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호

‘나노공학 창시자’ 에릭 드렉슬러

“제조업 강국 한국, 나노과학에서 획기적 성과 거둘 것”

  •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parker49@donga.com

    입력2006-10-10 09: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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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년 나노기술 보편화…암세포 제거하는 분자기계 나온다
    • 미래 지구촌 인구 절반은 나노바이오와 두뇌공학으로 먹고 산다
    • 부동산에 정신 팔린 미국보다 제조업 뛰어난 한국이 희망적
    • 아시아인은 이종분야 지식 교배능력 키워야
    ‘나노공학 창시자’ 에릭 드렉슬러

    드렉슬러 박사는 “지구 온난화를 유발하는 이산화탄소를 분리해서 없앨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100여 개의 원소로 이뤄져 있다. 이 원자들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천지를 창조할 수도 있고, 해체할 수도 있다. 예컨대 탄소(C)라는 원자를 어떻게 배열하는가에 따라 값비싼 다이아몬드가 되기도 하고, 시커먼 숯덩어리가 되기도 한다. 다이아몬드를 만들어보겠다는 ‘당돌한’ 사람들. 과거엔 연금술사로 폄하됐지만 지금은 어엿한 나노공학자로 대접받고 있다.

    한 사람이 세상을 움직인다

    천지창조의 비밀을 푸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직접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나노공학의 창시자는 에릭 드렉슬러(K. Eric Drexler·51) 박사로 알려져 있다. 그가 1981년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엔지니어링을 전공하던 대학원생 시절, 미국 과학아카데미 회보에 기고한 ‘분자공학’ 논문이 나노의 시대를 알리는 효시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드렉슬러 박사는 5년 뒤 ‘창조의 엔진’이란 책을 펴냈고, 일약 세계 과학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새 시대를 연 선구자답게 그는 1988년 스탠퍼드대에서 세계 최초로 나노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MIT에선 나노기술 연구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1992년 미국 상원위원회는 그를 초청해 나노과학에 대해 강연을 들었으며, 8년 뒤 클린턴 행정부는 5억달러를 투입하는 나노기술계획(NNI)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 뒤를 이어 영국,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는 총 1조530억원(2004년)의 나노기술 연구개발비를 책정했고, 일본도 1조원이 소요되는 개발계획을 세웠다. 한 사람의 창의적인 힘이 세계를 움직인 것이다.

    ‘나노’란 10억분의 1을 뜻한다. 숫자로는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어도 실제 ‘1나노미터’가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흔히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 원자의 크기가 10분의 1 나노미터다. 따라서 나노기술이란 원자 단위의 물질을 조정해 물건을 제조하는 것쯤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작은 원자를 움직일 수 있다는 걸까. 1990년대부터 나노과학에 대해 수많은 글을 발표한 이인식 과학문화연구소장은 ‘나노기술이 미래를 바꾼다’는 책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981년 주사 터널링 현미경(STM)이 발명되면서 인류는 원자나 분자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됐다. STM엔 끝이 매우 예리한 탐침이 달려 있다. 이 탐침을 물질 표면에 거의 닿을 정도로 대고 둘 사이에 전압을 걸어준다. 바늘 끝이 움직이면서 표면을 주사하는 동안에 발생하는 전류의 변화를 측정하면 표면의 구조를 나노미터 수준으로 밝혀낼 수 있다.

    이를 통해 분자나 원자를 살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을 변형시킬 수 있음도 확인됐다. 마치 개가 양떼를 몰 듯 분자를 몰 수 있고, 원하는 곳에 갖다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STM의 한계는 한 번에 한 개의 분자만 이동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이용해 물건을 조립하는 데는 너무나 긴 시간이 소요된다. 그렇다면 드렉슬러 박사는 어떻게 하루아침에 수십억개의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일까. 여기에 그만의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빛을 발한다. 다음은 이 소장의 계속되는 설명이다.

    “자연에 답이 있다”

    “고등동물의 세포는 단백질 제조 회사에 비유할 수 있다. 단백질은 20종류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된 분자기계다. 아미노산의 배열을 결정하는 것은 디옥시리보 핵산(DNA)이 갖고 있는 유전정보다. 유전정보에 따라 아미노산이란 원료로 단백질을 만드는 공장을 리보솜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드렉슬러 박사가 말하는 나노기계인 셈이다.

    만일 리보솜을 인간의 필요에 맞게 프로그래밍이 가능하다면 단백질을 자유자재로 합성할 수 있을 것이다. 드렉슬러는 이런 나노기계를 ‘어셈블러’라고 이름지었다. 그는 수많은 어셈블러가 함께 작업해 제품을 생산하는 미래의 제조방식을 ‘분자제조’라고 명명했다.”

