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노 ‘反미국 親북한’에 질렸다”
- 노무현 “미국도 한국 침략”, 럼스펠드 “오, 맙소사”
- “‘전작권 환수’ 내질러놓고 ‘연기하자’니…”
- “친노, 북한과 평화협정도 맺으려 했다”
- “박근혜 정부 안보기구(NSC) 지혜롭다”
- “한국이 日 집단자위권 100% 오해”
리처드 롤리스 미국 국방장관 고문역이 최근 서울의 한 호텔에서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신동아’ 인터뷰에 나선 그는 먼저 노무현 정부 시절부터 현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최대 군사 현안인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 논란의 내막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미 국방장관과 함께 이 문제를 직접 다뤘고 한국 대통령, 국방장관, 군 관계자들과 자주 만나온 만큼 그 내막을 미국 측 관점에서 잘 전해줄 수 있는 인물이다.
“LA로 가는 게 아니다”
롤리스에 따르면 전작권 환수는 ‘친(親)노무현계가 별 준비 없이 내질러서 탄생’한 것이었다. 곁들여 친노의 ‘반(反)미국, 친(親)북한’ 성향이 질릴 정도였다고 했다. 친노는 현재 제1 야당인 민주당의 강경파를 구성하고 있다.
롤리스는 “2002년 10~12월 한국의 대통령선거 정국은 ‘어글리(ugly·험악)’ 했다. 반미 촛불시위가 거리를 덮었다”고 말했다.
▼ 그래서 미 국방부에서 달라진 게 있었나.
“대선후보 진영도 반미 정서를 활용했다(노무현 후보가 ‘반미면 어떠냐?’ ‘미국에 사진 찍으러 가지 않겠다’고 발언한 것 등). 용산 미군기지 이전, 전작권 환수 구호도 나왔다. 우리(미 국방부)는 이런 요구에 맞게 한미관계를 다시 설정할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이듬해인 2003년 4월 서울에 왔는데….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지체 없이 이런 의사를 전하러 온 것이다. 내 카운터파트는 차영구 장군이었다. 나는 청와대에도 갔다. 반기문 대통령외교보좌관, 김희상 국방보좌관을 만났다.”
▼ 두 사람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나는 우리가 준비한 프로세스에 대해 말했다. 6개월 내에 용산 미군기지의 이전을 개시하겠다고 했다. 이들은 놀라며 ‘안 된다’고 했다. 나는 ‘노무현 팀은 용산기지 이전을 이야기해왔다. 용산을 스타트하자’고 했다. 그러자 이들은 ‘용산을 바로 떠나면 미국이 노무현을 버렸다는 인상을 준다’고 했다. 이에 대해 나는 ‘우리는 단지 평택으로 갈 뿐이다.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용산기지 이전은 2004년 7월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에서 타결된다.
“저 대통령이 또 무슨 황당한…”
노 대통령은 취임 9개월 후인 2003년 11월 17일 청와대에서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을 접견한다. 당시 언론은 ‘노 대통령과 럼스펠드 장관이 덕담을 주고받았고 안보 현안에 대해 긴밀히 의견을 나눴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
롤리스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럼스펠드에게 “장관, 당신도 알다시피, 한국은 외세에 의해 187차례 침략을 당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럼스펠드는 “저 대통령이 또 무슨 황당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라고 속삭였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일본이 97차례, 중국이 85차례 침략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한 차례 침략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신미양요를 암시하며 미국도 한국을 침략한 나라라고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럼스펠드는 “오, 맙소사…미국이요? (신미양요 때 강화도에) 잠깐 머물다 간 걸 갖고…”라고 신음하듯이 중얼거렸다고 한다. 럼스펠드는 롤리스에게 “내가 뭐라고 답해줘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과의 미팅이 끝나고 30분쯤 뒤 한국 외무부의 미국 담당자가 롤리스를 찾았다. “럼스펠드 장관이 노 대통령을 모욕했다고 청와대가 불평하고 있다”고 했다.
이날 노 대통령은 럼스펠드 장관을 만나 “헬로(Hello). 건강하게 보입니다. 그렇게 늙어 보이지 않습니다(You don′t look so old)”라고 인사했다고 한다. 그러자 럼스펠드는 노 대통령의 마지막 말을 받아 “저는 젊습니다(I am young)”라고 조크를 했다. 그런데 청와대는 럼스펠드의 ‘I am young’발음을 ‘안녕’이라는 반말투 한국어로 들은 것이다. 롤리스는 “오히려 나이 많은 럼스펠드 장관에게 ‘그렇게 늙어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게 나이스(nice)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노 대통령과 럼스펠드 장관의 미팅이 전반적으로 크레이지(crazy) 했다”고 회고했다.
