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호

‘도꼬다이’ 홍준표의 포효

“이명박 대통령 만든 내 앞에서 친이(親李)계 운운하는 자들, 참 가소롭다”

  • 입력2009-02-05 14: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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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쟁점법안 놓고 다시 충돌하면 강행처리 불가피
    • “‘노조방송’ MBC 제자리 찾는 길 모색해야”
    • “이명박 대통령 당선은 전적으로 홍준표 덕”
    • “원내대표 된 건 이상득 힘 아니라 대통령 요청”
    • “법무장관? 대통령께서 생각하고 있을 것”
    • “특정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요직 차지한 검사들 있다”
    ‘도꼬다이’ 홍준표의 포효

    사진 김형우 기자

    내가 홍준표(55)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처음 만난 것은 1993년 초 검찰에서였다.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에 근무하던 그는 스타검사였다. 언론엔 연일 그의 이름이 오르내렸고 그는 평검사로는 드물게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 터진 슬롯머신 사건 덕분이었다.

    지난해 검찰이 창설 60주년을 맞아 선정한 20대 사건에 포함된 슬롯머신 사건의 출발점은 ‘빠찡코 대부’로 통하던 정덕진씨 구속이었다. 표적수사 논란 속에 ‘6공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 의원이 정씨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알선수재)로 구속된 데 이어 이건개 대전고검장, 안기부 기조실장 출신의 엄삼탁 병무청장, 이인섭 경찰청장 등 정관계의 거물급 인사가 줄줄이 구속됐다. 당시 홍 검사가 강골검사의 표상, 나아가 ‘정의의 화신’으로 비친 데는 언론의 우호적인 평가도 한몫했다.

    슬롯머신 수사가 끝난 후 그에겐 시련이 찾아왔다. 출입기자들 사이에선 검찰 지휘부가 그에게 사건을 배당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돌았다. ‘선배를 잡아먹은 검사’ ‘통제할 수 없는 검사’로 낙인찍혀 ‘왕따’가 됐다는 게 정설이었다. 그 무렵 서울지검 강력부를 즐겨 드나들던 나는 그가 집무실에서 출입기자와 바둑 두는 걸 목격하기도 했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 서 있는 허수아비처럼 허허로운 모습이었다.

    1년간 안기부 파견근무(국제범죄수사지도관)를 마치고 1995년 10월 검찰에 돌아온 그는 수사와는 거리가 먼 법무부 특수법령과로 발령이 나자 사표를 던졌다. 이듬해 4월 신한국당 공천을 얻어 총선에 출마한 그에게는 ‘모래시계 검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때마침 불어닥친 TV 드라마 ‘모래시계’의 영향이었다.

    빨간색 팬티



    그가 국회의원이 된 후 나는 그에게 흥미를 잃었다. ‘정치인 홍준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던 데다, 깊이 없이 좌충우돌하는 듯한 그의 정치적 행보가 마뜩찮았던 것도 이유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 ‘저격수’로 활동할 때는 용감하다기보다는 무책임하고 위태롭게 보였다.

    그가 2006년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설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던 나는 그가 대선후보 경선에 나선 후 경악과 찬탄의 눈길로 그를 지켜봤다. TV토론회에 비친 그는 공부 많이 한, 나름 준비된 대통령후보였다. 특히 대운하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이명박 후보를 매섭게 몰아붙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지난해 한나라당 원내대표로 추대됐다. 어느덧 4선의 중진의원이다. 언제부터인가 신(新)실세, 혹은 신주류로 불린다.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기질이 있는 이 새로운 실세는 지난 한 달간 지속된 여야 입법전쟁의 한가운데서 거대 여당의 사령관으로서 전투를 지휘했다. 1월6일 전투가 종료됐다. 아니, ‘휴전을 맞았다’라는 표현이 정확하겠지만. 아군 진영에서 그를 향한 비난이 쏟아졌다. 적군의 불법과 폭력에 굴복했다는 것이었다. 글쎄, 호전적 성격의 그가 이런 비난을 받을 줄이야…. 나로서는 좀 뜻밖이다.

    인터뷰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첫날인 1월9일 오후 원내대표실은 어수선했다. 의원들이 왔다갔다했고 출입기자들이 무람없이 드나들었다. 칫솔을 입에 물고 나온 홍 대표가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인터뷰는 예정보다 조금 늦게 시작됐다. “1시간 안에 끝내자”는 그의 말에 “그러면 한 번 더 만나야 한다”고 하자 그가 죽는소리를 했다.

    “나 좀 쉬자. (원내대표로 선출된) 지난해 5월22일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쉰 날이 없어요. 오늘 저녁에 여행을 떠나려 해요. 집사람하고 둘이서.”

    제주도에 갔다가 이틀 뒤인 일요일 밤에 돌아올 예정이란다. 그는 후줄근해 보이는 감색 양복에 붉은색 셔츠를 받쳐 입고 붉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실실 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으며 ‘인터뷰 전쟁’에 돌입했다.

    -그런데 왜 늘 빨간색 옷을 즐겨 입으십니까. 정열의 표시인가요?

    “붉은색이 러시아에서 정의와 순수를 상징합니다. Justice and Purity. 약자로 JP. 홍준표 이니셜이 JP야. 정치판 들어오면서 붉은색 옷을 즐겨 입고 넥타이도 붉은 걸 매요. 내복도 그래요.”

    더 웃음을 참다간 몸 상할 것 같았다. 사진기자도 웃었다.

    “팬티도….”

    그의 익살에 또 한 차례 웃음이 터졌다.

    ▼ 검사 시절엔 안 그랬던 것 같은데요.

    “안 그랬지요. 정치판에 들어온 후 정의롭고 순수하게 정치를 해보고 싶어서 13년 전부터 붉은색 옷을 즐겨 입고 있습니다.”

    ▼ 부인께서 신경 많이 써야겠네요. 늘 붉은 색으로 맞춰놓으려면.

    “집에 붉은 옷이 많이 있습니다. 파카도 붉은색이고.”

    야당 행위는 공사판에서나 하는 짓

    ▼ 협상 타결한 날 밤 술 한잔하셨나요?

    “부대표들과 술 한잔했죠.”

    ▼ 분위기가 어땠습니까?

    “다들 만족스러워했어요. 언론에서는 뭐 백기 들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쟁점법안 상정은 전쟁에 가깝습니다. 원래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면 국회법에 따라 상정되는 게 관례입니다. 그런데 여야 대치상황에서는 단 한 건도 상정할 수 없어요. 지난 정권 때는 한나라당이 사학법 상정을 2년간 거부했지요. 국가보안법은 끝내 상정 못했고요. 그만큼 법안 상정이라는 게 어려운 겁니다. 일단 상정되면 대부분 처리됩니다. 이번 협상 타결로 미디어 관련 6법을 제외한 모든 법안이 상정됩니다. 여당으로선 이만한 선물이 없습니다.”

