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동권 학생에서 만화가로 변신, 그리고 역사를 보다
- 한일관계사에서 김옥균과 안중근의 비중은?
- 정치를 위해 역사를 꾸민 일본의 아시아주의자들
- “동북공정? 중국은 헛된 꿈에서 깨어나라”
‘기동전사 건담’을 만든 이 중의 한 명이라고 하면 우리 젊은이들도 “아, 그 작가!”라고 할 정도로 한국 팬도 많은 편이다. 1947년 홋카이도(北海道)에서 태어난 그가 역사를 소재로 한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966년 아오모리(靑森)현의 히로사키(弘前)대학 서양사학과에 입학한 것과 관련 있을 것이다.
과격 운동권 학생에서 만화가로
일본에서‘전공투(全共鬪)’를 대표로 한 대학가 투쟁이 한창이던 1968년 그는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반대하는 ‘베트남의 평화를 지키는 모임’을 만들어 이끌다 1970년 대학에서 제적됐다.
그 후 도쿄로 상경한 그는 만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만화영화 ‘철완(鐵腕) 아톰’(한국에서는 ‘우주소년 아톰’으로 소개됨)제작사로 유명한 ‘무시(?)프로덕션’의 2기생이 된 그는 애니메이션의 제작과 연출에 참여하면서 경험을 쌓아가다, 1979년 그리스 신화를 재해석한 ‘아리온’을 내놓으며 만화가로 정식 데뷔했다. 그리고 역사와 신화를 소재로 한 만화 제작에 집중해, 1990년 일본만화가협회 우수상을 받게 되는 ‘나무지’를 내놓았다.
일본 고대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오쿠니누시(大國主)’라는 일본 창세기의 신이 한 명 나오는데, 그 신의 별명이 바로 ‘나무지’다. 일본 고대 사서에선 일본을 만든 3대 신 중 하나로 ‘전투의 신’이자 ‘폭풍의 신’인 스사노를 꼽는다. 오쿠니누시의 장인이 바로 스사노다.
그는 이 만화(나무지)에서 스사노를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渡來人)’으로 규정했는데, 이는 ‘일본을 만든 신은 일본에서 나왔다는’ 전통적인 시각을 부정하는 것이라 주목을 받았다.
이렇듯 금기시하는 근·현대사로도 영역을 넓혀, 1996년에는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군상(群像)을 다룬 ‘무지갯빛 트로츠키’, 2000년에는 조선 출신의 풍운아 김옥균의 최후를 소재로 한 ‘왕도의 개(王道の狗)’를 출간하고 지금은 광개토태왕비의 비문을 소재로 러일전쟁기를 다룬 ‘하늘의 혈맥(天の血脈)’을 ‘월간 애프터눈’에 연재한다. 터부를 건드린 이 세 작품은 ‘야스히코의 근대 3부작’으로 꼽힌다.
일본은 일본인과 한족, 조선인, 만주족, 몽골인의 다섯 민족이 협동하자는 ‘5족협화(五族協和)’와 맹자의 왕도(王道)정치를 실현한 ‘왕도낙토’를 만들자며 만주국을 세웠다. 그러나 만주국의 실체는 ‘일본의 괴뢰국’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 구호들이 현실 세계에서 굴절되고 왜곡돼가는 것을 ‘무지갯빛 트로츠키’에 담담히 그려 넣었다.
근대 일본이 겪은 굴절과 오욕의 근원을 밝히는 데에 집중한 그는 한중일 3국 연대를 주장하다 비극적 최후를 맞은 김옥균에 주목했다. 김옥균을 주인공으로 한 ‘왕도의 개’ 취지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대체 일본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단 말인가.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자랑스럽게 여기는 메이지(明治)유신 시대에 이룩한 성과는 언제부터 일그러져 일본을 패권주의 국가로, 온 아시아에 대한 가해자로 만들었는가. ‘왕도의 개’에서 다루는 테마는 바로 그 점이라고 할 수 있다.”(‘왕도의 개’ 4권 후기에서)
한국은 김옥균을 갑신정변을 통해 민씨(閔氏) 일족의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조선의 근대화를 꾀했으나 그 과정에서 일본을 끌어들인 ‘원조 친일파’라는 복잡한 시각으로 본다. 일본은 다르다. 일본 정부는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 한 그를 처치 곤란한 식객으로 냉대했지만, 일본의 지식인들은 그를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헌신한 혁명가이자 우국지사로 추앙했다.