    나노기계를 만들어놓으면 이들이 알아서 원자나 분자를 움직여 물건을 만들어낸다는 방식이 드렉슬러 박사가 창안한 나노기술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개념은 과학계에 숱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드렉슬러는 몽상가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고, 나노기술을 얻기 위해 악마와 협상했다는 ‘인신공격성’ 조롱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의 아이디어는 실현 가능하다는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최근 일본 도쿄대는 분자기계 두 개를 결합시키는 데 성공했다. 나노미터의 스케일에서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도쿄대는 다음 단계로 여러 개의 분자기계를 결합시켜 더 큰 기계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나노로봇 개발의 대장정에 발을 들여놓은 것으로 평가된다.

    드렉슬러 박사가 ‘농담처럼’ 제안한 치료용 나노로봇도 실제 등장할지 모른다. 그는 나노로봇을 사람의 몸속에 집어넣으면 잠수함처럼 혈류를 헤쳐 나가 바이러스를 박멸하거나, 손상된 세포를 수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 아이디어에 대해 나노의학의 선구자인 로버트 프리타스는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인간의 적혈구 세포의 기능을 갖춘 나노로봇(호흡세포)을 몸에 주입하면 15분 동안 한 번도 숨을 쉬지 않고 역주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사람 세포에서 노폐물을 청소하는 로봇을 설계한 바 있다.

    세계 각국의 나노과학 전문가들도 나노기술이 그려내는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예컨대 국회도서관의 모든 정보를 바늘 끝에 수록하는 것은 20년 쯤 뒤의 일이라고 예상한다. 10년 뒤엔 나노기술로 암세포를 제거할 수 있고, 그보다 좀더 가까운 미래엔 인체의 장기(臟器) 중 일부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아직은 꿈이지만 그리 멀지 않은 꿈이라는 얘기다.

    9월6일 유엔미래포럼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드렉슬러 박사는 현재 ‘나노렉스’라는 회사의 기술고문을 맡고 있다. 나노렉스는 분자기계의 디자인과 시뮬레이션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곳이다. 그는 “지금 시점에 한국을 방문한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며 “미국에서 먼저 나노기술을 제안했지만, 이 분야의 획기적인 변화는 한국처럼 제조업이 강한 국가에서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나노기계도 제조기술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100만분의 1초보다 빠르다

    ▼ ‘나노과학’ 하면 ‘에릭 드렉슬러’를 떠올릴 만큼 이 분야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개척자’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예전에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웃음). 미국 과학아카데미 회보에 세계 최초로 ‘나노 시스템’에 대한 논문을 소개한 것이 벌써 25년 전이죠? 그 논문은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공대생 시절, 나는 제조기술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지 궁금했어요. 궁극적인 기계는 어떤 형태가 될 것이냐는 의문이었죠. 물리학이 미래의 제조기술을 상상하는 데 어떤 힌트를 줄 수 있는지 연구했어요.

    자료를 찾다보니 1959년 리처드 파인만(1918∼88, 1965년 양자전기역학 이론으로 노벨 물리학상 수상)이 처음으로 분자기계를 만들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반짝하고 제시했더군요.

    나는 주로 생물학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모든 제조기술은 단순하게 말하면 원자를 어떻게 배열할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대부분은 원자를 조잡하게 배열합니다. 그런데 자연을 살펴보니까, 세포는 유전인자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단백질을 합성하는 생산 시스템(리보솜)을 갖고 있더라고요. 리보솜을 생산기계라고 치고, 이걸 만들어내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생각했죠.

    산업용 로봇이 미완성 제품 앞에 서 있다고 상상해보죠. 컨베이어 벨트는 로봇 팔에 부품을 공급하겠죠. 벨트가 한 단계씩 나아가면서 로봇은 부속품을 제품에 끼우고, 마침내 제품은 완성됩니다. 이를 나노기술에 적용해볼까요? 모든 것은 나노미터로 측정되고, 이동하는 부품은 원자가 될 겁니다. 화학적 반응을 통해 부품이 제품에 끼워져 원하는 제품이 나옵니다. 각각의 동작은 100만분의 1초보다 빠르고, 100만분의 1m보다 작게 움직입니다. 빠르고 정확하죠. 이게 미래의 기계가 될 거라고 확신했어요.”