    ▼ 법안 상정이 포인트라는 말씀이네요.

    “이번 폭력사태의 출발점은 한미FTA(자유무역협정) 법안을 외통위(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서 강제 상정한 겁니다. 그런데 FTA 법안은 지난 정부 때 민주당이 만든 겁니다. 자신들이 만들어놓고 자신들이 거부하는 그런 야당과 협상하려니 얼마나 분통이 터지겠습니까. 그렇다고 172석의 힘으로 강제로 밀어붙일 수 있습니까. 이번 사태에서 보듯 상임위 회의장이 봉쇄되고 본 회의장이 점거되고 폭력이 난무하면, (상정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가 형사특별법으로 국회폭력방지법을 만들어 제출합니다. 몸으로 싸운 야당이 승리했다는 듯이 축배를 드는 것, 이거 공사판에서나 하는 짓입니다. 이성적인 국회에서 할 짓이 아니죠.”

    전매특허인 날선 입담이 시동을 걸었다. 표정도 신속하게 전환됐다. 안경 속 갸름한 눈매가 더욱 날카로워지고 좀 전에 농담한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입가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 당내 강경파 의원들의 불만이 크던데요. 당 지도부 사퇴하라고….

    “강경파의 불만은 이해합니다. 저도 MB(이명박 대통령의 영문 이니셜)정부의 개혁법안을 빨리 처리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정부도 협조해야 하고 당내 협조도 이뤄져야 하고 국회의장도 협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국회의장 협조만 안 됐습니다. 그래서 처리할 수가 없었습니다. 직권상정 권한을 행사해야 하는데 의장께서 끝내 거부했습니다.”

    ▼ 국회의장의 행동에도 명분이 있지 않나요? 의장한테 책임을 떠넘기는 건 적절치 않아 보이는데요.

    “책임을 떠넘긴다는 게 아니고요. 국회 질서유지권이 의장한테 있습니다. 필요하면 공권력을 동원해 질서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걸 안 했어요. 그것도 큰 문제입니다.”

    “사퇴할 아무런 이유 없다”

    ▼ 경찰을 동원해 야당 의원들을 끌어냈어야 한다는 얘긴가요?

    “그런 얘기가 아니라 미숙했다는 거죠. 이를테면 로텐더홀 농성의 경우 새벽이 되면 사람이 줄어 민주당 당직자 10~15명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 경위들 동원해 로텐더홀 정리했다면 그렇게 싸우지 않아도 됐을 겁니다. 낮에 정리하겠다고 통보하니 농성인원이 100명에서 400명으로 늘었습니다. 미리 통보한다는 건 해산시킬 의지가 없는 거죠. 질서유지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않았어요.”

    ▼ 의장도 민주적 질서를 지키겠다는 생각에서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뭐 그런 뜻도 있겠죠. 어쨌든 강경파 의원들은 의장에 대한 불만이 큽니다.”

    ▼ 강경파가 사퇴를 요구하는 사람은 홍 대표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 사퇴하실 생각이 없죠?

    “홍준표의 거취는 홍준표가 알아서 합니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때가 되면 정리합니다.”

    ▼ 사퇴할 만한 이유가 없다는 거지요?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 전혀 없다?

    “그렇습니다.”

    ‘도꼬다이’ 홍준표의 포효

    1월6일 밤 극적으로 합의한 3당 원대대표들이 밝게 웃고 있다.

    ▼ 차명진 대변인은 “불법을 향해 타협의 손길을 내밀었다”고 비난하며 대변인직을 내던졌데요.

    “불법과 타협한 게 아니라 불가피한 조처였습니다. 만약 불법사태가 방치되고 오래가면 그 책임은 정부여당에 돌아옵니다. 불법에 굴복한 것도 아닙니다. (야당에) 불법 책임은 계속 묻겠습니다. 불법 사태 장기화를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 합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의원이 이 점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강경파는 이해를 못하지만요.”

    ▼ 일단 극한대치와 폭력사태는 종식됐지만 2차 입법전쟁이 불 보듯 뻔하지 않습니까?

    “2차 입법전쟁이 아니라 4년 내내 입법전쟁이 있습니다. 정권이 10년 만에 좌파에서 우파로 넘어왔습니다. 10년 동안 우리나라 곳곳에 좌파의 뿌리가 박혔습니다. 그것을 1~2년에 걷어내기란 어렵습니다. 국회에서는 4년 동안 법안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 미디어 관련법을 비롯한 쟁점법안들에 대해 합의처리니 협의처리니 해서 논란의 불씨를 남기지 않았습니까? 2월로 시기가 늦춰졌을 뿐 또 한 번 극한충돌이 예상되는데요.

    “잘못 알고 계시는데, 2월 지나고 4월이 되면 새로운 쟁점법안이 없을 것 같습니까? 6월 되면 또 쟁점법안이 등장합니다. 이번에 미디어법하고 몇몇 법 처리하면 MB정부 내내 쟁점법안이 없을 것 같습니까. 계속 있어요. 그 점을 감안하고 국회사태를 조명해야 합니다.”

    “재충돌시 다수당 힘 발휘하겠다”

    ▼ 민주당은 승리했다고 자평하지 않았습니까? 최대 쟁점인 미디어 관계법, 금산분리 완화 법안, 재외동포에게 투표권 주는 공직선거법 등을 사실상 저지했다고요.

    “말이 안돼요. 미디어법은 민주당이 결코 합의처리해 줄 수 없는 법입니다. 또 한 번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금산분리법은 합의처리가 가능합니다. 그간 민주당 반대로 상정조차 못했는데 이번에 상정했습니다. 재외동포법은 위헌판결이 났기 때문에 1월31일까지 개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개정 안 하면 4월 국회의원 재·보선을 할 수 없습니다. 2월2일 본회의에서 통과시키기로 합의됐습니다. 민주당이 승리한 게 아닙니다.”

    ▼ 합의처리하려면 충돌이 불가피할 텐데, 또 다시 극한 대립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때는 대결할 수밖에 없지요.”

    ▼ 대결이라 하면….

    “물리적 충돌이지요.”

    ▼ 물리적 충돌을 감수하고 날치기를 하겠다는 겁니까?

    “날치기라는 말은 아주 불쾌한 표현입니다. 국회법에 따라 적법절차대로 처리하는 겁니다.”

    ▼ 다수당의 힘을 발휘하겠다는 거죠?

