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x3인치’ 그림으로 거대한 행복의 세계를 창조한 미술가.
- 소박하고 친근한 일상의 이미지로 세계 평화와 통일을 말하는 운동가.
- 예술로 인생의 통찰을 전하는 ‘만년 소년’ 작가의 꿈과 희망.
미국 뉴욕 첼시 25번가 첼시아트빌딩 20층 작업실에서 만난 강익중. 작업실 베란다에 서면 맨해튼 도심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는 세계 곳곳에 작품을 남긴 ‘스타’ 설치미술가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프린스턴시 공립도서관, 뉴욕 퀸스 지하철 메인스트리트역,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 중국 상하이엑스포 한국관(10월까지 설치)…. 발길 닿는 곳마다 그가 만든 초대형 조형물을 만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수많은 별이 모인 ‘거대한 우주’다. 작은 캔버스 그림 수천 점을 모아 ‘또 하나의 세상’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라진 서울 광화문 복원공사 가림막 설치그림 ‘광화에 뜬 달’도 그가 창조한 우주다. 60×60cm의 달항아리 그림 2616개로 구성된 이 작품은 높이가 27m, 폭이 41m에 달한다. 그가 매일 18시간, 6개월간 붓 대신 손으로 일일이 그려나간 그림은 옛 도공의 혼이 느껴질 정도로 경건하다. 산세와 도심의 풍경을 아우르는 가림막 앞을 지날 때마다, 그의 무시무시한 에너지와 상상력에 압도되곤 했다.
“불행은 산만한 것”
지난 7월, 대학원 공부차 머물던 뉴욕에서 강익중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인터뷰를 요청한 시점이, 운 좋게도 그가 서울 신문로 흥국생명 빌딩 1층에 전시할 새 작품을 모두 그린 뒤였다. 그는 26년째 미국 뉴욕에 살고 있다.
인터뷰는 9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그는 “이렇게 기자를 오래 만난 것 처음”이라고 했다. 뉴욕 차이나타운 내 공원과 인근 작업실, 첼시 25번가 빌딩의 새 작업실로 장소를 옮기며 우리는 대화를 나눴다. “1년 365일 중 손님 만나는 날이 3~4일도 되지 않는다”는 ‘바른생활 사나이’가‘작은 일탈’을 시도한 셈이다.
단정한 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그의 모습이 그렇게 평범할 수 없다. “점심 같이 드시겠어요?” 그가 기자를 처음 안내한 곳은 뉴욕 차이나타운의 한 베트남 샌드위치 가게. 소시지, 오이, 달걀에 독특한 향의 고수가 들어간 3달러짜리 샌드위치는 푸짐하다. 높은 물가로 악명 높은 뉴욕에서 기적처럼 싼 가격의 성찬(盛饌)이다.
“오전 9시 차이나타운 작업실에 나와 오후 7시까지 그림을 그려요. 점심 땐 여기에서 종종 샌드위치를 사 공원으로 가죠. 다른 중국식당에선 3달러50센트에 밥과 국, 반찬 4가지를 담은 도시락을 팔아요.”
그가 싸고 푸짐한 식당에 정통한 건 가난한 무명 화가 시절을 거쳤기 때문이다. 1987년 차이나타운에 조그만 스튜디오를 처음 얻었을 때 그의 관심사는 ‘어떻게 싸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까’였다. 그는 이때부터 마음에 드는 식당을 사진으로 찍고 주소를 기록했다. 그 자료로 만든 것이 바로 ‘굶주린 예술가를 위한 레스토랑 가이드’(1996년)다. 먹고사는 실존(實存)의 문제를 유머러스하게 승화한 그의 위트가 빛나는 책이다.
‘잘나가는 작가’가 됐지만, 그의 일상은 20여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왜?’라는 질문에 그는 명쾌한 답변을 내놓는다.
“행복은 단순하게 사는 데서 와요. 산만한 건 불행이고 고통이죠. 좋아하는 것에 온전히 몰입할 때 사람은 행복해져요.”
강세황의 후예
서울 광화문 복원공사 가림막 설치그림 ‘광화에 뜬 달’.
▼ 예술적 재능은 타고나는 것 같습니다.
“가계의 영향도 있겠지만, 특히 어머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형편이 어려웠던 시절 어머니는 틈틈이 세 아들의 옷을 지어, 우리 형제를 동네에서 유난히 빛나는 아이들로 만드셨죠. 외가 쪽에도 재능을 발휘하는 친구가 있어요. MBC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을 만든 이윤정 PD가 제 육촌 조카예요. 이종사촌형의 딸이죠.”
