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봉 참빛그룹 회장이 7월28일 서울예술고등학교와 예원학교를 경영하는 학교법인 서울예술학원(전 이화예술학원) 이사장으로 추대됐다.
- 이대봉 신임 이사장은 “최선을 다해 세계적인 학교로 발전시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 그의 이사장 취임은 사학재단 이사장 교체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아버지의 한(恨)이 20여 년 만에 학원 이사장 취임으로 승화됐기 때문이다.
“11월22일이 학교기념일이었고, 11월23일에 정기연주회가 있었어요. 대웅이가 노래를 마치고 나서 꽃다발을 많이 받았어요. 한 39개쯤 됐나. 노래도 잘하고 체격도 크고 건장해서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지. 그런데 그게 선배들에게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나봐. 사흘 뒤에. 그러니까 26일 점심시간에 불러내서 교정 끝에 있는 산으로 데려가서 그만….”
이 회장은 자식을 잃게 된 아픈 기억을 담담하게 회고했다.
고(故) 이대웅 군이 성악을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 당시 이 회장의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자택 근처에 살던 테너 안형일 서울대 교수(현 명예교수)의 권유가 계기가 됐다. 당시 대웅군은 안 교수의 딸에게 피아노 교습을 받았는데,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는 대웅군의 노래 솜씨를 눈여겨 본 안 교수가 “예고에 진학해보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서울예고에 입학한 이후 대웅군은 예비 성악가로 주목받았다.
대웅군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을 접한 이 회장은 처음에는 격노했다고 한다.
“비통함이야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 처음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고. 신체 건강하던 아이가 복부를 두 대 맞았다고 그렇게 된다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고. 때린 상급생 아이가 태권도 2단이라던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두 대 맞고 그렇게 되나…. 그때는 통신수단도 별로 없고, 교통편도 마땅치 않던 때라 쓰러진 애를 인공호흡도 시켜보고 우왕좌왕하다가 오후 1시가 넘어서야 선생님 차로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 숨졌다고 해요. 처음에는 격분했지. 그런데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해보니 이미 돌이킬 수가 없는 일이잖아.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었지. ‘노래를 잘하니까, 하느님 곁에서 노래 부르라고 일찍 데려가셨나보다’ 그렇게 생각했지. 내가 천주교 신자인데,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도 있잖아요.”
이대웅음악장학회
이 회장은 장례비용을 내겠다는 학교 측에 “비용 부담할 생각을 일절 말라”고 하는 한편, 가해 상급생에 대해서도 선처를 호소했다. 3일장을 치르고 난 뒤 학교와 성당에서 추모예배를 갖고 장지로 향하는 길에 이 회장은 ‘어떻게 하면 대웅이의 죽음을 기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 ‘대웅이는 비록 떠났지만, 대웅이처럼 예술을 하는 꿈나무를 육성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대웅이를 하늘나라로 보내면서 ‘청소년 콩쿠르’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지. 장학사업도 그때 생각했던 거고. 삼우제 때 학교 관계자들이 교정에 있던 주목 두 그루를 캐와 대웅이 묘소 옆에 심어줬어요. 49재 때는 선생님과 학생들이 갹출해서 학교 교정에 대웅이 추모비를 세워주고, 추모 음악회도열었고요.”
이 회장은 1988년 ‘이대웅음악장학회’를 설립, 매년 서울예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오고 있다. 또한 대웅군의 못다 이룬 꿈을 이어갈 음악영재를 길러내기 위해 성악콩쿠르를 개최해 입상한 학생에게는 유학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아들 하나를 잃었지만, 장학회를 통해 더 많은 아들, 딸을 얻은 셈이죠. 장학금을 전달하면서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한편으로는 대웅이 생각도 나지만 흐뭇한 마음이 더 커. 대웅이가 못다 이룬 꿈을 그 아이들이 훌륭하게 펼칠 테니까.”
서울예술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고 이대웅군 추모비.
2000년대 들어 중국에서 활발히 사업을 추진한 이 회장은 중국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어렵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중국에서의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를 무렵이던 2006년 중국 거주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고, 2007년에는 독립투사 유가족 등 101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지난해에도 중국 조선족 독립투사 유공자 자녀 100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장학사업 외에 이 회장은 개인적으로 항일열사 추모사업도 전개하고 있다. 이 회장의 한 측근은 “해란강CC에 지어진 팔각정에서 매년 8월15일 이곳에서 순국한 항일열사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추모식을 열고 있다”고 소개했다.
