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호

장애인 위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신발 만드는 사람, 남궁정부

“생명 같은 오른팔 잃고 나니 그들의 아픔이 보였어요”

  • 박은경 자유기고가 siren52@hanmail.net / 사진·박해윤 기자

    입력2005-11-10 16: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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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년 넘게 구두를 만들어온 기술자가 불의의 사고로 오른팔을 잃었다. 장애가 그를 옭아매고 세상은 등을 돌렸지만, ‘구두장이’는 주저앉지 않았다. 원서를 뒤지며 밤새워 족부의학을 공부하고, 입으로 물고 뜯는 연습을 거듭하며 장애인을 위한 특수 구두를 만들어냈다. 세창정형제화연구소 남궁정부 소장은 두 발로 걷기를 소망하는 세상의 모든 장애인에게 ‘희망의 증표’가 됐다.
    장애인 위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신발 만드는 사람, 남궁정부
    남궁정부(66)씨는 세상에 딱 한 켤레밖에 없는 구두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걸음걸이가 불편하거나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없는 장애인을 위해 지난 10년간 특수 구두를 만들어왔다. 서울의 강동구 천호동에 자리잡은 10평 남짓한 세창정형제화연구소. 남궁 소장의 하루는 이곳 매장에 기역(ㄱ)자로 들어앉은 진열장의 구두를 정리하면서 시작된다.

    족히 100켤레는 넘을 듯한 형형색색의 신발은 언뜻 여느 구두와 다름없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모양과 생김새가 다 다르다. 생김새만으로는 장애인이 신는 특수 구두 같아 보이지 않는 신발들. 그 속에서 간혹 눈에 띄는 한 짝의 신발, 이름과 제작날짜가 꼼꼼하게 적힌 구두의 표찰들이 갖가지 장애와 사연을 간직한 주인을 떠올리게 한다.

    전국에서 찾아오는 고객들로 한창 붐비는 오후. 구두 모양을 도안하는 책상과 고객의 발 상태를 측정하는 기계 사이를 바삐 오가는 남궁 소장의 모습엔 특별한 데가 있었다. 소매가 짧은 셔츠 밖으로 드러나야 할 오른팔이 보이지 않았다. 불의의 사고로 한 팔을 잃고 1급 장애인이 된 그는 또 다른 장애인을 위해 한 손으로 묵묵히 구두를 만들어온 것이다.

    “지금도 가끔 ‘환상통’이라 해서 잘려 나간 오른팔이 심하게 아플 때가 있습니다.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찾아와 눈물이 핑 돌 때도 있어요. 팔이 없어진 지 벌써 10년이 지났는데….”

    맘씨 좋은 할아버지처럼 푸근한 인상에 시종 보살 같은 웃음을 머금던 그의 표정이 이때만큼은 어두워졌다. 눈가엔 물기가 비쳤다.



    전동차에 깔린 오른팔

    1995년 11월의 어느 날 밤 11시경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도림역. 전동차에서 내린 그는 여느 날과 달리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이날은 그가 다니던 제화업체의 월급날이었다. 그러나 회사 사정이 어려워 직원들에게 월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궁 소장은 자신의 월급을 다른 직원에게 양보했다.

    쥐꼬리만한 월급에서 그나마 일부만 손에 쥔 그는 울적한 기분을 달래려고 동료들과 모처럼 술잔을 기울였다. 팍팍한 직장생활에서 누구나 한번쯤 겪는 그저 그런 하루를 무사히 마감하는가 싶던 순간, 엄청난 불행이 닥쳤다. 누군가에 떠밀려 술기운에 중심을 잃고 지하철 선로로 떨어진 그는 자신이 방금 내린 전동차에 깔려 오른팔을 잃고 말았다.

    “119 대원이 와서 저를 들것에 싣고 나갔죠. 피투성이로 뭉개진 오른팔이 덜렁덜렁하던 것만 기억납니다. 병원에 도착해 집 주소와 전호번호만 가르쳐주고 바로 의식을 잃었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깨어나니 훤하게 밝은 아침이었다. 너덜거리던 오른팔은 어깨 근처에서 잘려 나가 흔적도 없었다. 소매가 긴 환자복을 입고 있던 그는 무의식중에 오른팔이 있는 줄 알고 왼손으로 오른팔을 끌어당겼지만 헐렁한 옷자락만 잡힐 뿐이었다.