▼ 피는 못 속이는군요. 어린 시절 얘기를 더 들려주시죠.
“초등학교 때 미술대회에 나갔다가 한 번도 상을 못 탔어요. 어른이 그려준 것으로 오해받아서요.(웃음) 중학생 땐 샘솟는 아이디어를 주체하지 못해 자다가도 깨어나 그림을 그렸어요.”
▼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그림을 ‘업’으로 삼는 건, 집안에서 반대하지 않았나요?
“부모님은 저를 자유롭게 키우셨어요. 반대는 없었어요. 오히려 집안 어른들의 칭찬이 제 진로 선택에 영향을 미쳤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증조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똑같이 그렸는데, 큰아버지께서 만나는 사람마다 제 그림을 보여주며 자랑하셨죠. 제가 화가를 꿈꾸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그는 서울 이태원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이(異)문화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한동네에 사는 미국 친구들과 공놀이를 하며 자연스럽게 영어를 접했다. 짝꿍의 어머니가 미군부대에서 가정부 일을 한 덕분에, 미국 친구 집에 놀러갈 기회도 많았다.
“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떠나며 두려움은 없었어요. 낯선 문화를 경험하고 즐기는 데 이미 익숙했으니까요.”
장충고 재학 시절에는 국전을 준비하며 프로 화가가 되기를 꿈꿨다. 입시 준비는 뒷전이었다. 한 달 반 동안 수업도 들어가지 않고, 그림에 매달린 적도 있었다.
“당시 미술반을 이끌던 조용각 선생님(현 숙명여대 교수)이 가장 기억에 남는 스승이시죠. 선생님은 늘 우리에게 ‘10년 뒤를 봐라. 그것이 너의 모습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고등학생인 우리에게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신 거죠.”
1980년 그는 홍익대 미대에 입학했다. 낭만과 자유를 즐기기엔 엄혹한 시절이었다. 끓어오르던 창작 욕구는 사라지고 슬럼프가 닥쳤다. 수업에 빠지고 아웃사이더가 됐다.
“당시 분위기가…. 제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그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어요. 대학이란 곳이 싫었어요. 그래도 재밌는 건, 홍대 80학번 중 현재 우리 화단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친구가 많다는 거예요. 최정화, 문봉선, 이주헌, 고낙범, 박불똥, 권용식…. 당시 우수한 친구들이 한꺼번에 모인 걸 보며 ‘내가 최고가 아니구나’ 실망했던 것도 같아요.”
그는 1984년 1월 뉴욕으로 갔다. 한국에서 미대 출신에게 딱 맞는 일자리를 찾기란 어려웠다. 세계 각국에서 온 젊은 예술가들과 겨뤄보고픈 욕망도 있었다. 그는 브루클린과 맨해튼에 캠퍼스를 둔 프랫(Pratt) 인스티튜트에 입학했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고단한 삶. 하지만 대학원은 그에게 새로운 의욕을 불어넣었다.
예술가의 길을 포기하고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한 부인 이희옥씨와 아들 기호군.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그림 그릴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밤에는 식료품점에서 야채를 다듬고, 아침엔 샌드위치를 만들어 팔았다. 옷가게 점원과 1달러짜리 시계 노점상으로도 일했다. 지하철을 타고 일터와 학교를 오가는 때가 유일한 자유시간이었다. 어떻게 하면 지하철 안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오랜 궁리 끝에 나온 것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3×3인치’ 그림이다. 그는 지하철을 화실 삼아 작은 캔버스에 사람들의 모습과 영어 단어, 일상의 이미지를 그렸다.
변호사, 사업가로 변신한 아내
그의 20대에서 부인 이희옥(미국명 마거릿 리·49)씨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83년 미국 웨스턴 워싱턴주립대(미술 전공) 3학년이던 이씨가 홍대에 교환학생으로 오며,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둘은 ‘UFO 클럽’을 만들어 시간을 보냈다. 엉뚱한 상상을 즐기는 두 사람의 독특한 데이트 방식이었다.
▼ 부인의 첫인상은 어땠습니까.
“작고 예뻤어요. 착하고요.”
▼ 부인 때문에 미국에 가길 결심했나요?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건 미국에서 재회한 후였어요. 1985년 결혼식을 올렸죠. 장인어른께서 저를 본 뒤 ‘밥 잘 먹는 게 마음에 든다. 어서 혼인하라’고 말씀하셨어요.”
