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지휘부와 함께한 조만식 선생(오른쪽에서 두 번째). 조만식 선생 왼쪽이 당시 소련군 실세이던 군사위원 레베제프.
소련은 얄타회담에서 참전 대가를 받는 조건으로 유럽에서 전쟁이 종결된 후 2~3개월 내에 대일전에 참가해 만주의 일본군을 격멸하는 임무를 수행한다는 데 최종 합의했다. 소련군의 대일작전에는 만주 진공작전의 일환으로 해군이 한반도 북변 항구들을 봉쇄하고 전황에 따라 해병대를 상륙시키는 한편, 지상부대 일부를 만주 전구(轉句)에서 남하시켜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계획도 포함됐다.
소련군의 전략 구상에는 개전과 동시에 한반도로 진공한다는 계획이 포함되지 않았다. 작전계획상 목표는 만주에 있는 강력한 관동군을 분쇄하는 것이었으며 한반도에 대한 작전은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보조적인 작전에 지나지 않았다.
소련의 대일 참전은 극동의 전후처리에 소련이 필연적으로 개입하게 된다는 것을 뜻했다. 그것은 또한 한국의 북변 항구들이 소련군의 작전범위에 포함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전후 한국 문제의 해결에 소련이 개입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소련은 대일 참전을 계획하면서 전후 한국 문제 해결과 관련해 어떤 구상을 하고 있었을까.
건준과 공산당이 1대 1로 합작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루스벨트는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고 한반도를 둘러싼 관계국의 이해를 조정하는 방안으로 한국에 국제신탁통치를 실시하려는 계획을 발전시켰다. 루스벨트의 구상은 이후 수차례에 걸친 연합국 회담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신탁통치 구상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에 ‘적당한 시기’라는 유보 단서를 설정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재확인됐다. 테헤란 회담에서도 루스벨트는 한국이 자치능력을 습득할 때까지 40년간 후견제를 실시한다는 구상을 밝혀 스탈린의 동의를 얻어냈다. 1945년 2월8일 얄타에서도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전후 한반도에 20~30년 동안 국제신탁통치를 실시할 것과 외국 군대는 주둔시키지 않는다는 데 합의했다.
전시 회담에서 소련은 시종일관 미국의 신탁통치 구상을 청취하고 그것에 이해를 표명하는 정도에 머물고 자국의 대한(對韓) 구상을 적극적으로 표명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소련군의 대일 작전지역을 만주에 국한해 전후 한반도가 소련의 점령지역에 포함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소련은 이러한 미국의 의도를 뛰어넘는 적극성을 발휘해 소련이 한국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을 미국에 주지시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한국의 북변 항구에 대한 보조적인 작전을 통해 전후 한국 문제에 어느 정도 개입할 가능성이 보이자 대한 구상을 서서히 가다듬어 갔다.
소련군 최고사령부가 대일 작전구상을 완성한 1945년 6월29일 소련 외무성은 한국에 대한 구상을 명확히 하는 정책 보고서를 준비했다. 이 문서는 19세기 이래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국제정치를 검토하면서 전후 한국 문제 해결에서 소련이 취해야 할 태도를 언급하고 있다. 소련 외무성은 소련 극동지역에서 소련의 안보를 위협해왔고 앞으로도 위협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일본의 영향력을 한국에서 철저히 제거하는 데 일차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한반도에 소련에 우호적인 독립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소련의 안전을 보장하는 가장 유력한 방안이라고 판단했으며 신탁통치 실시는 소련의 주도적인 역할이 보장되는 조건에서 차선의 방책으로 간주했다.
한반도를 향해 급속히 남진하던 소련 제25군의 선발대는 1945년 8월21일 함흥에 진주했다. 북한 주둔 소련군사령관 치스차코프는 24일 비행기로 함흥에 도착했다. 치스차코프는 도청 간부들과 행정권 접수 교섭을 개시해 일본헌병과 경찰이 치안을 유지하고, 행정사무는 종전대로 도지사와 그 부하직원이 집행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이날 오후 함경남도 공산주의자협의회와 건국준비위원회 지도자들이 치스차코프를 방문해 행정권을 비롯한 일체의 권한을 넘길 것을 요구했다. 치스차코프는 이 요구를 받아들여 도용호를 위원장으로 하는 집행위원회가 함남의 치안 행정 일체를 장악할 것을 통고하는 한편 헌병·경찰관의 무장해제를 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