청와대에서 롤리스는 오랫동안 알고지낸 한국 외교부 소속 미국담당 고위관료를 만났다. 그의 얘기는 롤리스를 경악하게 했다. 이 관료는 “어젯밤 노 대통령의 측근들이 나를 청와대의 한 방으로 오라고 하더니 파일을 보여주더라. 거기에 내가 ‘AAK No. 4’로 적혀 있었다. 청와대에서 내 공식 별칭이 ‘AAK No. 4’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음은 롤리스와의 대화 내용이다.
▼ ‘AAK’가 무슨 뜻인가.
“‘American Ass Kisser’(미국인의 엉덩이에 키스하는 자들)의 약자다. 노무현 정부 이전에 청와대, 외교부, 국방부에서 미국과 긴밀히 업무 공조를 해온 관료들이 거기에 해당됐다. ‘No’는 일련번호인데 15번까지 있었다.”
▼ 그들이 어떤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가.
“전혀. 유능한 공무원들일 뿐인데 미국 정부와 친하다는 이유로 낙인을 찍은 것이다. 청와대가 AAK 파일을 만들어 당사자들에게 모욕을 준 것도 놀라운데, 이들을 결국 인도로, 이집트로 보내더라. 노무현 정부가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반미적인 정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美 스파이 사건 재조사해야”
2006년 10월 당시 여당(현 민주당)은 국회에서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 등이 국가정보를 수집해 롤리스에게 제공했다’는 이른바 미국 스파이 사건을 터뜨렸다. 수년에 걸친 재판 결과, 이 의혹을 집중 보도한 특정 매체 뉴스들은 ‘삭제’ 판결을 받았다. 롤리스는 “노무현 정권이 미국을 싫어하는 정도가 지나쳐 스파이 사건을 조작했다. 특히 국방부의 나를 가장 큰 방해물로 본 것 같다”고 말했다.
모 기업의 배모 회장은 롤리스에게 보고됐다는 ‘D-47’이라는 번역문서의 작성자로 지목됐다. 배 회장은 “이 문서는 사학법 파동을 언급하면서 ‘사학(私學)’을 ‘Historian line’으로 번역하는 등 비상식적 오역 투성이다. 이런 무식한 스파이가 어디 있나. 번역 아르바이트생을 시켜 급히 조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롤리스는 “당시 검찰은 노무현 정권과 한 몸이 돼 있었기 때문에 수사를 덮었다고 본다. 이제라도 재수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 국방부는 노무현 정부와 접촉할수록 ‘한미관계 재설정’ 결심을 더욱 굳혀갔다고 한다. 롤리스에 따르면 2003년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에서 노 정부의 실무급 인사가 ‘지휘권 체계’에 대해 처음 언급했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은 논의를 반대했다. 그러나 미 국방부는 내부적으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한미 합동군사훈련.
롤리스의 말로는, 윤광웅 국방장관이 럼스펠드 장관에게 전작권 환수 문제를 언급했다. 그러자 럼스펠드는 “당신은 우리가 당신을 위해 이미 열어둔 문을 열어젖히고 계십니다(You are a man who is pushing against the door we have already opened for you)”라고 말했다.
이어진 노 대통령과 럼스펠드의 면담에서 노 대통령은 럼스펠드 장관에게 “우리는 전작권을 환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이에 럼스펠드는 노 대통령에게 “저희를 보십시오. 저희가 용산기지 이전과 전작권 반환 협상을 하러 와 있지 않습니까”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롤리스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럼스펠드가 즉석에서 전작권 반환을 수용하자 깜짝 놀라며 당황했다고 한다.
盧 정부의 북한 감싸기
나중에 노 대통령은 전작권 환수에 대해 기쁘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노 정부가 전작권을 천천히 가져오겠다고 하고 미 국방부가 빨리 가져가라고 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롤리스에 따르면 2006년 10월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에서 럼스펠드 장관은 “2009년 연말까지 갖고 가라”고 했고 윤광웅 국방장관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2011년 연말까지 늦춰달라”고 했다. 이어지는 롤리스와의 대화 내용이다.