    “안 그러면 선거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수당이 되려고 몸부림칠 필요가 없죠. 협의해보고 안 되면 다수결로 가야죠. 그걸 막는 건 민주주의 본질을 부정하는 거죠.”

    ▼ 상정 안 된 법안의 경우 더욱 거센 충돌이 예상되죠?

    “미디어 관계법 6법은 상정시기를 합의한 바 없습니다. 나머지 법은 2월 안에 모두 상정됩니다. 미디어 6법은 국민에게 좀 더 홍보해야 합니다. 마치 ‘MBC법’인 양 잘못 알려져 있습니다. 미디어산업발전법이지 ‘MBC법’이 아니라는 걸 국민이 알도록 여론을 환기해야 합니다. 그 작업을 2월 중순까지 할 겁니다.”

    미디어법, 즉 신문법과 방송법 개정안을 두고 언론노조는 총파업을 벌였다. MBC, SBS 등 방송사와 군소 신문들이 가세했다. 신문법 개정안의 핵심은 신문·방송 겸영 허용이다. 방송법 개정안은 방송 진입 및 소유 규제 완화가 핵심. 이 법이 통과되면 신문·대기업·통신사의 경우 지상파 방송 지분의 20%, 종합편성·보도채널 지분의 30%까지 취득할 수 있다.

    MBC를 ‘노조방송’이라고 규정한 홍 대표는 “MBC가 제자리를 찾는 길이 뭔지 논의를 더 해봐야 한다”고 했다.

    ▼ 좌파방송이라고는 하지 않으시네요.

    “그건 조 차장이 알아서 판단하십시오.”

    ▼ MBC 민영화를 한다는 겁니까, 안 한다는 겁니까?

    “언론정책에 관한 문제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 한나라당의 모든 정책을 총괄하는 분이니 묻는 겁니다. 누구는 한다 하고 누구는 안 한다 하고. 미디어특위 위원장 정병국 의원의 말도 몇 차례 바뀌던데요.

    (담배를 꺼내 든 홍 대표가 사진기자에게 “담배 피우는 건 찍지 말라”고 요청했다.)

    “디지털로 전환하려면 방송사마다 3조~4조원이 필요합니다. KBS는 수신료 인상으로 재원조달이 가능합니다. SBS는 외부자금 유치로 가능하고요. 그런데 MBC는 아마도 자금을 마련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자금 염출할 길을 터줘야 합니다. 그 정도만 얘기하겠습니다.”

    ▼ 선진국의 경우 신·방 겸영에 대해 상당한 규제를 하고 있지요?

    “20% 지분으로는 지배주주가 되기 어렵습니다. 신문이 방송에 진출해도 특정신문사의 방송은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 반대하는 측에서는 거대신문이 기업을 끼우는 컨소시엄 형태로 지배구조를 장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잖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죠. 그 문제는 미디어산업 발전 차원에서 봐야 합니다. 앞으로 IPTV의 출현으로 수백개의 방송이 생겨날 텐데 언제까지 특정 지상파가 방송을 독점할 수 있겠습니까. IPTV 시대가 되면 지상파 방송의 영향력이 현저히 떨어질 겁니다.”

    ‘도꼬다이’ 홍준표의 포효

    “이 정부에 걸림돌이 된다면 내일이라도 사퇴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한 홍준표 대표.

    “청와대 불만은 당연”

    ▼ 청와대에서는 이번 여야 합의에 대해 불만스러워하지요?

    “청와대의 불만은 당연하죠. 갈 길이 먼데 야당이 발목을 잡고 있으니.”

    ▼ 야당이 아니라 여당 지도부에 대한 불만 말입니다.

    “그것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지시만 하면, 요구만 하면 당이 172석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대한민국 국회 현실이 그렇지 않습니다. 야당이 극렬 반대하고 점거하고 투쟁하면 법안처리를 할 수 없습니다. 국회 폭력방지법이 있다면 몰라도.”

    ▼ 청와대로부터 직접 주문받은 건 없나요?

    “그런 일 없습니다.”

    ▼ 대통령이 직접 전화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일 없습니다. 의회는 원내대표가 책임지고 이끌어갑니다.”

    ▼ 여야가 주고받았다고 하는데 뭘 주고 뭘 받았다는 건지 국민이 알기 쉽게 설명해주십시오.

    “우리가 준 것은 미디어 6법 상정시기를 못 박지 않은 겁니다. 야당이 양보한 것은 출총제(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와 한미FTA 법안입니다. 언제라도 처리하라는 얘기죠. 경색정국의 단초가 된 게 바로 FTA법 강제상정이지 않았습니까. 이번에 그걸 푼 거죠. 또 민생 관련 법안 100여 개를 (1월)13일까지 처리합니다. 그것을 처리하면 우리 몸이 가벼워지지요. 전선이 명확해집니다. 쟁점 몇 가지에만 집중할 수 있지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한 질문을 시작했다.

    ▼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로 자처하는 사람이 어제 허위사실 유포죄로 체포됐습니다. 체포의 적법성 논란이야 그렇다 치고, 정체불명의 논객이 높은 인기를 누린다는 건 정부의 신뢰도가 그만큼 떨어져 있다는 얘기 아닙니까. 민심이반이지요.

    “정책의 일관성 문제지요. 집권 첫 해에 광우병 촛불사태에 휘둘리면서 상반기에는 사실상 국정수행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국민이 실망했죠. 또 하반기에 국회에서 야당과 싸우는 걸 보고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현상이 생긴 겁니다.”

    ▼ 이명박 대통령의 리더십도 민심이반의 원인이지 않습니까?

    “대통령의 리더십이 문제라기보다는 참모진과 장관들이 제 역할을 못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내가 지난해 9월부터 인재 재배치론을 줄곧 주장한 겁니다.”

    ▼ 대통령과는 요즘도 친밀한 편인가요?

    “전혀 만나지 않습니다.”

    ▼ 통화는 가끔 하십니까?

    “안 합니다.”

    ▼ 사석에서 대통령한테 ‘형님’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의원이라는 얘기가 있던데요.

    “대통령 되고 나면 모든 게 달라집니다. 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고요. 가끔 청와대 참모와는 의견교환을 합니다.”

    “촛불시위는 좌파의 잔치”

    ▼ 촛불시위 때 만약 홍 대표께서 대통령이었다면 어떻게 대처하셨을 것 같습니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 그러면 대통령이라는 가정은 빼죠. 어떻게 대처하는 게 바람직했을까요, 그 상황에서?

    “대통령이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 청와대 참모진과 내각이 총사퇴했습니다. 당에선 강재섭 대표가 있었지만 물러갈 대표였기에 힘이 없었습니다. 나는 원내대표로서 6월 한 달간 온몸으로 촛불시위를 막았다고 생각합니다.”