백두산 천지 등산로
참빛그룹은 1975년 동아항공화물로 사업을 시작한 이래 항공물류와 건설 제조업, 천연가스에너지와 관광레저 등 4개 분야에서 14개 기업을 운영하는 알짜 기업이다. 1984년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항공산업 육성 공로로 표창을 받았고, 1999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도시가스 안전에 기여한 공로로 철탑산업훈장을,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던 2007년에는 모범 납세기업으로 훈장을 받았다.
이 회장은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는 수출을 해서 달러를 벌어들이지 않으면 살 수 없다. 또 국내 기업 활동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외국에 진출해 달러를 벌어들여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국내에서 항공물류와 천연가스 사업으로 종자돈을 마련한 그는 2000년 이후 중국과 베트남 등 해외에서 활발한 기업 활동을 하고 있다. 이 회장 스스로 “일주일에 나흘은 외국에서 보내고, 사흘은 한국에 있다”고 말할 정도다.
이 회장이 처음 해외사업에 눈을 돌린 때는 1990년, 지인들과 함께 백두산 관광을 다녀온 게 계기가 됐다. 당시 함께했던 지인은 “우리는 ‘등산로가 너무 험하구나’라는 생각만 하고 말았는데, 기업하는 사람이라 보는 눈이 다르더라. 결국 등산로를 내서 사업까지 하고 있으니…”라고 했다. 그는 “백두산을 오르는 길에 노천온천을 보고 ‘우리나라에도 이런 온천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회장은 백두산에 온천호텔을 지었다”며 놀라워했다.
백두산을 다녀온 이 회장은 천지로 향하는 등산로가 낙후돼 있는 것을 보고, ‘좋은 등산로를 내야겠다’고 결심, 백두산 등산로를 관장하는 중국 지린(吉林)성과 교섭에 들어갔다. 4년여 교섭 끝에 천지까지 올라갈 수 있는 등산로를 내기로 합의했고, 1996년에 입장료를 받는 등산로를 열었다. 그러다 1998년 산사태로 등산로가 붕괴되자, 다시 ‘동굴형 등산로’를 냈다. 2003년에 완공한 이 동굴형 등산로에는 매년 100만명 이상의 등산객이 찾고 있다.
이 회장은 “등산로를 처음 낼 때는 10만명 정도 왔는데, 이제는 100만명도 넘게 찾고 있다”고 했다. 또 1997년에는 83°C의 천연온천물이 나오는 백두산 제일 높은 곳에 천상온천관광호텔을 지어 운영해오고 있다. 등산로와 호텔은 중국과 합작한 것으로 60% 이상의 지분을 중국이 보유하고 있고, 참빛그룹은 나머지 지분과 운영권을 갖고 있다.
백두산 등산로와 온천호텔 등을 지어 중국에서 사업을 확장하는 사이, 이 회장은 조선족 자치주로부터 “골프장을 건설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 지역은 독립투사들이 말달리던 민족의 얼이 서린 곳으로 ‘용이 알을 품고 있다’해 소룡촌이란 지명을 갖고 있다.
여름엔 해란강, 겨울엔 휘닉스
육지의 하롱베이라고 불릴 만큼 경관이 수려한 곳에 자리 잡은 하노이 용봉 휘닉스 골프리조트.
“해란강 골프장은 여름에는 시원하게 골프를 즐길 수 있어 좋은데, 겨울에는 추워서 골프를 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겨울에도 골프를 즐길 만한 곳을 찾아 나섰지요. 동남아 여러 나라를 돌면서 조사를 하다가, 베트남 하노이 인근에서 좋은 곳을 찾아냈어요. 내가 여덟 번이나 직접 가서 지형을 살펴보고 결정한 곳이 휘닉스 골프장이에요.”