    ‘나노공학 창시자’ 에릭 드렉슬러
    ▼ 리처드 파인만 박사와는 교류가 있었습니까?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1981년 내가 처음으로 나노기술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기 직전에 집에서 파티를 열었는데, 느닷없이 파인만 박사가 방문했어요. 깜짝 놀랐죠. 나중에 안 사실인데, 내가 파인만 박사의 아들을 초청했더군요. 그가 파티에 아버지를 모시고 온 겁니다. 파인만 박사는 벌써 내 논문을 읽었다고 했어요. 아직 발표도 하지 않은 건데, 초고를 보셨던 모양이에요. 그렇게 만났다가 헤어졌어요.”

    ▼ 논문 발표 후 의미 있는 변화가 많았을 텐데, 가장 기억에 남는 변화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일례로 단백질공학에서 변화가 있었죠. 나노미터 스케일의 기계로 수많은 원자를 움직여 우리의 몸을 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왔어요. 인류는 DNA를 분석해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우리가 직접 DNA를 만들 수도 있는 거죠. 미국과학기술재단은 2015년에 나노기술을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미래 지구촌 인구의 절반이 나노바이오공학과 두뇌공학으로 먹고산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어요.

    ▼ 나노과학이 펼치는 미래의 세상이 궁금한데요.

    “가까운 미래에 지금보다 50배나 강하면서도 아주 가벼운, 비용도 적게 드는 강철을 만들 수 있어요. 에너지를 거의 소모하지 않는 컴퓨터도 만들 수 있고요. 그 컴퓨터는 1억만개의 처리장치를 갖추게 될 겁니다.

    혁신적인 의료기기가 나올 수도 있어요. 예컨대 분자단위의 기계가 몸 속에 침투해 암세포를 구별해내고, 부작용 없이 깨끗하게 제거합니다. 적은 비용으로 환경친화적이면서도 에너지 효율이 높은 제품을 대량 생산할 수 있죠. ”

    지구 온난화 현상을 유발하는 이산화탄소(CO2)도 없앨 수 있어요. 탄소(C)와 산소(O2)를 분리할 수 있죠. 산소는 공기중으로 되돌려 보내고, 탄소는 액체나 고체로 만들어 땅에 묻으면 됩니다. 산소와 탄소를 분리하는 데 막대한 전력이 필요하지만 10년 뒤엔 태양열로 할 수 있을 거예요.”

    미국 정부의 실수

    ▼ 나노기술의 응용분야를 보니 화장품이나 시멘트 가루처럼 극미세한 물질을 만들어내는 것도 있던데요.

    “우리가 나노기술이라고 부르는 것엔 두 가지 분야가 있어요. 내가 주장한 분자기계 제조분야가 있고, 말씀하신 대로 미세한 물질을 만들어내는 변형된 분야가 있어요. 이 때문에 나노기술이 뭔지 혼란을 겪고 있죠. 미세한 물질을 만들어내는 것은 나노기술이 아니에요. 마이크론 기술이죠. 그냥 아주 작은 물질을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 나노기술로 미국에서 상장한 대표적인 기업은 어디입니까.

    “아직은 없어요. 오히려 대학에서 나노기술을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죠. 칼텍이나 MIT, 라이스 대학이 나노기술을 응용해 DNA 연구 등을 하고 있어요.”

    ▼ 미국의 힘은 거대한 국가전략을 만들고, 정치인을 끌어들여 그 전략을 강화해 하나의 거대한 스토리로 압축시키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드렉슬러 박사께서도 1992년 미국 상원의 소위원회에서 앨 고어 의원과 열띤 토론을 했고, 그것이 2000년 열매를 맺어 클린턴 행정부가 나노기술계획(NNI)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어떻게 정치인을 설득했고, 국가 전략으로 채택하도록 했는지 궁금합니다.

    “내가 한 것은 소설이나 영화로 알려진 나노기술이 실제 무엇인지 알려준 것밖에 없어요. 급진적인 생산 시스템이 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소개한 것에 불과합니다. 사실 몇몇 과학자가 정부에서 연구자금을 지원받아 내가 소개한 것과는 전혀 다른 생산물을 내놓았죠. 아까 말했듯이 이른바 마이크론 기술이라고 하는 먼지처럼 미세한 화장품, 시멘트 등을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한 거예요. 미국 정부는 내가 제시한 아이디어와 아류(亞流)의 나노기술을 구별하지 못한 채 자금을 지원했어요.”

