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월말 호주 시드니에서 한국문화를 알리는 행사가 성황리에 끝났다.
- 한국전 참전 60주년을 기념해 열린 ‘사랑을 위한 2010’ 이벤트.
- 오랫동안 한국문화 알리기에 앞장서온 소피아스포렌이 주관한 이 행사에 많은 호주인이 자리를 채웠다. 특히 전날 열린 전야제 겸 디너쇼에는 호주 각계의 저명인사 60여 명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한국의 대중음악이 호주 주류사회의 두꺼운 장벽을 무너뜨리는 순간이었다.
호주에서 한국문화를 알리는 데 앞장서온 문미영 소피아스포렌 대표.
“내 친구들이 크게 감명받았다. 아주 훌륭한 공연이었다. 그들은 전통음악을 맘껏 즐겼고 한국 대중음악도 즐겁게 감상했다. 나를 기억해주어 고맙고, 호주인들에게 한국음악과 문화를 체험하게 해주어 감사한다.”(올윈 그린·6·25전쟁에서 전사한 찰리 그린 중령 미망인)
“역시 한국인은 특별하다. 이 감동이 오래갈 것 같다. 한국에 근무했던 전직 대사로서 한국문화를 호주에 알리는 일에 더욱 힘쓰겠다. 특히 한국 클래식 음악인을 호주에 더 많이 알리고 싶다.”(리처드 브로이노브스키 전 주한 호주대사)
“한국음식과 술(막걸리)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호주 시인 2명과 극작가 1명이 동석했던 우리 테이블은 음식이 부족할 정도였다. 우리 네 사람은 2011년에 한국을 방문하기로 약속했다.”(로빈 이얀슨 세계시인대회 의장)
“한국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앞으로 한국인 문화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석해서 많은 것을 배우겠다. 호주 이슬람그룹도 호주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본받아야 한다.”(케이사르 트라드·호주이슬람협회 대변인, ‘데일리텔레그래프’ 칼럼니스트)
“7월초에 다녀온 한국에서 큰 감명을 받았고, 타운홀 공연과 전야제에 참석해서 한국문화에 흠뻑 빠졌다. 내가 근무하는 미첼고등학교에 한국어 과정을 개설할 예정이다. 한국과 한국인이 경이롭게 느껴진 2010년 7월이었다.”(브레트 하퍼 미첼고등학교 교장)
위에 소개한 글들은 8월 초, 호주 주류사회 인사들이 시드니에 있는 한국문화 기획사 ‘소피아스포렌’에 보내온 감사편지 30여 통 중의 일부다. 이들은 문화계 인사, 학자, 언론인, 고위직 공무원, 외교관 등으로 호주의 내로라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이다. 도대체 시드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6·25 참전 60주년 기념공연
시드니의 7월은 겨울이라서 하루 해가 짧다. 오후 5시 무렵에 어둑발이 내리기 시작한다. 7월31일 저녁, 기타로 집시음악을 연주하던 거리의 악사도 그즈음 고단한 하루를 갈무리했다. 동전이 가득 담긴 모자를 들고 거리의 악사가 길모퉁이 선술집으로 들어간 다음, 타운홀 앞 돌계단 주변에 낯익은 얼굴들이 무리 지어서 모이기 시작했다.
“어이 김형, 여기서 만나네. 이게 얼마만인가? 이러다가 얼굴 잊어버리겠어.”
“준이 엄마, 서울에 간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거야? 교회도 안 나오고 말이야.”
너나없이 밤기차를 타고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들처럼 들뜬 모습이었다. 잠시 후 사람이 늘어나자 자연스럽게 줄이 형성됐다. 한국인들 사이로 호주 현지인의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다. 퇴근길 직장인들이 길게 늘어선 행렬을 신기한 듯 힐끔거렸다. 돌계단 옆 플라타너스 나목(裸木)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정겹게 어른거리고.
