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 YTN ‘백지연의 뉴스 Q’ 앵커를 그만둔 방송인 백지연씨가 최근 ‘백지연 커뮤니케이션즈’ CEO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이 회사는 ‘맞춤 컨설팅 시스템’과 ‘스피치 아카데미’를 통해 그가 18년간 방송현장에서 쌓은 산 지식과 스피치 노하우를 가르친다. 정적인 앵커 이미지를 벗어나 유연하고 패기 넘치는 CEO로 변모한 백지연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 보였다.
그는 ‘뉴스데스크’ 앵커 자리를 8년간이나 지켰고, 프리랜서로 변신한 뒤에도 KBS와 SBS, YTN의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전문 시사 인터뷰어로 입지를 다졌다. 또한 ‘백야’ ‘뷰티플 라이프’와 같은 공중파 TV 프로그램의 MC와 CF모델로도 활약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지칠 줄 모르는 불도저처럼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최근 ‘백지연 커뮤니케이션즈’라는 회사를 설립, 경영 일선에 나선 것도 그런 면모를 짐작케 한다. ‘백지연 커뮤니케이션즈’ 사무실은 서울 강남구 압구정역 사거리에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그는 지난 9월1일 개원한 스피치 아카데미와 지난 3월 문을 연 커뮤니케이션 컨설팅 회사 CSI(Communication Strategy Institute)를 운영하며 직접 강의도 하고 있다.
이곳엔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실내 장식, 방송국에도 흔치 않은 고가의 HDTV를 갖춘 스튜디오와 부조정실, 최신식 조명시설 등이 들어서 있다. 스피치 전문가라는 명성, 그리고 CEO라는 직함에 걸맞게 백씨 자신도 외모에 변화를 줬다. 찰랑찰랑한 생머리를 ‘올백’으로 질끈 동여맨 헤어스타일, 활동적인 느낌의 바지 정장, 화사한 메이크업으로 생기발랄한 분위기를 연출한 그에게서 옛 앵커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투자를 꽤 많이 한 것 같다”고 인사를 건네자 그는 환하게 웃으면서 “웬만한 사람이 평생 저축할까 말까 한 돈을 투자했다고 할 수 있지요. ‘그 돈으로 차라리 편하게 즐기며 살지 그랬냐’는 얘기도 들었지만,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게 제 성격인 것 같아요”라고 말문을 열었다.
“자신감을 팝니다”
-‘커뮤니케이션 컨설팅’이나 ‘스피치 아카데미’는 아직 생소하게 들립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인가요.
“우리가 파는 상품은 자신감이에요. 스피치 아카데미는 직업학교가 아닙니다. 여기 오는 분들에게도 제일 먼저 이런 얘기를 해요. ‘나는 당신들한테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최고의 목표다. 스피치는 자신감을 얻기 위한 아주 중요하고 기초적인 능력이다. 스피치를 통해 자신감을 얻으면 자기 확신이 생기고, 자기 확신이 생기면 삶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가장 가까운 길로 갈 수 있다. 또 삶의 목표를 이루면 결국 우리 모두의 공통된 목표인 행복을 얻게 된다. 그게 나의 목표다’라고요. 그래서 회사 안내 책자를 만들 때도 ‘우리는 자신감을 팝니다’와 ‘진품(authenticity)’이라는 점을 강조했어요. 스피치 교육에서는 우리가 정통이요, 진품이라는 뜻이죠.”
-커뮤니케이션 교육사업은 언제부터 구상했습니까.
“5~6년 전부터예요. 제가 하는 일을 유형화하고 싶었습니다. 제게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향상시켜 달라고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그들을 도와주기 위한 터전이 바로 ‘백지연 커뮤니케이션즈’예요. 앞으로 그룹으로 키워낼 생각이에요. 그 첫 번째 프로젝트가 CSI라는 1인 맞춤 컨설팅 회사이고, 두 번째 프로젝트가 얼마 전 개원한 스피치 아카데미죠. 그리고 올해 말쯤 세 번째 회사도 만들 계획이에요.”
-아카데미를 개원한 지 한 달여가 지났는데, 앵커로 일할 때와 어떤 차이가 있던가요.
“저는 일을 하지 않을 때는 게으른데, 목표가 정해지면 아주 부지런해져요. 앵커일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고 오후가 되면 다들 완전히 탈진해요.”