    ▼ 촛불시위가 이 정권에 던져주는 메시지가 뭐라고 보십니까? 무조건 막았어야 할 사건이었나요?

    “좌파들의 집결이라고 봅니다. 처음에는 일반 시민들이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6월10일 이후부터 20일간은 좌파들의 잔치였습니다. 반정부세력의 잔치였습니다. 그때부터 굉장히 힘들어졌습니다. 처음엔 순수하게 출발했습니다. 그 순수한 촛불시위가 좌파의 집결지로 바뀌었습니다. 공안당국이 좌파집단을 찾아내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 그토록 많은 시민이 들고일어난 건 정부에 대한 반감과 불신이 컸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단초는 대미 저자세 외교였지요.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다른 나라에서는 금지하는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허용하는 등 국민에게 불안감을 안기는 협상을 체결했잖습니까? 협상력도 떨어졌고.

    “지금 돌이켜보면 꼭 쇠고기 때문에 발생한 사태라고는 볼 수 없어요. 대선 끝난 후 이른바 반정부 세력이 쇠고기 문제를 빌미로 집결한 거지요. 특히 특정 방송사에서 광우병에 대한 인식을 나쁘게 했습니다.”

    ▼ 광우병이야 나쁜 거죠.

    “허위보도를 했습니다. 그것이 시민 참여의 계기가 됐고, 시민 참여가 잦아들 무렵 반정부집단들이 집결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대선과 총선에서 참패한 이 정부의 반대세력들이 촛불시위를 기화로 반정부 투쟁에 나선 겁니다. 그래서 20일 동안 이 나라가 무법천지가 됐던 겁니다.”

    ‘도꼬다이’ 홍준표의 포효

    2007년 11월 홍준표 한나라당 클린위원장이 ‘BBK논란’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 그 빌미를 제공한 게 정부가 아니냐고 저는 묻고 있습니다.

    “빌미를 제공했다기보다는… 그것도 한미FTA와 관련 있습니다. FTA 문제를 빨리 풀려다 그리 됐지요. 마지막 걸림돌이 쇠고기였거든요. 쇠고기 협상을 서둘러 하다 보니….”

    ▼ 서둘렀고 서툴렀지요.

    “서두르고 서툴렀던 것은 FTA를 통해 빨리 경제회생을 해야겠다는 조급함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잘못된 정책들이 결합돼 촛불시위를 부른 거죠. 그런데 정권 출범 첫 해는 늘 어렵습니다. 노무현 정부도, 김대중 정부도 그랬습니다. 대선의 앙금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BBK 해결했다”

    ▼ 한나라당이 청와대와 정부의 국정수행을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MB와 철학이 조금 다른 홍준표 대표가 당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과 함께.

    “만약 내가 이 정부의 걸림돌이 된다면 내일이라도 사퇴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가 전사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눈가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고 입가가 실룩거렸다.

    ▼ 걸림돌이라는 건 아니고요.

    “지금 조 차장 이야기는….”

    ▼ 이른바 친이(親李)계에서 볼 때 충성도나 이념과 철학이 이 정권의 핵심인사들과는 차이가 있지 않으냐는 지적이죠.

    “친이계, 친이계 하는데, 정치권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가장 깊은 인연을 가진 사람은 홍준표입니다. 선거법 위반사건 때부터 시작해 서울시장이 될 때, 그리고 대통령후보 당시 가장 많이 도와준 사람이 홍준표입니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데는 전적으로 홍준표 덕이 컸다고 봅니다. BBK 대선 아니었습니까. 지난 대통령선거 때 정책이 있었습니까. 논쟁이 있었습니까. 오로지 BBK였습니다. BBK로 시작해 BBK로 끝난 대선입니다. 그 BBK 문제를 해결해준 게 누구입니까. 홍준표가 했습니다. 친이계 핵심 어쩌고 하는데, 홍준표가 이 대통령과 가장 가까웠고 가장 도움을 많이 줬고 가장 앞장섰습니다. 대통령의 철학을 홍준표만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13년 동안 옆에서 함께 일해왔습니다. 요즘 와서 몇몇 사람이 감히 친이계 핵심 운운하는 걸 보면 참 가소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

    거침없는 언변이 그답다. 웃을 국면이 아닌데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의 단호한 말과 근엄한 표정의 기묘한 부조화 때문이었다. 그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엄숙하게 말했다.

    “그대로 쓰십시오. 청와대 참모 중에 나만큼 대통령과 깊은 대화를 해본 사람이 있습니까. 정당의 참모 중에, 지도자 중에 대통령과 나보다 더 깊은 얘기를 해본 사람이 있습니까. 대선 때 몰려든 사람들이 대통령과의 인연이 몇 개월 됐다고, 몇 년이 됐다고 감히 그런 얘기를 하고 다닙니까. 참 가소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 그러시겠네요. 그런데 과거의 공(攻)이야 어쨌든 현 상황에서 얘기하자면….

    “공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대통령의 통치철학을 내가 잘 알고 있다는 거죠. 대통령의 통치철학을 구현하는 데 내가 걸림돌이 된다면 언제라도 사퇴할 용의가 있습니다. 당장 오늘이라도.”

    ▼ 이 대통령이 과거에 홍 대표 신세를 많이 졌지요? BBK 문제말고도요.

    “신세를 졌다기보다는 내가 그분을 모시고 정치를 한 거죠. 지금 자유선진당에서 누가 이회창 총재 측근이라는 얘기를 들으면 내가 웃으면서 말해줍니다. 원조 측근은 나라고. 이회창 대통령 만들려고 10년 동안 견마지로를 다했던 사람이라고. 너희가 이 총재와 몇 년 함께 했다고, 무슨 일을 해줬다고 이 총재 측근이라 하느냐. 마찬가지 논리입니다. MB의 핵심측근 운운하면서 정권창출에 기여했다느니 MB의 통치이념을 구현한다느니 떠드는 자들을 볼 때마다 참 가소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진 자가 세금 더 내는 건 당연”

    홍 대표는 한나라당에서 드물게 서민적 이미지를 가진 의원이다. 17대 국회에서 토지 소유권은 국가와 공공기관이 가진 채 건물만 일반에 분양함으로써 아파트 값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이른바 ‘반값 아파트’ 법안을 발의했고, 이중국적을 보유한 남자도 병역을 회피할 수 없도록 한 국적법과 재외동포법 개정을 이끌어냈다. 청와대와 정부가 종합부동산세 완화를 추진할 때도 다른 목소리를 냈다.

