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자영은 2004년 훈장이 추서된 독립유공자 중 가장 높은 등급으로 포상된 인물이지만, 그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 연구자뿐이다. 약관의 나이에 학생대표로 3·1운동을 이끌었고 이후 고려공산당과 임시정부, 그리고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활약하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주도했으나, 분단과 냉전으로 얼룩진 한국현대사 속에서 우리는 이 젊은 혁명가를 애써 잊고 있었다.
3·1운동 현장을 통해 역사의 무대에 데뷔했고, 1920년대 전반기는 고려공산당과 임시정부에서, 후반기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활약했으며, 1930년을 전후해서는 국내 지하공작의 거점 확보에 힘쓴 윤자영. 강산이 일곱 번이나 바뀌는 세월을 넘어 그는 우리 앞에 독립유공자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했다.
윤자영은 경상북도 산간오지인 청송군 청송읍 금곡동 749번지에서 태어났다. 출생시기가 1894년 혹은 1896년으로 엇갈리지만, 일단 판결문과 제적등본의 기록에 따라 1894년으로 정리하고 넘어간다. 그의 문중이 관직과 학문을 이어오긴 했지만, 바깥으로 크게 알려진 대성(大姓)은 아니었다. 그저 중소지주로서 가세를 유지했다.
그는 20세 전후에 상경해 빠르면 1913년 늦어도 1918년쯤에는 서울에서 살았다. 그가 1932년 중국공산당에 제출한 ‘이력서’에는 1913년부터 1919년 사이에 처음 민족운동에 참가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가장 가까운 후손인 조카 윤동규(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씨는 “백부가 경성공업전습소(경성전수학교) 도기과(陶器科)에 다니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중단했다”고 전한다. 대학로에 있는 한국방송통신대학에 경성공업전습소 건물이 남아 있는데, 이것이 경성공업전문학교를 거쳐 서울대 공대가 됐다.
그의 존재가 확실하게 드러난 계기는 3·1운동이다. 경성전수학교 2학년 진급을 앞둔 그가 3·1운동 당시 학교 대표로 나선 것. 그는 당시 만25세의 나이 많은 학생이었다. 경성전수학교는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거쳐 해방 후 서울대 법대가 된다.
1919년 1월부터 여러 조직이 움직이고 있었다. 1월22일 광무황제(고종)의 죽음은 온 나라를 술렁이게 했고, 파리강화회의 개최 소식에 뜻 있는 인사들은 우리의 민족 문제를 세계회의에 상정할 기회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종교지도자들이 분주하게 회합을 가졌고, 각급 학교 학생대표들도 날마다 구수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 3월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거대한 만세시위가 시작됐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3ㆍ1운동 학생대표의 주역
윤자영은 바로 학생대표 중 한 주역이었다. 학생대표들이 3·1운동을 처음 계획한 시점은 고종 서거 직후인 1월23, 24일 무렵이었고 윤자영은 이보다 보름 정도 늦은 2월12일부터 참가했다. 음악회를 비롯 여러 형태의 위장 모임이 열렸는데, 그중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구내 숙소에서 열린 음악회에 윤자영이 경성전수학교 대표로 초청됐다.
이날 모임에는 윤자영 외에도 김원벽(연희전문), 김형기, 한위건(경성의학전문), 김문진, 배동석(세브란스의학전문)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해외독립운동의 정황과 민족대표의 동향, 동경 유학생들의 활동상을 전해들은 윤자영은 국내 학생들을 결집시키는 작업을 벌이기로 작정했다. 각 전문학교별 활동책임자가 결정되면서 윤자영은 김성득과 함께 경성전수학교 책임자로 선정됐다.
2월20일 승동예배당에서 열린 제1회 학생간부회의는 학생들이 독자적인 시위를 감행할 것을 결의했다. 그 자리에서 역할분담이 이뤄졌다. 김성득 김형기 김문진 김원벽 김대우(경성공업전문), 강기덕(보성법률상업전문) 등이 각 학교의 학생 참여에 관한 일체의 업무를 담당하고, 윤자영은 한위건 이용설(세브란스의학전문), 한창환(보성법률상업전문) 등과 함께 앞의 인물들이 구속될 경우 뒤처리와 2단계 투쟁을 맡기로 했다.