▼ 전작권 환수 시점을 두고 양측 의견이 엇갈렸는데.
“2007년 2월 한미 안보정책구상(SPI) 미팅에서 내가 김장수 당시 국방장관 측에 ‘한국 요구대로 반환 시점을 2011년 연말까지로 해줄 테니 대신 전작권 반환과 관련된 사안인 전략적 이행계획(STP)을 지금 바로 짜자’고 역제안했다.”
▼ 김 장관의 반응은 어땠나.
“김 장관이 ‘청와대에서 STP를 2009년부터 하자고 한다’고 해 내가 ‘그건 곤란하다’고 했다.”
▼ 왜 청와대가 2009년을 언급했다고 보나.
“노무현 정부의 임기가 2008년 2월까지니까. 노 정부는 전작권 반환의 정치적 과실(果實)만 취하고 반환에 따르는 모든 문제는 다음 정부로 떠넘기려 했다.”
▼ 그래서 어떻게 했나.
“김 장관이 2주 뒤 워싱턴 국방부에서 게이츠 장관을 만났다. 나도 배석했다. 거기서 게이츠 장관은 김 장관에게 ‘반환 시점을 2012년 4월로 더 늦춰주겠다. 단, STP를 2007년 7월부터 당장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반환 시점을 자기들 요구 시점보다 더 늦춰준 것이니 김 장관은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대신 노 정부가 STP를 맡도록 한 것이다.”
북한 문제를 둘러싸고 노무현 정부와 미국 간 의견 대립이 있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노 정부의 ‘북한 감싸기’로 인한 마찰은 상상 이상이었다고 한다. 롤리스는 “노 정부와 대화하는 것이 꽤 힘들었다”고 했다.
▼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사상 최초로 핵실험을 했다.
“그날 전까지 청와대는 우리와 협의하는 공식석상에서 ‘미국은 북한이 핵을 갖고 있다는 증거를 못 대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 핵 위협은 (핵이 존재하지 않으니)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오케이, 당신들의 입장을 이해한다. 그러나 만약 내일 아침 당신들이 일어났을 때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물었다. 청와대는 ‘그땐 미국 핵을 한반도에 재배치하면 되지 않느냐’고 횡설수설했다.”
▼ 국방부는 어떠했나.
“한국군 관계자가 말하기를, 청와대는 전시계획(war plan)을 짜는 국방부에 ‘북한 핵과 관련한 어떠한 컨틴전시 플랜(contingency plan·비상계획)도 미국과 논의해선 안 된다’는 지침을 줬다. 왜냐하면 청와대가 믿기엔 북한은 핵을 갖고 있지 않으니까. 정말 크레이지 했다. 우리가 파악하기로, 노 정부가 전작권 환수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북한은 핵개발에 굉장히 속도를 냈다.”
김계관 “노무현은 어리석다”
▼ 한국과 미국은 북한 급변사태에 대비한 작전계획을 논의해온 것으로 아는데.
“노무현 정부는 우리에게 ‘미국은 북한 정권 붕괴와 관련된 계획에서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한국이 미국, 중국, 일본 없이 독자적으로 북한 붕괴 문제를 다루는 계획을 갖고 있다. 이건 미국의 비즈니스가 아니다’라고도 했다. 심지어 노무현 정부는 북한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려고도 했다.”
▼ 노무현 정부가 미국 측에 북한과의 평화협정 체결 의사를 밝힌 적이 있나.
“옛날 스토리를 슬슬 끄집어내는 건 북한의 오랜 작전이다. 사람들이 흥분하는 스토리를. 평화협정도 그런 것이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평화협정 이야기를 듣고 몹시 흥분했다. 노 대통령과 우리가 만났을 때 청와대는 ‘노 대통령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 어떻게 대답했나.
“우리는 ‘원더풀’이라고 했다.”
▼ 그런데 왜 노 정부는 북한과 평화협정을 추진하지 않았나.
“우리는 노 정부에 ‘다만, 정전협정문을 주의 깊게 읽어보기 바란다’고 했다.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순간 정전협정은 무효가 되는데, 그러면 주한미군은 아니지만 유엔은 떠나야 한다. 유엔의 깃발 아래 한국에 제공되는 모든 군사적 이익, 예를 들면 일본 내 7개 유엔 공군기지가 유사시 한국 보호를 위해 동원되는 것과 같은 일이 철회된다.”