    ▼ 홍 대표께서 더러 청와대나 한나라당의 색깔과 조금 다른 주장을 펴지 않았나요? 그리고 한나라당이 부자정당, 웰빙정당의 이미지를 벗어야 한다고 자주 말씀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맞습니다.”

    ▼ 한나라당의 상당수 의원이 홍 대표님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지요?

    “종부세 문제를 예로 들지요. 노무현 대통령이 헌법보다도 더 고치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게 종부세입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편을 가르고 중앙과 지방을 엮어놓았어요. 종부세를 받아 지방을 지원했습니다. 종부세 완화 논란이 일 때 내가 여야 논쟁이 아닌 여여 논쟁을 유도했습니다. 야당이 끼어들 틈이 없게 여당 의원들끼리 논쟁을 벌이게 했습니다. 여당 내 강북 출신 의원과 강남 출신 의원 간에 논쟁이 붙었습니다. 정책위 의장과 원내대표의 의견이 달랐습니다. 당과 정부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렇게 여권 내에서 논쟁을 벌인 덕분에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별다른 논쟁 없이 합의가 됐던 겁니다. 만약 그것이 여야 논쟁으로 전개됐다면 합의가 이뤄질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두고 내가 한나라당과 생각이 다르다고 말하는 건 맞지 않죠. 그리고 가진 자가 세금을 더 내는 건 당연합니다.”

    ‘도꼬다이’ 홍준표의 포효

    홍 대표는 “언젠가 한 번 할 때가 있을 것”이라며 법무부 장관을 해보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 여권에서는 그런 생각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건 잘못된 거죠. 가진 자가 좀 더 양보해 가지지 못한 자가 좀 더 기회를 갖는 공정한 세상이 돼야 합니다. 선진국 보십시오. 가진 자가 얼마나 많은 기부를 합니까. 가지지 못한 자에게 얼마나 많은 배려를 합니까. 선진국에서 지도자의 덕목 중 가장 고귀한 게 무엇입니까. 노블레스 오블리주입니다. 전쟁 나면 가장 먼저 상층부의 자제들이 참전합니다. 그런데 한국 고위층은 달라요. 자식을 병역의무에서 빼돌립니다. 그러다 보니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2002년 대선 때 이회창 총재 두 아들의 병역면제가 국민감정을 자극하지 않았습니까. 지난번에 내가 국적법 문제를 제기하자 나보고 폐쇄적인 쇄국주의자라고 하더군요. 한국 사회의 소수 귀족층이 해외유학 관련법을 악용해 자식을 군대에 안 보냅니다. 그것을 저지한 게 제가 제안한 국적법입니다.”

    ▼ 그 법에 반대한 의원이 많았지요?

    “반대한 의원들, 나중에 조사해보니 자식이 이중국적인 사람이 많더군요. 한나라당뿐 아니라 열린우리당에서도 반대하는 의원이 많았습니다.”

    ▼ 그런 면에서 이명박 정부의 초대 내각과 청와대 참모 인선은 국민에게 큰 실망을 안겼지요?

    “그렇습니다.‘가진 자들의 정부’라는 느낌을 줬습니다.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국민이 판단하고 있다

    ▼ 실수든 오판이든 이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고 하겠죠?

    “10년 만에 정권을 잡다 보니 인재풀이 약했지요. 게다가 국회가 검증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어요. (대통령)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심으로 조각하다 보니 그런 실수가 생긴 거지요.”

    ▼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을 비롯해 국민에게 신뢰를 못 주는 일부 각료들에 대해 한나라당에서 홍 대표를 중심으로 경질을 요구했지만, 이 대통령은 그대로 밀고 나갔지요?

    “대통령께서 때가 되면 판단하시리라 봅니다.”

    ▼ 그런 점에 대해 대통령에게 불만이 있지는 않습니까?

    “거기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국민이 다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죽이기’ ‘노무현 살리기’ 등의 저서를 펴낸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월간 ‘인물과 사상’ 2009년 1월호에서 노무현 정권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노 정권이 가장 앞세운 건 정의였다. 정의실현은 장기적 거시적으로는 통합, 협력, 상생으로 가는 길일망정 그건 이론일 뿐이며 적어도 정권 임기 중엔 필연적으로 분열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게 돼 있다. 그것도 정의실현에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에 기반한 분열과 갈등이다.”

    홍 대표에게 강 교수의 글을 읽어주고 의견을 물었다.

    “강 교수 견해에 동의합니다. 노 정권에서 우리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편 가르기가 심했던 점입니다. 5년 내내 강남, 강북을 가르고 중앙과 지방을 갈라 갈등구조를 재생산했습니다. 말하자면 갈등구조 재생산으로 자기편을 결집하는 노력만 했지 상대편을 포용하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았어요. 이명박 정부에서는 갈등구조를 재생산하고 확대발전하는 정책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대운하도 반대했던 겁니다.”

    ▼ 노무현 정권에서 배울 점이라면 무엇을 꼽으시겠습니까?

    “정치자금 관계법과 선거법 정비한 것, 돈 안 드는 선거풍토를 만든 것, 그리고 돈 안 드는 정치제도를 정착시킨 것. 이것은 큰 성과라고 봅니다.”

    ▼ 항간에는 이런 냉소적인 얘기가 돌지요. 이명박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데올로기만 다를 뿐이지 언행이나 리더십, 미숙한 국정운영 등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고.

    “그것은 좀 듣기 거북합니다.(웃음)”

    현재 한나라당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는 홍 대표 외에 이상득·박근혜 의원과 외유 중인 이재오 전 의원을 꼽을 수 있다. 먼저 이상득 의원 얘기부터 해보자. 당 안팎에선 홍 대표가 ‘상왕(上王)’이라 불리는 이 의원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지난해 원내대표 선거 당시 만장일치로 추대된 배경에도 이 의원의 영향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상득 의원과 가깝지 않으냐”고 묻자 홍 대표는 부인하지 않았다.

    ▼ 이번 법안처리 과정에도 이상득 의원이 힘이 돼줬나요?

    “이상득 의원은 대통령 형이라기보다는 당내 맏형인 셈이죠. 6선에 연세도 일흔이 넘었고. 갈등이 있을 때마다 조정자 노릇을 해오셨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역할을 하셨죠.”

    “박근혜, 좀 더 도와주길 바란다”

    ▼ ‘만사형통(萬事兄通)’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이 의원에 대해 비판적인 여론이 있는데요.

    “이상득 의원은 동생 덕으로 정치하는 게 아닙니다. 정치판에도 이 대통령보다 훨씬 먼저 들어왔고. 만약 이상득 의원에게 공천을 주지 않으면 부작용이 클 겁니다. 밖에 있는 것보다 의정활동을 함으로써 공개적으로 감시를 받는 게 낫다는 거죠. 이 의원은 당내에서 갈등만 조정하지 어떤 사람을 옹립하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 원내대표로 추대될 때도 이상득 의원이 힘썼다는 얘기가 파다했잖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 알고 있습니다.”