김옥균은 일본 근대사상의 거물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일본 근대민주주의와 인본주의 사상의 아버지인 나카에 초민(中江兆民), 전전(戰前) 일본 우익의 거두이자 국수주의자인 도야마 미쓰루(頭山滿)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람을 만났다. 이들은 갑신정변 실패 후 김옥균의 비극적인 죽음을 보며, 일본의 정책과 대외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파란만장했던 김옥균의 생애가 근대 일본에 끼친 영향을 추적한 작품이 바로 ‘왕도의 개’다.
김옥균과 후쿠자와 유키치
메이지유신 10여 년 뒤인 1880년대 일본에서는 서구 침략에 어떻게 대항할 것인지를 놓고 2개 노선이 대립했다. 한중일 3국이 공동 근대화를 통한 연대를 해 대항하자는 ‘흥아론(興亞論)’과 일본은 아시아와의 관계를 끊고 적극적인 서구화를 추진해 서구의 일원이 되자는 ‘탈아론(脫亞論)’이 그것이다. 탈아론은 훗날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脫亞入歐)’로 연결돼 근대 일본이 보여준 선민(選民)의식과 아시아 멸시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후쿠자와도 처음에는 아시아와의 연대에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계기는 김옥균과의 만남이었다. 갑신정변 3년 전인 1881년 첫 만남에서부터 이들은 서로에게 강렬히 끌렸다. 조선의 근대화를 꿈꾸는 김옥균을 위해 후쿠자와는 물심양면으로 협력했다. 개화파가 주도한 조선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의 발간이 준비되자, 그는 심복을 기술고문으로 파견해주었다.
‘조선인을 교육시키는 데 가장 유용한 도구는 한글’이라는 점을 간파한 후쿠자와는 당시로서는 파격인 ‘조선은 국한문 혼용(混用)을 해야 한다’고 강력히 추천했다. 사재를 털어 한글 활자 주조 비용도 지원했다. 국한문 혼용은 ‘한성순보’의 후신인 ‘한성주보’에서 이루어졌다. 1884년의 갑신정변도 후쿠자와의 사상적·물질적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청국의 개입으로 3일 만에 끝나고, 김옥균을 비롯한 소수의 망명자를 제외한 주동자들은 멸족을 당했다. 이 참상으로 ‘큰 기대’가 ‘큰 실망’으로 바뀐 것일까. 후쿠자와의 아시아관(觀)은 일변했다. 갑신정변 실패 후의 참변을 “인간 사바세계의 지옥이 조선의 경성에 출현했다”고 비난한 후쿠자와는 1885년 2월 ‘시사신보’에 ‘탈아론’이란 제목의 사설을 기고했다. 야만적인 조선·청국과 절교하고 서구열강에 합류하자는 ‘탈아입구’의 논리를 내놓은 것이다. 나아가 그는 “조선의 멸망이야말로 조선 국민을 위한 것이다”라는 극언까지 내뱉었다.
이 주장에 대해 안티테제로서 존재한 것이 ‘흥아론(아시아주의)’이다. 흥아론에는 동양문명의 고결함을 내세우며 국수주의 우익단체인 ‘현양사’를 설립한 도야마 미쓰루와 도쿠가와 막부에서 해군봉행(장관), 메이지 정부에서 초대 해군경을 역임해 ‘근대 일본해군의 아버지’로 불리고, 메이지유신을 성사시킨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스승이기도 한 가쓰 가이슈(勝海舟)가 있었다.
흥아론의 중심세력인 ‘흥아회’(훗날의 아시아협회, 김옥균, 박영효도 관여) 후원자이기도 했던 가쓰는 근대화에 적극적이지만 일본 단독으로 서구에 대항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라고 판단했다. 한중일 3국의 연대와 공조가 정답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만연한 조선 멸시 여론에 대해 “조선은 비록 지금은 약소국이나 과거에는 일본에 문명의 종자를 전파한 스승이었다”고 강조하고, 대원군을 청의 이홍장(李鴻章)과 동급의 인물로, 조선을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할 나라로 만들 인물로 평가했다.
