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으로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고발한 예술가. 시련을 겪는 인간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내 삶의 존엄성을 일깨워준 철학자. 가난과 박해에도 그는 50년간 단 한 번도 카메라를 놓아본 적이 없다. 그렇게 최민식은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학교 정문 앞에 카메라 메고 팔짱 끼고 비스듬히 서 있던 대학생 같은 사람이 바로 그였다. 우리 나이로 일흔여덟이라는데 이럴 수가! 믿을 수 없다는 얘기에 그는 재빨리 걸어가면서 말했다.
“비결을 말할까요? 그건 걷는 거예요. 난 수십년간 하루 3만보 이상 걸어다녔거든요. 아마 7~8㎞ 될 걸요. 카메라를 메고 시장통을, 사람 많은 거리를 날마다 걷고 또 걷는 게 내 일이었으니까.”
그를 따라 신호등을 건넜다. 멈추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그는 곧바로 길 건너 대연성당 앞에 있는 자신의 살림집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아이고, 이거 집이 초라해서 큰일났네” 하면서도 앞장서서 쓱쓱 걷는다. 길가에는 그의 사진에서 흔히 보던 사람들, 애호박과 호박잎 서너 무더기뿐인 좌판을 펼쳐놓은 할머니, 낡은 담벼락에 기대 초점 없는 시선으로 담배를 피워 물고 선 초로의 남자, 한손은 뒷짐 지고 한손은 생선 두어 마리를 쳐들고 흥정하는 허리 굽은 아낙들이 보인다. 도처에 삶의 생생한 풍경이 널려 있다.
평소에는 지나쳐 보던 표정들이 리얼리즘 사진의 대가 최민식 선생을 뒤따라 걷자니 거울면이 햇살을 되쏘듯 내 눈을 부시게 한다. 의식주가 이뤄지는 삶의 현장은 어딜 가든 고만고만하게 누추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네 사는 세상이다. 관찰자가 아니라 그 풍경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 카메라 가방을 멘 최민식 선생이 걸어가고, 나는 감개무량해서 그 뒤를 따라간다.
네 평짜리 ‘작은 교보’
골목 안에 자리잡은 집은 좁고 나지막했다. 이 작은 집에서 그는 아내, 출가하지 않은 딸과 함께 살고 있다(3남1녀를 두었는데, 세 아들은 모두 장가를 갔다).길 건너 살 때는 제법 괜찮았는데 사정이 있어 집을 줄여 오느라 이렇다고 변명 비슷하게 말한다. 그러나 시멘트가 발린 조붓한 뜰 안에 시렁을 타고 오르는 포도넝쿨이 있고 일년초 몇 포기도 소슬하게 꽃을 피웠다.
미닫이문을 여니 한 서너 평 될까, 책으로 가득 찬 방이 나왔다. 사면에 재질이 다르고 제작 연도가 달라 보이는 나무로 짠 서가가 빽빽했다. 한쪽 벽면에 뚫린 공간 안으로 들어서니 거기 다시 책이 가득하다.
거기서 왼편 아래쪽 계단 아래 또 책이 가득한 공간이 나타난다. 벽과 담 사이를 이용해 책을 두는 방으로 개조한 모양이다. 전에 시인 장정일이 자기 방을 두고 했다는 말대로 사진가 최민식의 방 또한 ‘작은 교보’다. 세월에 노랗게 전 일본책부터 잉크 냄새 선연한 신간까지, 소설에서 철학, 시, 사회학, 역사, 심리, 그림책에 사진집까지. 출간 연도도 장르도 가히 전방위적인 책들이 밀집해 꽂혀 있다. 나는 희귀하고 엄정한 도서목록을 갖춘 서점에 들어온 기분이다. 바닥에 앉지 못하고 서가에 붙어 서서 책을 빼내본다. 손때가 가득한 책들이다. 곳곳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어떤 사람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세 가지를 봐야 한답니다. 첫째 그의 서재를 보고, 친구를 보고, 부모를 보고….”
최 선생은 자신의 장서를 아끼고 자긍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낡은 책들이 겹쳐놓인 방은 이미 좁지도 초라하지도 않았다. 거기서 최 선생이 경험한 감동과 전율이 방 안에 견고하고 그윽한 아우라를 형성해놓고 있었다. 정규 학력이라곤 초등학교 졸업뿐인 그가, 세계가 주목하는 ‘스타 사진작가’의 반열에 오른 것은 발로 뛰는 성실성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더 근원적인 힘은 바로 이 서재에서 나왔음을 나는 대번에 알아봤다. 50년 전 일본에서 사진을 처음 공부할 당시의 교과서까지 그는 알뜰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기 와서 대개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이 많은 책을 정말 다 읽었느냐, 책 좀 빌려줄 수 없느냐…. 허허 참, 나는 그런 질문에는 대개 대답하지 않습니다.”