-주로 어떤 사람들이 스피치를 배우러 옵니까.
“앵커나 아나운서를 꿈꾸는 예비 방송인이 반, 일반인이 반이에요. 인터뷰, 협상, 설득, 정보제공 등 커리큘럼이 세분화되어 있어서 각 개인에 맞게 지도하죠. 특히 변호사들의 수요가 많아요. 아마 앞으로 법정에서 변호사들이 예전처럼 서면변론으로 대체하는 것보다 실제 변론에 나설 일이 많아질 상황에 대비하는 차원인 것 같아요.
누구에게나 자기 콘텐츠라는 게 있습니다. 머릿속에 많은 게 있는데 그것을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하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아주 똑똑한 사람도 말을 못하면 무능력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스피치 훈련은 꼭 필요하고, 훈련을 통해 분명히 개선됩니다.”
-스피치를 잘하려면 어떤 훈련이 필요한가요.
“스피치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논리적으로 말하는 거예요. 핵심을 꿰뚫는 얘기, 즉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듣는 사람에게 잘 전달하는 능력이죠. 그런데 대개는 말을 끝내고 나서 ‘내가 하려는 말이 그 말이 아니었는데…’ 하거든요. 그래서 말하기 이전에 사고를 정리하는 방법부터 가르칩니다. 특히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회의석상이나 대외적인 자리에서 즉석 스피치를 할 기회가 많은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톱클래스에 있는 50대 남성들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에 자신감이 있는 분이 그리 많지 않죠.”
-스피치는 생각과 인격, 논리적 사고력을 반영하는 것이니만큼 어릴 때부터 배우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사실 제가 초등학교, 중학교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많아요. 제 아이가 초등학생이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 나이에 사고의 틀이 형성돼야 하거든요.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사안이나 사물을 보고 분석하는 훈련을 시키면 공부를 잘할 수밖에 없어요.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말할 수 있게 되면 국어뿐 아니라 과학도 잘하고 역사도 잘해요.”
-청소년을 위한 교육과정도 만들 계획인가요.
“지금도 컨설팅을 받으러 오는 학부모가 많아요. 하루 수십 통의 문의 전화가 오죠. 오는 겨울방학 이전에 초등학생부터 가르칠 거예요. 저도 초등학생 엄마라 심혈을 기울여 프로그램을 만들겠죠(웃음)? 이번 겨울방학 전에 시작할 계획입니다.”
-말을 잘하려면 평소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요.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것부터 가르친다고 했는데, 그건 내용적인 면이고요. 기술적인 면으로는 귀가 먼저 열려야 한다고 가르쳐요. 자기가 말하는 것을 자기가 들을 수 있어야 해요. 수강생들은 처음엔 자기가 잘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야 못한다는 것을 알겠대요. 스피치 교육은 전문적인 훈련이 필요해요. 혼자서는 못해요. 혼자 분석을 하면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니까요. 스피치는 제대로 된 교육기관에서 전문가에게 배워야 합니다.”
대학시절 별명은 ‘브룩 쉴즈’
연세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 석사를 마친 백지연씨는 모교 사랑이 남다르다. 그는 이번 가을 학기부터 연세대에서 스피치 전담 겸임교수를 맡기도 했다.
-사업 준비 때문에 방송까지 그만뒀는데, 대학에서 강의할 시간을 낼 수 있습니까.
“원래 모교 일은 발벗고 나서서 하는 편이에요. 지난 5년간 해마다 신입생 5000명을 대강당에 모아놓고 특강을 했어요. 요즘은 각 대학에서도 커뮤니케이션, 스피치 교육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스피치 교육을 전문적으로 받은 사람이 드물어요. 스피치 교육을 하려면 스스로 터득한 노하우뿐 아니라 학문적 백그라운드와 실전 경험도 필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말을 잘했나요.
“초등학교 때 별명이 ‘벙어리’였어요. 하도 말을 안 해서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걸 무척 싫어했죠. 그렇지만 내성적인 건 아니었죠. 집안에서 귀염둥이 막내여서 어릴 때 어머니가 저랑 얘기하는 재미로 산다고 하셨어요. 엄마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종알종알 잘 떠들었대요. 그러나 아이들하고 어울려 다니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책을 많이 읽어서 그랬는지 좀 성숙한 편이었어요.”