1600여 명의 청중이 소피아스포렌이 기획한 ‘사랑을 위한 하모니 2010(Har- mony for Love 2010)’을 관람하기 위해 타운홀 음악당을 가득 메웠다. 각양각색의 사랑만큼이나 다양한 종류의 음악으로 아름다운 하모니를 연출한 이날 공연은 한국인의 호주이민사 50년에 큰 획을 긋는 전환점이 됐다.
7월31일 호주 시드니 타운홀에서 열린 ‘사랑을 위한 하모니 2010’.
그동안에도 그런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0년 초부터 한국 출신 작가들과 국악 및 클래식 연주자들이 호주 주류사회를 상대로 문학행사와 공연을 해서 크고 작은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대중음악으로 호주 현지인들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웃 나라인 중국이나 일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첫 번째 성공사례일 것이다.
이렇듯 호주 주류사회의 높은 벽을 안타깝게 여긴 한국인이 있었다. 문미영(55) 소피아스포렌 대표. 일본에서 문학과 심리학을 공부한 문씨는 호주로 이민 온 이듬해인 2005년 6월 한국문화 기획사 소피아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다. 방송 관련 일을 오랫동안 해온 남편 서인수(57) 회장이 한국에서 대형 이벤트를 기획하고 연출했던 전문가라 출발이 순조로웠다.
2005년 12월, 이들 부부는 첫 작품으로 ‘한여름 밤의 크리스마스’를 타운홀 무대에 올렸다. 7080 스타들인 윤형주, 김세환, 남궁옥분, 최백호 등이 출연해서 꽤 좋은 반응을 얻었다. 2006년 3월에는 ‘최성수의 가을 동행’ 단독 콘서트를 시드니메트로극장에서 열었다. 거기까지가 한인동포 중년들을 위한 통기타 가수 중심의 공연이었다.
반면 2006년 6월에 열린 ‘김수희의 겨울 추억콘서트’는 장년층을 위한 무대였다. 이어 이민 1세대 어르신을 위한 공연 ‘어버이를 위한 孝 · 팝 재즈’가 2007년 5월 어버이날에 열렸다. 40년 동안 돈독한 우정을 이어온 남성 4중창단 포다이나믹스 출신의 장우, 박상규, 김준, 차도균과 함께 채은옥, 임희숙이 출연해서 효도잔치를 벌였다. 이 소식은 ‘신동아’ 2006년 7월호에 소개된 바 있다.
2007년은 호주동포사회에서 최초로 이민사가 편찬된 역사적인 해였다. 소피아스포렌은 ‘호주한인 50년사’ 발간을 축하하고 편찬 기금을 마련한다는 취지로 ‘시드니 빅쇼’를 기획했다. 특급 공연장인 리사이틀홀에서 1980년대 한국 가요계를 주름잡던 최헌, 장미화, 진미령과 중견 탤런트 선우재덕이 무대에 올라 향수를 달래주었다. 그 공연은 소피아스포렌의 밝은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호주가 깜짝 놀란 월드컵 응원전
2006년 초 문미영 대표는 회사 이름을 소피아엔터테인먼트에서 소피아스포렌으로 바꿨다. 스포츠(sports)와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의 합성어인 소피아스포렌 출범과 때를 같이해 유소년 축구팀 소피아스포렌FC를 창단하고, 문화를 사랑하는 호주동포들의 모임인 ‘호주문사모’를 발족시켰다.
특히 2006년 6월을 뜨겁게 달구었던 독일 월드컵 시드니 응원전은 한인동포들은 물론이고 호주 현지인들까지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호주공영방송 SBS-TV(Spe-cial Broadcasting Service) 소속으로 한국어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주양중 책임PD는 지금도 그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자.