    아침에 멀쩡한 몸으로 출근한 남편이 졸지에 장애인이 돼 병상에 누워 있자 아내는 “왜 술을 마셨냐?”며 원망했다. 차마 회사 사정과 월급 때문이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하루 빨리 장애를 잊지 않으면 여생을 제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수술 열흘 만에 퇴원했다. 치료비로 200여 만원이 들었다. 수중에 모아놓은 돈은 없었지만 다행히 자녀가 모두 장성해 학비가 들지 않을 때였다.

    “아이들이 학교를 그만둬야 할 처지였다면 아마 절망해서 자살이라도 했을 겁니다.”

    오른팔을 잃기 전까지 남궁 소장은 40여 년간 제화기술자로 일해왔다. 한 때 하루 200켤레의 구두를 만들며 직접 제화점을 운영했던 그는 열두 살 때 사환으로 제화업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광복 후 부모님을 따라 일본에서 귀국했습니다. 그런데 전쟁통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누나를 돌보는 소년가장이 됐습니다. 그때야 목공, 양화, 철공, 이발 기술말고는 특별히 배울 것도 없었고 취직할 데도 많지 않았죠.”

    한 팔을 잃고 나자 본드를 묻혀가며 평생 익힌 기술이 무용지물이 될 처지였다. 그는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기가 갑갑해 별생각 없이 평소 절친했던 업계 동료들을 찾아 나섰다.

    “그중에 나를 무척 따르던 후배가 있었습니다. 자기 제화점을 운영하던 그 후배가 어느 날 이러는 거예요. ‘형님이 여기 오시는 건 하루 열 번이라도 좋은데, 제가 약주나 점심 대접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때 아, 내가 뭐라도 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얼굴엔 새삼 세상 인심을 본 것 같은 씁쓸한 표정이 스쳤다.

    공부와의 전쟁

    구두장이를 천직으로 알고 외길을 걸어온 장인에겐 생명과도 같은 오른팔을 잃었지만, 희망은 전혀 뜻밖의 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수(義手)를 맞추려고 서울 응암동의 의료보장구 매장에 드나들던 남궁 소장은 그곳에 진열된 장애아동 신발에 자꾸 눈길이 갔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신발에 관심을 갖는 그를 눈여겨보던 사장이 “장애인용 신발을 만들어보면 어떠냐”고 권했다.

    “자기 발에 맞는 신발을 구하기 힘든 장애인의 이야기를 듣자 의욕이 솟았습니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처음으로 장애아용 신발 한 켤레를 완성했는데, 아이의 담당의사가 잘 만들었다고 칭찬했습니다.”

    불구의 몸으로 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막막했던 그에게 희망의 서광이 비치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왼손을 오른손처럼 능숙하게 사용하도록 단련하는 일이었다. 이때부터 6개월 동안 피나는 노력이 시작됐다. 자음, 모음 철자 쓰기부터 왼손으로 밥 먹기까지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매달렸다.

    “이젠 한 손으로 하는 일에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국수 같은 면 음식을 먹을 때 쇠젓가락 대신 나무젓가락을 쓰는 것, 삼겹살을 쌈 싸먹을 때 좀 불편한 것말고는 특별히 못할 일이 없지요.”

    자기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종이에 주문받은 신발 도안을 그리고 즉석에서 끌로 쓱싹쓱싹 능숙하게 잘라냈다. 그 작업을 지켜보면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배운 기술을 썩히지 않고 장애인 신발을 만들겠다고 하자 “그것 해선 밥도 못 벌어 먹는다”며 말리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장애인이 되고 나서야 장애인이 당하는 고통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발에 맞는 신발이 없어 제대로 걷지 못하는 장애인들을 보니까 그 아픔이 얼마나 클지 안타까웠어요.”

    평생 배운 구두 만드는 기술로 장애인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어 보였다. 그러나 장애인 신발을 만드는 작업은 생각처럼 간단치 않았다.

    “구두 만드는 일이 겉으로는 쉬워 보여도 그 과정을 관찰하면 엄청난 과학이 숨어 있습니다. 특히 발 모양이 일반인과 다르고, 양다리의 길이도 다른 장애인의 구두는 훨씬 더 과학적이고 정확한 설계와 제작공정을 요구합니다. 1㎜의 오차도 생기면 안 되니까 우선 발에 대해 엄청나게 공부해야 합니다.”