베트남 최대 골프장인 하노이 용봉 휘닉스 골프리조트는 하노이에서 38k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육지의 하롱베이라고 불릴 만큼 수려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더욱이 골프장 안에는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동굴이 있는데, 인간이 최초로 살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휘닉스 골프리조트가 들어선 용선현 용봉마을은 용봉, 용끈, 용땀의 3개 마을로 이뤄져 있는데, 지세가 마치 용과 봉황새가 앉아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리조트 이름도 용봉 휘닉스 골프리조트로 지었다.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 위치한 참빛그룹 본사에서는 용과 봉황이 위아래로 부조된 액자를 여럿 볼 수 있는데, 이 리조트 이름과 무관치 않다.
용봉 휘닉스 골프리조트 건설과정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이 회장의 사업방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사례다. 베트남은 우리나라에 비해 개발예정지에 거주하는 주민에 대한 보호가 엄격한 편이다. 최고의 골프리조트 부지를 찾아낸 이 회장은 427가구에 달하는 이주민들에게 최고의 보상비를 지급한 것은 물론 집을 지을 수 있는 터와 도로, 전기와 수도 시설 등을 모두 갖추어주었다. 이 같은 철저한 이주대책에 이주민은 물론 베트남 정부까지 나서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하노이 인근에는 전쟁열사들이 토지를 많이 보유하고 있어요. 전쟁열사를 최고로 예우하는 베트남에서 강제로 토지를 수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보상금은 보상금대로 지급하고 이주대책도 완벽하게 세워줬죠. 처음에는 172가구였는데, 나중에는 420여 가구로 늘었어요. 그래도 다 보상해주고 이주할 수 있도록 조치했어요. 묘소도 720기 이장해줬고요.”
용봉 휘닉스 골프리조트는 미국의 로날드 프림과 한국의 송호, 일본의 MK 등 세계적인 골프리조트 설계사에서 기본 설계를 잡았고, 공사는 이 회장이 직접 현장을 돌며 지휘 감독했다. 골프장 공식 개장을 앞두고 이 회장은 대규모 국제골프대회 유치를 추진했다. “투어를 유치해 세계적인 골프장으로 인정받겠다”고 공언한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결국 2007년 아시아 PGA투어를 유치했고, 유럽투어에서 뛰는 우수 선수 147명이 참가해 성공적으로 대회를 치렀다. 대회 참가 선수들은 한결같이 ‘최고의 아름다운 코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하노이 정도(定都) 1000년을 맞는 2010년은 베트남에 뜻깊은 해다. 이를 위해 하노이시는 일찌감치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하노이에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특급호텔을 짓는 일이었다.
약속하면 반드시 해낸다
참빛그룹이 하노이에 세운 참빛타워와 그랜드프라자 하노이 호텔.
공모에는 미국과 일본 등 9개국에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굵직한 업체 44개사가 입찰에 참여했다. 우리나라 업체도 참빛그룹을 포함해 4개 업체가 응찰했다. 이 회장은 “하노이 정도 1000년이 되는 2010년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호텔을 개장하겠다”고 강조했고, 결국 사업권을 따냈다. 이 회장이 하노이 특급호텔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 있었던 데에는 ‘54홀 용봉 휘닉스 골프리조트’의 성공이 밑거름이 됐다. 모두가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54홀짜리 골프리조트를 2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완공시키는 것을 보고, 베트남 당국자들은 “이 회장은 약속하면 반드시 해낸다”는 신뢰를 갖게 됐다고 한다.
이 회장이 중국과 베트남에서 연거푸 굵직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사업은 곧 신뢰’라는 그의 평소 경영철학을 일관되게 실천해온 게 밑바탕이 됐다. 해외사업 성공 비결을 묻는 질문에 이 회장은 이렇게 답했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누구든 도와주고 싶어야 일이 잘 진행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처음 만나서는 어렵겠지요. 그렇지만 자주 만나 신뢰를 형성하고, 사업을 통해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점을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국에서도 그랬고, 베트남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국내에서 참빛그룹은 글로벌 대기업에 가려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중국이나 베트남 등 해외에서 참빛그룹과 이대봉 회장의 위상은 국내에서의 인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일례로 지난해 3월 방한한 팜 꽝 응이 하노이 당서기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을 각각 면담한 데 이어 이대봉 참빛그룹 회장을 만나고 돌아갔다. 응이 당서기는 차기 베트남 국가주석으로 거론될 만큼 베트남에서 실력자로 통하는 인물이다. 베트남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이대봉 회장은 베트남 정가, 특히 하노이를 중심으로 끈끈한 인맥을 구축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노이 랜드마크, 참빛타워
하노이에 참빛타워와 그랜드 프라자 하노이 호텔을 짓는 과정에 이대봉 회장의 현장경영은 빛을 발했다. 그는 휘닉스 골프리조트를 건설할 때와 마찬가지로 매일같이 현장을 찾아 직접 진두지휘했다.
