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랑이의 발톱은 잠깐 감춰져 있었을 뿐 없어진 게 아니었다. 71세의 야구계 원로가 노익장(老益壯)을 과시하며 그라운드로 복귀했다. 감독으로 10회, 야구단 사장으로 2회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야구인이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룬 사람. 바로 김응용 한화이글스 신임 감독이다. 야구인 출신으로는 사상 최초로 야구단 사장에 올라 6년간 최고경영자(CEO)로 활동하던 그가 사장보다 서열이 낮은 감독직을 불사하면서 하위 팀의 현역 감독으로 돌아왔다. 전무후무한 우승 경력을 가진 김 감독이 한화이글스에서 우승 트로피를 또 들어 올릴 수 있을지 한국 야구계의 모든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프로야구의 감독 자리는 고작 8개뿐이다. 내년에 프로에 입성할 NC다이노스까지 합해도 고작 9개. 이 9명의 감독 중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감독은 더더욱 적다. 이런 상황에서 22년간 프로야구 감독으로 재직하며 무려 10차례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쥔 사람이 있다. 바로 김응용 한화이글스 감독이다.
그는 KIA 타이거즈의 전신인 해태타이거즈 감독으로 9차례, 삼성라이온즈 감독으로 1차례 등 총 10차례 한국시리즈를 제패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는 전무후무한 한국시리즈 4연패기록도 달성했다. 그가 감독을 맡았던 지난 22시즌 동안 거둔 성적은 통산 2653경기, 1463승65무1125패, 승률 0.565다. 한국 프로야구 최장수·최다승 사령탑이기도 한 김 감독은 이런 유례없는 성과를 바탕으로 야구인 사상 최초로 야구단 사장직에도 올랐다.
김 감독은 현재 가장 젊은 야구감독인 김기태 LG트윈스 감독(43)보다 무려 28세 위다. 그는 모든 사람이 그가 야구인으로 더 이상 이룰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아들뻘인 다른 감독들과 겨루기 위해 감독직에 복귀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김 감독이 1년도 버티기 힘들다는 감독직을 그토록 오래 유지하면서 계속 우수한 성적을 낸 비결은 강력한 카리스마, 뛰어난 위기관리 및 커뮤니케이션 능력, 팀워크에 대한 철저한 신봉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감독 시절 아무리 스타급 선수라 해도 성의 없는 플레이나 팀워크를 해치는 행동을 하면 “영양가 없는 타자”라거나 “정신병자”라는 험한 말을 쏟아냈다. 심판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코끼리처럼 그라운드에 등장해 육탄전도 불사했고, 덕 아웃에서는 의자나 방망이를 예사로 부수곤 했다. 선수들의 동요를 막으면서 결속력과 경기 집중력을 높이기 위한 고도의 노림수였다.
그는 또 팀이 연패에 빠졌을 때는 비판과 지적을 자제하고, 연패에서 탈출할 때 심한 질책을 하는 심리전의 대가이기도 했다. 구단주를 비롯한 선수단 외부의 입김이 아무리 세도 철저히 자기 선수를 보호하는 뚝심도 지녔다.
요즘 세대의 눈으로 보면 그는 모든 면에서 투박한 리더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요령과 수완이 아니라 성실과 땀방울을 소중하게 생각해 야구인으로서는 독보적인 커리어를 일궜다. 그는 2010년 사장직에서 은퇴하며 기나긴 야구 인생을 마감하는 듯했다. 하지만 사장 은퇴 2년, 감독 은퇴 8년 만인 2012년 10월 최근 몇 년간 한국 야구계의 최하위 팀으로 전락한 한화이글스의 감독을 맡아 화려하게 현장에 복귀했다. 무엇이 이토록 오랫동안 그를 그라운드 위에 묶어두는 것일까. 왜 야구계는 많은 젊은 감독을 놔두고 산전수전 다 겪은 그를 감독으로 원하는 것일까. 김응용 감독의 리더십 요체를 탐구해보자.
한일은행의 코끼리
김 감독은 1940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출생했다. 6·25전쟁에 맞닥뜨린 소년 김응용은 1951년 1·4후퇴 당시 아버지와 함께 부산으로 피난한 뒤 남한에 정착했다. 이때 만든 호적에 나이가 한 살 적게 올라가는 바람에 주민등록상 1941년생이 됐다.
소년 김응용은 어릴 때부터 다른 소년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거구였다. 신체 골격도 남달랐던 데다 한 살 어린 동급생들과 학교를 같이 다녔으므로 골목대장을 도맡아 했다. 운동 재능도 뛰어나 처음에는 축구 선수로 활동했다.