2월24일 연합이 확정됐고 천도교와 기독교계가 학생들에게 시위에 동참해달라는 요청을 전달했다. 독립선언과 시위계획이 결정되자 윤자영은 다른 학생대표들과 함께 천도교·기독교 지도자들과의 연합 문제를 논의했다. 이들은 2월25일 밤 정동예배당에 있는 이필주 목사 집에서 준비 모임을 갖고, 3월1일 정오 탑골공원에 모여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윤자영은 학생대표들이 거사를 준비하는 동안 핵심부에서 움직였다. 민족대표와의 연합에서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의 위상은 상당히 높았다. 특히 시위가 시작되자 학생들이 전체를 이끌어갔다. 그날 시위에서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이 최고지도자였다.
그 가운데 윤자영은 거사 당일 김성득과 함께 경성전수학교 학생들에게 선언서를 배포하는 임무를 맡았고, 종로에서 시위와 독립만세 제창을 주도했다. 이로 말미암아 일제경찰에 체포된 윤자영은 11월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1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수형카드’에 따르면 1920년 5월27일에 출옥했으므로 실제로 그는 1년3개월을 감옥에서 고생했다.
서대문형무소를 나오자마자 윤자영은 바로 청년운동에 뛰어들었다. 출옥하던 무렵 서울에는 청년 모임 70여개가 있었으나 번듯한 청년단체는 없었다. 청년모임들을 파악하고 지도할 조직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조선청년회연합회를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1920년 7월 정식으로 결성됐다.
조선청년회연합회를 이끌다
조선청년회연합회를 결성하기 위한 기성회에서 윤자영은 등 22명의 집행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집행위원 명단에는 오상근 장덕수 등이 있었다. 그해 12월2일 열린 창립총회에서 그는 서무부 상무위원으로, 1921년 4월 열린 제2차 정기회의에서 교무부 상무위원으로 선임됐다. 조선청년회연합회의 핵심인물로 떠오른 것이다.
윤자영은 조선청년회연합회를 이끌어가기 위한 구심체로 서울청년회 결성에도 나섰다. 1921년 1월27일 윤자영은 이득년·김한·홍증식·김사국·이영·장덕수·김명식·오상근·한신교 등과 함께 서울청년회를 조직했다.
1921년 그는 순회강연을 활발히 벌였다. 1921년 6월 조선학생대회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서 ‘배재학생선후책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강연한 것을 비롯 8월부터 전국순회강연에 나섰다. 조치원·연기·청주·창녕·밀양·양산·울산·부산 등을 순회했다. 9월8일 경남 창녕군 청년회관에서 ‘개조운동의 선구자’라는 주제로, 9월26일 울산청년회관에서 ‘청년운동의 제일보(第一步)’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1921년 10월7일자 동아일보는 그 장면을 “도도한 웅변을 시(試)하여 일반 청중에게 막대한 자극을 주고 갈채 속에 10시 반경 폐회하였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그는 청년운동의 확산을 도모했다. 3·1운동 이후 사회 개조를 이끌어갈 에너지를 청년운동에서 찾아 전국에 바람을 일으키려고 시도한 것이다. ‘선구자’로서 청년들이 내디뎌야 할 ‘첫걸음’을 강조한 강연제목만으로도 그가 무엇을 제시하고자 했는지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한편 그는 서울청년회 기관지 ‘아성’의 편집위원으로 활약했다. 1921년 3월부터 10월 사이 네 차례 간행된 이 잡지에 그는 12편의 글을 게재했다.