▼ 부인이 선생님 때문에 미술을 포기하셨다고요.
“두 사람이 모두 미술에 매달리긴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아내가 양보한 거죠. 저를 위해 희생한 아내는 제가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고 지쳐 돌아올 때 가장 좋아했어요. 미술도, 사업도 200%의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는 게 아내의 지론이죠.”
이씨는 꿈을 포기했지만, 적성에 맞는 또 다른 일을 찾았다. 이씨는 현재 미국 부동산 개발회사 YWA의 공동파트너이자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최근 금호종금과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해 맨해튼 AIG 빌딩을 매입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씨의 성공 뒤에는 치열한 노력이 숨어 있다. 낮에는 회사에 가고, 밤에는 브루클린 로스쿨을 다니며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4년간 새벽 2~3시까지 공부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고생 끝에 이씨는 두둑한 배포와 협상능력을 인정받아 말단사원으로 입사한 회사에서 파트너 자리까지 올랐다.
“아내가 처음 비즈니스 파트너들을 만나면, 상대편에서 비서라고 착각한대요. 150cm가 약간 넘는 작은 키의 동양인 여성이니까요. 하지만 아내는 첫 만남에서 상대편의 허를 찌른다고 합니다. ‘5분 스피치’로 기선을 제압하는 거죠.”
사실 이씨의 집안에도 유명한 인물이 있다. 1940~50년대 조선 최고의 주먹으로 통하던 시라소니(본명 이성순)가 그의 작은할아버지다. 강세황과 시라소니의 후예가 지금 ‘맨해튼을 움직이는 셀러브리티’가 된 것이다.
‘달항아리’그림이 강익중의 작업실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그는 “달항아리의 매력은 순수함과 당당함에 있다”고 말한다.
“언젠가 어린이 영재 캠프에서 인솔 교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아침에 모여 다 함께 외치는 구호가 있었는데, 그 말이 진리예요. ‘그림엔 정답이 없다. 내 그림이 정답이다.’ 세상은 자기의 창문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움직이는 거잖아요. 저는 아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면서 ‘자기다움’을 찾게 해주고 싶어요.”
“기회와 유혹을 분간하라”
잠시 대화를 멈추고 인터뷰 장소를 옮겼다. 차이나타운 바워리 스트리트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70세 넘은 중국인 노인이 조종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작업실로 올라갔다. 이곳을 가득 채운 것은 ‘3×3인치’로 자른 수십만 장의 목판과 물감, 크레파스…. 한쪽 방에서는 남미 출신 사내 2명이 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있다. 강익중이 ‘거대한 우주’를 창조하는 숭고한 노동의 공간이다.
▼ 사람이 조종하는 엘리베이터는 처음 타봅니다.
“저 할아버지는 36년째 이 건물 엘리베이터에서 근무하셨죠. ‘광화에 뜬 달’을 완성해 한국에 보낼 땐, 좁은 엘리베이터 공간 때문에 수십 번을 오르내렸어요.”
▼ 두 남자 분은 어시스트인가요?
“목판 자르는 일만 전담하는 분들이에요. 그림에만 전념하기 위해서 저분들을 고용했어요. 작업할 땐 제가 전화도 잘 받지 못해요. 컴퓨터 앞에 하루 15분 이상 앉아 있기 어려워요.”
▼ 1980년대 후반, 3인치 캔버스 대신 목판을 사용하기 시작한 건 아버지 때문이라고요?
“당뇨로 시력을 잃은 아버지를 위해, 목판에 그림을 그리고 소품을 붙이기 시작했어요. 촉각을 느낄 수 있는 미술의 시도였죠. 사실 ‘광화에 뜬 달’도, ‘버스를 타고 광화문 앞을 지나는 어머니가 보셨으면’ 하고 만들었어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담았죠.”
고된 삶 속에서 탄생한 그의 작품들은 1990년대 초·중반 미국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1994년은 그에게 기념비적인 해다. 그는 이 무렵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의 메인홀을 장식할 벽화를 제작했다. 높이 3.2m, 길이 22m의 이 벽화는 5925점의 3인치 그림으로 만들어졌다.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단어, 그림, 오브제가 주요 소재로 사용됐다. 다채롭고 친숙한 이미지의 작품은 ‘강익중식 3인치 미술’을 각인시켰다.