야구 선수가 된 것은 부산 개성중학교 1학년 때 학급대항 야구대회에 출전하면서부터. 우월한 신체조건을 가진 그는 출전 첫날부터 투수에다 4번 타자까지 겸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바로 다음 날 야구부 선수로 정식 스카우트됐다. 야구부 선수에게 주는 푸짐한 밥과 간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어 정말 열심히 운동했다는 것이 김 감독의 회고다.
고인이 된 김 사장의 부친 김식영 씨는 당시 같은 학교의 서무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한국의 아버지처럼 아들의 입신양명을 바랐던 그의 부친은 야구에 빠져 공부를 등한시하는 아들이 못마땅했다. 아버지는 “야구를 그만두라”고 종용했지만 소년 김응용은 굴하지 않았다. 그는 “그럼 학교에 안 가겠습니다”라고 대들며 3일을 버텼다. 결국 아버지도 백기를 들고 말았다.
야구 명문 부산상고를 졸업한 김 감독은 1961년 실업야구팀인 한일은행에서 선수로서 전성기를 보냈다. 당시 한일은행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실업야구의 최강자였다. 선수 시절 김 감독은 홈런 타자였다. 1965년과 1967년에는 실업리그에서 홈런왕도 차지했다. ‘코끼리’라는 김 감독의 별명도 그때 생겼다. 유독 큰 체구(185㎝ 95㎏)의 김 감독이 1루수로 활동하며 조그만 야구공을 받는 모습이 코끼리가 비스킷을 받아먹는 것과 흡사하다고 해서 이런 애칭이 붙었다. 야구계 인사 중에는 지금도 김 감독을 ‘코 감독(코끼리 감독)’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김 감독은 1973년부터 자신이 몸담았던 한일은행의 감독으로 활동하며 지도자 인생을 시작했다. 1977년에는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에서 한국 팀을 정상에 올려놓았고, 1980년에는 도쿄 세계 아마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남다른 지도력도 선보였다.
해태 왕조의 황제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고, 지도자 인생도 화려했지만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을 때 김 감독은 어느 구단에서도 지도자로 낙점받지 못했다. 그가 한국 실업야구의 간판이자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상당히 의외의 결과다.
물론 당시 김 감독이 미국 유학 중이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그는 크게 낙담했다. 이대로 지도자 생활을 접어야만 하는 것 아닌가라는 조바심이 들 무렵 해태타이거즈 야구단이 그를 사령탑으로 초빙했다.
‘감독 김응용’의 전성기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김 감독은 사령탑 첫해였던 1983년 해태를 한국시리즈 우승팀으로 만들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1986~1989년, 1991년, 1993년, 1996~ 1997년 등 해태에서만 총 9차례 한국시리즈를 제패했다. 9번 우승보다 더 놀라운 것은 ‘한국시리즈 진출=우승’ 공식이다.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기만 하면 상대팀이 누구건 상관없이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우승했다. 한국시리즈 경기 내용도 압도적이었다. 삼성라이온즈와 맞붙었던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는 4승1무2패로 우승했다. 단 2패를 한 것이 가장 나쁜 성적이었을 정도로 해태의 위용은 어마어마했다.
특히 1980년대 후반부터 모기업인 해태의 가세가 기울어 구단의 지원이 다른 구단보다 훨씬 빈약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더 대단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김 감독을 ‘해태 왕조의 황제’로 부르는 이유다.
프로야구가 개막한 1982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 야구는 삼성라이온즈와 해태타이거즈 두 팀의 대결 구도로 전개됐다. 삼성과 해태는 한국시리즈에서 3차례(1986, 1987, 1993년) 붙은 데다 각각 영남과 호남을 대표하는 기업이라는 상징성까지 있어 두 팀의 라이벌 구도는 무척 치열했다. 기업 규모로만 보면 삼성과 해태는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선수단 지원 규모도 마찬가지였다. 1998년 외환위기로 해태가 부도를 맞으면서 두 기업의 처지는 더욱 극명하게 달라졌다.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늘 해태가 삼성을 꺾었다. 게다가 삼성라이온즈가 한국 야구가 전기와 후기로 나눠졌던 1985년의 통합 우승 후 단 한 번의 실질적인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자 영남 팬들의 아쉬움과 갈증은 점점 커져만 갔다. ‘1등주의’를 표방한 삼성 야구단으로서도 용납할 수 없는 성적이었다.