소야, ‘시조 3수’(‘아성’ 제1호)윤자영, ‘唯物史觀要領記’(제1호)소야, ‘回程(詩)’(제1호)소야, ‘고생하는 언니와 외로운 아우에게’(제1호)소야, ‘배고파 우는 아우에게’(제2호)윤자영, ‘상호부조론’(제3호)소야, ‘향촌에 歸하라’(제3호)윤소야ㆍ김해광, ‘최근 중국의 國情’(제3호)SY生, ‘쏘피아 小傳’(제3호)윤자영, ‘상호부조론’(제4호)소야, ‘심장육의 단편’(제4호) SY生, ‘쏘피아 小傳’(제4호)
여기에서 두 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가자. 하나는 그의 이름이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그는 ‘소야·소야(蘇野)·소야(笑也)’와 ‘SY’란 필명을 썼다. 1924년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시기 일제경찰 정보문건에도 ‘尹蘇野(滋瑛)’로 기록돼 있다.
또 같은 시기 일제 자료엔 그의 별명이 윤석한(尹石漢·尹錫漢), 호는 불가살(不可殺)이라 쓰여 있다. 그리고 1932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제출된 이력서에는 ‘丁一英(尹蘇野)’이라고 적고 맨 아래편에 ‘丁一英’이라 서명했다. 러시아에서는 ‘Yun, Za Yen’ 혹은 ‘Chen Min’이라는 이름도 쓰였다.
또 하나는 그가 시조와 수필, 그리고 논평을 썼다는 점이다. 그가 남긴 ‘시조 3수’를 보자.
윤자영의 행적을 입증해주는 문서들. 왼쪽부터 윤자영이 작성한 간략한 자필 이력서,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를 당시의 수형카드, 1932년 중국공산당 대표 앞으로 모스크바 국제레닌대학 입학을 청원하며 제출한 청원서.
淨江水 흐르는 물 너의 기세 건장하다千里長程 먼먼길에 몸살 없이 왔다마는가는 곳 大洋이어든 쉬지 말고대양이 어디메냐 너의 동경 유토피아가다가도 길 잃거든 내 소리 곧 들을세라참소리 내 소리 듣고 正路로만
흘러가는 물결에 자신을 대입하면서 향후 행로를 다짐하는 글이다. 감옥에 있던 때가 ‘길이 막혀 울던’ 시절이었고 이제는 큰 바다를 그리면서 오직 ‘정로’로만 내달릴 것을 다짐했다.
서울에서 만난 두 신여성
서울에서 활동하던 무렵에 그는 신여성을 만난 것 같다. 서울을 오르내리던 시기로 보이는 1917년 그는 이미 안동시 옥동에 거주하던 안동 권씨 권필향(權苾香)과 결혼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엔 후손이 없었다. 권씨 부인은 1944년 작고.
그런데 그가 서울에서 석(石)씨 성을 가진 신여성을 만나게 되는데, 석씨는 가까운 동지 강문수의 처가쪽 여인으로 이화여전을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조카 윤동규씨 증언). 강문수의 아내는 간호사 석경덕(石景德)으로 1930년을 전후해 윤자영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의 연락책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윤자영의 여인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사람을 더 살펴보자. 1930년 무렵 이근영(李槿英)이란 젊은 여성이 그를 가까이서 도왔다. 이근영은 1931년 실제의 함흥 지하조직에 대한 대대적 검거에서 체포당했다. 일제의 기록에 이근영은 당시 나이가 22세, 본적이 함북 길주군, 주소가 중국 간도 용정촌이라고 적혀 있고, 옆에 ‘윤자영의 처’라는 메모가 붙어있다. 근래에 윤자영의 딸이라 자칭하는 인물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적이 있는데, 임경석 교수는 그를 이근영의 딸으로 추정하고 있다(임경석, ‘잊혀진 혁명가, 윤자영’, ‘진보평론’(2000), 326쪽).
윤자영은 출옥 직후인 1920년 6월 서울에서 비밀리에 결성된 사회혁명당에 가입하면서 사회주의에 입문한다. 이 단체는 기존의 신아동맹단이라는 반일혁명단체가 서울에서 제5회 대회를 열고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면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사회혁명당은 러시아에서 결성된 한인사회당과 연합하여 1921년 5월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을 결성했는데, 윤자영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흔히 같은 시기에 이르쿠츠크에서 결성된 고려공산당과 구별하기 위해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이라고 부른다. 그는 바로 이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내지간부로 선임됐다. ‘아성’ 1호(1921.3)에 그가 기고한 ‘유물사관요령기(唯物史觀要領記)’는 사회주의적 행보를 보여주는 편린이다.
