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국정원’과 대풍그룹 커넥션
- 뉴욕필 평양 공연 성사기(成事記)
- 박철수<대풍그룹 총재> , 뉴욕필 평양 공연 성사로 북한에서 인정받아
- 대풍그룹이 포스코, 광업자원공사와 논의한 사안은…
“친북주의자로 몰려 겪은 고통이 이만저만한 게 아닙니다. 억울함을 풀고자 그간의 일을 털어놓으렵니다.”
그는 2007년부터 대풍그룹 부총재 직책을 갖고 활동했다. 대풍그룹이 어떤 곳인가.
북한은 지난해 1월20일 대풍그룹을 국가개발은행의 외자유치 창구로 지정했다. 대풍그룹 이사장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총재는 재중동포 박철수가 맡았다.
대풍그룹 부총재가 4년간 일을 함께 한 조선족 박철수는 국가개발은행 부이사장에도 임명됐다. 김정일의 통치자금을 관리하는 39호 실장을 지낸 전일춘이 국가개발은행 이사장.
박철수는 2009년 8월부터 2010년 1월까지 이어진 남북 정상회담 논의 때 한 축에 서 있었다. 2009년 10월 임태희-김양건의 싱가포르 회동을 거간한 것. 한국에선 한나라당 부설 여의도연구소 C 박사, 대북사업가 Y씨가 알선했다.
뉴욕필 평양 공연 성사기
배경환(59) 전 대풍그룹 부총재는 문화계에서 ‘큰일 저지르기’로 소문난 인사다. 그의 이력에서 2000년 추진한 평양음악회를 제외하면 ‘정치’나 ‘북한’이라는 단어를 찾긴 어렵다.
그가 기획·제작해 2003년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공연한 ‘아이다’는 한국 공연 역사상 최대 규모로 기록돼 있다. 말 60필, 코끼리 10마리, 낙타 6마리, 1000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됐다. 2003년 5월29일자 ‘동아일보’는 2회 공연의 제작비가 60억원이라고 보도했다. 이밖에도 서울연극제 민영화 기획주관, 대종상영화제 민영화 기획, 청룡영화상 기획제작, 춘사영화제 기획제작, 예술의전당 야외무대 운영, 듀란듀란 내한공연 기획 등의 일을 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대풍그룹 부총재 직책을 가졌을까.
“뉴욕필하모닉오케스트라 평양 공연을 추진하면서 박철수와 함께 일했습니다. 대풍그룹은, 본부가 평양에 있었지만, 홍콩에 법인을 등록한 회사였어요. 당시에는 부이사장이던 박철수가 북한에서 가진 위상도 지금처럼 높지 않았고요. 이사장은 중국계 홍콩인 고계인이었습니다.”
배 전 부총재는 뉴욕필 평양 공연(2008년 2월26일)의 기획자다. 박철수는 이 공연이 성사되면서 북한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그는 말했다. 박철수는 중국동포로서 북한 고위직에 오른 최초의 인물.
“뉴욕필 평양 공연은 북한과 미국 사이의 일입니다. 중간에 한국 사람이 끼면 모양이 어색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북한 당국이 대풍그룹 부총재 모자를 씌워준 것입니다. 지금은 외자유치 기관으로 격상됐지만, 당시엔 그런 곳이 아니었어요. 홍콩법인인 터라 오해받지 않고 활동했죠. 주중 한국대사관에도 사정을 밝혔습니다. 대사관에선 북한과 미국 사이의 일이니 도와줄 것도, 막을 까닭도 없다, 알아서 하라고 하더군요.”
뉴욕필 평양 공연을 계기로 대풍그룹에 참여한 그는 최근 4년간 대풍그룹이 수행한 남북·북미·북중 간 이벤트에 발을 깊숙이 담갔다. 대풍그룹과 한국기업을 이어주는 역할도 했다.
그가 증언한 뉴욕필 평양 공연 성사기(成事記)와 대풍그룹 부침사(浮沈史)는 남북관계·북미관계가 얼마나 비틀려 있고, 즉흥적으로 움직이는지를 방증한다. 뉴욕필 평양 공연 막전막후(幕前幕後) 및 대풍그룹과 국정원 간 주고받기, 대풍그룹과 한국기업의 협상은 그간 알려지지 않은 비화(秘話)다.
배 전 부총재와의 인터뷰는 2월22일, 3월17일, 4월1일, 4월8일 네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지난해 2월16일 김정일 생일 파티 때는 박철수가 주탁(메인테이블)에 앉았어요. 우리랑 사진도 같이 찍었거든요. 그런데 올해 김정일 생일 때는 박철수가 초대받지 못했더군요.”