김옥균 암살로 촉발된 청일전쟁
일본 망명 후 김옥균은, 후쿠자와와의 관계는 소원해지는 대신 아시아주의자들과의 관계는 깊어졌다. 그들은 한중일 3국의 연대와 근대화로 서구에 대항하자는 ‘삼화주의(三和主義)’를 제창했다. 그러나 김옥균과 가쓰 가이슈와의 접촉은 ‘왕도의 개’에 묘사된 것처럼 1회로 끝나버린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옥균은 결단을 한다. 갑신정변을 진압한 이홍장과 담판해 청국의 조선 간섭을 중지시키고,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해 한중일이 대등한 연합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한일 관계의 장애물로 보고, 홋카이도나 ‘태평양의 고도(孤島)’인 오가사와라 제도 같은 벽지로 유배 보내기에 급급했다. 민비가 보낸 자객은 끊임없이 김옥균의 뒤를 밟았다. 그런 상황에서 김옥균이 이홍장과의 담판을 추진한 것은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1894년 3월 그는 주변 만류를 뿌리치고 홍종우의 안내를 받아 상하이(上海)로 향했다. 그러한 그를 맹우(盟友)인 나카에 초민과 도야마 미쓰루가 성공을 빌며 배웅해주었다. 상하이에 도착하자 홍종우가 바로 자객으로 돌변해 김옥균을 암살했다. 청국은 조선 정부의 환심을 사려고 김옥균의 시신을 ‘외교적 선물’로 제공했다. 민비는 민씨 일족의 원수이기도 한 그의 시신을 부관참시해 양화진에 효수했다.
잊혀가던 망명자의 비극적인 최후가 일본에서는 좋은 기삿거리가 되었다. 일본 언론은 부관참시를 한 조선왕조의 조처를 ‘전근대적인 야만’이라고 비난했다. 김옥균 암살을 방조한 청국도 한통속이라고 규탄했다. 그 때문에 야만적인 조선·청국과의 관계를 끊고 서구 제국주의에 합류하자는 후쿠자와의 탈아론이 힘을 얻게 되었다.
흥아론을 지지하던 도야마 미쓰루의 현양사 같은 과격파 단체들도 “김옥균 복수”를 외치며 조선과 청에 적극 개입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일어난 사건이 ‘민비 시해’다. 저들이 자행한 ‘국권능욕’적인 행위 때문에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한일 관계사는 터부의 영역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아시아주의는 변질돼 탈아입구(脫亞入歐)적 우월감과 융합되면서 후일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기형아를 만들게 된다. 이러한 여론 격변을 반기고 환영하며 획책한 이가 당시의 외무대신인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였다. 그는 서구열강과 대등한 관계를 구축하는 길은 ‘군사적으로 조선과 청을 제압해 그 힘을 인정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군부와 결탁해 조선이란 먹이를 두고 경쟁자인 청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김옥균이 상하이에 가게 된 것은 전쟁 빌미를 만들려는 그의 연출이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망명자인 김옥균의 일거수일투족을 외무대신이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전쟁 여론을 조성하려면 살아 있는 김옥균보다 무참하게 살해당한 김옥균의 시신이 더 가치 있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왕도의 개’는 김옥균 등이 제창한 삼화주의를 왕도의 상징으로, 무쓰 무네미쓰의 행위를 대외침략노선, 즉 패도(覇道)의 상징으로 그렸다. 상황은 무쓰의 의도대로 흘러가는데 때마침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다. 현양사의 과격파들은 ‘김옥균 복수’와 ‘조선 개혁’을 외치며 동학군 합세를 시도했다.