    장애인 구두 제작은 미개척 분야였기에 축적된 기술이나 참고할 만한 자료가 전무한 실정이었다. 세상에 없는 구두를 만들기 위해 그의 손과 발이 돼준 사람은 둘째아들 한균(35)씨다. 한국외국어대 대학원에서 영어를 전공한 아들이 족부의학 관련 원서를 번역한 뒤 A4용지에 타이핑해서 30~40장씩 책처럼 묶어주면 남궁 소장은 그걸 읽으며 지식을 쌓아갔다.

    발 뼈와 근육의 신경해부도 등이 실린 원서는 아무리 번역해서 본다고 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마저 중퇴한 그는 말 그대로 ‘공부와의 전쟁’을 치렀다. 더구나 장애인 신발을 만들 때 사용되는 각종 특수 소재는 대부분 외국에서 생산되는 것들이었다.

    “관절, 골격, 근육, 발 모양, 발바닥 형태에 대해 하나하나 공부했습니다. 궁금한 건 대학병원 재활의학과와 정형외과 교수들을 찾아다니며 물어보고, 인터넷에서 신발 제작에 관한 자료도 샅샅이 수집했습니다. 당시 아들이 타이핑해준 자료가 빛깔이 바랜 채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의 연구소 한쪽 벽면에는 각종 질병과 사고로 뒤틀리고 절단되고 일그러진 각양각색의 발 모양을 촬영한 사진 100여 장이 걸려 있다. 그 한 장, 한 장이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귀한 자료라고 말하는 남궁 소장. 그는 발을 공부하고 장애인 신발을 만들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이 하늘의 별만큼이나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 생산량 여덟 켤레

    “장애인은 발목, 발가락 등 모든 관절에서 힘이 실리는 부분이 비장애인과 다릅니다. 또 같은 장애를 갖고 있어도 비정상적 형상이 제각기 다릅니다. 그래서 고객이 오면 제일 먼저 족관절을 살핍니다. 소아마비 환자의 경우 다리가 짧다고 뒤꿈치를 들고 걸으면 다리 길이가 점점 더 짧아집니다. 흔히 말하는 까치발이 시간이 갈수록 심해져요. 따라서 아킬레스건의 길이와 종아리 근육의 강직도가 달라집니다.”

    장애인 위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신발 만드는 사람, 남궁정부

    세창정형제화연구소의 진열대에 놓인 100컬레가 넘는 신발은 저마다 다른 장애와 사연을 지닌 주인을 떠올리게 한다.

    족부의학을 공부하고 본격적으로 신발 제작에 착수하자 당장 급한 게 족틀(목형)이었다. 일반 신발은 형태와 크기에 따라 규격화된 목형이 나와 있지만, 장애인 신발 목형은 사람에 따라 일일이 새로 만들어야 했다.

    “한 손이 없으니 입으로 물고 뜯고 하면서 수많은 족틀을 만들었습니다. 손, 입, 옷 가릴 것 없이 온통 본드가 묻어 난리도 아니었죠. 발의 장애를 동반하는 각각의 질병에 맞게 족틀을 응용해서 만들어야 하니 여간 머리를 써야 하는 게 아닙니다. 덕분에 아마 치매는 안 걸릴 겁니다.”

    발에 꼭 맞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신발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가령 소아마비로 보행에 불편을 겪는 고객이 방문하면 제일 먼저 컴퓨터 시스템으로 양발의 무게중심을 측정한다. 이는 구두 도안을 그리는 기초가 된다. 다음으로 고객의 양쪽 다리 길이와 발을 자세히 관찰해 특징을 파악하고 석고 본을 뜬다. 석고 본이 굳으면 이를 토대로 발목과 발바닥이 기운 정도를 여러 각도에서 잰다.

    이 과정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신발 만드는 과정에 들어간다. 먼저 신발 도안을 완성한 다음 목형에 코르크를 붙여 도안에 알맞은 목형을 만든다. 목형에 가죽을 붙인 다음 이리저리 늘여 못을 박고 형태가 만들어지면 바느질을 하고 중창, 밑창을 단다. 간단한 과정 같지만 공정 하나에 수십, 수백 번의 손길이 간다.