박철수가 사라진 까닭
김일성·김정일 생일잔치에 해마다 참석하는 재미동포 P씨는 박철수의 위상이 예전만 못한 것 같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박철수는 지난해 3월 조총련기관지 ‘조선신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국가개발은행의 1차적인 등록자본은 100억달러로 설정하고 앞으로 단계적으로 늘려나갈 계획이다. 앞으로 다른 나라의 성공경험, 선진기술, 선진경영, 관리방법을 국가의 실정에 맞게 적극 받아들이기 위한 창구도 마련해 국제고문단을 조직하겠다. 외자 유치를 통해 먹는 문제와 철도·도로·항만·전력·에너지 사업을 동시에 추진한다. 최대 4000억달러 외자유치를 추진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법과 제도를 손질하고 있다.”
북한 당국도 국방위원회 위원장 명령 ‘조선대풍국제투자그룹의 활동을 보장할 데 대하여’, 국방위원회 결정 ‘국가개발은행을 설립함에 대하여’를 발표해 박철수와 대풍그룹에 힘을 실어줬다.
결과는? 나빴다.
대풍그룹은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놓지 못했다. 대풍(大風)을 일으키기는커녕 허풍(虛風)만 내지른 꼴이 됐다. 국가개발은행은 실패했고, 박철수의 역할도 줄었다는 게 정보당국의 판단이다.
지금부터 배 전 부총재의 증언을 통해 대풍그룹 속으로 들어가보자.
▼ 조선신보 인터뷰에 실린 박철수의 포부는 허황해 보입니다. 북한 당국이 박철수의 허풍에 속은 것 아닌가요.
“허풍을 쳤다기보다는 잘해보려고 했는데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유엔 제재가 이어지면서 실패한 것으로 봐야죠.”
▼ 뉴욕필 얘기부터 해보죠. 왜 추진한 겁니까?
“한반도의 현실에서 사회·국가에 기여할 일을 찾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박철수와 함께 추진한 프로젝트는 모두 나름의 의의를 갖고 있어요. 뉴욕필이 평양에 갔다는 것 자체가 일대 사건 아닌가요. 뉴욕필이 평양에 간다? 공연기획자로 욕심나는 일이죠. 박철수에게 뉴욕필 얘기를 꺼낸 게 2006년 12월입니다. 북한이 1차 핵실험(2006년 10월)을 한 직후예요. 뉴욕필이 평양에 들어가면 평화 무드가 조성되지 않겠습니까? 평양이 뉴욕필을 받을지, 미국이 뉴욕필을 보낼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웠고요. 뉴욕필 평양 공연을 추진하면서 한국대사관에 나와 있는 정보기관 사람에게 알렸거든요. 자칫하면 용공(容共)과 관련해 오해받을 수 있는 일이니까요. 대의명분을 갖고 한 일인데, 색안경을 낀 사람들이 나를 두고 좌파라고 몰아붙이니 억울하죠. 물론 개인적인 부분도 일부 있었지만….”
▼ 개인적인 부분은 비즈니스 측면을 말하는 건가요.
“기획하는 사람이 투기를 할 순 없죠.”
▼ 박철수와 인연은 어떻게 맺었나요.
“북한이 핵실험하기 서너 달 전에 처음 만났습니다. 박철수가 잘나갈 때가 아니에요. 대북 무역 일을 했거든요. 뉴욕필 공연을 거론하면서 북측에 알아봐달라고 요청했어요. 뉴욕필이 뭔지도 잘 모르더군요. 문화적으로 미국을 상징하는 단체라고 설명해줬어요. 정치 감각을 갖춘 친구니까 말귀를 곧바로 알아듣더군요. 평양 들어가서 그 친구가 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모릅니다. 2007년 초에 당4호실 소속 인사가 베이징으로 나를 만나러 왔습니다. 뉴욕필을 왜 초청해야 하는지 설명해달라고 하더군요. 글로 적어서 줬어요.”
▼ 혹하게끔 썼겠군요.
“그랬죠. 뉴욕필을 불러서 손해날 게 없다, 뉴욕필은 미국을 대표하는 예술단체로서 외교적으로 첨병 역할을 한다, 미국이 뉴욕필을 보낸다면 북미관계에서 상징적 의미가 크다, 관계 정상화 의지를 국제사회에 전하는 것이다, 뉴욕필을 보내놓고 뒤로 허튼짓 하지 않는다, 미국을 믿어도 되는지 알아보는 수단도 된다고 설명했죠.”
▼ 혹했겠네요.
“이익이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고도 설명했습니다. 뉴욕필을 통해 관계 개선 의지를 보이면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와 경제 협력에도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죠.”
▼ 뉴욕필에 의사 타진은 했습니까?
“그쪽과는 접촉조차 안 했죠. 평양 공연을 하겠느냐고 느닷없이 물으면 미친 사람 취급했을 겁니다.”
“적극 추진하라”
북한 당국은 뉴욕필 평양 공연에 호의적 태도를 보였다.