“샌프란시스코공항 벽화 작업 후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어요. 생애 가장 많은 돈을 받은 작품이기도 했죠.”
더 특별한 사건은 고(故) 백남준과 함께 코네티컷 주의 휘트니 미술관에서 2인전 ‘멀티플다이얼로그, 백남준과 강익중’ 전을 연 것이다. 당시 이 미술관의 큐레이터 유지니 사이는 강익중에게 “두 사람이 비빔밥처럼 갖가지 재료를 섞어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공통점을 지닌 것 같다”며 공동 전시를 제안했다. 그에게 ‘백남준과 2인전을 한 작가’라는 타이틀이 붙는 순간이었다.
“선생님이 전시에 앞서 미술관 측에 ‘나는 아무래도 좋다. 강익중이 좋은 자리를 얻는 게 중요하다’고 연락하셨어요. 후배 작가를 배려해주시는 모습을 보며 진정 ‘남을 품을 줄 아는 분’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강익중을 향한 백남준의 애정은 각별했다. 강익중이 백남준을 처음 만난 것은 1989년 10월 뉴욕 소호의 한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 때다. 백남준은 스스럼없이 후배 작가인 그에게 다가와 예술가의 길에 대한 충고를 들려줬다.
“여행을 많이 다녀. 그림은 싸게 팔고. 파티에 자주 나가고.”
백남준은 강익중의 최고 홍보 에이전트이기도 했다. “우리 익중이 잘 있냐?” “강익중을 아느냐, 유망한 작가다” “익중은 내 아들과 다름없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며, 그의 인지도를 높였다.
“선생님의 눈을 바라보면, 제게 늘 큰 에너지를 주시는 것 같았어요. 먼 미래인 30세기를 내다보는 큰 어른이셨죠. 언젠가는 제게 ‘가난한 사람은 땅을, 빌딩을 사야 해’ 하고 말하셨는데, 아마도 제 아내의 미래 직업까지 예측하신 것 같아요.(웃음)”
그는 지난해 과천 현대미술관에서 ‘멀티플 다이얼로그∞’전을 열어 자신을 이끌어준 스승에 오마주를 바쳤다. 그는 현대미술관 1층에 TV를 탑 모양으로 쌓아올린 백남준의 작품 ‘다다익선(多多益善)’ 주위의 계단 벽면을, 자신의 ‘3인치’ 그림 6만여 점으로 감쌌다. 그는 “백남준의 산을 오르듯 배우는 마음으로 설치를 진행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강익중의 인복(人福)은 고 김환기 화백의 부인 김향안 여사와의 인연에서도 드러난다. 백남준이 예술가로서 롤 모델이 됐다면, 김 여사는 그의 정신적 후원자가 돼주었다. 그가 김 여사를 알게 된 것은 1995년 무렵. 김 여사는 여행을 떠날 때 남편의 드로잉과 일기를 강익중에게 맡길 정도로 그를 믿고 아꼈다.
“김 여사님은 제게 늘 ‘아침을 챙겨 먹어라’ ‘식당에서 팁을 많이 줘라’ ‘기회와 유혹을 분간할 줄 알라’고 말씀하셨어요. ‘네가 하는 일이 역사와 민족, 세상에 옳은지 늘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당부하셨죠. 그 가르침이 지금도 제 인생관을 좌우하고 있어요.”
있으면 소박하고, 없으면 당당하자
얘기가 한창 무르익어갈 즈음, 오후 5시가 넘었다. 어두워지기 전 첼시 25번가에 있는 그의 새 작업실로 이동하기로 했다. 맨해튼 남서쪽에 위치한 첼시는 수백 개의 갤러리와 갤러리 빌딩이 밀집한 ‘현대미술의 아지트’로 통한다. 작품 전시·보관 공간으로 활용되는 그의 새 작업실은 첼시아트빌딩 20층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빌딩 역시 그의 아내가 매입·개발한 것이다. 빌딩 3층엔 한국 국제갤러리 이현숙 대표의 큰딸 티나 킴이 운영하는 티나 킴 갤러리가, 18층엔 유명 디자이너 캘빈 클라인의 개인 작업실이 들어서 있다.