    신발 하나가 완성되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5일 남짓. 연구소엔 패턴사인 그를 포함해 재봉사, 저부(밑창) 기술자, 속창 기술자 등 12명의 직원이 있다. 소아마비, 당뇨, 류머티스 관절염, 무지외반증, 기형 발가락, 발 절단, 족저근막염, 평발 등으로 장애를 겪는 사람을 위한 특수화와 특수 깔창을 만든다. 하루에 생산하는 구두는 평균 여덟 켤레. 하루 200~300켤레를 만들 수 있는 일반 신발에 비해 턱없이 적은 수량이다.

    “일반 기성화는 조립이 가능해 하루 200켤레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수화는 1㎜의 오차가 생겨도 장애인에게 큰 불편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훨씬 정교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시간이 걸려도 어쩔 수 없고, 더욱 정성을 쏟아야죠.”

    편안함뿐만 아니라 디자인과 색상에도 신경 쓰는 고객이 많다. 신발이 얇다, 밑창을 두껍게 해달라, 모양이 뭉툭한데 날렵하게 해달라는 등의 까다로운 요구는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지만, 옷과 달리 신발은 시침질하고 미리 신어볼 수 없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 완성된 신발이라 해도 고객이 신어본 다음 조금이라도 불편해하면 가차 없이 뜯고 새로 만든다.

    더 예쁘게, 더 편하게

    번거로움과 이익을 생각하면 적당히 넘어갈 수도 있건만, 그는 신발을 찾으러온 고객을 상대로 어디가 어떻게 불편한지 몇 번이고 확인한다. 어차피 큰돈 벌자고 시작한 일도 아니고, 까다롭게 요구해야 자신에게 꼭 맞는 좋은 신발이 만들어질 수 있다며 오히려 고객들을 부추긴다.

    “장애인이라고 예쁜 신을 신고 싶은 욕심이 없는 게 아닙니다. ‘치마 입고 걷는 게 소원이니 예쁜 구두를 만들어달라’는 것이 신발 맞추러온 고객들의 한결같은 부탁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일그러지고 뒤틀린 발 모양이라도 신발 안쪽에 쿠션을 덧대서 겉은 매끈해 보이게 만듭니다. 또 양쪽 발 모양이 달라도 신발 모양은 똑같게 만들어요. 그래야 이상해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고 1때부터 류머티스 관절염을 앓고 있다는 40대 초반 여성이 매장을 찾았다. 남궁 소장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 여성은 어릴 때부터 신발 욕심이 많았다고 했다.

    “발이 뒤틀리고 아프지만 신발 욕심은 많아요. 병을 앓는 동안 이멜다 부럽지 않게 수많은 신발을 샀어요. 하지만 내가 신을 순 없으니까 남에게 주거나 그냥 버리고…. 그렇게 날린 돈이 어마어마해요. 여기서 신발을 맞춰 신은 지는 7년쯤 돼요. 진작 이런 곳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버지’는 신발을 정말 예쁘고 편하게 만들어주세요.”

    남궁 소장이 가장 가슴 아플 때는 8~9㎝짜리 장애아동용 신발을 만들 때다. 평생 특수 신발을 신고 불편한 몸으로 살아가야 할 아이가 안쓰럽기 때문이다. 그는 비싼 돈을 주고 맞춤 제작한 의수를 착용하지 않는다. 어깨에 단단히 고정되지 않아 의수가 옷소매 안에서 덜렁거리기 때문이다. 별 쓸모도 없이 보기에 흉하기만 한 의수. 그래서 더 예쁜, 더 편한 구두를 만들어 장애인에게 신겨주고 싶은 것이 그의 바람이다.

    그런 노력 끝에 그가 만든 신발은 지난해 ‘이 시대 좋은 디자인상’을 수상했고, 예술의전당에 전시되는 감격을 누렸다. 2000년에는 장애인 복지향상에 일조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동부가 선정한 신지식인이 됐다.

    그해 미국 롱비치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세계 장애인용품 전시회(Abilities Expo)’에 참가한 것은 그에게 또 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세계 각국의 장애인 신발이 다 모인다고 생각하니, 처음엔 내가 뭘 보여줄 수 있을까 하고 망설였습니다. 일단 질병 종류에 따라 각각 모양이 다른 구두 스무 켤레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 독일을 제외하고 선진국에서 만드는 장애인 신발도 기존 신발에 높낮이만 맞춰주는 수준이었습니다. 팸플릿이 200장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전시 하루 만에 동이 나서 나중엔 복사를 해 나눠줘야 했습니다.”