동학농민운동 세력이 확대돼 진압하는 데 힘이 부치자, 조선 정부는 청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자 일본이 재한 거류민 보호를 명분으로 조선으로 군대를 보내 청군과 충돌했다. 청일전쟁이 일어난 것. 그때 가쓰 가이슈는 개탄하며 전쟁에 반대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전쟁은 일본의 대승으로 끝났다. 일본에서는 청국과 조선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문명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지고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우월감’이 팽배해졌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청국이 과도하게 영토를 잠식해 들어오는 일본을 막기 위해 독·불·러 3국에 중재를 요청해(3국 간섭), 러시아가 일본이 차지하려던 요동반도를 점령했다. 일본은 막부 시대부터 두려워하던 러시아의 남하를 자기 손으로 유도한 셈이 된 것이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은 더 큰 전쟁(러일전쟁)을 준비하게 됐다.
광개토태왕碑文 침략 근거로 조작
청국으로부터 받은 막대한 전쟁배상금은 대부분 전쟁 준비에 충당됐는데, 이는 군국주의 국가를 향한 시동이었다. 야스히코 요시카즈는 ‘왕도의 개’에서 청일전쟁의 막전막후를 근대 일본의 굴절이 시작된 시점으로 본다. 그 절정이 김옥균의 비극적인 최후라는 것이다.
‘왕도의 개’ 말미에는 변질된 아시아주의를 대표할 새 인물이 등장한다. 동학농민운동 때 “김옥균 복수”를 외치며 조선에 상륙한 현양사 제일의 난폭자이자 훗날 흑룡회를 창설해 만주와 조선을 넘나들며 조선 식민지화에 앞장서는 ‘대륙낭인’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다.‘하늘의 혈맥’에도 그를 이야기의 한 축으로 삼아 변질된 아시아주의가 침략 논리로 발전해가는 과정이 묘사된다.
작품은 러일전쟁 직전 도쿄 제1고등학교와 도쿄제국대학의 공동조사단이 광개토태왕비의 비문을 조사하기 위해 만주로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대로 14대 중애천왕의 미망인 신공왕후가 삼한(백제·가야·신라)을 정벌했다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실증적 자료가 될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이 연구를 후원한 우치다 료헤이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그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 나아가 대륙 침략의 명분을 조작해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 돋보이는 것은 광개토태왕비 비문의 훼손과 그 해석 과정에 들어간 음모의 연출이다. 이 비에는 광개토태왕이 5만의 병력을 동원해 한반도 남부에 침입한 왜군을 진압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문제는 그 부분을 묘사한 글귀의 일부가 손상돼 있는 것이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라이위신민)’
이것이 문제의 비문인데 □로 표시한 부분은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다. 일본은 이 문구를 ‘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가야,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유추 해석하고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보았다.
일본은 이전부터 임나일본부설을 통해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의 역사적 정당성을 주장해왔기에, 러일전쟁 전 일본의 첩보기관이 비문을 훼손해 일본의 한반도 원정기사를 조작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작품은 다르게 묘사한다. 중국인 탁본업자가 성급히 탁본을 하다 해당 글자를 훼손했고, 그것을 석고로 덮었다고 해놓은 것.
터부를 꺼내 흥미를 만들다
작품은 임나일본부설과 별개로, 왜군이 고대 한반도에 상륙한 것만큼은 사실이란 전제하에 전개된다. 작가는 고대 일본(왜)이 한반도로 원정했다는 주장의 진위와 일본이 의도를 갖고 비문을 훼손했다는 데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는 역사를 날조해 침략 논리로 이용한 것에만 초점를 맞춘다.
사실 ‘일본서기’나 ‘고사기’ 등에 나오는 신공왕후의 한반도 원정 기사는 신화적인 과장투성이다. 14대 천왕의 유복자를 임신한 채 참전한 신공왕후가 원정을 위해 인위적으로 출산 시기를 늦추었다는 등 비논리적인 묘사가 많다. 신공왕후의 임신에서부터 출산까지의 기간을 생각한다면, 15대 응신천왕은 14대 천왕의 아들이 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응신천왕은 누구의 후예냐가 문제가 된다. 이는 천왕가(家)의 순혈성에 대한 물음이기에 터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잃어버린 왕국’을 쓴 소설가 고(故) 최인호씨는 광개토태왕이 보내준 고구려군이 격퇴한 왜는 일본에 세력을 구축한 가야 세력이고, 응신천왕은 비슷한 시기에 멸망한 금관가야의 후손이라는 대담한 설을 제시했다.