그의 작업실에 들어선 순간, 탄성이 절로 나왔다. 통유리로 된 거실 벽을 통해 맨해튼 남서쪽 도심과 허드슨 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승용차가 응접실 바로 옆까지 올라온다는 혁신적 설계의 아파트 ‘스카이개라지(Sky Garage)’도 가까이 보였다. 이 역시 그의 아내가 개발에 참여한 건축물이다. 그룹 ‘롤링 스톤스’의 리더 믹 재거와 배우 니콜 키드먼도 이곳에 입주할 예정이라고 했다. ‘3달러짜리 점심’과 ‘맨해튼 노른자위 땅의 화려한 작업실.’ 순간 이 극과 극의 대조에 아찔해졌다.
▼ 예술은 결핍과 빈곤, 고통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경제적 여유가 생기며 작품의 원동력이 사라진 건 아닌가요?
“고통이 비단 가난에서 나오는 건 아니에요. 산만함도 하나의 고통이 될 수 있죠. 조화롭지 않은 것을 조화롭게 만들려는 힘, 그 반작용이 작품의 원동력이 돼요.”
▼ 가난과 부(富)가 예술가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나요?
“가난과 부, 둘 다 불편한 것일 뿐이에요. 저는 항상 ‘있으면 소박하고, 배우면 겸손하고, 없으면 당당하자!’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도중 작업실 벽면에 걸린 대형 달항아리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음전하고 깊은 빛깔이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가 달항아리에 반한 이유는 뭘까.
“달항아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순수하고 당당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김연아 선수를 보면서 달항아리 같은 순수함과 당당함을 느꼈어요.”
그가 천착하는 또 하나의 소재는 ‘한글’이다. 중국 상하이엑스포 한국관은 그가 만든 3만8000개 아트 한글타일로 꾸며져 있다. ‘정말 필요한 것은 별로 없다’ ‘기쁨 감사가 우리가 사는 별의 요술암호다’ ‘뉴욕 사람들은 콧구멍을 차 안에서 몰래 후빈다’…. 일명 ‘강익중체’로 쓰인 그의 익살맞은 경구는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제가 한글로 작업을 하자, ‘중국에서 진행되는 전시이니 한자로 벽을 꾸며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대요. 제가 반대했죠. 한국관은 무엇보다 ‘한국적인 이미지’를 전달해야 하는 공간이니까요. 한글은 조형미가 뛰어나 사각형 안에서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죠. 한글은 지구의 자랑이에요.”
그는 지난해 11월 ‘한글 세계전파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관저에 자신의 한글 작품을 기증하기도 했다. ‘한글과 유엔’이란 제목의 이 작품은 3인치 나무판에 유엔헌장 내용을 일부 요약한 한글 284자를 직접 새겨 넣은 것이다.
“얼마 전 반 총장님과 식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매일 아침 제 작품을 보며 유엔헌장 내용을 되새긴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아는 것, 쉬운 것, 옆에 있는 것
미술 트렌드가 급변하고, 아티스트들이 뜨는 작가를 좇아 모방하는 시대. 오히려 강익중은 우직하게 내면의 소리를 듣는 데 집중할 뿐이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미술이란 무엇일까.
“저는 아는 것, 쉬운 것, 옆에 있는 것, 편한 것을 그려요. 그림을 그리는 작업도 결국 나를 탐색하고 알아보기 위해 하는 작업이니까요. 남의 시각에 맞추거나 해외 트렌드를 좇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우리 미술이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에 치중하면서 자기 목소리는 없는 것이 가슴 아파요. 저는 예술가들이 ‘현대미술의 주인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일까. 그의 큰 관심사 중 하나는 통일이다. 한반도 분단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그가 스스로를 대단한 평화운동가라 여겨서는 아니다. 자신의 주변에서 느끼던 문제를 표현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됐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땅이 반으로 갈렸는데, 나는 뭘 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술가는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사람인데, 모국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문제라고 여긴 거죠. 무엇보다 이념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 통일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사회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 예술가의 임무이잖아요.”
그는 1999년 12월 경기도 파주 통일동산에서 ‘십만의 꿈’ 전시를 열었다. 폭 5m, 높이 4m, 길이 600m의 구불구불한 전시 공간에 전세계 141개국 어린이가 ‘나의 꿈’을 주제로 그린 그림 5만점을 전시했다. 원래 북한 어린이들의 그림 5만점을 함께 걸려고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북한 어린이들의 그림이 걸릴 자리는 ‘침묵의 벽’으로 비워뒀다.