-독서가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말하는 데 도움이 됐겠군요.
“독서를 많이 하는 것은 논리적 사고의 바탕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제 경험에서 나온 얘기예요. 시사 인터뷰어를 하려면 많은 정보를 짧은 순간에 다 습득해야 해요. 매일매일 방송을 하다 보니 핵심을 꿰뚫어 요약하고 질문하는 훈련이 몸에 밴 거죠.”
-대학시절 ‘퀸카’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하던데요.
“(웃음)브룩 쉴즈라는 닉네임 때문에 귀찮았어요. 그 무렵 ‘연대에는 브룩 쉴즈, 이대엔 소머즈가 있다’ 뭐 이런 우스갯소리 같은 것이 있었나 봐요. 나중엔 ‘자칭이다’고 하는 학생들도 있었는데 누가 자칭한다고 불러주는 세상인가요? 제 별명이 저도 모르게 브룩 쉴즈가 되어버렸다는 것은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알게 됐지요. 캠퍼스를 지나가는데 애들이 자꾸 쳐다보고 쑥덕거리더라고요. ‘브룩 쉴즈다’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한번은 심리학 전공 시간에 교수님이 ‘여기서 심리학과 아닌 것들, 다 나가!’ 하고 호통을 치시며 ‘백지연, 너 때문에 우리가 귀찮아’ 하시는 거예요. 그때 우리 과 남학생이 교수님 말씀에 힘을 얻어 ‘나도 너 때문에 귀찮아. 친구들이 자꾸 미팅 주선해달래’ 해서 한바탕 웃었죠. 여러 일화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 장난 같지만 재미도 있어요. 하지만 학교 다닐 때는 정말 그 애꿎은 별명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요. 연대 수석입학생이 제 강의 시간표를 입수해서 따라 듣다가 F학점을 두 개나 맞았다는 얘기도 들려왔죠. 그 학생은 지금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죠.”
“신앙과 자기설득으로 살았어요”
-과감하게 구애하는 학생은 없었나요.
“소위 ‘킹카’는 따라오지 않고, 제 마음엔 별로 와 닿지 않는 분들이 아주 용감하시더라고요, 하하. 남학생들이 밤에 자꾸 쫓아와서 무서웠어요. 집에 가려면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했는데, 누가 쫓아오는 것 같아 귀가 길에는 늘 공포에 떨기까지 했죠.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그때는 심각했어요. 인근의 홍익대 미대에 다니던 제 바로 위 언니가 저를 데리러 왔어요.”
-대학생들이 가장 닮고 싶어하는 여성상으로 뽑힐 만큼 많은 이에게 선망의 대상이 돼 왔습니다. 스피치 아카데미를 찾는 사람들의 상당수도 백지연이라는 이름에 끌려서 올 겁니다. 그런 성공 비결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성공이라고까지 하긴 조심스럽지만, 그저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밑천이 뭐냐고 묻는다면, 그건 하나님이에요. 제가 평범한 가정의 막내딸로 태어나 지금까지 열심히 살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신앙의 힘 덕분이에요. 다른 하나는 자기설득이었어요. ‘세상엔 나밖에 믿을 것이 없다. 내 안에는 파워가 있다. 내 안의 능력이 나를 결코 쓰러지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자기설득이 크고 작은 고비 때마다 저를 일으켜 세웠죠.”
-유혹을 느껴본 적은 없나요.
“모범생 기질을 타고난 것 같아요. 저는 자주 저 자신을 분석해요. 엄마가 되고 나서는 더 자주요. 아이를 키우면서 ‘난 저 나이 때 무슨 생각을 했지?’ 하고 지난날을 자주 회상합니다. 전 어릴 때부터 일탈을 무척 싫어했어요. 시험 보기 전에는 당연히 공부해야 하는 거고, 숙제를 먼저 해놓고 놀아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요. 참 융통성 없고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전 그게 편했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엄마 옆구리를 콕콕 찌르면서 ‘나 키우면서 편했지? 엄마는 아무것도 안했지?’라고 해요. 그러면 엄마도 ‘진짜야. 한 번도 손이 안 갔다’고 하세요. 잔소리할 필요가 없었대요. 그 흔한 과외도 한번 안 시켜주셨어요.”