읽지 않으려면 가난한 살림에 왜 책을 사겠으며, 책이란 응분의 값어치를 치르고 직접 사서 읽어야지 빌려서 적당히 읽겠다는 태도로는 제대로 된 독서가 도대체 불가능할 거라는 의미의 무응답이다. 여러 장르의 책이 있지만 이 방의 중심을 차지하는 건 역시 사진집이다. 세기의 사진작가들의 작품집과 작품론이 한 벽면 가득 꽂혔다.
“귀한 책이 많아요. 저런 건 가격도 만만찮지요. 저 책들은 내가 죽으면 부산대학교에 기증할 거예요. 부산대에서 강의 의뢰가 왔거든요. 내가 학력이 보잘것없지만 내 사진 평론책을 읽고 강의할 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했나 봅니다. 이 책이에요(그가 ‘리얼리즘 사진의 사상’이란 책을 뽑아서 보여준다. 나는 나중에 집에 와서 그 책을 정독했다. 방대한 독서량과 예술가로서의 고뇌와 각오와 정열과 기쁨이 넘치는 글이었다). 이전 같으면, 박사 아니고는 대학 강단에 어디 설 수 있었나요? 눈들이 밝아진 거예요.”
책 사이에 숨기듯 들어앉은 낡은 마란츠 앰프에서 소리 결이 생생한 슈베르트가 흘러나온다. 새삼 건너편 벽을 살피니 거기엔 오래된 엘피(LP)판이 잔뜩 꽂혀 있다.
“엘피판이 1000장쯤 되고 저쪽 방에 시디(CD)가 500장 정도 있어요. 책은 원래 한 1만권 됐는데 이사하면서 집이 좁아 어떤 학교에 반 넘게 기증했어요. 여기 남긴 건 내가 정말 아끼는 책들이에요.”
“베토벤이 예술의 모델”
이 아깝고 소중한 책들, 평생 어루만지고 얘기를 나눠온 그들의 미래 향방까지 그는 이미 결정해뒀다. 낡은 나무 서가 옆구리에 카라얀 사진이 붙어 있길래 “카라얀, 좋아하시나요” 무심코 물었더니 그는 정색하고 “기생오라비 같은 게 좋긴 뭐가 좋아. 내가 좋아하는 건 번스타인이지” 한다. 얼른 허리를 구부리고 옆방으로 건너가 거기 붙은 번스타인 사진 앞에 날 잠깐 세워둔다. 지휘자는 번스타인이 좋고 음악은 베토벤을 최상으로 친다.
“내게 베토벤 전기만 15권이 있어요. 여러 번 거듭 읽었지. 나는 시련과 좌절 속에서 자기 예술을 꽃피운 사람을 좋아하거든. 베토벤은 36세에 귀가 멀었는데 57세에 죽었어요. 그러나 베토벤은 아마 지구가 멸망하는 날까지 영원히 살아 있을 걸요. 불멸의 아홉 개 교향곡, 피아노 소나타, 17개의 현악 사중주, 미사곡 등 해서 베토벤이 작곡한 게 전부 760곡인데 그중 85%가 귀먹은 이후에 만든 거예요. 음악가가 귀먹어서 작곡한다는 게 말이나 돼요? 그런데 했거든.
베토벤 음악은 강렬하고 웅대하고 힘이 넘쳐 흐르고 심각하고 높고 영웅적이에요. 음악을 어떻게 힘있는 예술로 만드는지를 알았고,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경험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았거든. 천재지. 그리고 그 천재는 고난 속에서 탄생한 거라고요.”
사진작가인 줄만 알았더니 못 말릴 독서가에 클래식 전문가에 웅변가이기도 하다. 음대에서 베토벤에 관한 특강을 한 적도 있다니 베토벤 연구자라고 불러도 큰 무리는 아니겠다. 그의 열광을 길게 인용하는 이유는 베토벤이 바로 그의 예술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겨워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정부가 잡아 가둬도, 쌀과 연탄 살 돈이 똑 떨어져도, 초상권 침해로 사진의 주인공이 돈을 요구해 와도 그는 평생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베토벤을 떠올리면 언제나 힘이 났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힘을 찾는 사람들
이 자그만 세 겹 방은 최민식의 천국이다. 이 방에서 그는 완벽하고 충만하다. 책 읽고 음악 듣고 사진을 본다. 그리고 어떤 사진을 어떻게 찍어야 할지 그걸 관객(독자)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탐구하고 고민하고 모색한다. 책방 곁 화장실 문밖엔 반 평도 안 되는 암실이 있다. 평생 사진작업을 해왔고 25권의 사진집을 낸 대사진작가의 암실이라기엔 민망할 정도로 비좁은 공간.