윤자영은 1921년 말을 전후해 망명했다. 1921년 중후반 국내 곳곳을 다니며 조선청년회연합회의 외연 확대에 힘쓰던 그는 1922년 10월 러시아의 베르흐네우진스크에 다시 나타났다.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나뉜 고려공산당을 통합하려는 목적의 회의가 열린 것이다.
코민테른이 이들의 통합을 요구하면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책임 아래 연합중앙간부를 조직할 것을 지시했다. 1922년 1월22일에서 2월1일까지 극동인민대표회의를 거친 뒤 1922년 10월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두 파의 통합대회가 열렸다. 위임장을 가진 128명의 참석자 가운데 윤자영이 속한 상하이파가 68명으로 우세를 차지했다. 윤자영은 의장단의 일원으로 참가했고, 통합회의가 끝난 뒤 이동휘·김성우 등과 대표 자격으로 코민테른 본부를 찾아 모스크바로 갔다.
그러나 회의 결과에 불만을 품은 이르쿠츠크파가 반발하고 나섰다. 그러자 코민테른은 고려공산당 통합대회의 결과를 부인하고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해산을 명령하는 한편, 극동부 산하에 코르뷰로(고려국)를 설치했다. “무원칙한 파쟁을 버려라. 민족운동의 지도적 집결을 촉성하라. 민족단체 안에서 일을 열심히 하되 간부 자리를 다투지 말라”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코르뷰로는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두 파의 대표를 파견했다. 바로 상하이파의 윤자영과 이르쿠츠크파의 장건상이다.
윤자영은 1923년초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는 국민대표회의의 한 축을 형성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윤자영과 김철수를 비롯한 고려공산당 상하이파는 국민대표회의 안에 프랙션을 구축하고 임시정부 개조에 찬성하고 나섰다. 이르쿠츠크파가 임시정부를 없애고 새로운 정부조직체를 결성하자는 창조파에 가담한 것과는 달리 상하이파는 현실에 맞게 정부 틀을 고치자는 개조론을 들고 나선 것. 이때 윤자영은 상하이파를 이끌면서 개조파의 리더가 됐다.
윤자영은 상하이의 상황을 코르뷰로에 보고하면서 임시정부의 개조가 당연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즉 1923년 3월 국민대표회의가 민족운동의 지도기관을 수립하는 문제에 있어 신조직 건설론·임시정부 개조론·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유지론의 세 파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하나로 묶으려면 임시정부의 개조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한 것이다. 따라서 윤자영은 개조론을 성사시켜야만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국민대표회의가 끝나자 상하이파에 균열이 생겼다. 특히 임시정부옹호세력과 연합하여 개조론을 이끌어나간 상하이파는 안팎으로 공세에 시달렸다. 국민대표회의 후반기에 윤자영을 대신하여 안창호와 함께 개조파의 전략을 이끌었던 김철수가 상하이파 프랙션 내부로부터 공격받았고, 코르뷰로는 국민대표회의 실패 요인을 윤자영 그룹 탓으로 돌렸다.
코민테른집행위원회 원동부 책임자인 보이틴스키가 코르뷰로에 보내는 서한에서 “실패의 책임을 공산주의 프락치가 져야 하고, ‘윤자영 그룹’이 조선에서 혁명센터를 형성하는 데 대한 코르뷰로의 지시를 위반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이현주, ‘한국 사회주의 세력의 형성 : 1919∼1923’, 316쪽)
국민대표회의에서 개조파의 한 축을 맡았던 윤자영으로서는 강한 후폭풍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 상하이에 급파된 일제경찰 간부는 “윤자영이 60여명으로 구성된 상하이 고려공산당의 대표”라고 상부에 보고했다. 결국 그가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자마자 반대세력이 겨누는 과녁이 된 것이다.
