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현대 중국에서는 그 밝은 측면도 자주 거론된다. 낡은 명분에 구애하지 않는 ‘다양성 속의 자유경쟁’으로 발전이 한층 빨라졌다는 것이다.
그 시대구분도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견해로 엇갈린다. 하나는 기원전 475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라는 주장이다. 다른 견해는 기원전 403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로 잡는다.
그런데 기원전 475년은 명목상 천하를 다스린다는 주(周) 왕조의 분가이기도 했던 강대국 진(晉)나라로부터 그 신하 격인 한(韓)·조(趙)·위(魏) 3가(家)가 반란을 일으켜 주가(周家)를 멸망시키고 영토를 분할한 해다. 또한 기원전 221년은 서북지방의 강대국 진(秦)나라에 의해 천하통일이 이뤄진 해다.
한편 기원전 403년은 쇠락한 주 왕조가 마지못해 한·조·위 3가의 주가 분할이라는 하극상을 합법화하고, 그들 3가를 제후국으로 승인한 해다. 이는 주 왕조가 대의명분과 존재가치를 스스로 포기한 행위였다. 한국사에 비유한다면, 김일성 집단이 스탈린의 허락을 얻어 300만명 이상의 동포를 희생시킨 6·25전쟁을 합리화한 것과 마찬가지다. 과오 자체도 중대하지만, 과오에 대한 공식적 합법화도 이에 못지않게 부당하다는 것이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국제정치와 윤리학의 공통적 견해다. 춘추시대에도 도덕은 문란했지만, 전국시대 이후의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중국 사학의 통설은 전국시대를 기원전 403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로 구분한다. 이 기간에 부당한 전쟁을 통한 약육강식이 성행하면서 이전 춘추시대 초기에 약 140개, 말기에 약 40개를 헤아리던 제후국의 수는 크게 줄었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진정한 독립을 누린 제후국은 ‘전국(戰國) 7웅’이라 불리던 연(燕)·제(齊)·조(趙)·한(韓)·위(魏)·초(楚)·진(秦)의 7개국뿐이다. 그중 한·위·조가 ‘신흥 3국’에 해당한다. 진(晉)나라를 분할한 이들 3국의 발흥과 공인이 곧 ‘전국시대의 개막’으로 지칭된다.
지백의 오판과 패망의 길
원래 진(晉)나라는 주(周) 왕조의 친척 격으로, 영토가 광대했으며 기원전 632년에 남방의 대국 초(楚)를 격파한 후로는 중원의 패권자로서 약 100년 동안 위세를 떨쳤다. 그러다 춘추시대 말기에 와서는 주공(周公)이 벙벙해진 반면에 중신들이 똑똑하여, 그 중 지(知)씨·범(范)씨·중행(中行)씨·조(趙)씨·한(韓)씨·위(魏)씨의 존재가 두드러졌다.
주공의 중대한 과오로는 중신들에게 영토와 군대를 나눠주고 세습시킨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것보다는 재정적으로 대우를 잘해주면서 그들을 원로원 같은 자문기구에 포함시켜야 좋았을 것이다. 쓸모가 있더라도 한 직위에 오래 두지 않고 예비역이 되게 했다가 전쟁 등 유사시에 다시 현역으로 복귀시키는 영국식 방법을 활용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주공에겐 그만한 지혜나 상식이 없었던 모양이다. 고작해야 출공(出公) 때 횡포가 심한 네 중신을 치고자 외세인 제나라와 노나라의 힘을 빌리다가 사전에 모의가 탄로 나는 바람에 출공이 외국으로 도주하다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애공(哀公)이 즉위했으나, 사건 처리를 주도했던 지(知)씨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 당주가 지백(知伯)이란 사람이었는데, 영리하긴 했으나 총명하지 않았고, 인정미가 없어 덕망이 신통치 않았다.
지백은 우선 주공 측과 사이가 좋지 않은 범씨와 중행씨를 쳐 없애고는 그 영토를 병합했다. 다음으로는 나머지 중신인 한·위·조 3씨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우선 한씨에게 사신을 보내 일부 영토의 할양을 요구했다.
이에 분개한 한씨의 당주 한강자(韓康子)는 그러한 요구를 즉각 거절하려 했는데, 재상인 단규(段規)가 침착하고 슬기롭게 간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