나는 화장실을 지나 담 틈에 억지로 만든 암실 안에 굳이 들어가봤다. 몸을 움직이기도 어려울 만큼 불편하지만 불을 켜고 필름을 들여다보자 따스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삶의 엄숙함과 거기 맞선 인간 본연의 가식 없는 표정들이 필름 안에 살아 있었다. 이런 사진들이 넓고 쾌적한 암실에서 만들어질 수야 없겠지. 그건 일종의 오락이거나 기만일 테지. 나는 새삼 가슴이 뜨거워졌다.
지난해 최민식은 시인 조은과 공저로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에 대하여’라는 사진집을 펴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삶을 살펴온 노사진가와 시인의 교감, 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사진과 가장 아름다운 글이 만나 길어 올린 감동어린 사진이야기’라는 서브 타이틀이 붙은 책이다.
나는 시인 조은의 집에 두어 번 가본 적이 있다. 그 집도 최 선생이 지금 서 있는 암실과 똑같았다. 서울 사직동 골목 안 13평짜리 낡은 한옥 안에 조은은 정결하고 소박하고 자족적인 한 세계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창문에 광목 커튼을 달고 그 아래 자그만 책상을 놓고 거기 앉아 시 쓰고 책 읽던 조은. 그가 최민식 선생의 사진에 붙이는 아포리즘(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을 쓴 것이 그저 우연인 줄 알았는데, 최 선생의 집에 와보니 그게 아닌 것을 알겠다. 둘의 눈이 향한 방향이 공통되고 그러자니 삶의 태도가 공통되고 그래서 사는 집도 비슷할 수밖에 없다.
관찰자의 자격으로 두 사람을 잇달아 만난 나는 사람을 대하는 둘의 태도가 유난히 따습다는 공통점을 또 발견했다. 어둡고 암울한 것들 속에 숨겨진 힘과 아름다움, 그걸 찾는 시인과 사진작가라는 일치점이 있으니 둘이 만나 공저를 낸 것은 예정된 필연이었겠다. 세상사 우연히 이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모순과 부조리 고발
“나의 카메라 워크는 절대로 가난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나 호기심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통찰과 분노의 고발인 것이다. 나의 사진은 고난과 시련을 겪는 인간으로서의 아픔 그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사진 속에 담겨 있는 인물의 고통에 직면하게 하였다. 이것은 비참하고 불쌍하다는 동정의 의미보다 인간이 누려야 할 삶의 존엄성을 일깨워주는 아픔이었다.”
최민식의 사진론이다. 대단한 독서량을 자랑하는 만큼 글도 잘쓴다. ‘휴먼(Human)’ 12권과 여자들의 얼굴만 모은 ‘우먼(Woman)’ ‘사진이란 무엇인가’ 말고도 여러 권의 사진 에세이와 사진 평론집을 펴냈다.
지난해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사진전을 대여섯 차례 보러 갔다. 그가 일흔을 훨씬 넘긴 노대가(老大家)라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1950~70년대에 고달프고 비참했던 우리들의 모습, 50년 시간을 뛰어넘어 눈앞에 달려드는 수백점 사진 앞에서 나는 거의 고통을 느꼈다. 충격이었다. 콧날이 시큰해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사진이 숱했다.
갈가리 찢어져 살이 다 드러나는 러닝셔츠를 입은 사내, 듬성듬성 빠진 이빨을 드러낸 채 밝게 웃는 지게꾼, 그의 때 낀 손톱과 검정고무신, 머리와 몸에 비닐을 둘러쓰고 비를 피하는 생선장수 아낙, 마른버짐이 핀 아이에게 국수가락을 걷어 먹이는 젊은 엄마, 산발한 머리에 누더기를 입은 채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서양 만화의 주인공을 그려대는 계집아이들, 그들 곁에 놓인 초라하기 짝 없는 보퉁이, 머리에 둘러쓴 다 해진 수건, 엄마의 빈 젖을 파고드는 굶주린 아기, 까까머리 동생을 업고 지치고 때묻은 얼굴을 밧줄 위에 묻은 누나….