    ▼ 단일후보로 추대된 배경이 뭔가요?

    “정권 출범 초기이므로 강단 있고 추진력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당내 요구에 따라 제가 선출된 겁니다.”

    ▼ 지난번에 이상득 의원이 한나라당 주요 의원들의 성향과 동향이 적힌 보고서를 읽고 있는 게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았습니까? 홍 대표님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평가는 아니었죠?

    “글쎄요, 내가 그거 아주 불쾌하다고 했습니다.”

    ▼ 대통령 덕을 안 본다고 하지만, 국가기관의 힘이 그쪽으로 쏠리는 거죠. 모 정보기관이 개입한 것 같은데요.

    “그런 게 생기겠죠. 대통령 형한테 정보를 갖다 바치는 사람들이 있는 거죠. 하지만 그게 뭐 한국 정치판에서만 있는 일은 아니죠.”

    박근혜 전 대표는 1월5일 최고위원·중진회의에 참석해 오랜 침묵을 깨고 여야 대치상황에 대해 한마디했다. 비록 야당의 국회 본회의장 점거행위를 비판하긴 했지만, 박 전 대표 발언의 무게중심은 여당의 법안 강행 처리에 대한 우려였다. 그는 “국가 발전을 위하고 국민을 위한다면서 내놓은 법안들이 국민에게 오히려 실망과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는 점이 굉장히 안타깝다”고 한나라당에 쓴소리를 했다. 공교롭게도 다음날 여야는 대타협을 했다.

    ▼ 협상 막판에 박근혜 전 대표의 한마디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당내에서 박 전 대표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꽤 들리던데요. MB정권에 협조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만 생각한다고.

    “박 전 대표의 잘잘못에 대해서는 국민이 평가할 문제입니다. 제가 따로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 원내대표로서 하실 얘기가 있을 텐데요.

    “(박 전 대표가) 좀 적극적으로 이 정권의 지지율 제고에 나서주길 바랍니다만, 본인이 아직 결심을 못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제가 강요할 수도 없지요. 그러나 원내대표로서,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시면 좋겠다는 바람은 늘 있습니다.”

    ▼ 오바마가 힐러리를 국무장관에 임명한 것을 두고 우리 정치상황과 비교해 말이 많았지요.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관계를 두고. 이 대통령의 포용력, 리더십이 부족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많지요.

    “두 분 다 마음을 열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 두 사람 마음이 통하면 친박이니 친이니 하면서 툭탁거리는 일이 사라지겠지요?

    “그렇습니다.”

    ▼ 10년 만에 정권을 잡아 출범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친박이니 친이니 떠든다는 게 웃기는 일 아닙니까?

    “양 진영에서 위기의식을 못 느끼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 홍 대표님은 어느 쪽이죠?

    “굳이 분류하자면 오리지널 친이지요. 지난 대선 때 내가 뛰어든 것은 이명박 진영과 박근혜 진영이 워낙 팽팽하게 붙어 자칫 당이 깨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들어가 중화제 노릇을 했던 겁니다. 일종의 페이스메이커였지요. 피스메이커이기도 하고. 오리지널 친이긴 하지만, 지금 얘기하는 친이는 아닙니다. 나는 한 번도 계파구도에 따라 움직인 적이 없습니다. 홍준표는 도꼬다이(단독)입니다.”

    ‘도꼬다이’라는 말에 또 웃음이 나왔다.

    “‘깜’ 아닌 장관 여러 명”

    ▼ 검찰에 있을 때부터 그랬죠?

    “그렇습니다. 나 홀로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잠시 전화통화를 한 그가 투덜거렸다.

    “조 차장,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 박박 긁는 건 똑같구먼.”

    그가 비밀을 털어놓듯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지난해 5월22일 원내대표가 된 직후 대통령한테 의회는 나한테 맡겨달라고 요구했어요. 정치적 재량권을 갖겠다고. 사실 원내대표는 이상득 의원이 밀은 게 아니라 대통령이 맡아달라고 한 거예요. 얼마나 힘든 자리야? 야당 대표는 반대만 하면 돼요. 여당 대표는 먼저 청와대와 조율한 다음 정부, 제1야당, 제2야당과 조율하고 그것이 끝나면 당내 조율을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국회의장과 조율하고. 그렇게 6단계 조율을 거쳐야 하나의 정책이 나옵니다. 얼마나 피 말리는 과정인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그런 것도 모르고 제대로 못한다는 얘기를 해요.”

    ▼ (여당안(案)을 관철하려는) 성의가 부족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청와대 참모들이 그러죠? 멍청한 참모들이에요.”

    ▼ 이명박 대통령이 홍 대표를 어려워한다는 얘기가 들리던데요. 심지어 무서워한다는 얘기까지. 약점을 많이 안다고.

    “그런 뜻이 아니라….”

    ▼ 직언을 잘해서인가요?

    “내가 할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대통령과의 공식석상에서 편하게 말하는 사람 중 하나예요. 대통령께서 듣기 싫어하는 얘기를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 예를 들어주시죠.

    “지난해 가을 (대통령 앞에서) 장관들 비판을 했습니다. 이번에 국정감사를 지켜보니 ‘깜’이 안 되는 사람들이 장관을 하고 있더라고. 말해놓고 아차 싶었어요. 인사는 대통령이 하신 건데. 대통령께서 웃으면서 하는 말씀이, ‘국회 가서 주눅이 들어 그렇지 행정부에선 잘한다’는 겁니다. 내가 ‘국회 와서 주눅 들 장관이라면 장관감입니까’라고 하자 대통령께서 곤혹스러워하시더군요.”

    ▼ 보시기에 ‘깜’이 안 되는 장관이 서너 명 됩니까?

    “나는 많다고 봅니다.”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이제 이재오 전 의원 차례다.

    “이재오 선배 들어오면 내가 비켜나겠다”

    ▼ 이재오 전 의원과 친하시죠?

    “그렇습니다. 재오 형님과 저는 무려 12년간 함께 정치를 해왔습니다. 정치 선배이기 전에 개인적으로 형님-동생 하는 사이입니다. 이재오 선배를 국민이 미워하는데―지역구에서도 미워하고―그분의 진면목을 몰라 그렇습니다. 얼마나 검소하고 겸손하고 서민의 어려움을 잘 아는 분인데. 정권 잡는 과정에 국민이 오해 한 겁니다. 대통령 다음으로 힘이 센 사람이라고. 국민은 강자를 싫어합니다. 그리고 이재오 선배와 박근혜 전 대표가 앙숙이라고 하는데, 정치노선이 다르면 그럴 수도 있죠. 한 사람은 추앙하고 한 사람은 괜히 미워하는 구조는 잘못된 겁니다. 언론도 자꾸 부정적으로 다루잖아요.”