“적극 추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답니다. 그때부터 갑·을 관계가 바뀝니다. 명령이 내려오면 완수해야 하는 시스템이니까….”
그는 북한 내각이 확인서를 발행해야 일을 추진할 수 있다고 밝혔다고 한다.
“사회·문화단체 문서가 아닌 정규 정부기관 문서를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그게 나와야 내가 움직인다, 국제사회는 정부 문서가 아니면 믿지 않는다고 전했습니다. 중계방송은 한국 방송국이 해야 한다는 단서도 달았고요. 통미봉남(通美封南)이 아닌 통미통남(通美通南)을 도모하는 행사여야 한다고 믿었거든요.”
북한 당국도 확인서를 발행하기에 앞서 배 전 부총재에게 확인을 요구했다.
“2007년 3월 김계관 외무성 부상(현 외무성 제1부상)이 뉴욕을 방문합니다. 김계관이 미국에 머무를 때 뉴욕필 쪽에서 확인해주게끔 해달라고 북측이 요청했어요.”
김계관은 3월1~7일 뉴욕을 방문했다. 2·13 베를린합의 이후 일시적으로 북미간 훈풍이 불 때다.
▼ 뉴욕필과는 접촉도 안 했다면서요.
“2월27일인가, 28일에 김계관이 뉴욕에 가려고 베이징에 나왔어요. 박철수가 나보고 김계관을 만나보랍디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내가 왜 만나느냐고 했죠.”
▼ 확인은 어떻게 해줬습니까?
“뭘 어떻게 확인해주느냐, 시작도 안 했는데, 문서가 나와야 시작한다고 사실대로 말했어요.”
북한 내각 문화성은 2007년 6월18일 문화상 강능수(현 내각 부총리) 서명이 담긴 확인서를 발급했다. 문화성은 국문·영문으로 각각 확인서를 작성했다. 문건에 담긴 내용은 이렇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화성은 조선예술교류협회와 홍콩대풍국제투자그룹 사이에서 교섭되고 있는 미국 뉴욕필하모닉악단의 평양 방문 공연을 환영하고 이에 동의하면서 이 사업의 리행을 조선예술교류협회와 홍콩대풍투자그룹에 위임하여 조선예술교류협회가 미국 뉴욕필하모닉악단과 그 동행성원들의 평양 방문 시 그들의 안전과 편의, 공연을 원만히 보장하도록 협력할 것을 확인한다.’
문화성이 이 문서를 발급하기까지의 우여곡절(迂餘曲折)은 공작을 연상케 한다. 때로는 웃음도 나온다.
“뉴욕에서 김계관에게 확인해줄 게 없다고 얘기해도 요지부동입디다. 재미교포 C씨를 통해 잭 프리처드 한미경제연구소 소장 쪽과 연결이 됐어요. 대북 특사로 일했던 사람인데, 한미경제연구소 쪽에서 유엔 북한대표부에 전화하게끔 했습니다.”
▼ 그렇게 확인이 된 거군요.
“C씨 말로는 잘 처리했다는데 전화했는지 확언할 수는 없어요. 북측 얘기는 확인이 안 됐다는 거예요. 전화를 했다는데 못 받았느냐고 물었죠. 대표부 구조가 전화는 증명이 못 된대요. 공식 기록으로 인정을 안 한답니다. 메일이나 팩스로 문서가 들어와야 정식으로 보고된다는 겁니다. 박길연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대사(현 외무성 부상) 연락처를 주면서 뉴욕에서 그쪽으로 확인해주라고 거듭 요구하는 겁니다. 확인서가 없으면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뉴욕에서 확인이 돼야 확인서를 내주겠다니 답답한 노릇이었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묘안을 생각했죠. 선의의 편법이었어요.”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P참사가 뉴욕필 행사 담당자로 결정됐다. 외무성이 뉴욕필 초청 행사를 주관하는 것으로 북한 당국이 교통정리한 것이다. 배 전 부총재는 P참사에게 존 스트라익이라는 미국인을 뉴욕필 공연을 맡고 있는 에이전트라고 소개했다. P참사는 스트라익과 e메일을 주고받으면서 평양 공연을 논의했다.
“존 스트라익은 내가 만든 가공의 인물입니다. 미국에서 주로 쓰는 e메일 어드레스를 만들어 스트라익 명의로 P참사한테 e메일을 보냈습니다. 실제론 나와 메일을 주고받은 건데…, 여하튼 스트라익 덕분에 2월부터 요구한 확인서가 6월에 나왔습니다.”
“핵문제는 거론하지 말라”
북한 당국은 뉴욕필 방문을 2007년 6월7일 승인했다. P참사는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명의의 문건을 스트라익에게 보냈다. 이 문건은 “북한 정부가 뉴욕필 평양 방문을 승인한 사실을 알려주게 돼 영광이고 기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P참사는 스트라익에게 문건을 보낸 날 주중 북한대사관에서 대풍그룹을 담당하는 K참사에게도 “당국이 뉴욕필 평양 방문을 승인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K참사는 이를 배 전 부총재에게 알렸다. 강능수 문화상 명의의 확인서는 그로부터 11일 뒤 나왔다.