“2006년 6월13일은 시드니 한인 역사에 큰 궤적을 남긴 날이었습니다. 한국 대 토고 전이 벌어진 이날 소피아스포렌은 10만달러가 넘는 거액을 들여서 엔터테인먼트센터를 통째로 빌렸습니다. 단체 응원전을 펼치기 위한 조치였는데, 한국에서 온 유명 연예인들이 역동적인 사전 이벤트를 펼쳐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경기가 벌어지는 동안 시드니가 들썩일 정도로 뜨거운 응원전이 펼쳐진 건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엔터테인먼트센터는 1만5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실내체육관이지만 안전 때문에 5000명만 입장이 허용됐고, 몇 시간씩 기다렸던 수천 명은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호주 당국의 엄격한 조치였지요. 그날 행사는 무려 30만달러가 넘는 엄청난 비용이 든 빅 이벤트였지만 후원사는 소피사스포렌의 모기업체인 아주그룹과 행사 진행을 맡았던 호주공영 SBS방송뿐이었습니다. 물론 문미영 대표가 처음부터 ‘후원 사절!’하면서 손사래를 쳤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이민사에 길이 남을 만한 유쾌한 날이었습니다.”
7월30일 전야제 겸 디너쇼에 참석한 호주 각계의 저명인사들.
이에 힘입은 소피아스포렌은 2008년 중순 호주대학과 공동으로 한국포럼을 개최했다. 호주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로위연구소에 의뢰해서 ‘호주 주류사회에서 차지하는 한국의 위상과 한국 문화 선호도 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 결과를 책자로 만들어서 한국 정부에 전달해 해외 문화정책을 수립할 때 활용하도록 만들 계획이었다. 그러나 녹음기술자의 실수로 포럼의 기록을 남기지 못해 책 출간을 포기하는 아픔을 겪었다.
“모든 생물은 힘들어한다”
이후 소피아스포렌의 그래프에 완만한 하강곡선이 그려졌다. 각종 공연 성공과 스포츠 팀 승리로 상승세를 탄 여세를 몰아 호주 주류사회로 진입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 더욱이 수입 한 푼 없이 수십만달러를 쏟아 부은 월드컵 응원전 준비과정에서 발생한 일부 한인동포들의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힘이 빠지던 상황이었다. 문미영 대표의 탄식 어린 독백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헛소리 마라! 삶이 한두 번 박살나지 않으면 인생이 뭔지도 모르고 짐승처럼 죽어야 한다. 울지 마라! 사랑에 드리운 그림자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건 헛사랑에 불과하다. 나라사랑과 동포사랑은 연인들의 사랑과 다르지 않다. 엄살 피지 마라!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힘들어한다. 그게 살아 있다는 증거다. 아무리 시드니가 아름답다고 해도 마음속에서 비가 내리면, 그저 비 내리는 항구에 지나지 않는다. 기어이 사막을 건너가고야마는 낙타처럼 천천히 걸어가는 게 인생 아니던가.”
문미영 대표는 일본 법정대에서 일본문학을 전공하고 와세다대 대학원에 개설된 심리학 과정을 2년 동안 수료한 다음, 연세대 교육대학원에서 아동심리학을 전공했다. 사업가 집안의 딸로 태어나서 남부러울 것 없이 성장했지만 마음고생이 많은 소녀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전형적인 사업가 집안의 분위기가 작가와 연극배우를 꿈꾸면서 문화적 인간으로 살고 싶었던 그를 끊임없이 억압했다.
그렇게 참으면서 살아야 했던 문미영이 마침내 돌파구를 찾았다. 1년 동안 일본 교환학생으로 가게 된 것. 1970년대 말, 기독교방송에서 주관한 1년짜리 교환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해서 당시로서는 여권조차 내기 힘들었던 17세 고등학생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어린 나이였는데도 스스로에게 인간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던 시절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우리 집안이 부럽다고 하는데, 정작 나는 풍요롭게 사는 것만으로는 존재감을 가질 수 없었어요. 1년간 교환학생 생활을 하고 돌아온 다음 1983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문학과 심리학에 천착한 것도 그런 상실감을 보상받기 위한 노력이었을 겁니다.”