    ▼ 언론은 싸움 붙이는 걸 주요 기능으로 생각하니까.(웃음)

    “조 차장은 그러지 말아요. 어떤 때는 나와도 싸움을 붙여요. 뭐, 이재오계가 홍준표 물러나라고 한다고. 심지어 워싱턴에서….”

    ▼ 실제로 이번에 그런 목소리가 나왔잖아요, 친이계에서. 이재오 전 의원이 들어와 당의 구심점이 돼야 한다고. 현 지도부로는 안 되겠다고.

    “이재오 선배 들어오면 내가 얼마든지 자리 내주고 비켜날 용의가 있습니다.”

    ▼ 두 분 관계가 친이계 의원들 얘기와는 달리….

    “일부 소인배들의 얘기죠. 이재오 선배와 나는 등 돌릴 이유도 없고 경쟁하는 관계도 아닙니다.”

    ▼ 친이계가 그런 얘기를 하는 건 이 전 의원이 홍 대표보다 이명박 대통령의 뜻에 좀 더 충실하다고 보기 때문 아닌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죠. 이재오 선배와 MB 관계는 저와는 또 다르죠. 이재오 선배도 바른 소리 잘하지요. 대통령을 설득할 수 있는 여권 내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 하여간 이 전 의원이 들어오면 원내대표에서 물러나시겠다는 거죠?

    “이 전 의원이 들어와 원내대표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도 않을 사람이지만. 원내대표말고도 얼마든지 할 일이 있습니다.”

    홍 대표가 법무부 장관을 하고 싶어한다는 얘기는 정치권에 널리 퍼져 있다. 지난해 연말 개각 얘기가 나왔을 때도 홍 대표의 입각설이 잠시 돌다가 수그러들었다.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서는 홍 대표가 법무부 장관 입각이 유력해지자 법안처리의 총대를 멨다가 입각이 물 건너가면서 소극적인 태도로 돌아섰다는 얘기가 돈다. 능력 부족이 아니라 성의 부족이라는 얘기다. 이에 대해 묻자 홍 대표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전제 사실이 맞지 않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 말이 나왔으니 얘긴데, 법무부 장관 입각 건은 어떻게 된 겁니까?

    “제 소관이 아니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 희망하셨던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말할 처지가 아니기 때문에.”

    ▼ 법무부 장관이 되면 어떤 일을 꼭 해보고 싶습니까?

    “언젠가 한 번 할 때가 있겠죠. 대통령께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봅니다. 제가 법무부 장관이 된다면 대한민국의 법질서를 바로잡고 싶습니다.”

    현고검사부군신위

    ▼ 이명박 정부 출범 첫 해 검찰 인사에 대해 말이 많았죠? 이른바 TK 독식이니 지역편중 인사니 해서. 사정라인 검사들의 수사능력이 떨어진다는 얘기도 나왔고.

    “지난 1년간 검찰 수사과정을 지켜봤습니다. 우리 때는 지사적인 용기를 가진 검사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검사는 샐러리맨 같다는 느낌을 받아요. 우리 때는 거악(巨惡)을 보면 몸 사리지 않고 덤볐습니다. 요즘 검사는 그런 문제에 대해 예민해합니다.

    이 정부에서 수사능력이 떨어지는 검사들이 특정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중요 자리에 가는 걸 내가 눈여겨봤습니다. 반대로 특정지역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능력이 있어도 소외되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그거, 옳지 않습니다.”

    그가 검사생활을 시작한 것은 1982년. 사법시험 24회다. 1995년에 사직했으니 13년간 근무한 셈이다. 그는 검찰을 떠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검찰에서 내 할 일을 다했다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검찰 수뇌부는 나를 폭발물의 뇌관처럼 취급했어요. 슬롯머신 수사가 끝난 후 검찰 내부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1년 동안 사건을 배당받지 못했습니다. 수사는 전혀 못하고 정덕진·박철언 재판에만 관여했어요. 인지수사를 하려 해도 결재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다른 검사에게 넘기라고 하더군요. 그러다 안기부로 파견 갔던 겁니다. 그 후 수사부서에서 빼겠다는 수뇌부 의지로 내 뜻과 무관하게 법무부 특수법령과로 배속됐습니다. 그래서 나온 겁니다.”

    그는 “검찰의 조직논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며 “검찰은 검사의 개성이나 소신보다 조직의 보호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정의를 향한 일념에서 한 일인데, 검찰 조직의 선배들을 수사해 조직을 파괴했다는 오명을 얻고 나왔지요.”

    ▼ 당시 검찰 내에서 홍 검사가 너무 튄다는 얘기가 있었죠?

    “그런 이야기가 있을 수 있죠.”

    ▼ 영웅주의에 빠졌다는 비판도 있었죠?

    “영웅주의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런 수사 못했죠. 그리고 튀지 않으면 그런 수사 못하죠. 검찰총장과 부딪칠 만한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 검사와 정치인 중 어느 것이 더 자신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검사가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검찰에 돌아갈 수 없어 부득이하게 정치를 합니다만. 제가 죽고 난 후 아들이 비문에 ‘현고검사부군신위(顯考檢事府君神位)’라고 써주길 바랍니다.”

    ▼ 검사가 보는 세상과 정치인이 보는 세상은 어떻게 다릅니까?

    “검사는 선악만 가리면 되고 정치인은 선악과 함께 가야 하는 직업입니다. 정치가 더 어렵습니다. 초·재선 때는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검사 시절의 연장선이었지요. 그래서 저격수 노릇도 했고. 3선이 되면서 내공이 생겼고 요즘은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한량 아버지와 인고의 어머니

    그는 애초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 장군이 되려 했다. 가난이 가장 큰 이유였다. 1971년 10월 육사 시험에 합격한 후 신체검사를 기다리는 동안 그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아버지가 농협에서 비료 두 포대를 탔는데, 훔친 비료를 몰래 샀다는 누명을 쓴 것이다. 장물취득혐의로 체포된 그의 아버지는 이틀간 파출소에서 조사를 받았다. 무혐의로 풀려나긴 했지만 이 일은 홍 대표에게 큰 상처를 줬고 그의 인생진로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법대에 진학해 검사가 되기로 맘먹은 것이다.

    그는 2남3녀 중 차남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한량이었다. 농사는 부업이었다.