한국시리즈 우승이 절실했던 삼성은 결국 1999시즌이 끝난 직후부터 우승청부사 김 감독을 데려오기 위해 집요한 애정 공세를 펼쳤다. 김 감독의 마음도 삼성 쪽으로 굳어졌고, 언론에서도 그의 삼성행을 기정사실화했다. 하지만 김 감독은 박건배 해태타이거즈 구단주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간 자리에서 박 구단주의 간곡한 설득과 마주했다. 마음을 접은 그는 2000년 시즌 1년 동안 해태에 더 몸담았다.
하지만 해태타이거즈는 더 이상 1980~1990년대 한국 야구계를 호령하던 팀이 아니었다. 선동열, 이종범, 조계현, 임창용 등 주축 선수들의 잇따른 이적으로 팀 전력이 순식간에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것은 물론이고, 구단 살림도 빠듯해져 결국 야구단 운영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까지 전락했다. 김 감독도 더 이상 해태타이거즈에 남을 명분이 없어진 셈이다.
적진의 수장 되다
결국 김 감독은 2001년 삼성의 사령탑으로 변신해 푸른색 유니폼을 입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떠난 지 반 년 만인 2001년 중반 해태 타이거즈는 야구단을 KIA에 매각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김 감독의 삼성은 2001년 정규시즌 1위를 차지했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정규 시즌 3위였던 두산베어스에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매번 우승을 눈앞에 두고 놓쳐야 했던 삼성의 악몽이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지만 김응용 감독은 자신의 이름값을 했다. 삼성은 2002년에도 정규시즌 1위를 차지했고, 한국시리즈에서 당시 ‘야구의 신(野神)’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LG트윈스의 거센 추격을 뿌리치고 삼성 구단 최초의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차지했다. 당시 승장 김응용 감독이 패장 김성근 감독을 치하하며 “야구의 신과 싸우는 것 같아 너무 힘들었다”고 했던 말은 지금도 전설적인 어록으로 야구계에 회자된다.
삼성라이온즈는 2004년에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하지만 현대유니콘스와 9차전(한국시리즈는 7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현대에 패했다. 이에 김 감독은 그해 말 삼성의 사령탑 자리를 애제자 선동열(48) 현 KIA타이거즈 감독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사퇴했다.
야구인 최초 CEO서 다시 감독으로
삼성 구단은 구단에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안긴 김 감독의 공로를 인정해 그를 야구단 사장으로 임명했다. 감독에서 최고경영자(CEO)로 변신한 김 사장은 2005∼2006년 선 감독과 힘을 합쳐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등 사장으로 재임한 6년간 구단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많은 사람이 감독으로서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선동열 신임 감독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예상했다. 일종의 ‘상왕’ 노릇을 할 것이란 우려가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경기장의 선수와 코치진을 제외한 야구단의 나머지 모든 업무 즉 구단 운영, 마케팅, 판촉, 구장 운영, 홍보, 선수단 수급, 트레이닝 등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총칭해 프런트(Front Office)라고 한다. 삼성은 전통적으로 프런트의 입김이 강한 구단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김 감독은 사장으로 취임한 후 일절 현장에 간섭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 김 감독은 2011년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사장과 감독은 각자 다른 역할과 임무를 맡았는데 사장이 감독에게 간섭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현장을 총괄하는 사람은 오직 감독뿐이며, 감독보다 해당 팀의 야구를 잘 아는 사람도 없다. 나 역시 감독을 할 때 위에서 간섭하는 걸 제일 싫어했는데 내가 사장이 됐다고 간섭하기 시작하면 팀이 어떻게 굴러가겠나”라고 답한 바 있다.
실제 그는 6년간 삼성라이온즈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1년에 선동열 감독과 얼굴을 마주한 것이 서너 번도 안 될 정도로 철저히 선 감독을 배려했다. 까마득한 선배이자 스승인 그를 선 감독이 어려워할까봐 마주치면 오던 길도 돌아가려고 했을 정도다.
프런트의 간섭이 심하던 한국 야구계에서 당시 김응용 사장의 이런 행보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이외에도 그는 기업인 출신 야구단 사장 일색인 한국야구위원회(KBO) 이사회에서 야구인 출신답게 오랫동안 자신이 현장에서 느낀 문제점과 개선 방향 등을 밝혀 야구계 운영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사람들이 그를 야구계 최고 원로로만 기억할 무렵, 김 감독은 예고 없이 현장에 복귀했다. 그것도 최근 한국 야구계의 최하위 팀으로 전락한 한화이글스의 감독을 맡았다. 선수단 구성이 훌륭했던 해태나, 선수단 구성은 물론 구단의 지원도 최상이었던 삼성과 달리 한화는 선수단 구성도 구단의 지원도 썩 좋은 편은 아니다.