“새벽 4시면 일어납니다. 한 시간 동안 내가 개발한 운동을 하고, 5시부터는 골프 코스를 관리하는 사람과 함께 휘닉스 골프장을 한 바퀴 돌아요. 코스 상태도 점검하고, 디봇도 메우고, 휴지도 줍고, 개선할 것이 없나 찾아 지시하죠. 7시쯤 숙소로 돌아와 샤워와 식사를 마치고 하노이 공사 현장으로 출발하면 9시30분쯤 도착해요. 1층에서부터 6층까지는 한 층씩 올라가면서 공사 진척사항을 확인하고, 지시할 것은 지시하죠. 6층에서 맨꼭대기층(31층)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다시 한 층씩 내려오면서 공사현장을 둘러보죠. 베트남에 머물 때는 매일 이렇게 살았습니다.”
전문건설업체에 시공을 맡기는 대신 이 회장이 직접 공사를 맡아 진행하면서 공사비를 3분의 1 수준으로 대폭 줄였다.
“내가 직접 공사를 감독하면서 공사비를 많이 절감했지만, 건물에 들어가는 제품 하나하나는 세계 최고의 것을 썼어요. 가구면 가구, 엘리베이터면 엘리베이터, 냉난방시스템도 그렇고, 세계적으로 이름난 최고급 회사의 제품만 썼습니다. 꼭 한번 와서 보세요.”
참빛그룹이 하노이에 짓는 건물에는 이산화탄소가 배출되지 않는 미국 캐리어의 친환경 공조시스템과 독일 지멘스의 자동제어 소방설비를 갖춘 빌딩 자동화 시스템이 채택됐다. 또한 미국 마이크로스 피델리오 전산 시스템과 시스코의 통신 장비 등을 갖췄다. 이 회장은 “호텔을 찾는 고객이 ‘세계 최고’라고 느낄 수 있도록 아낌없이 투자했다”고 강조했다.
9월11일이면 618개 객실을 갖춘 지상 31층 규모의 그랜드 프라자 하노이 호텔과, 바로 옆에는 5층 규모의 백화점, 그 위에 지상 30층 높이의 오피스타워인 참빛타워가 그 위용을 드러낸다. 하노이 정도 1000년을 맞아 올해 완공되는 참빛그룹의 두 건물은 하노이를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될 전망이다.
이 회장의 사랑과 나눔 정신은 베트남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과 중국에 이어 올해부터는 베트남에서도 장학금을 지급했다. 베트남전 당시 희생자의 유가족 자녀 가운데 학업성적이 우수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이어가기 어려운 모범학생 200명을 선발해 장학금을 지급했고, 베트남 소수민족 가운데 생계가 어려운 학생 200명에게도 장학금을 줬다.
서울예고에 대연주홀 신축
서울 예원학교 이사장 취임을 계기로 이대봉 회장은 “앞으로 예원학교와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세계적인 예술 인재의 요람으로 키워나가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부실경영으로 빚더미에 허덕이던 재단을 인수한 그는 부산에 있는 14층 규모의 빌딩을 재단에 기증했고, 현금 110억원을 출연해 부채를 탕감했다.
“학교 재단은 앞으로 견실하게 운영할 수 있는 여건을 갖췄어요. 빚을 정리하고도 수십 억원의 현금이 쌓여 있고, 한 달에 8000만원 정도 수익이 들어오는 빌딩도 보유하게 됐으니까요. 앞으로 학교가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시설과 운영 면에서 하나하나 보완해나갈 겁니다.”
그는 객석 1200석 규모의 대연주홀을 갖춘 컨퍼런스홀을 서울예고에 지을 예정이라고 했다.
자식 잃은 슬픔을 장학사업으로 승화시킨 데 이어, 부채에 허덕이던 학교까지 인수해 세계 최고의 예술학교로 키워내기 위해 정성을 쏟는 그가 남달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