-힘들고 지칠 때는 없습니까. 그럴 때는 어떻게 합니까.
“좌절하는 순간은 있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이요. 그때 제가 가장 신뢰하는 컨설턴트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 저 너무 겁나요. 저 너무 어려워요. 근데 제가 여기서 주저앉을 순 없잖아요’라고 기도해요. 그건 기도이기도 하고, 독백이기도 하고, 제 자신과의 대화이기도 해요.
전 세상의 그 누구에게도 기대거나 기대하지 않아요. 물론 친구도 있고, 사랑하는 어머니와 가족도 있지요. 그들을 다 사랑하고 믿어요. 그렇지만 그들에게 의지하진 않으려 하지요. 사람의 마음은 변하기 때문에 변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이죠. 변하지 않는 건 하나님뿐이기 때문에 의지하고 믿죠.”
-직업상 자기관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텐데, 나름의 건강관리법이나 미용 노하우가 있다면?
“따로 관리할 시간이 없어요. 피부 관리를 위해서는 세안 정도나 신경을 써요. 세안은 성격대로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해요. 운동도 잘 못해요. 살 안 찌는 건 유전자 덕분인 것 같아요. 키도 그렇고요. 피부는 어머니를 닮았어요. 감사해야죠.”
-스피치 아카데미 개원식 날 뒤풀이 자리에서 ‘마이 웨이’와 드라마 ‘명성황후’의 주제곡 ‘나 가거든’을 부르는 것을 보고 놀랐어요. 가수 뺨치는 실력이던데요?
“가끔 노래 부를 일이 있으면 부르는 곡이죠. 제가 원래 그런 비장한 노래를 아주 좋아해요.”
-분위기도 잘 맞추더군요.
“저는 뭐든 열심히 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책을 낼 때도 대필 작가를 쓰지 않고 제가 직접 다 쓰죠. 사실 중학교 때까지 성악을 했어요. 원래 성악으로 대학 가려고 했어요. 근데 성적이 아주 좋아서 그만뒀죠(웃음).”
MBC, KBS에 모두 합격
-원래 꿈이 아나운서였습니까.
“앵커가 될 생각은 있었어요. 부모님은 제가 심리학을 전공해서 교수가 됐으면 하셨고, 저는 임상학을 더 공부해서 정신과 의사를 할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유학을 가려고 학교를 정해놓고 외국어 공부를 하느라 외신 뉴스를 많이 봤어요. 당시 50대 중반이던 바버라 월터스나 다이안 소여 같은 앵커가 뉴스를 진행하는 모습이 참 당당하고 인상적이었어요.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가졌죠.
그렇게 유학 준비를 하다 방송사들이 공채 아나운서를 뽑기에 특유의 도전정신에 힘입어 MBC와 KBS 시험에 모두 응시했어요. 한두 명 뽑는데 수백명이 몰렸어요. 다들 ‘신부 화장’을 하고 왔더라고요. 저는 꼭 붙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메이크업도 안 하고 갔거든요. 그땐 메이크업을 할 줄도 몰랐지만.”
-대학 다닐 때도 화장을 안 했나요?
“전혀요. MBC에 입사해서도 2~3년간은 맨얼굴로 다녔어요. 요즘도 가끔 노 메이크업으로 나와요. 화장하는 거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아나운서 시험을 치르는 날에도 맨얼굴에, 언니 정장을 빌려 입고 갔는데 두 방송국에 다 합격했어요. 양 방송사로부터 강력한 콜을 받다 결국 MBC로 가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게 내가 모르는 능력이 있나 보다. 앵커의 꿈을 50대 정도에 이루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될 수도 있겠다’….
입사한 뒤에는 나름대로 열심히 했죠. 아니, ‘정말 제대로 해보자’는 각오로 뉴스 연습을 열심히 했어요. 그때만 해도 MBC 9시 뉴스는 남자 앵커 혼자서 진행했는데, 곧 KBS처럼 남녀가 같이 진행한다며 여자 앵커를 뽑는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얼마 후 오디션이 다섯 번쯤 열렸는데 수습사원들에게도 연습삼아 해보라며 기회를 줬어요. 그런데 그 오디션에서 1등을 하는 바람에 수습 5개월 만에 메인뉴스의 앵커 자리에 덜렁 올라갔죠.”