한화는 2009년부터 2012년까지의 4시즌 동안 2011년을 제외한 무려 3시즌에 8개 구단 중 8위를 하는 처참한 성적을 냈다. ‘국보급 투수 류현진만 혼자 야구하는 팀’ ‘다른 팀에 가면 바로 2군행인 선수들로 1군 선수단이 짜인 팀’이라는 일각의 비판도 만만치 않다. 이미 탁월한 지도력과 리더십을 인정받은 그이지만 한화에서 해태의 기적을 재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특히 그가 한화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내지 못하면 이때까지 감독과 사장으로 쌓은 화려한 이력에도 손상이 간다는 점에서 그의 현장 복귀를 우려하는 시선이 여전하다. 하지만 김 감독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이다. 벌써부터 특유의 카리스마로 선수단을 압도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감독직을 떠난 지 무려 8년이 흘렀고, 고희(古稀)를 넘긴 만큼 이번에 복귀하면서 한결 부드러운 모습을 보일 것으로 내다봤다. 김 감독 역시 “나이도 있으니 더 부드러워지지 않겠느냐”는 취지의 말을 했다. 하지만 이는 의례적인 말에 불과했다.
김 감독은 10월 10일 한화이글스의 홈구장인 대전구장을 방문해 선수들에게 “최근의 한화 성적은 기대에 못 미쳤다. 그렇다고 돈으로 좋은 선수를 마냥 사들일 수는 없는 만큼 젊은 선수를 키우는 방법으로 강해져야 한다. 야구 선수는 못하면 죽는 거지 별수 없다”는 취지의 취임 일성을 날렸다. 해태 시절처럼 선수들을 혹독하게 몰아붙여 죽을 각오로 뛰는 강한 팀을 만들겠다는 출사표인 셈이다.
여든을 바라본다는 망팔(望八)의 나이, 더 이상 부족함이 없는 화려한 커리어에도 김 감독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응용 리더십의 교훈
① 훌륭한 리더는 편애하지 않는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의 최대 이변은 지난 대회 우승국인 이탈리아의 예선 탈락이었다. 이탈리아는 조별 예선에서 2무 1패의 초라한 성적을 냈다. 주된 원인은 마르첼로 리피 감독이 2006년 독일 월드컵 우승 당시의 선수들을 지나치게 중용했기 때문이다.
리피 감독은 현재 최고 실력을 자랑하는 선수들을 모아 새 팀을 꾸리는 대신 과거 자신이 데리고 있었던 선수들로 대표 팀을 만들었다. 파비오 칸나바로, 젠나로 가투소 등 30대가 훌쩍 넘은 고참들의 기량이 눈에 띄게 떨어졌지만 리피는 이를 무시했다. 가투소는 쓸데없는 반칙으로 경기의 흐름을 자주 끊었고 칸나바로도 종종 상대 공격수를 놓쳤다. 반면 지난해 이탈리아 리그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20대 안토니오 카사노는 대표 팀에 발탁되지 못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일본 야구 대표 팀을 맡았던 호시노 센이치 감독은 일본 야구계에서 반(反)요미우리 진영의 대표자로 유명하다. 명투수였던 그는 메이지대 졸업반 시절, 일본 최고 명문 구단인 요미우리 입단이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요미우리는 약속을 깨고 다른 선수를 1순위로 지명했다. 배신감에 사로잡힌 호시노는 주니치 선수 및 감독 시절 요미우리와의 승부에 유독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표 팀을 맡은 호시노는 선수 선발 때부터 이와세, 모리노, 가와카미, 아라키 등 당시 주니치의 주력 선수를 대거 발탁했다. 그러나 요미우리의 간판타자 오가사와라, 투수인 우쓰미와 다카하시는 제외했다. 베이징에서 주니치 감독 시절 그가 아꼈던 마무리 투수 이와세는 많은 경기에서 결정적 순간에 등판했지만 제 역할을 못했다. 한국을 상대로 한 운명의 올림픽 준결승전에서는 이승엽에게 역전 투런 홈런까지 맞았다. 반면 요미우리의 에이스 우에하라는 베이징에서 좀처럼 등판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이처럼 리더가 과거 자신과 일한 경험이 있는 직원을 더 아끼고 편애하는 경향을 ‘내집단 선호(in-group favoritism)’라고 한다. ‘내집단(內集團)’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미국의 사회학자 W G 섬너다. 그는 원시 부족민을 상대로 한 연구에서 사람들이 스스로 ‘우리’라고 평가하는 내집단 이외의 사람들에게 종종 불쾌감, 혐오감, 경쟁심 등을 나타내고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리피 감독이나 호시노 감독의 실패는 리더의 내집단 선호가 야기하는 위험을 잘 보여준다. 베이징 올림픽 야구 준결승전 8회 말에서 한국과 일본은 2대 2 동점이었다. 한 치도 예상할 수 없는 팽팽한 승부에서 호시노 감독은 다른 투수가 있음에도 노장인 데다 구위도 좋지 않았던 애제자를 밀어붙였다. 충격적 패배를 당한 일본 대표팀은 3, 4위 결정전에서도 패해 메달 없이 베이징을 떠났다.