    그는 엑스포에서 뜻밖의 수확을 얻었다. 전시회 기간 중 미국인으로부터 구두 10켤레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받은 것. 그때의 감격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세계에서 감사편지 답지

    그의 고객은 미국뿐 아니라 일본, 나이지리아 등 세계 각국에 퍼져 있다. 불편한 몸으로 전국 각지에서 상경하는 고객도 수없이 많다. 지금껏 그가 만든 신발을 신은 장애인은 8000여 명. 한 사람이 두세 켤레를 주문한 것을 감안하면 지난 10년 동안 그가 만든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신발’은 1만여 족을 헤아린다. 무수한 고객이 보내오는 감사편지는 장애를 딛고 일어선 남궁 소장에게 무엇보다 큰 보람을 안겨준다.

    “당신이 제게 만들어주신 아주 예쁘고 편한 신발 덕분에 저는 행복합니다. 감사드립니다. 나이지리아에서 에스더 올림.”

    “수고가 아주 크셨습니다. 신발 속에는 소장님의 정성과 기술과 노력과 고생이 들어 있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도쿄에서 가네가와 이치로.”

    “류머티스 관절염 말기 환자인 저는 아픈 발을 끌고 다니며 고통스러울 때마다 단 한 번만이라도 편한 신발을 신고 걸어봤으면 했습니다. 2급 중증장애인의 감히 바랄 수 없는 꿈을 이뤄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이○○.”

    “할아버지, 옛날에 저한테 신발 만들어주셨죠. 감사합니다. 구두 만드느라 힘드시죠. 저도 할아버지처럼 구두 만들고 화가도 해서 돈 많이 벌어 맛있는 것 사드릴게요. 사랑해요. 오래오래 사세요. 세진 올림.”

    두 다리가 없는 아홉 살 소년 세진이는 의족에 남궁 소장이 맞춰준 구두를 신고 지난해 로키산맥 등정에 성공했다.

    그에 대한 고객들의 신뢰와 감사는 편지로 끝나지 않았다. 10평 남짓한 공간을 매장과 신발 제작공장으로 나눠 쓰느라 옹색했던 연구소가 장애인 고객들의 도움을 받아 두 배로 커졌다. 지난 3월 매장 뒤에 있는 건물 2층에 세 들어 공장을 따로 분리했는데 단골손님들이 십시일반으로 3000만원을 모아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건물 주인도 사정을 알고 세를 깎아줬다.

    “단골손님들이 ‘평생 이 연구소에서 신발을 맞춰 신어야 하는데 없어지면 안 된다’면서 돈을 모아주었습니다. 고맙고 감사한 일이죠.”

    그는 고마움의 표시를 다른 장애인들을 통해 대신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서울 정동교회에서 합동 결혼식을 올린 네 쌍의 장애인 예비부부에게 신발 여덟 켤레를 무료로 만들어줬다. 그 가운데는 비장애인도 있지만 남궁 소장은 좋은 날 모두에게 새 구두를 신겨주고 싶었다고 했다.

    사정이 여의치 않은 장애인에게는 신발값을 깎아주거나 거저 줄 때도 많다. 고객 중에는 신발을 맞춰놓고 찾아가지 않는 이가 종종 있다. “곧 가지러 오겠다”면서 끝내 나타나지 않는 사람은 십중팔구 돈이 없는 사람이다.

    “그럴 땐 참 안타깝습니다. 신발은 꼭 필요해서 맞췄는데, 돈 때문에 찾을 생각을 못하는 거지요. 사정을 잘 아니까 택배로 부쳐주고 돈은 나중에 생기면 갚으라고 합니다.”

    돈이 없어 맞춤 신발을 신지 못하는 장애인들에게 지난 4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1999년 의수·의족 같은 의료보장구가 의료보험 적용대상으로 지정될 때 제외된 특수제화가 마침내 의료보험 적용 대상이 된 것. 누구보다 장애인의 속사정을 잘 알던 남궁 소장은 이를 위해 전국 각지의 고객을 대상으로 서명운동을 펼쳐 8000여 명의 동의를 받아냈다.

    뿐만 아니라 보장구 수가조정위원회 위원 중 한 사람이 자신의 고객임을 알고, 그를 찾아가 설득을 거듭했다.