▼ 확인서를 들고 뉴욕필에 접촉했겠군요.
“자린 메타 뉴욕필 사장이 지휘자인 주빈 메타 동생이에요. 한국의 스태프가 그쪽으로 접촉했어요. 처음엔 스케줄이 안 된다고 하더군요. 다시 요청했더니 명확하게 답을 안 주고 시간을 끕디다. 아마도 미국 국무부와 협의에 들어갔겠죠. 뉴욕필은 보통 여름휴가 때 외국 투어에 나서는데, 확인서가 늦게 나오는 바람에 시기를 놓친 측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뉴욕필이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과 계약을 맺고 서울 공연을 해왔거든요. 평양 공연은 수익을 못 내지 않습니까. 서울 공연이 함께 이뤄져야 기획자가 돈을 벌 것 아닙니까. 평양과 서울을 잇는 투어가 성사돼야 공연이 더욱 빛을 보고요. 그러려면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의 양해를 얻어야 했습니다.”
그는 중계권 판매와 서울 공연 입장료 수익으로 이익을 남기려고 했다. 대풍그룹과 MBC는 2007년 9월 뉴욕필 평양공연과 관련한 양해각서를 맺었다.
“MBC가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과 협상했어요. 평양 공연은 몰라도 서울 공연은 그쪽에서 허락해야 했으니까요.”
뉴욕필은 2007년 12월11일 뉴욕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듬해 2월26일 평양에서 공연을 한다고 발표했다. 박길연 당시 유엔주재 북한대사는 기자회견에 참석해 “핵문제는 거론하지 말아달라, 북미 우호 증진을 위해 뉴욕필을 초청했다”고 밝혔다.
“뉴욕필 기자회견 며칠 전에 박철수를 통해 메시지가 왔습니다. ‘국가를 위해서 영웅적인 일을 해줬다. 지금부터는 국가 차원에서 일을 진행하겠으니 지켜봐달라’는 겁니다. 김계관이랑 크리스토퍼 힐이 만나 공연을 논의했다는 겁니다. 뉴욕필이 국무부에 문의했고, 국무부가 나선 거죠. 방송사하고도 연결해놓았는데, 세상에 이런 경우가 있느냐고 항의했죠. 일 잘했다고 칭찬받았다면서 ‘조국이 큰 공로를 인정하고 있다’고 박철수가 그럽디다. 박철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북한이 나의 조국도 아니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한 일인데, 공로 인정 같은 건 필요 없다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박철수가 자기가 사람을 잘 써서 공연이 성사됐다고 북한에서 말했답니다. 뉴욕필 기자회견을 보고 하도 기가 막혀서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하려고 했어요. 기획자로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일 아닙니까? 미국과 북한 양쪽을 상대로 국가가 이럴 수 있느냐고 항의하려고 했어요. 2000년 평화음악회 때는 김대중 정권과 북한이 공연에 어깃장을 놓았습니다. 2000년에도 그런 일을 겪었는데, 이번엔 북한과 미국에 당한 꼴이었습니다. 보도자료까지 다 만들어놓고 기자회견을 준비했습니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평양 봉화예극장에서 2000년 4월5일 열기로 한 ‘평화를 위한 국제음악회’는 소프라노 조수미가 참여해 화제가 됐다. 악단이 평양에 들어가 최종 연습하는 상황에서 공연 날짜를 며칠 앞두고 북한 당국으로부터 공연을 미루라는 통보가 왔다.
“오케스트라가 평양에 들어가서 연습하고 있는데 공연을 나중에 하라는 겁니다. 6월15일 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 개최 발표와 시기가 맞물리면서 한국 정부와 북한 당국이 공연을 취소한 거예요. 북한 당국이 도의적으로 나에게 미안해야 할 일이 두 번이나 있었던 겁니다.”
▼ 기자회견은 왜 안 했습니까?
다들 하지 말라고 합디다. 주중 한국대사관에서도 말렸습니다. 베이징이란 곳이 외국인이 함부로 기자회견 하는 곳이 아니랍디다. 월요일 오전에 기자회견 하려던 것을 일요일 오후에 접기로 결정했습니다.”
뉴욕필 평양 공연은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북미관계 정상화가 초읽기에 들어갔다거나, 한국의 새 정부 출범에 맞춰 북한이 통미봉남에 나섰다는 식이었다. 심지어 미국이 뉴욕필 공연을 통해 이명박 정부에 메시지를 전했다는 식의 논평도 있었다.