롤리스에 따르면 북한은 노무현 정부가 ‘친북한 반미국’ 성향을 보이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북한은 노 대통령에 대해 “어리석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어설픈 반미정책으로 오히려 미군을 도왔다는 것이다. 2005년 9월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에 롤리스는 미국 측 부대표로 참석했다. 김계관 북한 측 대표는 사석에서 롤리스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정말 영리하다. 용산기지와 휴전선 근방의 미군을 평택으로 이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미국은 노무현을 속였다. 노무현이 (반미정서에 편승해) 기지 이전을 요구하게끔 했다. 노무현이라는 사람은 어리석다. 북한은 노무현보다 훨씬 똑똑하다. 미국은 주한미군이 다칠 염려 없이 북한을 마음껏 공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군대를 뒤로 물린 것이다.”
“박근혜 면담에 불같이 화내”
롤리스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는 2005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면담을 집요하게 방해했으며 면담이 성사되자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롤리스의 이야기다.
“2005년 3월 박근혜 대표와 럼스펠드 장관 면담 일정을 미 국방부가 확정하던 때였다. 주미 한국대사관 관계자가 내 사무실을 방문해 ‘이 면담을 취소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청와대 지시’라며 ‘만약 취소해주지 않으면 백악관과 국무부에도 항의하겠다’고 했다. 나는 ‘취소하면 외교 선례를 남기게 된다’고 했다. ‘우리도 앞으로 면담 취소를 요구할 것’이라고 했다. 예정대로 면담은 성사됐다. 박 대표 측이 ‘언론 비공개’ 약속을 지켜준 것에 대해 당시 미 국방부는 감사하게 생각했다. 노 정부는 박근혜-럼스펠드 면담을 인지한 후 ‘우리 정부에 대한 모독(insult)’이라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도 미국을 상대로 전작권 환수 연기를 추진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미국의 동의를 얻어 2012년 4월로 된 환수 시점을 2015년 12월로 연기했다. 친노가 내지른 전작권 환수가, 친노 정권 자신은 물론 후대 정권들까지 미국에 환수 연기를 지속적으로 부탁해야 하는 상황을 만든 셈이다.
전작권 환수는 박근혜 정부에 국방비 증대, 대북억지력 약화 같은 여러 현실적 난제를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이념 논쟁으로 정부 리더십이 상처받을 일도 많다. 새누리당 내에서도 ‘전작권 환수 연기하려면 대통령이 사과해야’ ‘이 기회에 자주국방 해야’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또 미국이 수년 정도는 모르겠으나 무기한 연기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이와 관련한 롤리스와의 대화 내용이다.
▼ 박근혜 정부의 요구 내용과 이에 대한 미 국방부의 현 입장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박근혜 정부는 (구체적인 시점을 못 박지 않고) 북핵 위협이 없어질 때까지 전작권 반환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미국의 답변은 ‘이미 날짜가 정해져 있고 한국이 전작권을 가져갈 능력이 있는데 한국이 요구하니 북핵 위협에 대해선 다음 회의에서 논의해보자’라는 것이다. 이 일환으로 미국은 올해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에서 북핵 저지 컨틴전시 플랜을 구체화해달라는 한국 측 요구를 많이 받아주는 것으로….”
미국으로선 북핵 위협이 이미 상수(常數)이므로 ‘북핵 위협이 없어질 때까지’와 같은 요구를 받아들일 마음이 적어 보인다. 핵우산을 제공하기로 이미 약속한 마당에 이 내용을 좀 상세화하고 ‘퉁’ 치겠다는 이야기 같다.
“매우 먼 길 거쳐 만나는 느낌”
▼ 유사시 북핵을 저지할 세부적인 계획을 제공해달라는 박근혜 정부의 요구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과거에는 없던 요구이며, 이런 논의를 하는 건 큰 성과다. 박근혜 정부는 맥을 짚어 자국 안보를 튼튼히 하고 있다. 우리가 매우 먼 길을 거쳐 만나고 있는 느낌이다. 박근혜 정부는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위상과 기능을 강화한 점에서 매우 지혜롭다. 그 덕분에 외교·국방의 통합적, 유기적 전략 수립이 가능해졌다. 실무적으론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NSC를 잘 구조화하고 있다. 일본도 ‘박근혜 NSC’를 지켜보면서 비슷한 조직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 FX 사업으로 여러 이야기가 있었는데 후보기종인 F35A 스텔스기가 한국 방위에 유리하다고 보나.