유학생 문미영은 와세다대 대학원에 개설된 후카자와 교수의 심리학 과정을 이수하면서 새로운 정신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정신의학인 줄 알았던 심리학이 인간의 내면세계를 탐구할 수 있는 도구임을 알게 된 것. 더욱이 일본 유학 기간에 겪은 두 나라 간의 문화적 갈등을 통해서 ‘지구인’이라는 평생 화두를 얻었다.
“일본에 건너가보니 다수의 일본인과 소수의 재일한국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나는 타고난 성격 때문이었는지 ‘국화와 칼’ 같은 일본의 문화가 좋았어요. 그럼에도 ‘시계 같은 일본인’한테서는 거부감이 일기도 했습니다. 특히 일본에서 낳은 아들을 키우면서 겪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차별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지구인으로 살 수는 없는 것일까?’라는 깊은 회의에 빠졌습니다. 그런 과정에 아들을 일본학교에서 한국인학교로 전학시켰고, 그걸 계기로 일본인과 재일한국인말고도 한국인이 일본에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됐지요. 그때까지는 일본에 한국학교(조총련계 학교가 아닌)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호주 주류사회를 노크하다
일본에서의 삶에 한계와 회의를 느낀 문미영씨는 “모든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는 지구인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2004년에 호주 이민을 결행했다. 막상 와서 보니 호주는 일본과 전혀 다른 나라였다. 다양한 인종이 다양한 문화를 공유하면서 너나없이 지구인으로 살아가는 나라인 것.
놀랍게도 호주는 세계 200여 국가에서 이민 온 다양한 인종이 출신국가의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조화롭게 살고 있었다. 당연히 문씨의 눈에는 호주가 지구에 남은 마지막 파라다이스로 보였다.
예외 없이 미국문화의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서 미국인으로 거듭나는 멜팅 포트(melting pot)가 아닌 다양한 채소의 특성이 그대로 보존되는 샐러드 접시(salad bowl)처럼 모든 문화를 수용하는 나라 호주. 문씨는 호주에서 한국문화 전도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2005년 6월 소피아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해서 대표직을 맡았다.
언제부턴가 문 대표는 “용기를 내어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실감했다. 불후의 명시(名詩) ‘해변의 묘지’를 남긴 폴 발레리의 명언이다. 그가 일본 유학을 떠난 것도 뜻대로 살고 싶은 욕망을 실천에 옮긴 것. 38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이 있지만 호주에서 소피아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한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호주 주류사회에 한국문화를 제대로 알리고 싶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호주에는 한국의 유수한 그룹사들이 진출해서 괄목할 만한 실적을 올리고 있다. 분야도 다양하고 규모도 엄청나게 크다. 그러나 한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기업은 없다. 문화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아무리 첨단제품을 만든다고 해도 생명이 짧아질 수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일본재단(Japan Foundation)에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을 기부해서 수십 년 동안 호주에 일본문화를 소개하도록 만드는 호주 주재 일본 대기업들과 전혀 다른 행태다. 게다가 공관에서조차 한국문화 알리기를 하는 둥 마는 둥이었으니, 문 대표의 푸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기’였습니다. 호주 실정을 잘 모르는 처지에서 동포사회 여기저기에 도움을 청해봤지만 그들도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오히려 염려스러운 눈빛을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오기가 생겼지만, 그런 마음으로 호주 주류사회의 빗장을 풀 수는 없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지난 5년은 호주 주류사회의 문밖에서 서성거린 추운 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6·25전쟁 60주년을 맞았고, 호주에 수많은 한국전 참전용사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특히 1950년 11월 평안북도 정주에서 중공군의 포탄을 맞아 전사한 찰리 그린(Charlie Green) 중령의 미망인 올윈 그린(86) 여사가 60년 동안 혼자 살고 있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린 중령은 호주 육군3대대 초대 대대장이었고, 3대대는 가평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서 ‘가평대대’로 불리는 정예부대였습니다.”