뉴욕필 소동(騷動)은 베이징에서 나비가 날갯짓 한번 한 것이 뉴욕에 폭풍을 불러일으킨다는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를 연상케 한다. 사람들이 놀라거나 흥분해 시끄럽게 법석거리고 떠들어 대는 일의 시작은 복잡하지 않고 간단할 때가 많다.
▼ 뉴욕필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비즈니스 측면이 컸어요? 아니면 명분이 더 컸어요?
“북미관계 개선은 남북 모두에 좋은 것 아닌가요. 아시아나항공이 뉴욕필 단원을 싣고 평양-서울을 직항으로 운행했어요. 그것도 남북관계에서 상징적인 사건 아니었나요.”
▼ 중계권료는 받았습니까.
“약속했던 돈의 5분의 1밖에 못 받았습니다.”
▼ 왜요?
“MBC에선 오현창 당시 글로벌사업본부장이 책임자였습니다. 이번에 강원도지사 선거 나온 최문순이 사장이었고요. 뉴욕필이 나를 끼고 계약하는 데 난색을 표했다는 겁니다. 미국 정부가 기획자는 빼고 계약하라고 했다고 뉴욕필 쪽에서 밝혔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일부만 받았습니다.”
▼ 공연이 이뤄졌으니 열매는 맺었네요.
“그런 셈이긴 한데,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내 처지에선 이해는 해도 용납은 안 됐어요. 내가 무슨 큰 영예를 얻고, 큰돈을 벌자는 건 아니었지만….”
▼ 기분이 상했다는 거군요.
기분 상하지 않겠습니까. 기분 상하는 정도가 아니지. 공로를 인정하겠다, 보답을 해주겠다고 북측이 얘기했지만, 그게 다 수작으로 보입디다.”
▼ 공연 당일에는 기분이 어땠습니까?
“그때는 다 받아들였을 때니까…. 여하튼 시기가 절묘했어요. 새 정권에서 평화 무드가 이어지리라는 걸 예상케 하는 행사였다고나 할까요. 결과는 반대로 갔지만…. 그런데 새 정부 인사들이 뉴욕필 서울 공연에 참석을 안했더군요. 좌파 정권 때 기획해 이뤄진 일이라고 여긴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나는 원칙을 강조하는 이명박 정부 대북정책이 옳다고 봅니다. 땡볕인지, 햇볕인지 하는 게 남북관계를 오히려 비틀리게 만든 측면이 커요. 그럼에도 정치와 경제, 정치와 문화는 분리해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요. 문화 교류, 경제 교류가 정치를 앞서가는 예가 많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핑퐁 외교가 그렇지 않았습니까. 물론 영리 목적도 있었지만, 내가 그린 큰 그림과는 결과가 달랐습니다.”
배 전 부총재는 뉴욕필 평양 공연 석 달 뒤인 2008년 5월 방북했다. 평양이 약속대로 보답을 해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칙사(勅使) 수준의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조선백호무역회사 명의로 발행한 초청장엔 이렇게 적혀 있다.
‘조선백호무역회사는 평양모란봉교예단의 해외순회 공연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귀사의 부리사장 박철수 선생과 문화담당 부총재 배경환 선생을 5월 중에 평양에 초청합니다.”
▼ 평양에 가서 어떤 일을 했습니까?
“북한 교예단은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서커스라는 게 만국공통인데다, 북한 국적이라는 점이 흥미를 자극하거든요. 평양에 갔더니, 최문순 사장, 그러니까 당시는 최문순 의원이죠. 그 사람도 평양에 와 있다는 겁니다. 평양 사람들이 최문순을 만나보라는 거예요. 단칼에 싫다고 했습니다.”
▼ 왜 안 만났습니까?
“뭣 하러 만납니까? 재주는 곰이 부리고…. 박철수, 최문순이 뉴욕필 공연 수혜자죠. 나는 새 정부 들어선 뒤 좌파 인사로 오해받아 뒷조사를 받는 등 고생하고 있고요.”
▼ 평양모란봉교예단의 해외순회 공연은 어떻게 됐습니까?
“북미·유럽·한국공연을 추진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됐죠. 한국 공연은 남북관계가 경색되는 바람에 시도조차 할 수 없었고요. 유럽 출장을 여러 번 갔습니다. 이탈리아, 스페인 공연을 준비했는데, 글로벌 경제위기가 터지면서 스폰서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중국에 머무르면서 ‘대풍그룹 부총재’ 자격으로 연합뉴스와 수차 인터뷰했다. “2006년 10월 북한의 핵실험 이후 북미 간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북한에 뉴욕필의 평양 공연을 전격 제의, 성사시킴으로써 한반도 긴장 완화의 물꼬를 트는 해결사 역할을 해 주목받았다”고 연합뉴스는 그를 소개했다. 기사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겼다.
“기사를 막아달라”
“북한 당국이 국제 경제 체제에 편입하고자 적극적으로 외자 유치에 나서고 있다.”