‘하늘의 혈맥’에 등장하는 우치다 료헤이는 천왕가와 한반도가 관련된 수수께끼를 조선 침략 논리로 이용하려 한다. ‘신공왕후는 원정 중에 임신했다. 아이의 진짜 아버지는 같이 참전한 중신 다케우치노 스쿠네일 것’이란 일반 연구자들의 견해를 반박하며 ‘응신천왕 아버지로서 격에 맞는 인물을, 광개토태왕비문 연구를 통해 날조해낼 것’을 요구한다.
우치다는 어떻게 속였는가
비문 조작 시비가 있었던 광개토태왕비. 중국 측 연구에 따르면 비문 훼손자는 이 비석의 탁본을 떠서 팔아먹던 중국인 탁본업자라고 한다.
일본과 조선이 한 뿌리라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은 에도(江戶) 시대부터 존재해왔고, 아시아주의에서도 일본과 한국이 연대해야 한다는 논리의 근거로 작용해왔다. 이 설을 신봉했던 우치다 료헤이는 이 설을 악용해 조선과 만주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정당화하려 했다.
이 만화에는 일선동조론에 동조해 한국과 일본이 한 나라가 되어 러시아에 대항하자고 하는 조선인도 등장한다. 우리로서는 아주 불편한 묘사다. 그러나 실제로 흑룡회와 연합해 조선의 식민지화를 앞당긴 조선인들이 있었다. 동학 출신의 이용구가 창설한 ‘일진회’가 그것이었다.
‘하늘의 혈맥’은 현재 연재 중이다. ‘왕도의 개’가 일본 근대사의 굴절과 침략 국가로의 전환을 묘사했다면, 이작품에선 그 굴절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야스히코 요시카즈는 ‘하늘의 혈맥’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그는 “우치다 료헤이 같은 인물들이 ‘어떤 식으로 자신의 꿈을 말하고 어떤 사람들을 속였는지’를 직시해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야스히코 요시카즈
“일본은 일본대로 한국은 한국대로 가면서 협력하자”
▼ 김옥균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터부의 역사를 만화로 그리는 야스히코 요시카즈
▼ ‘왕도의 개’ 후기에 ‘김옥균의 이상이 조선과 일본 관계를 왕도로 이끄는 지표가 될 수 있었다’고 적어놓았다. 김옥균의 삼화주의와 일본의 아시아주의는 어떤 관계가 있다고 보나.
“한중일 3국이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기에 사실상 같았다고 본다. 지금 연재하는 ‘하늘의 혈맥’에는 안중근이 등장할 예정이다. 최근 하얼빈에 안중근 동상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세우는 게 좋다고 본다. 그 동상에는 안중근의 주장인 ‘동양평화론’을 반드시 새겨 넣어야 한다.
외교평론가인 오카모토 유키오는 ‘케네디 암살범인 오스왈드의 동상을 세운다면 미국인들이 분노하지 않겠냐’며 반대했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오스왈드는 이용당했으나 안중근은 확신범이었다. 오스왈드에게는 철학도 뭣도 없었지만, 안중근에게는 동양평화론이란 철학이 있었다.”
▼ 일본에서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죽인 것에 대해 ‘안중근이 표적을 잘못 잡았다’‘이토야말로 조선을 병합하는 것을 반대했다’라는 비판이 나오지 않았는가.
“그래서 안중근이 틀린 부분도 함께 공부해야 된다는 것이다. ‘왜 이토를 죽였는가’를 놓고…. 그가 죽였어야 할 이는 (일본의 이익선을 주장하며 조선 장악을 주장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나 을사조약 때 총리대신을 한 가쓰라 다로(桂太郞)였다고 본다. 이토는 조선병합에 반대했다.”
“안중근의 저격이 조선병합 가속화”
▼ 그것은 일본 실력자들만 아는 것이다. 안중근은 알 수 없지 않았는가.
“그렇다. 하지만 이토를 죽인 것이 결과적으로 조선병합을 가속화했다.”