슬픈 올윈
2010년 7월, 시드니에는 유난스레 겨울비가 자주 내렸다. 말 그대로 찬비였다. 비가 저렇게 내리는 날 “가라, 그냥 가라”고 말해버린 탓이었을까? 창문 밖의 먼 풍경도 차갑게 느껴지고, 내 마음 안의 풍경도 몹시 을씨년스러웠다. 필자는 23년 전에 호주로 이민 온 시인이다.
시린 손과 마음을 녹여볼 심산으로 실론티 한 잔을 끓였다. 찻잔에서 피어오른 김이었을까? 빗물처럼 고인 우울이 출렁거렸던 것일까? 뿌옇게 성에가 낀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는 오후였다.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더 말해서 뭐하랴.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은 비 오는 날에 술 마실 수 없는 남자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오후까지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한 애술가(愛酒家). 술에 취하면 하루가 가고, 시에 취하면 한 달이 지나가는데 말이다.
그날따라 여러 사람한테서 함께 술 마시자는 전화가 걸려와 사양하느라 애를 먹었다. 우울했다. 결국 친구 하나가 집으로 쳐들어와서 우리 부부를 술청으로 끌어냈다. 그렇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그날은 비요일(雨曜日)이었다.
어둑발 내린 술청 밖으로 겨울비가 추적거렸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금지된 일을 하면 통쾌하다. 비를 핑계로 목요일에 술을 마시다니. 술이 들어오면 이성(理性)은 밖으로 나간다. 쉰 살, 그 너머의 남자가 겨울비에 속절없이 젖고 있었다.
그 순간, 전화메시지 신호음이 울렸다. 6·25전쟁 미망인 올윈 그린 여사였다. 문득 “애고(哀苦), 86세 노인도 겨울비가 내리면 어쩔 수 없으신가보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메시지 내용을 읽다가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필립, 지난 일요일에 앰뷸런스로 시드니병원에 실려 갔다가 1시간 전에 퇴원했어. -슬픈 올윈.”
급하게 전화 버튼을 눌렀다. “NSW주 의사당에서 열린 6·25전쟁 참전용사 행사에 참석했다가 쓰러졌어. 나도 이제는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아.” 그린 여사의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불과 1주일 전에 소피아스포렌 서인수 회장과 함께 그의 집을 방문해서 와인도 함께 마시고, 노래도 불러주면서 행복한 시간을 가졌는데.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올윈 그린 여사는 스물일곱의 나이에 전쟁미망인이 됐다. 6·25전쟁이 그의 남편 찰리 그린 중령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의 나이 서른 살이었다. 그래서 그린 여사의 미망인 연륜은 6·25전쟁의 역사 60년과 똑같다. 혹시 그는 한국을 원망하며 60년 동안 살아왔을까?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그린 여사가 1993년에 펴낸 책 ‘그대 이름은 여전히 찰리(The Name′s Still Charlie)’에 오롯이 담겨 있다. 6·25전쟁 60주년을 맞은 올해 6월25일 그 책의 개정판이 나왔다.
‘우리가 저들을 잊지 않게 하소서(Lest We Forget)’는 영어권의 첫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R. 키플링이 쓴 시의 한 구절이다. 무명용사 위령탑에 새겨진 문구이고, 노병들이 하기식을 거행하면서 묵념할 때 외우는 추모사다. 바로 그 묵념 순서에 가없이 슬픈 표정을 짓는 분이 그린 여사다.
그런데 7월30일 저녁, 시드니 소재 청사초롱 레스토랑에서 열린 전야제를 겸한 디너쇼에서 또다시 그린 여사의 슬픈 눈빛을 보았다. 가수 이은하 때문이었다. 그녀의 히트곡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을 올윈 그린 버전으로 바꾸어서 부른 것. 노래를 부르는 동안 두 사람은 눈물을 글썽였다.