“대풍그룹이 중국 국가개발은행과 투자기금 조성에 관한 합의를 맺었다.”
“평양-라진 철도보수, 공항사업, 국가개발은행에 한국이 투자해볼 만하다.”
▼ 연합뉴스 인터뷰를 읽어보니 대풍그룹 부총재로서 뉴욕필 공연만 추진한 게 아니던데요. 국가개발은행 설립을 비롯해 여러 일에 관여했더군요. 수소문해보니 한국기업과 대풍그룹을 연결하는 일도 했던데요.
“그랬죠.”
▼ 지금부터 대풍그룹의 대남사업 얘기를 해보죠. 한국 언론이 100억달러 유치설을 보도한 적이 있는데, 그건 어떻게 된 겁니까?
“지난해 정상회담을 하느니, 마느니 할 때 대풍그룹이 100억달러를 유치했다는 보도가 한국에서 나왔죠. 그게 와전된 거요. 내용이 뭐냐 하면 중국 국가개발은행에서 북한 몫으로 100억달러를 배정했다는 겁니다. 북한이 외자를 유치했다는 게 아니고요. 중국기업이 북한에 투자할 때 중국 국가개발은행이 좋은 조건으로 대출해준다는 내용이에요.”
▼ 박철수가 100억달러의 자본금으로 국가개발은행을 세우겠다고 큰소리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100억달러는커녕 10억달러도 북한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박철수 처지가 곤란한 거요. 포부는 괜찮은데, 결과물이 없으니….”
▼ 박철수 입지가 북한에서 약해졌나요?
“데미지가 당연히 크지 않겠어요. 대풍그룹이 뭐하는 곳입니까? 외부에서 투자를 유치하는 곳이잖아요. 박철수가 자본을 유치할 곳이 사실상 중국, 한국밖에 없습니다. 특히 중요한 곳이 한국이고요. 한국에서 지난해 봄부터 가을까지 박철수는 사기꾼이라는 식으로 부정적인 보도가 쏟아졌지 않습니까. ‘신동아’도 그렇게 썼고요. 그 와중에 나도 좌파 인사라는 식으로, 도매금으로 넘어갔고요. 대남사업 총책인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왜 대풍그룹 이사장을 맡았겠습니까? 김양건이 책임자가 된 건 대남 사업을 잘 해보라고 박철수에게 힘을 실어준 것으로 해석해야 해요. 그런데 지금 남북관계가 어떻습니까. 뱉어놓은 말을 박철수가 지킬 수 없게 된 거죠. 두 달 전, 그러니까 2월에 박철수가 독일 슐츠재단을 데리고 평양에 들어갔는데, 그것도 성과물은 없었어요.”
박철수가 추진한 대남사업 중 결과물이 나온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중국기업의 북한 광산 투자에선 일부 성과를 거뒀다고 한다. 박철수가 한국 언론의 부정적인 기사를 막아달라고 그에게 부탁한 적도 있다고 한다.
“지난해 여름, KBS ‘취재파일 4321’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대풍그룹 취재를 세게 했어요. 베이징까지 날아와 부정적인 내용으로 박철수를 인터뷰하고 그랬거든요. 나보고 기사를 막아달랍디다.”
▼ 어떻게 했습니까?
“일요일에 베이징에서 서울로 들어왔어요. 이튿날 취재파일 4321쪽 사람을 만났는데, ‘어제 방송했는데요’라면서 웃더라고요. 인터넷으로 방송을 봤더니 완전히 박살을 내놓았더군요. 북한이 대풍그룹을 띄웠잖아요, 보증한 곳이니 믿고 투자하라고요. 그런데 한국 언론에 박철수가 된통 당했지 않습니까.”
국정원과 대풍그룹
▼ 대남사업에서는 성과가 있었습니까?
“그건 내가 다 알죠. 거의 모든 일에 나도 관여했으니까. 북한에서 보기엔 박철수가 일을 아주 잘 한다고 느꼈을 거예요. 포스코, 광물자원공사 같은 큰 곳과 북한을 연결해줬으니까요.”
▼ 대풍그룹과 특정회사가 접촉했다더라는 식의 보도는 있었지만, 구체적으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얘긴데요.
“노무현 정부 때는 별별 일이 다 있었어요. 국정원하고 대풍그룹도 서로 관계를 맺었고…. 좌파 정권 때는 남북 경협과 관련해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도와줬어요. 정보기관도 지금과는 태도가 정반대였고요. 정권이 바뀌면서 박철수가 성과를 내진 못했지만….”
▼ 포스코와는 어떻게 접촉했나요.
