 있었다. 사주에 문(文)이 있다고 했으니 잠시 공부길을 찾을까도 했지만 죽으라고 책만 파고들 입장도 아니니 분수에 맞게 살자 싶어 文에서 藝로 방향을 틀었다.
원효로 선린상고 들어서는 길목에 ‘한국연예연합회’라는 회사가 있었다. 약 50여 개의 단체들을 관장하는 연합회사였다. 사장 안찬옥, 전무 이완영(중학 1년 선배), 상무 김영순(서울치대 출신, 명 트럼페터에 노래도 일품, 이해연씨의 남편이자 길옥윤씨의 선배이기도 했다). 30여 밴드와 20여 플로어 쇼단체가 소속되어 있었는데 모든 단체는 미군의 스페셜 오피스에서 넉 달에 한 번씩 실시하는 오디션을 거쳐야 했다. S.A(스페셜 A), A, B, C로 등급이 나뉘고 D는 드롭(낙제)이었다.
나는 연합회를 찾아가서 나를 써달라고 했다. 월급은 일하는 것을 보고 주라고 했다. 제작부가 만들어지고 레코드실도 생겼다. 나는 업무부의 제작 스태프가 됐다. 음악실장은 서울음대 출신의 박선길(가수 박정운의 아버지). 제작부에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흑인 여성 미세스 화이트가 주로 발음을 봐주었고 나는 통역을 겸하며 제작 전반에 끼여 들었다. 제법 큰 구내식당이 예비 오디션 장소로 사용됐다. 연합회 스태프와 해당단체 오너들이 어울려 기록하고, 지적하고, 수정했다. 의상, 안무, 음악, 영어발음, 구성, 쇼맨십, 표정, 스테이지 매너 등을 체크했다. 본 오디션의 결과가 좋아야 좋은 연예인을 영입할 수 있었고, 그래야 일도 많고 수입도 많아지니 모두들 진지하고 열심이었다. 당시의 경제사정으로 볼 때 연예인들의 달러 수입은 적은 것이 아니었다.
본 오디션에서 나의 역할은 미국인 심사원들의 지적사항을 듣고 기록해 해당 단체장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각각 다른 전문분야를 담당하는 심사원들의 지적은 다양하고 치밀했다. 곡의 해석, 발음, 표정, 몸짓, 의상, 구성의 다양성과 진행의 스피드, 그리고 공연의 흥과 재미까지도 심사의 대상이 되었다. 일을 하면서 쇼의 근간은 Speed(경쾌한 진행속도), Fun(재미), Variety(변화, 다양성)라는 것을 배웠고 ‘Show must go on!’이라는 구절도 익힐 수 있었다.
오디션을 통과하기 위해서 각 단체는 항상 새 레퍼토리를 준비해야 했다. 매달 미 국방성에서 발간하는 뮤직 폴리오가 각 클럽에 전송되었는데 그 안에 ‘스타크 어레인지먼트(Stock Arrange-ment)’라는 것이 있었다. 여기에는 일류 편곡자의 손으로 매만져진 미국 본토 히트 연주곡의 파트별 악보가 들어 있었다.
당시 기억나는 연주인으로는 이봉조, 최창권, 김강섭, 엄토미, 송민영, 여대영, 김인배, 정서봉, 김희갑, 박성원 등이 있다. 이때쯤 이름을 ‘Knights of Melody’(A.Tone의 후신)로 바꾼 우리 악단은 여전히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미국 국무성에서 주한미군 위문단을 편성해 서울로 보내면, 주한 미군 연예 담당자는 그들이 첫날밤을 우리가 출연하는 E.D.F.E클럽( 을지로 6가 극동 미공병단 본부인 E.D.F.E(Engineering District of Far East)에 있던 장교 클럽)에서 보내도록 스케줄을 짰다. 먼길 온 것을 환영하는 뜻에서, 그리고 한국에도 이만한 악단이 있다는 자랑의 뜻에서였다.
당시 8군 무대에서 노래한 가수는 최희준, 프랭키손, 곽순옥, 로라 성, 현미, 한명숙, 이금희, 이춘희, 모니카 유, 여대영씨 부인인 소프라노 봉혜숙, 소프라노 이영숙, 미국 가기 전의 어린 윤복희, 패티김, 김씨스터즈 그리고 막내들인 이씨스터즈 들는데, 모두 쟁쟁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우리 악단에도 전속 가수가 있었다. 손시향(서울농대), 박형준(외대 스페인어과), 정숙자(이대 법대), 이석(왕실의 후손/외대 스페인어과), 유주용(서울문리대 물리학과) 등이었다.
1958년 제대하고 1964년 이른봄까지, 낮에는 학교 공부 혹은 연합회 일에 매달리고, 밤에는 E.D.F.E클럽에서 연주를 했다. 역대 공병단장의 인계사항으로 매년 바뀌는 클럽 서전들은 우리를 전속으로 써야 했다. 미8군 사령본부 클럽의 ‘다운 비이츠’ 악단과 우리 ‘나이츠 오브 멜로디’ 악단은 늘 S.A등급이었고, 매니저 없이도 일자리 걱정은 안 했다. 당시 우리 악단이 받는 월 보수는 1200달러로 1인당 100달러가 넘었는데, 대학등록금의 서너 배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밤낮으로 바쁜 일과였지만 경제적으로는 풍족했다. 연예회사의 월급과 악단의 수입으로 나는 학생귀족이었다. 내 학비 충당하고 집의 생활비와 동생들의 학비에도 도움을 줄 수 있었다.
1962년 ‘나이츠 오브 멜로디’는 미군무대를 떠나 다운타운 악단이 됐다. ‘민들레’라고 악단 이름을 바꾸고 우리 음악으로 레퍼토리도 넓혔다. 퇴계로의 문라이트클럽에 출연하면서 이대강당, 서울대문리대 강당, 드라마센터에서 공연도 했다. 여러 차례 KBS TV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 시기부터 나는 연주를 하며 악단의 사회를 겸하기 시작했다(4월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