국민대표회의가 끝난 후 윤자영은 상하이에 자리잡았고 잠시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1923년 7월2일 그가 임시의정원 경상도의원으로서 ‘임시헌법개정기초위원’에 임명된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자신의 의지를 임시정부에 직접 참여해 달성해보려고 했던 노력으로 생각된다. 그는 임시정부 의회활동에 참가하면서 줄곧 새로운 ‘통합회의체’ 또는 ‘대동단결체’ 조직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에게는 전위조직이 필요했고, 그 필요성에서 만든 조직이 바로 청년동맹회였다.
그런데 당시 윤자영은 1924년 1월6일 ‘니주바시(二重橋) 투탄의거’를 일으킨 의열단의 김지섭이 도쿄에 잠입하는 것을 도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경의 추적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1924년 4월5일 상하이 프랑스조계 팔선교(八仙橋)에 자리잡은 삼일당(三一堂)이란 교회에서 청년동맹회를 창립했다. 창립총회에서 사회를 본 윤자영은 11명으로 구성된 집행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됐다.
이에 대해 당시 신문에서는 “상하이에 있는 일본영사관에서는 그를 체포코자 백방 활동중이나, 그는 정치범인고로 불국(佛國) 경관이 극력 보호하여 아무 일 없이 청년동맹의 중요간부까지 되고 있는 중이라더라”고 보도했다. 당시 일제 경찰이 파악한 그의 호가 ‘불가살(不可殺)’이었으니 그 기개가 대단했음을 헤아릴 수 있다.
청년동맹회는 좌우연합체였다. 주도자들은 “민족적 일치단합 아래 동포청년이 대동단결해 희생적 정신으로 사업에 당하면 반드시 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청년동맹회를 발의했다.
당일 선출된 집행위원은 신국권 조덕진 윤소야(자영) 김상덕 장덕진 엄항섭 주요한 조윤관 최충신 박진 등이며, 윤자영은 조덕진 김상덕 장덕진 최충신과 더불어 상무위원이 됐다. 엄항섭이나 주요한처럼 임시정부와 안창호 계열의 인물도 포진한 것으로 미루어 청년전위조직으로서 통일전선을 형성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925년 중반을 넘어서면서 점차 청년동맹회의 성격은 좌편향했다. 민족혁명의 길로서 과학적 공산주의를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그의 청년동맹회 활동 이면에는 ‘오르그뷰로(고려공산당 조직위원회)’와 관련된 활동도 있다. 유명무실해진 코르뷰로를 대신하기 위해 1924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려공산당 조직위원회가 결성됐는데, 이것이 오르그뷰로라 불리는 단체다. 윤자영은 이 단체에서도 지도적 인물로서 기관지 ‘거화(炬火)’의 편집을 담당했다고 이력서에 기록했다. 그러다가 1925년 그의 활동 소식이 뜸해졌는데, 수학생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25년 8월부터 1926년 2월까지 상하이대학에 청강하고 있었다.
1926년 윤자영은 만주 지린성 지역으로 이동했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설치가 그의 다음 행보였다. 그가 만주로 이동하게 된 계기는 상하이로 탈출한 화요파(火曜派) 계열의 김찬을 만남으로써 마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1925년 11월 국내에서 제1차 조선공산당 관련자 검거가 시작되자 김찬은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 두 사람은 주도세력이 거의 체포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만주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건설하기로 가닥을 잡는다.
이에 윤자영은 1926년 4월 만주로 떠나 5월16일 상하이파 인물인 김하구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결성에 착수하고 화요파의 최원택 조봉암 김동명과 함께 만주총국을 설치했다. 그 본거지가 지린성 닝안(寧安)현 닝지(寧吉)탑에 설치됐다. 본부인 총국 책임비서 조봉암, 조직부책임 최원택, 선전부책임 윤자영이 핵심이 되었고 중앙집행위원에는 김하구 김철훈 김룡락 등이 선임됐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상하이파와 화요파의 연대로 이뤄진 것이다. 여기에는 상하이파의 기득권과 화요파의 주도권이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윤자영은 신병을 이유로 선전부장직을 사임했는데, 화요파의 주도력에 밀려 자퇴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얼마간 그의 행적은 소상하지 않다. 1927년 3월 모스크바로 갔다가 5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으며 1927년 7월 용정에서 상하이파 공산주의자그룹인 재만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결성했다고 전해진다.