“‘나의 꿈’을 그리는 작업이 여의치 않아, 두 번째로 ‘어린이의 자화상을 그려 교환하자’고 북측에 제안했는데 결국 성사되지 않았어요. 그래도 북한 어린이들과의 작업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2004년에는 통일 염원을 담은 지름 15m의 초대형 특수풍선 ‘꿈의 달’을 일산 호수공원에 띄웠다. 이 풍선은 세계 141개국 어린이들의 그림 12만6000여 장을 붙여 제작한 것이다. 그는 당시 달을 띄우며 다음과 같은 소망을 남겼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보았던 하나 된 조국의 달을 띄워보고 싶었다. 이것은 과거의 달이기도 하고 어린이들의 꿈이 담긴 미래의 달이기도 하다.”
통일이 되기 전 임진강에 어린이의 그림으로 세계 최초의 떠 있는 미술관 ‘꿈의 다리’를 만드는 것은 강익중의 오랜 소망이기도 하다.
2007년 강익중의 차이나타운 작업실에서 어린이들과 함께했다. 그는 어린이 그림으로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하려 한다.
“이 행사가 2001년 9월11일 개막하기로 했는데, 그날 테러가 발생해 행사 오프닝이 상당 기간 연기됐어요. 135개국 어린이 3만여 명의 다양한 그림을 통해 평화를 이야기하자는 취지의 전시였죠. 어린이들의 작품은 방문객의 접근 금지 조치가 해제된 후 뒤늦게 세상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어요.”
강익중은 최근 세계 어린이들의 그림 수집에 몰두하고 있다. 심지어 “어린이 그림은 주식(主食), 내 그림은 부식(副食)”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가 어린이 그림에 이토록 애착을 갖는 까닭은 뭘까.
“어린이들이 미래의 주인공이잖아요.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한데 묶어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세상을 만들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그가 요즘 가장 에너지를 쏟는 ‘희망의 벽’ 프로젝트도 어린이 그림과 관련이 있다. 그는 아이들의 꿈을 담은 그림을 모아 대형 작품을 만들어 미국 신시내티 병원, 충남대병원, 서울 아산병원 등에 설치했다. 현재 국내외 몇몇 병원에서도 ‘희망의 벽’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아픈 아이들에게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또한 정보기술(IT)이 발전한 한국의 이미지를 살려, 전세계 병원에 대형화면을 설치해 아이들이 다른 나라 친구들과 서로 인사하며 우정을 나누게 하고 싶어요. 전세계가 어린이들의 꿈으로 연결됐으면 합니다.”
‘아트 포 피플’
공공미술가로서 그의 상상력은 끝이 없다. “공공미술은 명랑한 혁명”이라 믿는 그는 ‘사람들을 위한 미술’의 가치를 힘주어 말한다.
“공공미술은 모든 사람을 기쁘고 행복하게 하는 ‘아트 포 피플(Art for People)’이에요. 특정 사람, 민족을 아프게 하거나 소수자를 폄하해서도 안 되죠. 그런 의미에서 서울 광화문광장에 놓인 설치물이 조금 안타까웠어요. 계단만 있어 장애인은 올라가기 어렵더라고요. 공공미술에는 모든 사람을 배려하는 착한 마음이 필요해요.”
그가 말하던 ‘예술의 세계’는 인생의 이치와도 맞닿아 있었다. 묵직한 통찰이 담긴 답변을 들으면서 나는 몇 번이고 무릎을 쳤다. 특히 좋아하는 작품에 대한 그의 설명을 들을 때가 그랬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에요.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듯한 해탈의 미소를 짓고 있잖아요. 사실 사람들이 그림을 그릴 때, 모두 자신의 얼굴을 그려요. 그렇다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작가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겠죠. 작품을 할 때, 언제 붓을 드느냐보다 언제 붓을 내려놓을지 아는 게 더 중요해요. 이발할 땐 가위질을 언제 멈춰야 하는지, 주식 투자에선 언제 팔아야 하는지 아는 게 중요한 것처럼. 저요? 저는 붓을 언제 내려놓아야 할지 하루는 알다가, 다음날은 모르겠다가 그렇더군요.”
얘기를 마치고 보니 벌써 해가 졌다. 강익중의 작업실을 나서 돌아오는 길. 머릿속에 그의 작품이 떠나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일상의 사소한 소재를 담았다. 하지만 그가 전하는 울림은 크다. 통합과 화해, 행복을 말한다. 저마다 다른 색채와 개성을 지닌 작은 그림 수만 개가 모여 하나의 ‘놀라운 세계’가 되고, 그 조화 속에서 제각각은 고유의 빛을 잃지 않는다. 그게 우리가 바라는 세상의 모습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