-뉴스는 물론이고, 시사 프로그램도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방송하면서 실수한 적은 없나요.
“18년 동안 생방송을 하면서 실수한 적은 거의 없어요. 저는 앵커이자 시사 인터뷰어예요. 앵커의 꽃은 인터뷰라고 생각해요. 준비된 뉴스도 진행하기 힘들다고는 하지만 훈련을 하면 웬만큼 잘할 수 있어요. 하지만 훌륭한 인터뷰어가 되기는 쉽지 않죠. 저는 앞으로도 시사 인터뷰어로 남을 거예요. 그런 이유로 최근 2~3년 동안 ‘백지연의 뉴스 Q’ ‘백지연의 정보특종’ ‘KBS 라디오 정보센터 백지연입니다’ ‘백지연의 라디오 정상회담’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시사 인터뷰에 치중했죠.”
“아들도 말을 너무 잘해요”
-가장 인상 깊었던 인터뷰이는 누구인가요.
“웬만한 인사는 거의 다 만나본 것 같아요.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말레이시아의 모하메드 마하티르 전 수상과 미국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였어요. 그 둘은 인터뷰를 정말 잘하는 인터뷰이로 기억에 남네요.
저는 정치인과 인터뷰할 때는 공격적일 때가 있어요. 정치인은 검증을 해야 해요. 정치인은 서민의 먹고 사는 문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정치인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입법기관이라 무능력하고, 비도덕적인 정치인이 있다면 수만명, 수십만명이 고생해요. 그래서 정치인들은 검증을 받아야 하고, 언론이 그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하지만 정치인을 공격적으로 인터뷰한다고 해서 그들 개인에 대해 사감이 있는 건 아니에요.”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이는 백지연씨한테도 아킬레스건 같은 게 있나요.
“아들(9)이요. 예전에는 자아, 자존심 같은 게 너무나 강했거든요. 근데 지금은 자아가 없어진 것 같아요. 기도할 때 그걸 많이 느껴요. 모든 기도가 아들에게로 향하거든요. 그걸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킬레스건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귀한 존재인데….”
-평소 아들과 자주 대화합니까.
“자주 하려고 노력해요. 아들도 말을 너무 잘해서 저랑 대화가 돼요. 미운 네 살, 미운 일곱 살, 그러는데 저는 아이 키우면서 한번도 미운 적이 없었어요. 너무 예뻐요. 타임머신 타고 한번만 그때로 돌아가봤으면 좋겠어요. 어느 부모가 아이가 예쁘지 않겠어요.”
-일하는 엄마로서 고충은 없나요.
“바쁜 엄마라서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적어 미안한 생각이 많이 드는데, 아이는 영악해서 엄마가 미안해하는 것을 안대요. 아이들은 부모의 생각을 뛰어넘는 어른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엄마가 아이에게 미안함을 갖는 게 교육상 안 좋다고 해서 미안한 마음을 떨쳐내려고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그래도 미안해요.”
-대화할 때 어떤 충고를 해주나요.
“충고는요. 전 모든 아이는 위대하다고 생각해요.”
-잔소리를 안 하는 편인가 보죠?
“‘공부해야지?’ 그 얘긴 해요. 만날 옆에 붙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걔가 공부를 못한다면 반은 제 책임이라고 봐요. 그래도 공부하라고 혼내지는 않아요. ‘공부해야 되지 않겠니’ 하면서 스스로 하도록 유도하죠. 아이가 ‘나도 알아’ 하고 수긍하는데,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걸 보면 엄마를 안 닮은 것 같아요(웃음).”
백지연씨는 2001년, 열세 살 연상의 국제금융 전문가 송경순(54)씨와 재혼했다.
-사업 준비를 하면서 남편의 외조가 컸겠군요.
“저희는 각자 일해요. 남편은 남편대로 전문가고, 저도 전문직이잖아요. 둘 다 전문직이기 때문에 각자 자기 세계에서 열심히 일하고 서로 존중하려고 노력하죠. 저는 인터뷰할 때 남편이나 아이 얘기 잘 안 해요. 저 같은 경우는 공인이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사적인 질문을 많이 받는데 굳이 자랑도, 안 좋은 소리도 할 필요가 없죠. 부부가 잘 사느냐는 것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돼봐야 아는 것 아닌가요? 두 사람의 문제이기에 한쪽이 좋은 의미로 얘기해도 다른 쪽은 섭섭할 수도 있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은 듯해요. ‘저도 남들처럼 열심히 삽니다’가 정답이에요.”