고달프고 굶주리던 이 시대, 외신기자도 아닐 텐데 우리들의 부끄러운 얼굴을 이토록 다양하게 클로즈업해놓은 최민식은 누구인가, 그는 왜 이들에게 렌즈를 들이댔을까. 누추한 입성에 지쳐빠진 표정들, 다 해진 누더기 속에서 눈부시게 약동하는 아이들, 아름답지도 위대하지도 않은 이들을 주목한 까닭이 뭘까…. 나는 의아하고 신기하고 또 고마웠다. 그들의 일그러지거나 무연한 표정은 나로 하여금 어떤 아름다움이나 위대함보다 더 큰 둔중한 감동을 맛보게 했다. 새삼 겸허하고 유순해져서 나는 놀란 눈으로 세상을 둘러봤다.
그는 출생지가 경북 안동이라고 하지만 원래 고향은 황해도 연안이다. 천주교도라 동네에 정착하기 어려웠던 아버지가 전국을 떠돌다 안동에서 어머니를 만나 혼인해 그를 낳았다. 아버지는 공식 학력은 전무했으나 한문을 잘했고 독서를 즐겼다. 어려서 씨름판에 나갔다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다리를 절던 아버지는 글씨도 잘 썼다. 그래서 생업으로 택한 것이 도장공이었다. 남의 편지 같은 것도 대필해주고 병풍 글씨를 써주기도 했지만 그 시절 객지에서 도장을 파서 생계를 꾸리기가 쉬울 리 없었다. 그가 일곱 살 때 아버지는 다시 연안으로 돌아간다. 기차를 타고 갔다.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와서 다시 개성 가는 차를 타고 거기서 연안행 차를 바꿔 탔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밀레 같은 그림을 그려라”
초등학교 때 그가 가장 잘한 과목은 그림과 서예였다. 아버지를 닮았던가 보다. 일제 강점기였으니 담임이 일본인이었다. 그는 최민식의 재주를 아꼈다. 그가 그린 그림을 들여다보며 일본에 유학해서 그림을 배우면 훌륭한 화가가 될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은 소년의 가슴 깊이 들어와 박혔다. ‘훌륭한 화가’란 말은 맘속에서 때로 보석처럼 빛났고 때로 가시처럼 찔러 상처를 냈다.
“없는 살림에도 아버지가 어디선가 물감을 사오셨어요. 화가가 되려거든 밀레같이 가치 있는 그림을 그리라고 하시면서. 밀레의 ‘만종’을 어디선가 구해오시기도 했어요. ‘이 사람처럼 농사짓는 가난한 사람들을 그림으로 그려라’고 하셨죠. 아버지는 성당에 열심히 다니셨고 가톨릭 성인들의 얘기를 많이 해줬어요. 돈 보스코 성인의 축제 얘기도 아버지께 들었거든요.”
그러나 가난은 모든 것을 지웠다. 밀레의 그림을 흉내내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찬탄을 받았지만 그림공부는 언감생심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땅이 없는 그들 가족은 지주 밑에서 소작을 부쳐야 했다.
“당시 연백 땅이 거의 개성 사람들 소유였어. 4대 6으로 나눠 먹는데, 식구가 많으니 7개월만 먹으면 양식이 바닥나 버려. 나머지 5개월은 굶어야 하는 거지. 그런 배고픈 체험이 없었으면 내가 오늘날 이런 사진을 찍지 않았을 거예요.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서 외국 가서 공부했다면 지금쯤 풍경이나 누드사진을 예술이라면서 찍고 있겠지….”
식량도 안 되는 농사일이 싫어 평남 진남포의 군수공장에 취직했다. 얼마 후 광복을 맞아 고향에 돌아오지만 그래도 서울로 가야 그림 공부할 길이 열릴 듯해 소년은 서울로 올라온다. 차비는 고모를 졸라 빌렸다. 첫 상경한 그는 나중에 자기가 찍고 다닌 사진 속 인물과 비슷한 모습이었으리라.
“6·25전쟁이 나기 3년 전이었어. 일단 과자공장에 취직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용산에 있는 작은 미술학원에 다녔어요. 그것만으로도 뛸 듯이 기뻤지. 그러나 낯선 곳에서 먹고 자고 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라야지. 정말 안 해본 것 없이 다 했어. ‘화가’의 꿈을 가슴에 품은 채 식당과 빵공장과 두부공장을 전전했어. 넝마주이, 지게꾼 같은 막노동도 닥치는 대로 했고. 인쇄소에서도 일했지. 군고구마 장사도 하고 나중에는 역전에서 구두닦이도 했어. 온종일 장사해서 돈 몇푼을 벌어놓으면 밤에 깡패들이 와서 다 빼앗아가버리고. 그러느라고 학원도 제대로 못 다녔어.”