    “특수제화가 의료보험 적용 대상이 됐지만 신발 가격에 비해 보험수가가 너무 낮게 책정된 것, 2년에 한 켤레만 보험적용을 받을 수 있게 한 것은 여전히 아쉽습니다. 비장애인은 1년에 몇 켤레씩 신발을 사 신지 않습니까. 신발의 중창과 밑창을 만들 때 들어가는 10여 종의 특수소재는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아 독일에서 전량 수입합니다. 그 때문에 장애인 신발의 한 켤레 가격이 30만~40만원에 달합니다. 그래도 보험 덕분에 그 절반 가격에 신발을 맞출 수 있으니 다행스럽지요.”

    가난한 장애인을 위해

    장애인 위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신발 만드는 사람, 남궁정부

    남궁 소장은 수년간 단련한 왼손으로 능숙하게 신발 도안을 그리고 잘라낸다.

    가난한 장애인을 위해서라면 공짜 신발도 만들어주던 그가 서명운동에 적극 뛰어든 계기가 있었다. 어느 날 남루한 차림의 40대 초반 부부가 광주에서 출발해 아침 일찍 그의 연구소로 찾아왔다. 남자는 밖에서 기다렸고 여자가 대신 들어와 남궁 소장에게 이것저것 질문하더니 조심스레 신발 가격을 물어왔다. 남편과 상의하고 오겠다며 매장을 나간 여자와 남자는 그 길로 볼 수가 없었다. 남궁 소장은 오랫동안 그 일이 마음에 걸렸다. 소문을 듣고 불편한 몸으로 물어 물어 그 먼 길을 찾아왔다가 그냥 돌아갔을 부부를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아렸다.

    제 각각의 사연을 품은 신발만큼이나 주인의 사연도 절절하다. 어느 날 고관절 질환으로 한쪽 다리가 4㎝가량 짧은 60세 남자가 매장에 들러 구두를 맞췄다. 그런데 찾아갈 날짜가 훨씬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가족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손님이 신발을 맞춘 이틀 후 돌아가셨다고 해요. 고인이 우리 신발을 무척이나 신고 싶어했다면서 삼오제 때 태워줄 수 있게 택배로 신발을 보내달라는데,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차마 신발값은 받을 수 없었습니다.”

    하반신 마비로 제대로 설 수 없었던 50대 고객은 새 신발을 찾아간 며칠 뒤 숨을 거뒀다. 그후 가족이 신발을 들고 매장을 찾아와 꼭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주라며 놓고 갔다. 맞춤이라 딴 사람 발에는 맞지 않는 쓸모없는 신발이지만 남궁 소장은 그 마음이 고마워서 아무 말 없이 신발을 받았다.

    “가슴 아픈 사연도 많지만 믿기 어려운 기적도 있습니다. 몸이 굳어서 손을 못 쓰고 팔다리가 왜소한 여자 손님 한 분이 휠체어를 타고 와서 우리 신발을 맞춰 갔지요. 그러던 어느 날 멀쩡하게 걸어 들어와 또 다른 신발을 맞추고 간 적이 있습니다. 양쪽 목발을 사용하다 목발 없이 걷게 된 사람도 있어요.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사람도 신발만 제대로 맞으면 감쪽같이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런 보람이 있기에 신발을 만들지요. 죽을 때까지 손에서 일을 놓지 않을 생각입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남궁 소장에겐 고달픔과 서러움, 고생이 적지 않았다. 단돈 100만원으로 처남 집 차고를 빌려 사업을 시작한 초창기엔 사업이랄 것도 없이 옹색하고 초라했다. 어느 날인가는 깜빡 잊고 수돗물을 틀어놓았다가 차고가 온통 물에 잠기는 바람에 가죽이며 본드 등 신발 재료를 몽땅 날렸다.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차고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면 관련 법에 저촉된다는 말을 듣고 옆집의 작은 점포를 얻어 이사했지만 그곳의 생활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살림집을 겸해야 해서 연탄 아궁이를 보일러로 고치고 가게 출입문을 새로 달았더니 주인이 허락 없이 맘대로 고쳤다고 잔소리를 했습니다. 또 임신한 딸에게 본드 냄새가 좋지 않다며 내쫓는 바람에 1년이 채 안 돼서 또 이사를 해야 했죠.”