그 내용을 전혀 모르고 전야제에 참석했던 60여 명의 호주 인사도 깊은 슬픔에 잠겼다. 호주에서는 이미 ‘잊힌 전쟁(The Forgotten War)’이 되어버린 6·25전쟁을 다시금 떠올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은하는 자신의 노래를 그린 여사에게 헌정한다고 말했다. 한편 장우는 그린 여사의 신청곡으로 1920년대 팝송을 불렀고, 조항조는 ‘동백아가씨’를 바쳤다.
디너쇼에 참석한 리처드 브로이노브스키 전 주한 호주대사, 브라이언 월 전 대법원 판사, 리처드 앨런 호주시인협회 회장, 로빈 이얀슨 세계시인대회 의장, 카렌 펄맨 국립AFTRS 학장, 케이사르 트라드 이슬람친선협회 대변인, ‘시드니모닝헤럴드’와 ‘디 오스트레일리안’ 기자들도 숙연한 모습을 보였다.
30일 밤 디너쇼는 한국 전통음식과 막걸리로 푸짐하게 만찬을 즐긴 다음 혜강예술단, 장우, 이은하, 조항조, 웅산 등의 공연으로 이어졌다. 디너쇼에 참석한 60여 명의 호주인은 언론계, 문화계, 학계, 법조계, 외교계를 대표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이었다.
한국전쟁 미망인 올윈 그린 여사에게 자신의 히트곡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을 헌정한 이은하씨.
혜강예술단이 연주하는 힘찬 북소리(drumbeats)로 고풍스러운 타운홀 음악당의 무대가 장엄하게 열렸다. 이어서 한국 SBS-FM의 ‘이숙영의 파워 FM’을 14년 째 진행하고 있는 이숙영 아나운서가 등장해서 두 시간 동안 톡톡 튀는 멘트로 무대를 이끌었다.
두 번째 무대는 한국 재즈음악의 대부 격인 장우가 ‘대니 보이’ 등의 스탠더드 팝으로 장식했다. 또한 그는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마이 웨이’를 열창해 큰 박수를 받았다. 장우는 자신의 무대를 갈무리하면서, 한국에서 ‘재즈 디바’로 각광받는 웅산을 소개했다.
시드니 한인동포들과 처음 만난 웅산은 중저음의 매력적인 보이스로 타운홀을 재즈 바다로 바꾸어놓았다. 특히 웅산은 수려한 용모와 세련된 무대 매너를 선보임으로써 그녀가 일본에서 ‘재즈 한류 붐’의 주인공이 된 이유를 알게 했다. 호주 팝음악계의 대부 그랜 베이커도 “한국에 저토록 재즈를 멋지게 부르는 가수가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고 말했다. 당연히 호주 한인동포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그런 다음 이날 타운홀의 밤을 뜨겁게 달구어놓은 인기 절정의 가수 조항조가 등장해서 ‘남자라는 이유로 만약에’ 등의 히트곡을 불렀다. 타운홀은 갑자기 한인동포들의 싱 얼롱(Sing Along) 장소로 변했고 앙코르는 끝없이 이어졌다. 조항조는 객석에 나이 든 동포가 많다는 걸 알고 예정에 없던 트로트 메들리를 불러 앙코르에 답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이은하는 자신의 히트곡과 함께 다함께 어울려 부를 수 있는 곡들을 패키지로 불러 객석에서 한바탕 춤판이 벌어지게 만들었다. 호주 공연이 두 번째라고 밝힌 이은하는 “한인동포들의 표정이 밝고, 호응이 뜨거워서 공연하는 가수들 또한 편하고 즐겁다”고 말했다.
공연장을 찾은 한인동포들도 즐거운 건 마찬가지였다. 공연 시작 두 시간 전에 타운홀에 도착해서 입장을 기다렸다는 이영기(49)씨는 “자꾸 힘들어지는 이민생활의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렸다”면서 “공연을 한 시간 정도 연장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털어놓기도 했다.