“내 생각에, 결정적 도움이 될 거다. 왜냐하면 북한, 중국 같은 주변국이 갖고 있는 전투기 대수를 한국이 따라가지 못한다. 양이 아니라 질, 5세대의 좋은 전투기로 대응해야 한다. 특히 핵 비대칭이 문제다. 한국은 이들이 아직 갖지 못한 스텔스기라는 비대칭 전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새 전투기는 앞으로 적어도 30년을 책임져야 하는데, 미국과 한국이 비슷한 수준의 전투기를 써야 연합군으로서 함께 작전하고 공동 방위하는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 그러나 미국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지지한 것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사실, 그 문제는 노무현 정부 이래 한미간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언론 보도를 보면 한반도 유사시 자위대가 주한미군 지원을 이유로 한국으로 진출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인데….
“100%, 완전한 오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워싱턴은 한국이 이런 오해를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 근간은 무엇인가. 한국에 있는 몇몇 사람이 깊이 분석하지 않았을 수 있다. 또 일부는 문제를 일으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곡해했을 수 있다. 한국 때문에 일본도 혼동하고 있다. 이런 오해가 미국이 하려는 일을 훨씬 어렵게 하고 있다. 이것은 오직 미국과 일본 사이의 문제이고 한국과는 전혀 무관하다. 단순히 일본 및 일본 주변 해상에서의 미일 간 군사작전상 편의를 위한 것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미국은 일본 내 공군·해군·병참시설을 이용하지 않고선 한국을 방어하기 힘들다.”
▼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계(KAMD)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그 문제도 큰 오해를 낳고 있다. 미국은 한국이 적합한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갖기를 원하는 것이지, 미국의 전역미사일방어체계(TMD)에 가입하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다.”
“유사시 중국이 北 변방 장악”
▼ 김정은 사후 중국이 북한을 분할 점령할 것이라는 미 연구소 보고서가 최근 언론에 보도됐다. 이런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보는지.
이 질문에 대해선 롤리스와 합석한 마이클 피네건 전 미 국방부 한반도과장이 답을 했다.
“레닝 리포트? 레닝은 내 친구인데, 그 리포트는 몇 가지 잘못된 가정을 하고 있다. 첫째, 중국이 북한을 점령하려 할 때 북한 주민들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가정하고 있는 점이다. 이건 큰 오산이다. 둘째, 김정은 체제가 곧 무너질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볼 땐 그렇게 가정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만약 북한이 몰락한다면 중국은 자국 방어용으로 어떻게든 북한 영토 내 10~15km까지 들어가 상황을 통제하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늘 이렇게 가정해왔다.”
▼ 그렇다면 평양은, 핵은 어떻게 되나. 한국, 미국, 중국은 그냥 지켜보나.
이 질문에 대해 롤리스는 “많은 경우의 수가 있다. 매우 중요한 문제여서 지난 30여 년간 이야기해왔다. 노무현 정부는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지만”이라고 말했다.
■ 첩보극 같은 ‘도재승 서기관 납치 사건’ 秘스토리
“비자금 쌓아놓고도 몸값 떼먹은 전두환 정권에 분노”
롤리스가 인터뷰에 응한 계기는, 그가 진짜 하고 싶은 비밀 이야기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1986~87년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도재승 서기관 납치 사건’의 알려지지 않은 내막이 그것이다. 그는 “최근 ‘전두환 비자금’관련 소식을 외신으로 접하면서 ‘비자금 쌓아두고도 몸값 떼먹었나’라는, 묵혀둔 분노가 되살아났다”고 말했다.
1986년 1월 31일 오전 8시 10분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주재 한국대사관의 도재승(당시 44세) 서기관이 탄 푸조 승용차가 대사관 앞에 다다랐다. 그때 갑자기 연녹색 벤츠 승용차가 앞을 막았다. 이어 소련제 기관총으로 무장한 괴한들이 벤츠에서 나오더니 도 서기관을 벤츠 트렁크에 태웠다. 이들은 푸조 차 앞바퀴를 총으로 쏴 펑크를 내고 달아났다. 사상 초유의 외교관 납치 사건은 대서특필됐다. 납치단체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1년 9개월 만인 1987년 10월 도 서기관이 풀려났다.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공항에 나가 도 서기관을 맞았다. 첫 직선제 대선을 2개월 앞두고 여권에 큰 호재로 작용했다.