윤자영이 다시 조선공산당 활동의 전면에 나선 시기인 1928년은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에서 큰 변화가 나타난 시점이다. 코민테른이 ‘12월 테제(조선의 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대한 테제)’를 발표함에 따라 한국민족운동의 지형이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 두 파가 서로 코민테른의 승인을 확보하려 다투는 틈에 코민테른은 아예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취소하고 ‘12월 테제’를 발표했다. ‘12월 테제’의 핵심은 ‘민족부르주아와의 결별’과 ‘일국일당제’라는 두 가지 원칙이었다. 따라서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인사회주의자는 독자적 혁명조직을 해체하고 중국 혁명조직에 가담해야 했다.
이동휘와 김규열은 ‘12월 테제’에 근거하여 통일된 조선공산당을 재건설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여기에 윤자영을 비롯한 김철수 오산세 안상훈 등 이동휘 계열의 인물이 결집했다. 다만 국내에는 경계가 엄중해 목적 달성이 어려운 만큼 우선 국내와 연결하기 쉬운 지린성 방면으로 근거지를 옮겨 재건설운동을 전개하고 그것을 국내 진입의 교두보로 삼기로 했다.
결국 조선공산당 재건설 포기
1929년 2월말 윤자영은 동지들과 함께 지린성 둔화현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3월 둔화현 향수하자(香水河子)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기관지 ‘볼셰비키’를 발행해 조선공산당 재조직문제·전술·조선혁명·토지문제 등에 관한 기사를 게재하며 선전에 주력했다. 윤자영은 조직부를 담당했다. 그 외 주요인물과 직책을 살펴보면 책임 김철수, 선전부 김영만, 연락부 김규열, 경리부 최동욱, 정치부 김영식, 공청부 오산세 등이다.
1930년 이들은 순차적으로 국내에 진입했다. 1월 책임자인 김철수가 먼저 입국했고 5월부터 10월까지 윤자영 안상훈 송무영 홍달수 조덕진 김일수 등 간부들이 속속 잠입했다. 이들의 목적은 국내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런 선택과 노선은 북간도에 머물던 ML파(마르크스-레닌주의동맹)나 화요파가 자체 조직을 해체하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12월 테제’ 직후인 1930년 1월 중국공산당이 한인공산주의자의 중국공산당 가입을 결정했고 이에 따라 1930년 만주지역에서 활약하던 ML파와 화요파는 자체 조직을 해체하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하지만 윤자영을 비롯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구성원들은 서둘러 국내로 진입했다.
윤자영은 국내에 들어오자마자 미리 입국해 조직을 만든 김일수 아래에서 조직부책임을 맡았다. 이들은 함경남도 함흥에 뿌리내렸다. 함흥은 일제가 식민지세계의 건설이라는 큰 구도 속에 중화학공장을 세워 공업단지를 만들어가던 곳이다. 따라서 노동자층이 두터워 프롤레타리아트의 에너지를 수렴, 동력으로 삼기에 마땅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뒷날 원산과 함흥일대에 태평양노동조합이 거대한 힘으로 존립할 수 있던 배경이었다.
윤자영과 김일수는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함흥일대에 정착시키고 활동을 펴나가는 핵심인물이었다. 김일수를 비롯한 조직원들이 윤자영에게 상황을 보고했고 이에 대해 윤자영은 “재건파 간부의 결의에 따라 위험을 무릅쓰고 입국한 우리는 만난을 물리치고 목적 달성에 매진하자”고 격려했다.