    “판소리를 즐기고 꽹과리도 치고 시조도 읊는 한량이었어요. 활쏘기와 술 마시는 걸 즐겼습니다. 낮 11시부터 밤 11시까지 술판을 벌였어요. 일 년 열두 달 그랬어요.”

    그의 집안은 원래 부유한 편이었는데, 그의 부친이 말아먹었다고 한다.

    “1년에 논 한 마지기씩 팔았다고 들었어요. 논 판 돈으로 아버지 술값 대고 유흥비 댄 거죠. 내가 남지초등학교(경남 창녕) 1학년 때 가산을 탕진했어요. 일곱 살 때였죠. 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12월23일, 그 추운 날씨에 고향에서 쫓기다시피 해서 리어카 끌고 대구로 이사 갔어요. 이틀을 걸어. 대구에서 살다가 다시 창녕으로 돌아갔지요.”

    아버지를 원망할 법도 하건만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 가족은 단 한 번도 아버님을 원망한 적이 없어요. 자식들한테 잘하셨거든요. 한량처럼 사셨지만 바르게 산 분이었습니다. 남한테 피해 안 끼치고.”

    ▼ 어머니가 힘드셨겠습니다.

    “좀 힘들었지요.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한테 절대 복종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대주가였다. 1.8ℓ짜리 무학소주 댓병을 초저녁에 2시간도 안 걸려 다 비우고도 멀쩡했다. 환갑을 맞은 예순한 살 때 간암으로 사망했다.

    “아버님 돌아가시는 걸 보고 나는 술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부득이한 경우 외에는 술을 안 먹습니다. 소주는 석 잔 이상, 맥주는 두 잔 이상 안 먹습니다. 속칭 폭탄주도 두 잔 이상은 절대 안 먹습니다.”

    그는 기질은 아버지를 닮고 체질은 어머니를 닮았다고 했다. 어머니에 대해선 “인고의 여성이었다”고 회고했다.

    “저는 어머님이 아버님한테 말대꾸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아버님이 아무리 잘못해도 아버님의 판단을 따랐습니다.”

    ▼ 홍 대표님의 부부관계는 어떤가요? 부모님 영향을 받았을 법한데.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밖의 일에 대해선 집사람이 간섭하지 못하게 합니다. 대신 집안일은 전권을 줍니다.”

    ▼ 민주적인 가정인가요?

    “집안일과 밖의 일을 분리하기 때문에 민주적이고 안 민주적이고 할 게 없습니다.”

    “영호남 결혼으로 지역감정 없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부모, 윗사람 등 자신과 중요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태도와 행동을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닮는 것을 동일화(同一化, identification)라고 한다. 동일화를 통해 부모의 성격이 자식에게 옮겨진다.

    동일화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중 홍 대표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것은 금지된 대상과의 동일화, 공격자와의 동일화다.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대상, 혹은 두려운 대상의 특징을 닮음으로써 그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의 부친의 행동은 객관적으로는 그다지 존경할 만한 것이 아니다. 가장의 의무를 소홀히 한 데다 가산을 탕진해 집안을 곤경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식인 홍 대표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존경한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아버지의 ‘반가정적’ 행위가 ‘힘’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절대복종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홍 대표의 심리 기저엔 아버지에 대한 동일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홍 대표의 부친이 활쏘기를 즐겼다는 것, 가난 때문이기는 하지만 그가 한때 육사 진학을 꿈꿨다는 것은 그의 무인 기질을 짐작케 한다. 검사가 된 것도 그렇고.

    “검사와 기자는 사주팔자를 보면 ‘문(文)’이 아니라 ‘무(武)’로 나옵니다. 그래서 검사와 기자는 칼잡이 취급을 합니다.”

    ▼ 전형적인 시골 출신인데요. 지방차별이나 지역감정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신 적이 있습니까?

    “1980년대 초 지역감정이 극심하던 시절 우리는 영호남 결혼을 했습니다. 집사람이 전라도 여자입니다. 그래서 저는 호남에 대한 편견이 없습니다.”

    ▼ 부모님이 반대하시지 않던가요?

    “양가에서 다 반대했습니다. 우리 쪽은 전라도 여자라고, 저쪽은 고시생이라고 반대했죠.”

    ▼ 부모를 설득했습니까, 밀어붙였습니까?

    “밀어붙였습니다.”

    그는 지방차별 문제에 대해 이런 견해를 내놓았다.

    “지방이 차별받는다고 자꾸 말하는데, 인재대국주의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지방은 지방대로 발전해야겠지만, 수도권은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더욱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이명박 대통령의 정책에 찬성합니다.”

    평소 눈물을 잘 흘리지 않는다는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렸다”고 말했다. 1996년 4월25일, 그가 국회의원이 된 지 2주 만이었다.

    “어머님을 잘 모시지 못해 가슴 아팠습니다. 평생 아버님 뒷바라지하고 그 후엔 자식들 뒷바라지하고. 자식이 검사 돼서 덕 본 것도 없고.”

    “이제 굶지 않아도 된다”

    그가 사법시험에 합격했을 때 그의 가족은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제는 굶지 않아도 된다, 나중에 변호사 하면 먹고살 길이 열린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였어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뭘 하겠다기보다는 내 가족에게 따뜻한 밥을 먹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뻐했습니다. 신분상승했다고 좋아한 게 아닙니다.”

    그는 아들 둘을 뒀다. 큰아들은 전투경찰 복무를 마치고 서울 신림동 원룸에서 사법시험 공부를 하고 있다. 대학 재학 중 해병대에 갔다 온 둘째아들은 해외연수를 하고 있다. 그가 검사 시절 자식들을 야구방망이로 때린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야구방망이는 과장된 얘기고요. 엄하게 키운 건 맞습니다. 바르게 키우려고요. 자식들이 군에 갔다 온 후 아버지를 많이 이해하게 됐습니다.”

    ▼ 자식들이 사춘기에 아버지에게 꽤 저항했을 법한데요.

    “저항했죠. 그래서 매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두 놈 다 아버지를 많이 생각해주고 따라주고 있습니다.”

    두 아들은 홍 대표의 성격을 많이 닮았다고 한다. “독하겠다”고 슬쩍 찌르자 “독하다기보다는 바르게 컸다”고 응수했다.

    ▼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가족애입니다. 가정이 평안하지 않으면 남자가 밖에 나가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가정이 평안해야 사회도 있고 나라도 있습니다.”

    첫날 인터뷰가 끝날 때 그가 한 말은 “조 차장, 참 까시랍다”였다. 둘째날 인터뷰가 끝난 후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한 말은 “원내대표, 더 하기 싫다”였다. 이유를 묻자 “하도 말이 많아서, 말이 많아서…”라고 넋두리하듯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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