10년 뒤인 1998년 1월 ‘신동아’는 익명의 제보를 근거로, “전두환 정권이 도 서기관의 몸값으로 약속한 절반의 돈을 내놓지 않고 떼먹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롤리스는 이번 인터뷰에서 “내가 바로 돈을 떼인 쪽의 핵심 인물”이라고 자신의 실명을 공개하면서 도재승 서기관 납치사건의 숨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래는 그가 말한 이 사건의 전모로, 영화 ‘007시리즈’나 ‘본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범죄와 정치, 배신의 스토리다. 글에서 ‘나’는 롤리스다.
석방된 도재승 서기관의 귀국 소식을 전하는 1987년 11월 3일자 동아일보 1면 보도.
정 씨의 소개로 서울에서 한국 외무부 차관 및 실무자들과 만났다. 이들은 “도재승 서기관을 빼내는 데 1000만 달러의 몸값이 필요하다고 들었다. 그런데 우리는 납치범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연락도 안 된다. 돈은 우리가 대겠다. 3개월 내 데려와 달라”고 말했다.
나는 외무부 측에 조건을 걸었다. “레바논에서 죽은 내 친구인 미국 정부 요원의 시신을 아직 돌려받지 못했는데, 도 씨를 구하는 일과 시신을 받는 일을 함께 진행해도 되느냐”고 했다. 외무부 측은 “마음대로 하라. 도 서기관만 데려오면 된다”고 했다.
나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미술품·보석 거래 사업을 하는 친구인 빅터 샤이토에게 부탁했다. 샤이토는 아르메니아인으로서, 베이루트의 아르메니아인 공동체와 깊은 유대를 갖고 있었다. 샤이토는 ‘얼마 전 독일 지멘스의 직원 두 명이 베이루트에서 납치됐다 몸값을 주고 풀려나는 과정에서 브로커가 동원됐다’는 정보를 듣고 브로커와 접촉했다.
일주일 뒤 샤이토가 내게 전화를 했다. “미스터 도가 살아 있다. 도는 갱단에 납치됐는데 그들은 일본인 외교관을 납치하려다 실수로 도를 납치했다. 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감금해놓고 있다. 도는 거의 죽어가고 있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라고 했다. 샤이토는 “베이루트에서 세력이 강한 무슬림 그룹인 아말(Amal)이 브로커 노릇을 한다. 아말이 도를 찾아냈다”고 했다.
납치범들은 스스로를 ‘이슬라믹 파이터스 오브 리비아(Islamic fighters of Libya)’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400개의 리비아 갱단 리스트를 살펴보니 그런 단체는 없었다. 잡범들이었다. 샤이토는 “아말에 따르면 지멘스 직원도 500만 달러에 데려왔으니 이번에도 500만 달러면 된다. 아말은 이 돈에 죽은 미국인 시신도 찾아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돈을 벌 목적이 없으며 친구인 너를 위해 이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1000만 달러의 반값이면 되고 한 달 내 도씨를 데려올 수 있다”고 외무부에 이야기했다. 외무부는 “당장 착수하자”고 했다. 돈은 도 씨가 살아 있음이 확인될 때, 도 씨를 베이루트 공항을 통해 요르단으로 빼내올 때 절반씩 아말에게 지급하기로 했다.
나는 제네바 리치몬드 호텔로 갔다. 객실에서 아말이 보낸 심부름꾼에게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타임’지를 주면서 “도 씨가 이 잡지를 들게 해 도 씨를 촬영한 뒤 사진을 24시간 내 제네바로 가져오면 250만 달러를 주겠다”고 했다. 제네바에서 베이루트까지는 5시간이 걸린다. 아말의 심부름꾼이 내가 내건 조건대로 도 씨가 찍힌 폴라로이드 사진을 호텔로 가져왔다. 사진 속 도 씨가 들고 있는 타임지에 나만 아는 표시가 있었다. 사진을 확인한 외무부 직원들은 나와 함께 은행에 가서 현찰로 250만 달러를 인출했다. 호텔로 다시 가서 나와 샤이토가 보는 가운데 아말의 심부름꾼에게 돈을 주고 사진을 받았다. 이 돈은 한국 정부의 돈이었을 것이다.