무공훈장과 일본 밀항
그러다 전쟁이 났다. 이 시절의 고단함은 듣는 것만으로도 진저리쳐진다. 불과 50년 전 일인데 도무지 실감할 수 없는 비현실이다. 먹고 살 길이 마땅찮아 차라리 군대에 지원하기로 했다.
“지원하는 바람에 수송부대인 병참단에 배치됐어. 보병에 갔으면 나는 전쟁 중에 죽었을지도 몰라요. 훈련이 끝나자마자 원산까지 밀고 올라갔지. 나중에는 우리 부대가 함흥, 청진까지 갔다고! 미 10사단 소속이었어. 군수물자를 기차로 지원하는 일을 맡았어. 중공군이 투입되면서 후퇴했는데, 후퇴하면서 함흥의 만세교를 폭파하라는 명을 받았어요. 나는 중사였어. 졸병 5명과 함께 그 다리에 폭탄을 설치해놨다가 다리에 인민군이 가득할 때 버튼을 눌렀지. 끔찍했지.”
그 참전 공로로 최 선생은 무공훈장을 받는다. 나중 지리산 빨치산 토벌로 다시 훈장 하나를 추가해 그는 6·25전쟁 중 두 개의 무훈을 세우는 전쟁 공로자가 됐다.
나는 바로 이 연재 기사에서 지리산에 숨어 살던 빨치산 할머니를 만난 적도 있고 중국 인민해방군의 자격으로 인해전술에 참가했던 분도 인터뷰했다. 다 선량하고 정의감 넘치는 이들이었다. 자연과 인간과 예술을 특별히 사랑하던 그들, 유난히 미감이 발달하고 감격하기 잘하던 그이들이 서로 총을 겨눈 채 죽고 죽였다는 걸 자랑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전쟁이었다.
전쟁 중 그가 속한 부대는 전남 순천까지 후퇴한다. 전시였지만 성당에는 빠지지 않고 나갔다. 성가대 가운데 선 예쁘장한 아가씨 하나를 눈여겨본다. 청년의 가슴에 연정이 타올랐다. 미행해 집을 알아뒀다가 나중에 찾아가서 정식으로 청혼한다.
“우리 장인은 고향이 의주인데 한때 우리 동네(연안)에 피난 와서 살았더라고요. 알고 보니 집안끼리 서로 아는 사이야. 그 바람에 혼인이 빨리 성사됐지요. 나는 스물다섯이고 우리 집사람은 열여덟인데 그때만 해도 그게 노처녀였어요. 계급이 상사니까 적기는 해도 월급은 몇 푼 나왔지….”
그러나 휴전과 동시에 제대를 선택한다. 손위 처남이 부산에 살고 있어 그 곁으로 살림을 옮긴다. 아이 둘이 태어나고 네 식구의 가장이 됐지만, 전쟁판에서 숱한 죽음을 겪었지만 그의 뇌리엔 여태도 생생하게 ‘훌륭한 화가’란 말이 맴돌고 있었다.
마침내 1955년 그는 일본행 배를 탄다. 밀항이었다. 형편이 괜찮던 처남에게 얼마간의 돈을 융통했다. 고맙게도 아내와 아이 둘도 처남이 맡아줬다.
“이맘때였어요. 가을밤이었지. 16명이 부산 영도 해변에서 자그만 어선에 올라탔어. 사흘 만에 일본 규슈에 닿았어요. 다행히 나는 일본말에 익숙해서 검문 때마다 위기를 넘겼어요. 도쿄에 무사히 도착한 후 알아봤더니 같이 간 사람들 중 둘만 빼고 열넷은 잡혀서 오무라 수용소에 갇혔다가 본국으로 강제송환됐더라고요.”
스타이켄과의 조우
도쿄에 도착하니 수중엔 20일 정도 지낼 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직장을 구하다가 어느 식당에 취직했다. 그 집 주인 딸이 마침 중앙미술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당장 중앙미술학원 야간부에 입학했다. 그토록 오매불망하던 그림공부였다. 희열 그 자체였다. 돈이 필요해 낮에는 미술학원 학생들과 어울려 고물 수집을 하러 다녔다.
“당시 일본은 넝마주이 벌이가 괜찮았어요. 학비와 용돈이 나오고 책 살 돈도 나오고 그렇게나 갖고 싶던 중고 카메라도 한 대 샀다니까요.”