그런데 윤자영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국내로 잠입하기 직전 코민테른이 극동부를 통해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에 비공식적으로 해체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령’이 아니라 ‘비공식적’인 것이므로 일단 공식적인 해체명령이 있을 때까지 활동을 밀고 나간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래서 더욱 활동에 박차를 가했던 것 같다. 제2차 간부회의에서 윤자영이 “코민테른의 지령은 반드시 해체하라는 고압적이 것이 아니다. 국내에서 열성당원을 규합하여 당기관을 이룩하면 구체적인 지시를 하겠다는 매우 애매한 태도”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결국 극동부의 의견에 따라 조선공산당재건설위원회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모스크바 국제레닌대학 입학 청원
윤자영은 1931년 5월 다시 만주로 건너갔다. 국내로 잠입해 활동한 지 7개월 만이었다. 이 결정은 코민테른의 결의에 따른 중국공산당의 방침을 받아들인 것이기도 하지만, 일경의 포위망이 급박하게 조여드는 상황에서 부득이한 결정이었다. 1931년 12월 윤자영의 동지 상당수가 검거됐는데, 이는 역사에 ‘간도검거사건’으로 알려졌다. 당시 일경이 압수한 권총만 36정일 만큼 규모가 컸다. 이 사건에 윤자영이 관련된 이야기와 탈출 소식은 당시 신문 호외를 통해 “목하 검거망을 피하여 그림자를 감추었다”라고 보도됐다.
가까스로 북간도로 탈출한 윤자영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동만주특별위원회 선전부에 활동무대를 마련했다. 다음해인 1932년 9월26일 그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모스크바 국제레닌대학 입학을 청원했다.
이와 관련해 1932년 9월 윤자영이 작성한 자필 문서 3종류가 임경석 교수에 의해 발굴됐다. 간략한 자필 이력서, ‘중국공산당 대표’ 앞으로 제출한 편지와 청원서가 각각 1통씩이다. 그중 정일영(丁一英)이라는 이름으로 작성된 청원서는 그의 유학 희망을 담은 것이다. 당시 국제레닌대학은 각국 공산당 중앙간부들의 교육과 훈련을 맡은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윤자영은 결국 모스크바로 갔다. 그런데 그의 국제레닌대학 입학 청원은 거절 당하고 대신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입학이 허용됐다. 간부들이 입학하는 국제레닌대학에 비해 격이 떨어지는 학교에 배정된 것이다. 그에 대한 푸대접인지, 아니면 언어수준을 기준삼아 그렇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이마저도 곧 절대적인 장벽에 부딪혔다. 스탈린의 대숙청 바람에 그도 희생된 것이다. 1934년 윤자영은 반당(反黨)분자로 낙인찍힌 지노비예프의 동조자 혐의를 받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임경석 교수가 발견한 ‘지노비예프 논문 소지·유포 혐의로 조사받은 공산대학 한인 학생들의 신상명세서’에 그의 이름이 들어있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한편 충칭(重慶)에 머물던 임시정부가 1943년 소련에 구금된 것으로 파악한 한인 혁명가 57명의 석방을 요구한 일이 있다. 임시정부가 외교부장 조소앙 명의로 중국주재 타스통신 특파원을 통해 소련정부로 의사를 타진했는데, 그 명단에 윤자영도 들어 있었다. 임시정부가 그의 생사여부는 몰랐지만 소련정부에 구금된 사실만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희생
대숙청의 피바람 속에 그는 1938년 10월14일 처형됐다. 이 사실은 최근 조카 윤동규씨가 신청한 민원에 대한 회신형태로 국내에 알려졌다. 러시아주재 한국대사관이 ‘구KGB 문서보관소내 스탈린 숙청 당시 사망한 고려인’ 명단에 대해 연구하는 NGO단체인 삼일문화원을 통해 확인해준 것이다.
윤자영은 1938년 10월2일 노보르시비르스크주 내무인민위원회로부터 최고형인 총살형을 선고받고 10월14일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1958년 12월19일 복권됐다. 멀고 먼 남의 나라에서 벌어진 권력투쟁으로 아깝게 희생된 것이다.
윤자영은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짧은 생애를 던지고 간 혁명가였다. 국권을 피탈당한 민족수난의 시대에 뛰어난 인재요, 혁혁한 활동가가 민족사의 고귀한 재산으로 평가되지 못한 것은 오직 후손들의 못난 역사인식 때문이었다. 모두 합쳐도 작은 나라인데, 그것을 이념과 정치적 지형으로 나누고 역사마저 배타적인 정통성 논리에 잠기다보니 민족사의 한 부분을 내팽기치고 말았다. 우리 정부가 늦게나마 건국훈장 독립장을 그에게 추서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