    세 가지 꿈

    가난한 셋방살이 설움은 주변의 외면과 장애로 인한 불편에 비하면 수월하고 견딜 만한 일이었다. 처음 장애인 구두를 만들겠다고 나섰을 무렵엔 일거리라곤 병원을 통해 어쩌다 들어오는 한두 건의 주문이 고작이었다. 여기에 다섯 식구의 생계를 내맡길 수 없어 과거 제화점을 할 때 거래하던 공장을 찾아 도움을 청했다. 신발제작 하청을 부탁하자 돌아온 반응은 싸늘했다. 일감을 얻기는커녕 ‘제까짓 게 그 몸으로 해봐야 얼마나 하겠냐’고 무시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어렵사리 주문받은 신발을 만들 땐 매일 재료를 사러 다녔습니다. 돈은 없고 외상은 하기 싫고…. 그래서 필요한 재료를 그날그날 사야 했지요. 비 오는 날이 제일 고역이었습니다. 가죽을 비롯해 무거운 신발 재료들을 한 손으로 들어야 하는 데다 우산을 쓸 손도 없으니 비를 고스란히 맞고 다녔어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납디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일거리가 늘어났고 직원도 두게 됐지만, 그가 외출한 사이 직원 두 명이 그동안 제작해둔 신발 패턴과 고객명단을 빼내 사라졌다. 10개월가량 그의 밑에서 일하며 장애인 신발 제작 기법을 익힌 그들은 후에 들리는 소식으로 제화점을 차렸다고 한다. 타고난 천성이 낙천적이지 않았다면 사고로 오른팔을 잃은 이후 지금까지 꿋꿋이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남궁 소장. 그는 자신이 장애인이 되지 않았다면 절대 생각지 못했을 꿈 세 가지를 소중히 품고 있다.

    하나는 해외지사 설립이다. 이를 위해 그는 내년쯤 미국을 다녀올 생각이다. 미국 LA에 지사를 설립해 그곳 장애인에게도 편한 신발을 제공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두 번째 꿈은 장애인 제화 기능공을 키우는 양성소를 만드는 것.

    “건강한 몸으로 살다 어느 날 사고로 장애인이 된 사람은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실을 바로 보고 자신의 처지를 냉정히 깨닫지 않으면 평생을 폐인으로 지낼 수밖에 없어요. 그걸 깰 돌파구 중 하나가 기술 습득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이라면 남다른 사명감을 갖고 비슷한 처지의 장애인 구두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기술을 갖고 생계가 해결되면 자립하기도 쉬울 테지요.”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구두장이’이자 ‘장인’으로 살아온 그는 자신의 기술을 장애인 자립을 위해 쏟고 싶어했다. 기술을 전수받은 제자들이 전국 각 도마다 퍼져나가 장애인 신발을 만드는 제화점을 열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마지막 바람이자 꿈이다.

    “걱정이 있다면 요즘은 장애인들도 3D 업종을 기피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직원 중에도 장애인이 여섯 명 있었는데 지금은 두 명만 남았습니다. 제작 공정마다 전문 기술자가 필요하고 한 가지 기술을 습득하려면 길게는 수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는데, 5∼6개월을 못 버텨요. 어렵고 힘들어도 꾸준히 하다 보면 돈도 모을 수 있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데 그걸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장애인이 되기 전 제화점 사장으로 있을 때, 남궁 소장은 ‘어떻게 하면 더 세련되고 예쁜 구두를 만들 수 있을까’에만 열의를 쏟았다. 장애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평생 장애인 구두를 만들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세창정형제화연구소 홈페이지에는 그의 인사말이 떠 있다.

    “이 세상의 단 한 사람을 위해 구두를 짓는 ‘구두장이’의 장인정신으로 양발을 땅에 딛고 걸을 수 없었던 장애인에게 편안한 구두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휠체어, 목발을 대신한 구두

    세련되고 예쁘지 않아도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구두를 만들어 장애인의 휠체어와 목발을 대신하고 싶은 것이 남궁 소장의 간절한 소망이다.

    장애를 극복하고 국내에서 독보적인 기술자로 성공한 그는 이제 기쁜 마음으로 구두를 만들고 있다. 열두 살 소년가장이 밥벌이에 떠밀려 시작한 일이 구두장이였다면, 지금 그는 스스로 선택한 일을 천직으로 삼고 있다. 곁에는 일찍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제자로 뛰어든 막내아들 한협(34)씨가 있어 든든하다.

    “아들에게 구두 제작을 맡길 수 있게 되면, 국내에 전무한 정형·교정 제화 교과서와 학술자료를 만드는 데 노력을 쏟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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