헌책방을 도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어느 날 헌책방에서 그는 인생을 바꿀 책 한 권을 발견한다. 미국 사진작가 스타이켄이 편집한 ‘인간가족’이란 사진집, 태어나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다 죽는 인간사의 반복을 영상언어로 보여주는 책이었다.
“카메라의 성서, 인류라고 하는 드라마, 신비를 수놓은 서사시였어요. 신을 향한 인간의 고백이었고 관객과 사진작가가 손을 맞잡고 올리는 기도였어요.”
치열하게 일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름 아닌 자신의 모습이 그 흑백사진집 속에 담겨 있었다. 놀라웠다. 사진이 이렇게 울림이 큰 것이라면, 그림보다 사진을 하고 싶었다. 새로 산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림 대신 사진이론과 촬영 연구에 몰두했다. 삶의 진실과 인간 본연의 적나라한 모습을 사진 속에 담는 일에 미칠 듯이 빠져들었다. 힘든 일을 해도 지치지 않았다.
마침내 2년제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그제야 아내와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공부의 목적을 발견했고 방법도 알았으니 돌아가도 좋았다. 1957년 그는 중고 카메라 석 대와 부속품, 수십 권의 사진집을 사들고 다시 밀항해 부산으로 돌아온다.
“이런 사진 찍는 건 이적행위”
서너 평 남짓한 공간에 빽빽이 들어찬 책들은 그를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원천이 됐다.
생판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정면에서 찍는다는 건 일종의 도전이었다. 대담성과 용기가 없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내도 필요하고 민첩성도 필요하고 요령도 필요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사진 찍다 멱살을 잡혀 파출소까지 끌려가거나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듣는 건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노숙자나 노동자의 사진을 찍다 몸싸움으로 옷이나 살이 찢기는 일도 흔했고 카메라가 박살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무엇보다 다 찍은 필름을 뺏길 때가 제일 아깝지요. 고발당해 법정에 선 것만도 서너 차례 될 걸요. 공모전에 당선돼 사진이 신문에 나면 사진 찍힌 이의 가족이라는 사람이 만나자고 연락을 해 와요. 허가 없이 찍었다는 이유로 보상을 요구하는 거지요.”
간첩이라고 신고가 들어가 경찰이 출동한 건 이루 셀 수도 없다. 얼추 잡아도 일년에 여남은 번씩은 된다. 한번 잡혀가면 짧으면 한 시간, 길면 이틀씩 경찰서에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우리나라 사람의 반공의식이 얼마나 철저한지 놀랄 지경이죠. 간첩 하나 잡으면 3000만원인가를 준다고 하니 일단 신고부터 해놓고 보는 거죠.”
그의 ‘휴먼’ 1집이 처음 나온 건 1967년이다. 이듬해 울릉도에서 간첩단이 잡혔는데 그들의 소지품 중에 최민식의 사진집이 섞여 있었다. 밑바닥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찍은 사진들이었다.
“수류탄, 자살용 앰플, 난수표와 함께 내 사진집이 턱 나오는 겁니다. 만일 그 책 안에 내가 한 사인이라도 있었더라면… 영락없이 간첩으로 몰렸을 거예요. 무섭던 시절이니 당장 처형당했을지도 모르고. 허허.”
군사정부 시절 내내 그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가난하고 삶에 찌든 사람들에게만 렌즈를 들이대는 그를 정권이 미워했다. 등 뒤를 따라다니는 전담형사가 있었다.
“발전하는 조국의 모습을 자랑해야 할 텐데 어쩌자고 보여주기 싫은 밑바닥 사람들의 모습만 자꾸 찍어대냐는 거지. 자고 있으면 밤중에 경찰이 들이닥쳐요. 권총 차고 두 놈이 오지. 이런 사진을 찍어대는 건 결국 이적행위 아니냐는 거였어요. 1970년 군사독재에 항의하는 부산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하면서부터는 더욱 노골적으로 박해했고….”
그의 사진 인생 50년 중 35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쫓기고 가난했고 천대받았다. 1967년 영국의 대표적 사진연감에 그의 사진이 실리면서 ‘스타 사진작가’로 선정되고 ‘카메라의 렘브란트’란 별칭을 얻었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대접은 달라진 게 없었다. 일본, 독일, 미국의 사진 잡지에 그의 작품이 수백점 실렸지만 한국에선 사진에 그나마 관심을 가졌던 동아일보사에서 첫 사진집 ‘휴먼’ 1권을 출판해줬을 뿐이다. 사진을 찍을 자유는 있었지만 발표할 자유는 없었다. 시상식이 있어도 여권이 안 나오니 참석할 수 없었다. 서양 신부님의 호의로 분도출판사에서 ‘휴먼’이 잇달아 출판됐지만 판매금지로 묶여버렸다.