한국 가수들의 호주 공연을 빠짐없이 관람한다는 양미란(56)씨는 “그동안 본 공연 중에서 최고였다.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서 이 기분을 연장하고 싶다”면서 타운홀 근처 노래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날 공연장 일대의 노래방과 음식점은 공연을 함께 관람한 친구들의 모임으로 시끌벅적했다.
문미영 대표는 “그냥 행복하다는 말밖에 더 할 말이 없다”면서 “특히 공연이 끝난 다음 입양아 부모들이 찾아와서 한국문화를 체험하게 해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해서 가슴이 뭉클했다”고 말했다.
총영사가 보낸 격려의 편지
한편 김진수 주 시드니 총영사는 다음과 같은 격려의 편지를 써서 소피아스포렌에 전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문미영 대표와 남편 서인수 회장.
본 공연 하루 전 주재국 문화계와 언론계 및 학계의 주요 인사들을 초청하여 한인식당에서 개최된 전야제는 과거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시도였다. 주재국 참석자들이 막걸리와 김치 등 한식을 맛보고 수준 높은 한국 음악인들의 공연을 즐기면서 한류문화의 진수에 매료된 듯 감동하는 모습을 보고 이번 공연의 성공을 예감할 수 있었다.
특히 금년이 6·25전쟁 60년이 되는 해로서 한-호 양국 간 역사적인 우호협력관계를 새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이번 공연이 큰 의의가 있었다고 본다. 전야제에 특별히 초청된 6·25 전쟁 미망인 올윈 그린 여사를 위한 이벤트는 좋은 착상이었다.
가수 이은하는 그린 여사에게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노래가 담긴 CD를 증정하고, 그린 여사는 자신이 저술한 남편의 전기 ‘그대 이름은 아직도 찰리(The name′s still Charlie)’를 이은하에게 전달하는 퍼포먼스는 참석자들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하였다.
시드니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타운홀에서 1600명 이상의 한인동포와 주요 주재국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이번 공연은 한국이 경제대국만이 아닌 문화대국으로 세계적 수준에 손색없음을 확인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번 공연은 일상에 지친 동포들에게 큰 위로와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공연 마지막에 한인동포들은 가수들이 부르는 ‘아 대한민국’을 함께 부르면서 비록 몸은 멀리 해외에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자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내년은 한-호 양국이 수교한 지 5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다. 이번 공연을 통해 그간 다져진 한-호 양국의 협력을 강화하고 양국 국민의 우의를 돈독히 하기 위해 시드니 총영사로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금년 말 또는 내년 초에는 이곳 시드니에도 한국문화원이 개설될 예정이다. 앞으로 한-호 양국 간 클래식 대중문화 교류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교류협력 활성화 방안을 적극 모색하고 싶다. 또한 호주에 한류문화를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공연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소피아스포렌의 세심한 기획과 준비를 높이 평가한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필자가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톱(top) 5 중 하나로 꼽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남긴 말이다. 언제부턴가 이 말을 떠올릴 때마다 소피아스포렌의 지난 5년이 오버랩된다. 거기에 부러진 꽃가지와 피 묻은 손수건이 녹슨 훈장처럼 놓여 있기 때문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우주만물은 항상 변화하여 한 가지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결같을 수 없다. 그런데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게 있으니 소피아스포렌의 소걸음이다. 가끔은 불가능을 꿈꾸는 것 같은 절망감에 빠지기도 할 터인데 그들은 변함이 없다. 인터뷰를 갈무리하면서 문미영 대표가 결연한 한마디를 남겼다.
“가끔 호주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나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그런 다음 ‘한국계 호주인’이라고 스스로 답합니다. 그렇게 하면 소피아스포렌이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호주 주류사회에 열심히 알리는 것. 그게 내 운명입니다. 한국계 호주인으로 우뚝 서는 날까지 소피아스포렌은 계속 정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