“박철수가 중국 자본으로 북한 광산을 개발하려고 했습니다. 중국 철강회사 2곳과 MOU(양해각서)를 맺었습니다. 철강은 국가기간산업 아닙니까? 박철수에게 포스코와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통일 후 미래를 대비해서 한국 철강회사가 좋지 않겠느냐고 조언했죠. 박철수가 조언을 받아들이고, 북측에 의사를 타진했습니다. 성진제강연합기업소에 남북 합작으로 제철소를 건설하고 북측이 포스코에 철광석과 무연탄을 제공하는 사업이었습니다. 베이징 한국대사관에 나와 있는 국정원 인사가 포스코와의 연결을 도와줬습니다. 대풍그룹과 국정원을 잇는 다리 역할을 내가 했어요.”
▼ 그랬군요.
“내가 얘기한 것을 국정원이 포스코에 전했습니다. 북한 당국은 포스코가 파이낸스 공법을 가르쳐줬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북한 제2경제위원회 국장한테서 대풍그룹 쪽으로 연락이 왔어요. 파이낸스 공법 개념도를 포스코로부터 받았으면 좋겠다고요.”
파이낸스 공법은 쇳물을 생산할 때 코크스와 철광석을 사전 처리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포스코가 세계 최초로 가동한 신기술이다. 철광석과 무연탄 매장량은 많지만 코크스가 나지 않는 북한에는 요긴한 제철법이다. 제2경제위원회는 북한에서 군수산업을 관장하는 곳이다.
▼ 정확하게 언제 일인가요.
“뉴욕필하고 동시에 진행했으니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2007년)예요. 국정원 직원에게 북한이 파이낸스 공법 개념도를 원한다면서 제2경제위원회 국장이 보내온 문건을 건넸습니다. 자칫하면 내가 산업스파이로 몰릴 일 아닙니까? ‘이런 거 줘도 되느냐’ ‘안 되는 것 아니냐’ ‘알아서 해라’라고 국정원 쪽에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료를 보내온 겁니다. 박철수가 개념도를 받아서 북한대사관에 넘겼어요.”
▼ A4 용지 몇 장이었나요?
“나는 못 봤어요. 디테일한 내용은 아니었던 것으로 알아요. 국정원이 포스코 쪽에 얘기해 포스코가 대풍그룹에 전해준 겁니다. 그 일이 있은 뒤 포스코 중국 총책임자인 김동진(당시 포스코차이나 총경리)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나, 대풍그룹 이사장이던 고계인, 박철수, 김동진이 포스코차이나 총경리 사무실에서 회의를 했습니다. 앞서 말했듯 성진제강연합기업소에 합작 제철소를 짓고 포스코가 철광석, 무연탄을 가져가는 조건으로 논의가 진행됐습니다. 포스코 쪽에서 철광석·무연탄 샘플을 보내달라는 식으로 대풍그룹에 요구사항이 많았어요. 그 뒤로는 그 사람들끼리 서로 주고받고 했죠.”
2008년 2월26일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뉴욕필 평양 공연.
이 에피소드는 정권의 성향과 남북관계 변화에 따라 정보기관의 역할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2007년은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이 열린 해다.(10월2~4일)
배 전 부총재와 포스코의 설명대로 디테일한 내용이 담기지 않은, 보도자료 수준의 기초 사안이 담긴 문건이라면 북한으로 자료가 넘어갔다고 해도 문제될 것은 없으나 국정원이 주주가 존재하는 사기업에 요청해 기술 관련 자료를 북한에 넘겨주게 했다면 문제 삼을 만한 일이다.
국정원 대변인실은 이와 관련해 “사실 무근이다. 관련 부서에 문의한 결과 그런 사실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참고로 북한은 2009년 ‘주체철’ 생산 체제를 완성했다. 수입에 의존하는 중유와 코크스 대신 북한에서 조달한 원료로 만든 철강이다. 2009년 성진제강연합기업소에 주체철 생산체계를 처음 완성한 후 황해제철, 김책제철 등에 이 생산체계를 도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정일은 성진제강연합기업소를 찾아 “자체의 기술로 주체철 제강법을 완성한 것은 핵실험 성공보다 더 위대한 승리”라고 말했다고 조선중앙TV가 2009년 12월20일 보도했다.
평양 10만호 건설 프로젝트
대풍그룹은 2012년 강성대국 진입을 위해 추진한다는 평양 10만호 건설사업에도 한국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아파트 10만호 건설은 장성택이 맡아 추진하는 사업입니다. 2012년 강성대국 진입과 관련해 진행하는 것인데, 박철수가 그 프로젝트를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10만호를 지으려면 돈이 들 것 아닙니까? 박철수는 북한광산 개발권을 남측에 제공하고, 한국 자본과 기술을 유치하려고 했어요. 광물자원공사가 4개 회사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와서 대풍그룹 베이징 사무실에서 MOU를 맺었습니다. 일이 진행되려면 광산이 경제성이 있는지 먼저 살펴봐야 할 것 아닙니까. 조사단을 보내는 문제가 논의되다,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프로젝트가 중단됐습니다.”