그러다 환갑을 넘긴 이후에야 비로소 살 만해졌다. 한 예술가의 인생이 환갑이 될 때까지 가난과 억압으로 묶여 있어야 했다니! 이젠 정권의 압제도 없어졌고 간첩이란 의심도 ‘해당사항’이 없어졌으며 책도 여러 권 나와 알아주는 사람도 제법 생겼다. 원고료나 강의 수입도 들어오기 시작했고, 상도 여러 개 받았다. 그는 천진하게도 그동안 받은 상금을 손가락을 꼽아가며 나열한다. 그리 큰 액수 같지도 않건만 그에게는 생애 최초로 사진을 통해 벌어들인 목돈이었던 모양이다.
“2000년도 부산방송 문화대상을 받았어요. 상금이 1000만원이었어요. 지난해에는 부산 시립미술관이 내 사진 50점을 영구보존한다면서 1200만원을 주데요. 올해에는 동강 사진전에서 또 1000만원을 받고…. 요즘도 집사람에게 한 달에 100만원씩은 준다고요. 상금으로는 아프리카에 가려고 해요. 돈이 뒷받침이 되어야 사진의 앵글 각도가 넓고 깊이가 생기는 건데…. 현장에 가서 1년 내내 살아야 해요.
10여 년 전부터는 나도 한국을 벗어나 인도 네팔 티베트 이집트에 사진 찍으러 다녀요. 그렇지만 잠깐 만에 후딱 찍고 돌아오니 뭐가 돼야지. 브라질 인도 중국까지 다니며 노동자만 찍어대는 살가도나 집시만 찍는 쿠델카의 사진을 보면 입이 딱딱 벌어진다니까요.”
“술 한잔에 필름이 몇 통인데…”
사진에 눈을 뜬 건 스타이켄의 ‘인간가족’이지만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진작가는 미국의 유진 스미스다. 스미스의 사진은 화조가 어둡고 이미지가 강렬하다.
“그의 사진은 몸을 조이는 압박감을 느끼게 해요. 생명의 몸부림인 거죠. 조화로운 분위기나 묘사의 아름다움이 아니거든요. 그보다는 인간이 영위하는 삶의 진실을 파헤치려고 하기에 그의 사진에는 쓰라림과 피맺힘이 있어요. 그의 어둠에는 밝음 쪽으로 도약하려는 몸부림과 내적 진통이 있어요.”
최 선생은 책꽂이에서 스미스의 사진집을 꺼내 내 앞에 펼쳐 보인다. 스위스의 베르너 비숍도 좋아한다. 그는 ‘카메라의 평화주의자’로 불리는 사진작가로 서정적이고 평화롭고 인간적인 따뜻함을 전하는 사진들을 남겼다. 다큐멘터리 사진의 새로운 길을 터준 도로시어 랑어도 전범으로 삼는 작가다. 이 세 사람에게서 그는 사진을 독학으로 배웠고 자기 사진의 테마를 확립했다. 최민식은 80%쯤을 흑백사진으로 찍는다.
“흑백이 표현력이 강렬하거든요. 어두운 장면이 많은 내 주제에도 맞고. 직접 현상할 수 있으니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고….”
그는 한 서른해 전부터 베레모를 애용하고 있다. 딱 어울리는 모습이다.
“다른 모자는 챙이 있어서 카메라 사용이 불편하잖아요. 첨엔 머리카락이 바람에 안 날려서 좋고 먼지를 막아줘서 좋았는데 요즘은 머리카락 빠진 것을 가려줘서 더 좋아요.”
가톨릭 성인의 삶
잡기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술도 노름도 않고 사치도 여자도 멀리했다.
“술 한잔에 5000원이면 필름이 몇 통이야? 그런 생각이 먼저 들거든. 여자하고 하루 잤다 하면 필름이 70통이잖아 싶어 발걸음이 딱 멈춰져. 옷은 노상 군복 물들인 거나 입고 다니지. 대학에 강의 나가면 정문에서 월부책장수인 줄 알고 번번이 못 들어오게 해요.”
대신 그의 유일한 쾌락은 지식놀음이다. 독서다.
그에게는 잊지 못할 은인이 둘 있다. 유학을 도와준 처남이 하나고, 다른 한 분은 경북 왜관 베네딕트 수도회의 독일인 신부 임 세바스틴이다. 쌀을 사면 필름이 떨어지고 필름이 있으면 쌀이 떨어지던 그에게 마음 놓고 사진 찍을 수 있도록 12년간이나 은밀히 생활비를 지원해준 분이다. 임 신부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최민식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없을 리야 없겠지만 작품의 숫자가 크게 줄었을 것은 확실하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8×10 사이즈 사진 100장씩을 들고 왜관에 내려갔다.
