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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관료제의 원조, 일본 관료조직 대해부

‘캐리어’ 되면 평생 보장 그래도 ‘진골’은 도쿄대 법학부

한국 관료제의 원조, 일본 관료조직 대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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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인 16일 저녁. 다케나카 장관이 미야우치 자문회의 의장과 식사를 하면서 전날 전해들은 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를 찾는 전화가 이시하라 행정개혁장관에게서 걸려왔다. 내일 고이즈미 총리 면담 일정이 잡혔다는 것이었다.

총리 면담시간은 길지 않았다. 미야우치 의장은 관료들이 이미 조정을 끝낸 사항에 대해 언급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관료들이 아직 결론을 내지 못한 2가지 안건, 그 가운데에서도 의약품의 소매점 판매 허용 건에 관해 논의를 집중하기로 했다.

17일 총리 관저 내 총리 집무실. 미야우치 의장은 책상에 2개의 영양드링크제를 올려놓았다. 똑같은 브랜드였으나 하나는 의약품, 다른 하나는 의약부외품으로 각기 지정된 것이었다. 현재의 제도 아래에서는 후생노동성이 ‘의약부외품’으로 인정한 것만 편의점에서 팔 수 있다.

“어느 것을 편의점에서 팔아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미야우치 의장이 총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총리는 흥미롭다는 듯 드링크 병을 바라보았다.



다음날인 18일. 총리는 ‘안전에 문제가 없는 의약품 전부를 소매점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한다’고 결정했다. 일반인의 편의를 고려한 것이었다. 후생노동성 등 관료들이 약제사 등의 입장에서 어떻게든 판매 해금을 막아보려 했던 시도는 일단 좌절됐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약국 외에서도 판매가 가능한 약품의 구체적인 품목과 판매 방법을 검토하는 것은 결국 주무 부서인 후생노동성의 몫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10개의 안건에 대해서는 사실상 각 부처간 협의가 끝난 터라 더 이상 논의해봤자 아무 성과가 없다. 결국 야쓰다 교수 등 개혁회의 멤버들은 관계부처 간부들이 이미 조정을 끝낸 10가지 안건에 대해서는 자문단의 의견을 별도로 병기해 정부에 보고하는 것으로 임무를 마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일화는 일본 정부의 개혁이 어떤 과정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정부는 정책을 독자적으로 결정했을 때 생기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민간 자문기구를 구성한다. 그러나 이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고 실제 결정은 정부 및 담당 관료가 한다. 민간기구는 결국 정책 실패시 여론의 화살을 피하기 위한 방패막이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정책, 특히 공무원 조직의 ‘이익’을 건드리는 개혁 정책은 기득권을 누리는 소수와 관의 유착으로 좀처럼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공무원에게 자체 개혁을 맡기면 사회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수준이 아닌, 공무원 조직이 용인하는 만큼의 개혁만 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국파관료재(國破官僚在)’

한국의 경우도 정부 각 부처마다 제 기능을 못하는 자문기구, 심의기구, 협의체를 숱하게 갖고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각 부처는 자문기구 등이 제 기능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문화관광부의 한일문화개방정책과 관련한 한 자문기구에 관여하고 있는 A씨는 “노무현 대통령 방일 전 추가개방 의견을 강력히 제기했으나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서 “대체 뭐 하러 이런 기구를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관료조직이 갖는 개혁과 변화에 대한 저항, 아니 저항을 넘어선 억압 기구로서의 속성은 권력의 현상 유지와 확대의 수단으로 등장한 관료 기구의 역사적 연원에 비춰볼 때 생래적인 것인지 모른다.  

항간에서 아무리 경제가 어렵다 해도 국민 개인과 법인으로부터 거둬들인 세금, 국가예산을 이용해 각종 공공사업을 기획·추진하는 공무원들은 위기의식이 희박하다. 나라는 망해도 공무원 조직은 유지될 거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국파산하재(國破山下在)’. ‘나라는 망해도 산천은 그대로’라는 뜻의 이 말은 전란으로 지새던 중국 고대역사 속에 등장했다. 필자는 정부 부처를 출입할 때 고급 공무원들과 회식하는 자리에서 취기를 빌려 ‘국파관료재(國破官僚在)’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거 무슨 실례되는 말이냐”며 정색하고 반론을 제기한 공무원도 있었다.

필자가 그런 말을 한 데에는 나름의 뜻이 있었다. 해방 이후 한국의 역사를 보자. 일제시대에 일반 행정, 사법, 경찰, 심지어는 제국 일본군의 ‘졸개’ 노릇을 한 이들까지 이승만 정권 아래서 대다수 살아남았다. 반민족행위로 지탄받기는커녕 해방조국에서 떵떵거리고 살았던 것이다. ‘대일본제국’의 공무원들이 ‘대한민국’의 공무원이 됐다. 이는 심하게 말하자면 어느 나라, 어느 정치세력에도 봉사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그런 뜻에서 ‘관료조직의 몰가치성’을 거론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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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헌주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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