▼ 광물자원공사 건도 국정원이 연결해준 겁니까?
“아닙니다.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건 국정원도 알고 있었죠. 내가 이야길 안 해도, 광업자원공사가 국정원에 알립니다. 국정원에 안 알리고 북한과 어떻게 일을 합니까? 나는 주중 한국대사관에 관련 사실을 얘기했고요. 몰래 하고 그런 것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떳떳이 얘기하는 거죠. 내가 광물자원공사 쪽에 닿는 인맥이 있어서 박철수와 연결해줬습니다.”
이와 관련해 광물자원공사는 “북한 광산 개발과 관련해 대풍그룹과 의향서를 맺고 조사단 파견을 준비했으나 사업을 중단했다. 실제로 북한으로 실사단을 파견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대풍그룹은 노무현 정부와 북한에 오징어를 인도적으로 지원하는 사업을 논의한 적도 있다. 인성실업 강종원 전 대표의 설명.
“인성실업이 남대서양에서 오징어를 잡는데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에 값이 폭락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오징어가 너무 많이 잡혔어요. 2007년 K씨를 통해서 박철수를 만났습니다. 한국 정부가 우리가 잡은 오징어를 구매한 뒤 북한에 인도적으로 지원하는 사업을 박철수와 논의했습니다. 이재정 당시 통일부 장관도 논의에 참여했고요. 노무현 대통령 임기가 얼마 안 남은 데다, 지원 액수도 상당해서 성사되지는 않았고요.”
▼ 남북경협에는 왜 발을 담갔나요? ‘전공’도 아니지 않습니까.
“박철수와 나, 주중 북한대사관 K씨를 북한에선 베이징 3총사라고 부릅니다. 뉴욕필 공연을 준비하면서 인연을 맺어 이런저런 일을 했습니다. 2004년부터 중국을 근거지로 일을 해왔습니다. 중국에서 보면 북중관계가 다르게 보입니다. 중국이 북한을 예속화하려는 게 빤히 보여요. 죽지 않을 만큼 지원하고, 투자는 적게 하면서 알맹이만 빼가려고 합니다. 한국이 북한 경제를 선점해야 해요.”
배경환 전 대풍그룹 부총재가 2003년 서울올림픽주경기장 특설무대에 올린 ‘아이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인 1985년 남북 교류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조용필이 최고의 가수일 때인데, 당시에는 방송국에서 노래 부르는 것 외에 공연이 별로 없었어요. ‘북한동포에게 추석선물 보내기 조용필 자선공연’을 준비했습니다. 정부 허가를 못 받아서 불우이웃돕기 자선공연으로 바꿔 진행했습니다. 그때부터 북한에서 공연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앞으로는 북한 쪽을 쳐다보지도 않겠군요.
“실제로는 보수파인데, 좌파로 낙인찍히면서 불편한 게 많아요. 불쾌하기도 하고요. 정보당국에서 뒷조사했다는 소문도 있고요. 중국 국립오페라단에서 ‘아이다’를 높게 평가했습니다. 베이징올림픽주경기장에서 ‘아이다’를 올리려고 해요. 서울 공연보다 규모를 더 키울 겁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초청하려고요. 하하. 통일부에 사업 승인을 요청해놓은 다른 건도 있습니다. 남북 연주자가 오케스트라를 결성해 세계적 지휘자를 데려와 6자회담에 참여하는 6개국에서 평화음악회를 여는 기획입니다. 오케스트라의 하모니가 얼마나 평화롭습니까? 정치가 못하는 일을 문화가 할 수 있어요.”
못 말리는 남자
‘못 말리는 남자’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게 되는 일인가요?”라고 묻지는 않았다
대풍그룹이 북한에서 주가를 높이고, 박철수 같은 인사가 고위직에 올랐다는 사실을 통해 북한 당국의 수준을 짐작해볼 수 있다. 대풍그룹이 벌인 일련의 활동은 앞서 살펴봤듯 해프닝적 요소가 적지 않다.
북한 당국은 박철수를 능력이 출중한 사람으로 여겼을 것으로 보인다. 포스코, 광물자원공사 등과 함께 일을 진행했으니 말이다. 앞서 언급했듯 이명박 정부의 실세 정치인과 북한의 대남총책이 싱가포르에서 만날 때 박철수가 거간 노릇을 했다. ‘국회의원 임태희 특보’ 명함을 갖고 활동한 대북사업가 Y씨와 박철수는 2009년 8월 베이징에서 만났다. 임태희-김양건 만남은 2009년 10월 이뤄졌다. 북한 당국이 보기엔 박철수가 적지 않은 일을 한 것이다.
그간 남북 교류에선 한국 정부 대 북한 당국으로 이뤄진 시스템 대신 비선, 특사, 아마추어가 활개치곤 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남북 간 협상·교류의 원칙을 바로 세워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