“동아일보사에서 펴낸 ‘휴먼’ 1집을 보고 만나자는 제안을 해왔더군요. 분도출판사가 김지하의 ‘밥’같은 판금서적들을 만들곤 했잖아요. 정의를 위해, 어둠을 몰아내기 위한 증언으로 생활비 걱정 없이 사진작업을 계속하라고 했어요. 그걸 모아 임 신부님은 ‘휴먼’ 4집에서 8집까지를 만들어주셨어요. 만날 때마다 항상 똑같은 차림으로 베레모를 쓰고 골덴(코듀로이)바지를 입고 낡은 세무(섀미)신발을 신으셨죠.
자선단체 ‘소년의 집’을 설립한 미국인 소 알로시에 신부님도 토굴 같은 작은 방에 야전침상 하나만 놓고 사시더니…(소 신부 덕분에 그는 일본에서 돌아온 직후 휴머니즘으로 가득 찬 사진을 마음껏 찍은 적이 있다). 아 사람은 이렇게 사는구나 싶었어요. 예, 나는 가톨릭의 아들이지요. 본명은 빈첸시오예요. 같은 이름의 주교님이 계셨는데 고아들을 위해 주교관을 개방하신 분이죠.”
그러고 보니 최민식은 사진을 통해 가톨릭 성인의 삶을 실천해왔는지도 모른다. 그가 평생 흠모해온 톨스토이, 밀레, 베토벤이 두루 신성으로 넘치는 예술가인 점도 예사롭지 않다.
리얼리즘 사진의 목적
오늘도 그는 카메라 두 대를 메고 사람 많은 거리를 걷는다. 그는 늙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는다. 35㎜ 카메라의 작은 크기와 가벼운 무게는 그에게 대단한 기동력을 준다.
“이제는 요령이 생겨 무릎에 카메라를 놓고 안 보이게 얼른 찍어요. 그래놓고는 눈은 엉뚱한 데를 보는 거지. 나는 일부러 꾸미거나 연출하는 사진은 딱 싫어요. 그러자면 안 보는 척 앉아서 마냥 기다렸다 순간을 재빨리 포착해서 번개같이 셔터를 눌러야지. 찍히네 마네 실랑이가 있기 전에 이미 셔터가 눌린 거지. 리얼리즘 사진을 하자면 그런 훈련이 충분히 돼 있어야 해요.”
그는 ‘자갈치 아저씨’다. 그의 작품은 요즘도 온통 자갈치 시장의 표정과 언어들로 이뤄져 있다. 그의 사진은 본질적 요소만을 포착한다. 장식성을 모조리 뺀다. 동물적 직관으로 대상을 재빨리 발견해내고 카메라 위치를 찾아내 광선과 형태, 인물의 표정이 어울리는 최상의 순간,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해 호랑이 같은 민첩함으로 셔터를 눌러댄다.
“리얼리즘 사진의 목적은 삶을 배우는 데 있거든요. 곤궁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장을 담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고난에 직면한 개인의 힘과 위엄이 드러나기 때문이에요. 그게 내 사진의 주제입니다. 사진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가장 강력한 지렛대가 되거든요. 카메라는 그냥 펜이에요. 내가 표현할 주제를 잊어서는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어요. 좋은 사진은 사람의 정신과 감정을 확장시킨다고 생각해요.
나는 사진의 힘을 믿어요. 힘들게 살아왔지만 사진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켰다고 자부합니다. 현재와 미래의 세대에게 과거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는 사진만큼 탁월한 매체가 없어요. 진정한 사진작가는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야 해요. 그들이 말하는 삶의 의미를 다른 사람들에게 깨우쳐주는 것, 그게 작가로서 나의 임무입니다.”
그의 사진 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실이 담겨 있다. 천마디의 외침과 절규가 들어 있다. 고뇌와 진실,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아름다움, 그게 사진작가 최민식의 변함 없는 주제일 것이다. 그의 사진을 본다. 고구마 여섯 개를 늘어놓고 좌판 앞에 앉은 젊은 엄마, 그 곁에 아랫도리를 다 드러낸 채 놀고 있는 무심한 아이, ‘59년 BUSAN’이라 쓰인 간략한 설명. 그의 사진 끝에 거의 언제나 따라다니는 이 ‘BUSAN’이란 단어는 이제 세계인의 가슴을 치는 아픈 시그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