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호

[김학준의 6·25재조명②] 맥아더가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은 타당한가

  •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

    입력2020-06-07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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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덧 광복 이후 최대의 민족 참사였으며 오늘날까지도 한민족 모두에게 큰 부담을 안기는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했다. 이 계제에 이 전쟁을 둘러싼 수많은 쟁점 가운데 16가지만 가려 그 내용을 5회로 나눠 살펴보기로 한다.

    쟁점 : 맥아더의 남침 유도설은 타당한가

    6·25 전쟁 당시 주한유엔군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가운데). [미국 국립문서 기록관리청]

    6·25 전쟁 당시 주한유엔군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가운데). [미국 국립문서 기록관리청]

    이 전쟁이 북한의 남침 개시로 시작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 점은 어느 무엇보다도 1994년 6월 김영삼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넘겨준 옛 소련의 기밀 문서에서 재확인됐다. 우리는 이 문서를 ‘옐친문서’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러나 이 문서가 공개되기 이전에는 미국이 한국을 부추겨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이 특히 미국학계 일각에서 제기됐다. 그 대표적 연구자가 가브리엘 콜코(Gabriel Kolko) 교수였다. 그는 혐의를 일차적으로 미국의 극동군총사령관이던 맥아더 원수에게 씌웠다. 1949년 10월 1일 성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을 붕괴시켜 세계적 영웅으로 자리를 굳히고 그 기세를 몰아 1952년 실시될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려는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을 부추겨 북침을 감행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북한의 반격을 유도해 확전되도록 계획했다는 추론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면 맥아더는 어떤 판단에서 이 대통령을 부추겼다는 것일까. 그는 당시 이 대통령이 국내 정치에서 야당의 공세 앞에 궁지에 몰려 있었고 그래서 그 역시 전쟁을 통해 반전의 탈출구를 찾고자 했다는 추론을 제시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지적돼야 할 것은 그는 어떠한 1차 자료도 제시하지 못하고 그저 그 스스로의 표현대로 ‘추측’을 제시했을 뿐이었다.

    그러한데도 그가 쓴 책 ‘힘의 한계: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외교정책’이 미국 주요 대학에서 교과서 가운데 하나로 채택됐기에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콜코 교수의 추론과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읽힌 커밍스 교수의 ‘한국전쟁의 기원’ 제2권은 ‘한국군의 해주침공’을 내세웠다. 6·25전쟁 직전에 한국군이 황해도의 도청 소재지 해주를 침공해 전단을 열자 북한이 반격을 가함으로써 결국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다는 가설을 제시한 것이다. 이 가설 역시 옐친문서가 공개되기 이전에 쓰인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미국의 1차 자료를 철저히 점검한 정병준 교수와 이완범 교수 등에 의해 이 가설은 완전히 부정됐다.



    쟁점 : 애치슨 선언은 북한의 남침을 유도한 미끼였을까

    미국의 ‘북한 남침 유도’설에 연결되는 쟁점은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전국기자협회에서 행한 연설에 관련됐다. 그는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말하면서 한국을 제외했는데, 유도설을 제시한 연구자들은 이 연설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한 미끼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애치슨 발언에 앞서 맥아더는 극동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1948년 이후 일관되게 한국을 제외하는 안을 본국 정부에 올렸고, 이는 공지의 사실로 밝혀져 있었으며 애치슨 연설은 그것의 재확인에 지나지 않았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냉전사 분야에서 세계 제1인자라는 평을 받는 존 루이스 개디스(John Lewis Gaddis) 예일대 교수는 애치슨 연설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해석을 전면 부인했다.


    쟁점 : 김일성의 개전 제안을 처음에는 거부한 스탈린이 나중에는 승인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옐친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은 처음에는 평양 주재 소련대사를 통해, 이어 1949년 3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거듭 남침 계획을 설명하고 승인을 간청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거절했다. 미국이 군사개입할 개연성이 있으며, 그렇게 되면 전쟁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직접적 군사 대결로 확대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1950년 3월 다시 모스크바에서 열린 회담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끈질긴 제의를 승인했다. 스탈린으로 하여금 태도를 바꾸게 만든 요인들은 무엇이었을까. 옐친문서에서도 이 물음에 대해서는 명확한 대답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다음의 요인들을 제시했다. 

    첫째,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사실이다. 스탈린은 늦게까지도 중국대륙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이 장악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 예상을 깨고 중국공산당은 장제스가 이끈 중화민국을 타이완으로 밀어내고 대륙을 장악한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것이 스탈린으로 하여금 ‘이제 공산주의의 물결이 아시아를 휩쓸기에 이르렀다’는 판단을 내리게 만들었다”고 풀이했다. 스탈린은 1950년 2월 모스크바에서 마오와 회담하고 두 나라 사이의 상호방위원조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중소동맹을 형성한다. 

    둘째, 1949년 10월 소련이 마침내 원자폭탄을 보유하게 됐다. 이로써 미국의 원폭 독점 시대는 끝이 났다. 연구자들은 이것 역시 스탈린에게 자신감을 갖게 만들었다고 풀이했다. 


    박헌영이 남침 계획을 반대했다는 주장은 사실인가 아닌가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1946년 여름에 월북했고 1948년 9월 북한 정권이 수립됐을 때 제1부수상 겸 외무상으로 임명된 박헌영이 수상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반대했다는 주장이 퍼져 있었다. 자신이 남조선로동당의 ‘마지막 지하총책’이었다고 주장하는 박갑동이 쓴 책들은 이 주장을 되풀이해 강조했으며, 심지어 박헌영을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을 추진했던 사람’으로까지 묘사했다.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옐친문서는 박헌영이 김일성을 따라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스탈린 앞에서 북한군이 내려가면 ‘지하의 남로당원들’이 일제히 호응해 봉기할 것이라고 큰소리치면서 남침 계획을 적극적으로 제시했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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