리피 감독도 마찬가지다. 이탈리아 축구계는 그에게 젊은 피 영입을 요구했다. 그러나 리피는 젊은 피보다는 자신이 총애하는 기존 선수들 간의 호흡과 조화가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이탈리아는 최약체인 뉴질랜드, 슬로바키아 등을 상대로 졸전을 펼치며 단 1승도 올리지 못했다.
이처럼 팀 스포츠의 최대 악재는 파벌이다. 김 감독은 “지도자가 특정 선수를 편애하면 파벌이 생긴다”며 “파벌은 조직에 불필요한 알력과 갈등을 초래해 팀을 무너뜨린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시리즈 10회 우승을 차지하는 동안 한 번도 특정 선수를 편애한 적이 없다. 결승타를 날리고 덕 아웃에 들어온 선수에게 제대로 등 한 번 두드려준 적이 없다고 회고할 정도다.
김 감독이 밝힌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라고 왜 고맙고 예뻐하는 선수가 없었겠어. 그런데 내가 누굴 좋아한다고 소문이 나거나, 그런 오해를 살 수 있는 행동을 해봐. 다른 선수들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어. 내가 누구 등을 두드려주면 대번에 옆에 있는 녀석이 ‘나한테는 한 번도 저렇게 안 해주더니 왜 저 선수는 달리 대접해주는 거지’라고 할 거 아냐. 특히 해태타이거즈는 자기가 한국 최고 야구선수라고 생각하는 선수들이 모여 있는 팀인데 말이야. 그런 소리 들을 바에는 애초에 칭찬을 아예 안 해주는 게 나아. 속으로만 칭찬해주면 되잖아”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스타 선수라고 절대 봐주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스타 선수를 더 혹독하게 몰아붙여 선수단 전체에 긴장감을 조성하고, 스타 선수의 자만심을 제어하려고 했다.
김 감독의 이런 행동은 배타적 순혈주의가 강한 한국 기업 및 조직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한국 사회에서는 특정 시기에만 신입 직원을 채용해 기수를 부여하는 공채 제도가 여전히 직원 선발 방식의 주류를 점하고 있다. 이는 조직 구성원의 다양성과 변화 대응력을 떨어뜨린다. 편애를 일삼는 리더가 진정으로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없는 이유다.
② 리더는 심리전에 능해야 한다
김응용 감독은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꼼수’에 능한 감독이다. 자팀 선수는 물론 타팀 선수, 심판진, 때로는 관중과도 교묘한 신경전 및 밀고 당기기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낸다. 만약 그가 ‘힘’만을 강조해 다른 팀을 이기려 했다면 한국시리즈 10회 우승의 위업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선이 굵은 야구를 구사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속에 감춰져 있는 세밀함이 김응용 식 야구의 본질이다. 야구계가 그를 ‘코끼리의 몸과 여우의 지략을 갖춘 지도자’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1991년 한국시리즈에서 그는 한화이글스의 전신인 빙그레이글스와 격돌했다. 당시 김 감독은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잡았던’ 삼국지의 그 전법을 앞세워 빙그레를 대파했다. 당시 해태타이거즈의 에이스이자 한국시리즈 1차전의 승리투수였던 선동열은 1차전의 역투로 인해 손가락에 물집이 잡혔다.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남아 있는 경기에 도저히 출전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김 감독은 매 경기 승부처만 되면 투수 선동열에게 불펜에서 몸을 풀라고 지시했다. 상대방의 기를 꺾어놓기 위한 고도의 노림수였다. 결국 빙그레는 선동열이 아니라 해태의 6차전 선발투수였던 문희수에게 완투패를 당하며 2승4패로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머물렀다.