    ▼ 인류 앞에 새로운 개념을 내놓는 것은 영광인 동시에 ‘몽상가’로 격하될 수 있는 위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노기술의 권위자인 미국의 리처드 스몰리(1996년 노벨 화학상 수상, 2005년 타계) 교수가 “드렉슬러의 어셈블러는 과학과 환상의 세계에 양다리를 걸친 꿈 같은 얘기”라고 말한 적도 있다죠? 이에 대해 드렉슬러 박사께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스몰리가 내 아이디어를 이해하지 못한 거예요. 그가 했다는 유명한 말이 생각나는데, ‘당신은 손가락으로 원자를 끄집어내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손가락을 써서 원자를 움직일 수 있다고 얘기한 사람은 하나도 없어도. 나도 마찬가지고요. 과학자들끼리도 서로의 아이디어를 오해해 종종 거대한 논쟁이 벌어지곤 합니다. 이 경우가 딱 그랬죠.

    논쟁의 결과요? 많은 사람이 나를 지지했어요. 스몰리는 그 후 침묵했어요. 그러나 스몰리를 추종하는 일부 과학자들은 아직도 내 생각이 틀렸다고 합니다. 미국 정부 자금을 받아 연구한 그들 입에선 당연히 내 의견을 묵살하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이는 그들의 실수이자, 미국 정부의 실수이기도 합니다.”

    ▼ 여전히 스스로가 옳다고 믿습니까.

    “학자는 어떤 방법이 더 효율적인지 탐구하고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한 것은 가능성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하고 분석한 겁니다. 현재 물리학에서 가능한 것을 증명한 셈이죠. 나는 ‘이렇게 하면 더 잘 만들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어요.”

    나노로봇이 인간을 공격해?

    ▼ 1959년 파인만 박사가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나노과학에 대해 강연할 때, 한 변이 0.4mm인 정육면체 크기의 모터를 최초로 만드는 사람에게 상금 1000달러를 건 일화는 유명합니다. 만약 드렉슬러 박사께서 똑같은 상금을 건다면 어떤 사람에게 주고 싶습니까.

    “한 사람에게만 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이젠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일해야 합니다. 나노과학만 하더라도 분자공학, 화학, 분자생물학, 엔지니어링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있어요. 한국의 과학자나 공학도들도 활발하게 교류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과학적인 관점에서만 보지 말고, 엔지니어링의 관점에서 보면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야죠. 그래야 미래를 열 수 있어요.”

    ▼ 한국 정부는 2001년부터 2010년까지 12억4000만달러를 투자해 나노과학을 육성하기로 했습니다. 한 가지 걱정스러운 점은 미국이 선도하는 나노과학 분야의 시장에서 한국이 뒤늦게 따라가봤자 미국에 기술 로열티만 지급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겁니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리고 한국이 나노기술의 어떤 분야를 전략적으로 육성해야 하는지 조언도 해주시죠.

    “확신하건대 나노과학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은 미국에서 나오지 않을 겁니다. 미국은 스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요. 화장품 만들고 돈 버는 데만 신경 쓰고 있지, 새로운 제조기술을 개발하는 데는 관심이 없어요. 미국의 제조업 중 80% 이상이 해외로 이전했어요. 이 때문에 미국은 삼성에서 만든 칩을 쓰고, 대만에서 만든 컴퓨터를 사용하죠. 고작 소프트웨어나 부동산 가격에만 관심이 있거나 서로 고소하는 일에 정력을 낭비하고 있어요. 그러나 제조기술이 발달한 한국은 미국과 달라요. 제조업에 대한 이해가 풍부한 한국이 나노기술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가능성이 충분해요.”

    ▼ 영화 ‘쥐라기 공원’의 작가 마이클 클라이튼이 나노과학을 소재로 ‘먹이(Prey)’라는 제목의 새 소설을 발표했다고 들었습니다. 자기 증식하는 나노로봇이 진화해 무리를 이뤄 인간과 동물을 습격한다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나노로봇의 자기 증식 능력 때문에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던데요. 이를 막을 수 있는 장치는 뭡니까.

    “그분의 생각은 완전히 소설이에요. 근본적으로 나노기술을 이해하지 못한 거죠. 나노기술과 나노로봇은 전혀 연관이 없어요. 나노기술은 제조기술에 관한 겁니다. 예컨대 컨베이어벨트가 어떻게 스스로 생각하고, 인간을 공격한다는 말입니까.”

    ▼ 예전에 직접 창업한 ‘포사이트(www.foresight.org)’라는 웹사이트에 나노기술 연구의 지침을 발표한 적이 있죠? 나노기술이 악용되지 않도록 암호화해야 한다는 등의 지침을 써놓은 것은 뭔가 걱정스러운 점이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포사이트는 내가 창업자로 관여한 적은 있지만, 지금은 완전히 손을 뗐어요. 더 이상 조언도 하지 않고요. 물론 걱정스러운 점은 있습니다. 누군가 나노기술을 습득한 뒤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우려죠.