호주제 폐지 운동에 앞장
백지연은 2001년 한국 여성단체연합의 제의로 호주제 폐지 제1기 홍보대사를 지냈다. 이를 두고 그는 “정치적 활동처럼 비칠까봐 홍보대사 일을 망설였지만 호주제 폐지는 원래 내 신념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호주제의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된 것은 이혼한 여성이 아이를 키우다 재혼해도 그 아이는 여전히 전남편의 성을 따라야 하는 점이다. 백지연도 같은 아픔을 겪고 있다.
“호주제 폐지 관련 홈페이지에 한번 들어가보세요. 우리네 수준을 알 수 있는 댓글이 많이 올라와 있어요. 이혼이 자랑할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죄도 아니죠. 잘못된 것에 대한 책임은 여자와 남자가 각자 지면 돼요. 하지만 그 책임을 아이들한테 물어선 안 돼요. 사람 위에 법이 있을 수 없어요. 사람이 편리하게 살 수 있도록 질서를 만들어놓은 것이 법 아닌가요? 사람을 옭아매서 불행을 초래하는 법이 왜 있어야 합니까. 아이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그런 법은 없어져야 마땅해요.”
백발이 돼도 앵커로 뛰겠다
-정치권에선 선거 때마다 영입하고 싶은 후보 1위로 꼽아왔는데, 정치에 도전해볼 생각은 없나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제 직업에 만족해요. 제 직업은 끝까지 앵커예요. 시청자가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백발이 되어서도 앵커를 하고 싶어요.”
-지난 3월 ‘백지연의 뉴스 Q’를 그만둔 후 방송계에서 은퇴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아요.
“지금은 사업 때문에 잠깐 쉬는 것뿐이에요. 내년 봄 개편 때 다시 방송 일을 할까 고려 중이죠. 오늘도 여러 방송사에서 프로그램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더라고요.”
백지연은 1987년부터 지금까지 앵커로서 새로운 역사를 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사 5개월 만에 메인 뉴스 앵커 자리에 올라 8년간 그 자리를 지킨 것도, 프리랜서로서 앵커를 한 것도, 자신의 이름을 건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한 것도 그가 처음이다.
-지금까지 앵커로서 누릴 수 있는 건 다 누려본 것 같은데요.
“굳이 욕심을 내자면 ‘앵커의 전설’이 되고 싶다고 할까요? 지난날을 돌아보면 앵커로서 평탄한 길을 걸어온 것만도 아니에요. 9시 뉴스를 진행할 때는 노조 파업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앵커로서 ‘사형선고’를 받은 적이 있어요. 당시 보도이사가 일간지를 통해 ‘이제 앵커 백지연은 없다’고 선언했죠. 몇 달 후 제가 가족들과 설악산에 여행을 가 있을 때 바로 그 보도이사로부터 9시 뉴스에 복귀해달라는 전화가 왔지요. ‘다시는 앵커를 못하게 하겠다고 보복성 인사를 하시더니 저를 복귀시키는 것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못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설악산에 머물던 며칠 동안 계속 전화가 오더군요. 그래서 결국 복귀 제의를 수락했죠. 그렇게 복귀한 경우도 처음이겠지만 제 발로 물러났다 복귀한 경우도 제 경우 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요.
장학금 받아서 영국 옥스퍼드대로 유학을 떠나면서 다시 복귀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들 왜 잘나갈 때 유학을 가냐고 했지만 그때는 무언가 재충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지요. 그래서 모두가 하고 싶어하는 9시 뉴스 앵커 자리에서 제 발로 나왔는데, 유학 갔다오자마자 다음날로 복귀했죠. 나름대로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그래도 뒤돌아보면 일하면서 축복을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에 열심히 사는 사람은 많잖아요. 그렇다고 다 누리는 건 아닌데 열심히 한 만큼 항상 열매가 충분했던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죠.”
-앞으로의 포부나 바람이 있다면?
“지금까지 그랬듯 힘차게 잘 사는 거요. 그리고 아들의 행복이요. 근데 계속 아들, 아들 해서 남편이 삐칠 것 같아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