▼ 만화에 안중근을 등장시키는 것은 안중근과 김옥균의 사상에 공통점이 있다고 보기 때문인가.
“다소 닮았다고 본다. 성미가 급한 면까지 두 사람은 비슷하다.”
▼ 아시아주의가 김옥균과 안중근 사상에도 연결됐다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안다고 해도 터부로 여기는 이가 많을 것이다. 아시아주의가 대동아공영권과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연결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일본도 한국 이상으로 터부시한다. 아시아주의가 대동아공영권 주장으로 연결됐다는 것을 일본인은 다 자각하고 있기에 학교에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도야마 미쓰루나 우치다 료헤이는 교과서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반면 나카에 초민은 교과서에 ‘민주주의의 선구자’로 평가해놓았다. 탈아론자가 서구적 부국강병을, 아시아주의자가 동양의 고결함을 강조했다면, 나카에 초민은 그 가운데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뤘다.
그런데 나카에와 함께 김옥균을 응원하고 그의 중국행을 배웅한 것이 도야마 미쓰루였다. 도야마는 여러모로 미심쩍은 인물이지만, 그냥 터부시하기만 해서는 일본의 근대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 터부시되는 아시아주의의 의의는 무엇이었다고 보는가.
“탈아입구론의 위험성을 확실히 지적한 유일한 대항마로서 의의가 있었다.”
▼ ‘하늘의 혈맥’은 러일전쟁 무렵 우치다 료헤이에 의해 아시아주의가 조선을 식민지로 병합하는 논리가 되는 것을 보여준다.
“우치다가 동등한 지위에서의 합방을 믿었다고 볼 수는 없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빈사(瀕死) 상태의 조선과 대등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인에게는 대등한 합병이라고 선전하면서 실제로는 식민지로 병합한 것이다.”
▼ 그것이 바로 침략임을 ‘하늘의 혈맥’에서 보여줄 것인가.
“당연히 그렇게 묘사해야 한다.”
▼ ‘하늘의 혈맥’에서는 우치다 료헤이가 광개토태왕 비문 해석을 두고 학자에게 연구 내용을 조작하라고 요구하는데, 이 대목은 실재를 근거로 한 것인가.
“그 부분은 상상이다. 상상이라 해도, 일본과 한국은 원래 같은 나라라는 논리가 한일합방론의 추진제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한일 고대사는 양날의 검
▼ 광개토태왕비문의 일부가 훼손된 상황을 성급한 탁본 작업 중에 일어난 것으로 묘사해 놓았던데, 한국에서는 일본의 정보기관이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로 만들려고 일부러 지웠다는 의견이 많다.
“일본에서도 그렇게 믿는 이가 많다. 한국 출신의 재일사학자(이진희)가 죽는 순간까지 그 설을 믿었다. 그러나 일본 정보기관이 훼손했다는 설은 중립적인 중국 측 사학자의 조사로 부정되고 말았다. 중국 사학자는 비문 훼손자가 중국인 탁본업자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당시의 탁본업자들은 지금으로선 생각도 못할 거친 방법으로 탁본을 떴고, 도중에 훼손된 글자에 석고를 덧댔다.
일본으로서는 몇 글자 지우는 게 득이 될 수가 없다. 그 부분은 광개토태왕이라는 고구려의 영웅이 침입해온 왜를 격퇴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일본 처지에선 굴욕적이다. 조작하려면 비석을 쓰러뜨리고 땅에 묻는 게 나았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인의 시야가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든다. 비문 조작설은 ‘일본이 바다를 건너 원정해 왔을 리가 없다’ ‘이기든 지든, 어디까지 들어왔든, 왜가 바다를 건너왔다는 것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에서 비롯한 것 아닌가 생각된다.
(한국인의 처지에서는) 일본의 식민지배 논리로 연결될 수 있으니까 인정할 수 없다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저런 후진국(고대 일본)이 한반도까지 건너왔을 리가 없다는 식의 논리도 있는 것 같고….”
▼ 한국에서는 일본 천왕가에 가야의 피가 흐른다는 주장이 있다.