    예를 들면 이 세상에 전쟁이 나지 않는 이유가 이쪽이나 저쪽 모두 비슷한 군사력을 갖고 있기 때문 아닙니까. 그런데 어느 한쪽이 막강해지면 그땐 게임이 안 됩니다. 나노기술을 통해 새롭고 파괴적인 기술을 습득한 쪽이 인류를 향해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세계가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월등한 기술을 갖고 있으면 남을 조종하려고 하잖아요. 그게 나의 유일한 걱정거리죠.

    나노기술이 발달하면 사진기자가 들고 있는 카메라나 기자가 탁자 위에 놓은 녹음기 같은 것은 얼마든지 만들어서 모든 세상 사람에게 저렴하게 보급할 수 있어요. 그러면 테러리스트나 범죄자들을 적발해 위험을 미리 막을 수 있을 겁니다.

    반면 카메라나 녹음기는 사람의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어요. 정부가 이런 기계로 사람들을 감시할 수 있잖아요. 앞으로 시민은 새로운 나노기술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 기술이 평화와 자유를 신장하는 방향으로 쓰이도록 정부를 압박해야 합니다.”

    ▼ 박사께서 우려하는 것이 실제 일어난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아직 나노기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는 모두 적어도 10년 후 얘기입니다.”

    ‘창이냐 방패냐’

    ▼ 인터넷을 발명한 선 마이크로시스템즈 창업자 빌 조이는 “지식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과 지식의 무제한적인 발전이 세상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드렉슬러 박사를 향해서도 “나노기술이라는 엄청난 힘을 얻기 위해 파우스트적인 거래를 했다”고 비난했죠.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빌 조이가 그런 얘기를 한 게 아마 2000년 이전일 거예요. 그는 이 기술이 머지않아 중단되리라고 확신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그도 지금은 가능하다고 믿고 있어요. 빌 조이가 언젠가 내게 ‘어떤 불가능해 보이는 기술이라도 불가능하다고 말해서는 안 되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선 이미 그 기술을 만들어내고 있는 게 오늘날의 현실이거든요.

    실제 우린 나노기술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고 있고, 기본적인 생각에는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어요. 장차 나노기술을 어느 방향으로 개발할 것인가, 어떤 용도로 사용할 것인가 하는 부분은 사회에서 합의가 이뤄져야 할 겁니다.”

    ▼ 개인적인 질문입니다만, 결혼도 했고 자녀들도 있으시죠? 자녀들이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워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가르칩니까.

    “(비서이자 아내인 웨인 왕 여사를 보며) 우린 아이가 없어요(웃음). 그 질문을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해줄 조언으로 바꾼다면, 창의력이란 이종(異種)교배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말해주고 싶어요. 내 연구만 봐도 분자공학, 생물공학에서 영감을 얻은 것 아닙니까. 분자공학 학위는 없지만 보면 이해할 수 있어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자신의 전공을 토대로 다른 분야의 지식을 쌓아가야 합니다. 이종 분야를 서로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창의력입니다. 아시아는 특별한 분야의 지식은 뛰어난데, 이종교배엔 약한 것 같아요. 이 한계를 뛰어넘었으면 합니다.”

    ▼ 어떤 과학자는 ‘미래의 지성인은 누구도 하지 않은 질문을 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질문이 새로운 미래를 열어간다는 뜻인데요. 박사께선 어떤 능력을 갖춘 사람이 사회의 리더가 될 것으로 예상합니까.

    “기업가로 한정해서 말한다면, 누가 어떤 분야의 진정한 전문가인지 아는 사람이 경제 분야의 리더가 될 것 같아요. 이들이야말로 적절한 사람을 모으고, 특허를 내고, 돈을 끌어 모아 사업을 벌여 성공합니다. 물론 많은 사업가가 실패하죠. 이를 보완하기 위한 시스템도 필요합니다. 미국은 기업 인수합병이 자유로운 나라죠. 큰 회사가 작은 회사의 기술을 사들이면, 작은 회사는 자금난에 봉착하지 않고, 기술을 사장시키지 않을 수 있어요.”

    누구든 와서 배우라

    ▼ 스스로 미래주의자라고 믿는다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이 내 기술을 보고 좀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다면 난 만족합니다. 악용한다면 그것 또한 내 책임이지만요. 내가 기술고문으로 있는 나노렉스는 모든 나노기술에 대한 정보를 무료로 공개합니다. 누구든 와서 최근 기술을 배울 수 있고,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좀더 많은 곳에서 신기술이 사용되면 그것만큼 기쁜 것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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