“갱단들, 도재승 재납치에 혈안”
아말의 심부름꾼은 베이루트 공항에서 베이루트의 또 다른 거대 세력인 시리아 단체의 검색에 걸려 돈의 절반을 빼앗겼다. 아말은 “우리 문제니 상관없다”고 했다. 아말은 “남은 돈으로 갱단에서 도 씨를 사와 우리 거처로 데려왔다”고 샤이토에게 연락했다.
그런데 가지 카나한이라는 터프한 사람이 보스인 이 시리아 단체들에 의해 ‘도 씨가 큰돈이 된다’는 정보가 베이루트 갱단들 사이에 퍼지고 말았다. 갱단들은 도 씨를 다시 납치하기 위해 혈안이 됐다. 심지어 ‘도 씨를 죽여도 돈이 된다’고 여겼다. 미국 정부의 친구는 내게 “미스터 도는 베이루트의 뜨거운 감자가 됐다. 이 도시의 갱단들이 완전히 난리가 났다”고 했다.
아말은 도 씨와 남은 돈을 교환하자고 했다. 아말이 도씨를 요르단 암만으로 출국시켜 미리 대기한 한국 외교관이 도 씨를 확인해 제네바 호텔의 다른 한국 외교관에게 통지하면 이 외교관이 미리 와 있던 아말의 심부름꾼에게 250만 달러를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외무부와 안기부는 싸우고…”
나는 외무부에 “남은 돈으로 도 씨를 인계받으면 된다”고 했다. 그러자 외무부는 “서울에서 문제가 생겼다. 돈이 지체될 것 같다”고 했다. 샤이토는 아말에게 “지체될 것 같다”고 말했다. 사흘째 되는 날 외무부 최모 공사가 전화로 “서울에서 외무부와 안기부의 최상 레벨에서 큰 싸움이 났다. 안기부가 ‘이건 우리 일인데 왜 외무부가 했느냐’고 엄청 화를 내고 있다.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샤이토는 아말에게 “1~2일 더 도 씨를 보호해달라”고 했다. 아말은 “도 씨를 집에 데려왔다. 그는 지금 내 딸의 침대에서 자고 있다. 도 씨를 더 데리고 있다가는 내 가족도 위험하다. 도 씨를 거리로 내보내겠다”고 말했다.
나는 서울의 고위급 김모 씨에게 전화해 “청와대에 ‘약속을 지키라’고 해달라”고 요청했다. 김 씨는 “아주 복잡하다. 외무부와 안기부가 싸우고 청와대 고위층이 결정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외무부는 결국 내게 “두 번째 250만 달러는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
샤이토는 “나는 아말과의 약속을 깨뜨릴 수 없다. 또 내 손에 도 씨의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며 “일단 내 돈으로 아말에게 250만 달러를 주고 도 씨를 빼내 한국 정부에 인계해주면 한국 정부가 내게 그 돈을 변제해줄 수는 있는가”라고 했다. 내가 샤이토의 제안을 외무부에 전하자 외무부는 “그건 좋다”고 했다.
아말은 샤이토의 돈을 받고 도 씨를 요르단 암만 공항으로 데려왔다. 한국 외교부 직원이 도 씨를 확인했다. 그를 독일의 미군부대로 데려가 건강검진을 했다. 몇 가지를 물어보려 했지만 도 씨가 도저히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국 정부는 도 씨를 귀국시켰고 전두환 대통령은 공항에서 도 씨를 따뜻하게 맞았다. 전국적인 이슈가 됐고 전두환 정권과 그 대선후보는 정치적 이익을 누렸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250만 달러를 샤이토에게 갚지 않았다. 외무부 차관 등에게 돈을 달라고 요구했으나 그들은 주지 않았다. 우정과 선의를 배신한 것이다.
아말은 샤이토에게 “당신들이 약속을 어기고 5일씩이나 우리를 위험에 빠뜨렸으니 미국인 시신은 찾아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고 샤이토는 큰돈을 잃었다. 샤이토는 지금도 왕성하게 사업을 한다. 나와 샤이토는 전두환 비자금 뉴스를 보면서 “1987년에 전두환 정권은 수억 달러의 비자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아니냐. 그런데 도 씨를 구출해준 친구의 돈 250만 달러를 떼어먹은 것 아니냐. 정말 너무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