“그것은 터부임과 동시에 내가 아시아주의자들의 역사관에 주목한 점이기도 하다. 일선동조론이 우익적인 학문이 돼버리는 것은 ‘고향이니까 한국을 취하는 게 뭐가 나쁜가’ 식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주장은 ‘양날의 검’이 된다.”
▼ ‘양날의 검’ 의미를 보여주는 것도 작품을 만드는 목적 중 하나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만, 일본에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논의를 하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아시아주의와 관련된 것은 언급하는 것조차 좋지 않다’는 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냄새나는 것에 뚜껑을 덮는 행위일 뿐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중국 전문가인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본이 전쟁에 져서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해도 이는 진짜로 반성해서 된 것이 아니다. 아시아주의를 진정으로 극복해야 민주주의가 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디가 잘못되었고 어디를 고쳐야 하는지를 직시해서 터부를 극복해야만 한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대한국인 안중근 (오른쪽), 조선병합에 대한 양해를 얻기 위해 러시아의 재상과 회담차 하얼빈 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가운데 모자 벗으며 인사하는 이). 피살되기 1분 전 모습이다.
▼ 터부를 직시하고 극복하기 위해 작품을 그린다는 뜻인가?
“고바야시 요시노리(극우 만화가)는 ‘도야마 미쓰루를 배우자’라는 제목의 책을 냈지만 도야마는 극복해야 할 인물이다. 우치다 료헤이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어떤 꿈을 이야기하면서, 어떤 이들을 속였는지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매력적인 인물이기에 더더욱 극복하는 데 애를 써야 한다.”
▼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단히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고대의 사람들은 지금의 중국과도, 한국과도 관계없다고 생각한다. 중국이 진정으로 긍지를 가질 영토라 할 수 있는 곳은 중원이다. 중화제국을 부흥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청국의 최대 영토를 중화제국의 땅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모순이다. 청 왕조는 중화민족이 아니었다.
만주국 창설은 어느 정도까지는 정통성이 있었다고 본다. 청국이 멸망할 때 만주족이 중원을 중화민족에게 돌려주고 자기 영지로 돌아가는 것, 일본이 그것을 응원해서 진정한 만주인의 나라를 만들어주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때의 만주인이 진정한 만주인이었는지, 만주의 중국인 비율은 어느 정도였는지, 일본이 정말로 만주인의 나라를 만들어주려고 했는지 등을 의심해본다면 다 부질없다는 생각도 든다. 죽은 아들 불알 만지기다.”
▼ 결국 일본은 만주국도 조선처럼 식민지로 만들려 하지 않았나.
“그래서 일본이 ‘좀 더 마음을 비우고 옆에서 응원만 하겠다는 식으로 했었다면…’ 하는 것이다. 조선에 대해서도 병합을 하지 않고 백업만 하고, 그 대신 ‘사이좋게 지내자’고 했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있다.”
긍지를 가진 소일본주의 필요
▼ 진정 그것이 불가능했는지도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인가.
“미국과 영국은 일본에 ‘조선을 차지하라’고 권했다. 그때 일본인들이 ‘아니다. 선조는 같았는지 몰라도 지금은 전혀 다르다. 저 사람들은 자존심이 매우 높아서 안 된다’라고 할 수 없었는가하는 생각이 든다.”
▼ 그것은 전후 총리대신을 지낸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의 ‘소일본주의’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식민지 같은 것은 필요 없다. 일본열도 개발만으로도 충분하다. 조선도 대만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준다면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에 대해 도덕적 우위에 설 수 있다’고 했던….
“나카에 초민처럼 탈아입구와 아시아주의 사이를 걸어가자는 것이 이시바시 단잔의 생각이었다. 그러한 방식은 정말로 현실화할 수 없었는가. 대국이 안 되어도 좋지 않았겠는가?”
▼ 그런 의미에서 패전 이래 60년간 일본이 걸어온 길은 소일본주의가 승리한 것이 아닌가 싶다. 식민지 없이도 일본이 한때나마 세계 1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던 것을 본다면 말이다.
“그것은 긍지가 있는 소일본이 아니었다. 미국의 속국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었을 뿐이다.”