김 감독의 이런 노림수는 1996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이어졌다. 당시 해태는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현대유니콘스의 명투수 정명원에게 노히트노런 패를 당했다. 그러자 김 감독은 발끈하며 “(현대의 연고지인) 인천 출신 심판들이 노골적으로 현대 편을 든다. 이들이 계속 주심을 본다면 한국시리즈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김 감독의 말은 상대 팀과 심판을 동시에 흔들었다. 이후 해태는 5·6차전을 잡고 여덟 번째 우승을 했다. 그는 심판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육탄전까지 불사하는 거친 항의로도 유명했다. 이와 관련 김 감독은 “상대 팀을 교란한다는 둥, 심리전을 편다는 둥 말이 많았는데 나는 상대 팀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승부에서는 상대 팀을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우리 선수들을 잘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감독이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벌벌 떨고, 불리한 판정이 나왔는데도 덕 아웃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선수단이 감독보다 더 긴장한다는 이유다.
김 감독은 “감독의 표정 하나에 우리 팀 전체 선수의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선수들이 여유 있는 마음가짐을 갖도록 해주려면 육탄전이 아니라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김 감독의 이런 모습은 리더가 심리전과 커뮤니케이션의 달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잘 알려준다.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좋은 말만 하는 것이 최상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선수단이 흔들린다 싶으면 심판에게 강한 어필을 해서라도 선수단의 단합을 유도하고, 투쟁 심리를 자극하는 사람이 진짜 훌륭한 리더라는 뜻이다.
③ 리더는 패배를 생각해선 안 된다
종목을 막론하고 최근 등장한 젊은 감독들은 즐기는 야구, 소위 스포테인먼트(스포츠+엔터테인먼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별난 머리 스타일이나 장신구로 치장을 하고 쇼맨십을 발휘하는 선수도 점점 많이 등장하고 있다. 심지어 일부 감독은 스스로 세리머니의 주인공이 되어 많은 관심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김 감독은 이런 추세가 달갑지 않다는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 그는 “관중은 즐거워야 하지만 프로 선수는 즐거우면 안 된다”라며 “죽을힘을 다해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는 게 프로”라고 강조했다.
김 감독은 “요즘 보면 ‘질 때는 깔끔하게 지고 다음 경기를 준비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프로에 버리는 경기가 어디 있냐. 구장에 관중이 단 1명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게 감독의 임무다. 진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말아야 실제로도 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한 시즌에 130경기를 치러야 하는 야구의 특성상 지는 게 뻔한 경기에 선수단을 무리하게 투입하는 것은 자원 낭비가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교과서적인 폼으로 야구를 하면 부상을 안 당한다”고 밝혔다. 그는 “스타 선수들이 왜 유명해졌겠어. 부상 안 당하고 오랫동안 뛰면서 좋은 성적 냈기 때문에 유명해진 거잖아. 꼭 어중간하게 하는 선수들이 다쳐. 올바른 폼으로 열심히 하면 다칠 이유가 별로 없지”라고 덧붙였다.
같은 맥락에서 김 감독은 9구단, 10구단 등 신설 야구단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현상이 매우 바람직하다고 평가했다. 경쟁할 상대가 많아져야 리그 전체의 수준도 높아진다는 이유에서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야구를 보면 삼성·SK·롯데·두산 등은 계속 상위권에, LG·한화·넥센 등은 계속 하위권에 있는데 이는 관중 동원에도 부정적 요소로 작용하며 한국 프로야구의 수준 향상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 감독은 프로야구가 지금보다 더 발전하려면 문호를 활짝 넓히고,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신설 구단 추가 창설은 물론 외국인 선수도 더 많이 끌어와야 한다는 것.
경쟁을 두려워하는 것은 진정한 프로가 아니라는 김 감독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지금 구단마다 외국인 선수를 2명씩 쓰는데 잘하는 선수 있으면 더 많이 데려와서 수준 높은 야구를 보여줘야 한다. 몇몇 팀이 일본인 코치를 쓰는 걸로도 말이 많은데 그런 일로 왈가왈부하는 거 보면 한심해. 능력이 뛰어난 게 중요하지 코치진의 국적이 무슨 상관이야. 야구인들이 자기 밥그릇만 챙기면 절대 발전이 없어. 지금보다 더 많이 개방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