▼ 전후의 일본도 올바른 상태는 아니었다고 보는가.
“그렇다. 지금 아베 총리가 과거 회귀적인 면을 보이고, 전쟁 전으로 돌아가자고 해서 비판받고 있다. 그러나 반수 이상의 일본인은 알고 있다. 최소한의 긍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일본은 언제까지 미국에 기대며 살아야 하는가. (아베 총리가) ‘보통의 대국’을 목표로 하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자기 나라는 자기 힘으로 지키고 경제적으로도 자립하자고 하는 것 같다. 그러니 (일본인들은) 그것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아베는 그러한 것을 주장해 터부의 영역을 좁혀간다. 터부의 영역을 건드리니까 밖에서 보기에는 과거회귀처럼 비친다. 그러나 거꾸로 보면 일본인이 터부의 영역에 대해 얼마나 부자연스럽게 눈감고 있었는지, 한국은 잘 모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 하지만 한국에서는 일본이 우경화한다고 보는 이가 많다.
“아베 정권은 확실히 지지율이 높다. 일본인이 아베를 지지하는 것은 군사대국으로의 회귀보다는 왜곡된 소국주의, 군대 없는 부국이 얼마나 불완전했는지에 대한 반동이라고 생각한다.
전후 일본 교육에는 많은 터부가 존재했다. 그렇다보니 전쟁 전 일에 대해 반성하는 게 아니라, 눈을 질끈 감고 아예 없었던 일처럼 여기면서 살게 되었다. 전쟁 직후의 일본 교과서는 나름대로는 민족적 영웅이라 할 만한 노기 마레스케(러일전쟁 참전 육군 장군)나 도고 헤이하치로(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해군 제독)조차 싣지 않았다. 군인이었던 사람은 다 삭제해버리는 식이었다.”
쿨하게 말하는 시대를 만들자
▼ 그러나 일본의 혐한론(嫌韓論)은 지나치다. 지난 1년 사이 일본의 한 석간신문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한국에 대한 나쁜 소식과 비난기사를 헤드라인으로 뽑아 올렸다.
“지금의 혐한·혐중(嫌中) 여론은 지나치다고 본다. 옛날의 일본을 닮았다.”
▼ 한국에선 지금 동아시아 정세가 청일전쟁 전야 같다는 시각도 있다.
“지금의 한국은 약소국이 아니니 그때와 같을 수가 없다. 지금의 문제는 일본이 상대들로부터 ‘네가 싫다’라는 소릴 반복해서 듣게 되자, ‘그래 나도 네가 싫어’란 식으로 반응하게 된 것이다. 일본인은 김치를 좋아하고, 한류 드라마를 좋아하고, 중화요리를 좋아하면서 별생각 없이 살아오다가, 갑자기 상대(한국, 중국)의 반일감정에 직면하게 되니 반사적으로 반감을 가질 수도 있다고 본다.”
▼ 큰 문제는 없다는 뜻인가.
“일본인 관점에서 무책임하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일본인을 신뢰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일본인은 이런저런 문제를 갖고 있지만, 기본적인 교육을 받았고 정보도 자유롭게 구할 수 있기에, 교과서에 씌어 있어도 ‘이상하다’ 싶으면 믿지 않으려 한다. 교과서의 내용이 바뀐다고 해서 일본인의 생각이 일제히 따라가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가끔씩 이상한 소리를 하는 일본인이 나온다 해도 그가 일본인 전부를 대변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 한국에도 독자가 많은데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일본 만화 문화는 폭이 넓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룬다. 정치사상, 성 풍속, 난센스, 개그에 이르기까지 통제 없이 자유롭게 그린다. 정부의 지원도, 통제도 없고 전부 자기 책임으로 이뤄진다. 일본인은 그러한 자유로움 속에 살고 있기에 이상한 시대가 오지 않는 한, 한 가지 사상으로 물드는 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래도 모르니 터부를 더 줄여서, ‘천왕가에 한국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그렇다고 해서 뭐 나쁠 것은 없잖아’라고 쿨하게 말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면 괜찮지 않겠는가.(웃음) 그런 뜻에서 일본인을 좀 더 신뢰해주시면 감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