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탁월한 이야기꾼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SF 소설 ‘차원 이동자(The Mover)’를 연재한다.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넘나드는 ‘차원 이동자’ 이야기로,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선보이는 이 소설 지난 회는 신동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편집자 주>
1
꿈이 문제였다. 파동화된 존재에게 잠은 사라졌고 꿈꾸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추격자 타파히 히후 길힐은 그렇지 않았다. 타파히는 꿈을 꿨고 전생을 희미하게 기억해 냈다. 육체를 벗어난 영원의 존재에게 그건 광기가 빚은 악몽이었다.2
“난 전생을 봐.”타파히의 말을 처음 들은 동료 추격자 레우웩은 비웃었다.
“이보게, 타파히. 잠 없는 우리에게 꿈 따윈 불가능해.”
레우웩 주변을 반복해 회전하던 타파히가 우울하게 속삭였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다고! 뭔가 자꾸 보여.”
“그럴 리 없어. 육체에서 탈피하며 우린 새로 태어났어. 다른 기억이 잔상으로 남았겠지.”
“아냐, 레우웩. 몸으로 살았던 기억이 완벽히 재생된다고! 중간중간 끊어지지만 아주 생생해.”
“이를테면?”
회전을 멈춘 타파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를테면…, 탈피 직전의 내가 느껴져. 물론 나도 알아. 탈피와 동시에 이전 기억은 지워졌지! 그게 편했으니까. 그런데 그게 떠올라. 함께 탈피됐던 가족도 보여. 솔직히 그들이 보고 싶다고.”
파동 세계에서 혈연에 대한 관심은 금기시됐다. 그건 육체에 대한 병적 호기심으로 연결될 기미이자 결국엔 변절의 조짐이었다. 긴장한 레우웩이 가속하며 말했다.
“가족은 사라진 원시어야. 정신 차려. 넌 추격자고 임무가 있어.”
뒤로 물러난 타파히가 조용히 대답했다.
“파동 궤적으로 탈피 이전의 혈연관계를 찾아낼 수 있다는 걸 아나? 레우웩, 너도 그럴 수 있는 거라고. 네 가족을 만난다고 상상해 봐. 신나는 일 아냐? 그게 왜 나쁘지?”
레우웩은 침묵했다. 오직 사명만을 떠올리며 분투해 온 그는 자기 동료가 대오에서 이탈할까 염려됐고 그럴 경우 상대를 빨리 소멸시켜 주는 게 예의에 합당하리라 스스로 다짐했다.
3
“몸은 진화의 방해 요소일 뿐이야. 한숨 자고나면 자유를 얻는 거지.”누군가 타파히의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다른 손 하나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전해졌다.
“함께 잠들면 우린 영생을 얻는 거야. 두려워 마, 우리 아가.”
갑자기 꿈이 헝클어졌고 늘 그랬듯 대폭발 장면이 이어졌다. 부모로 보이는 생명체의 모습을 더 선명히 기억하려 해도 항상 그 폭발 장면이 가로막았다. 그 뒤론 적막한 침묵이 길게 이어졌고 한 행성 모습이 반복해 출현했다. 타파히의 꿈은 그렇게 끝나곤 했다.
4
레우웩이 변절한 타파히를 쫓는 건 힘든 일이었다. 오랜 세월 추격 기술을 연마한 상대는 무척 노련한 데다 레우웩보다 민첩했다. 그를 잡기 위해 우주를 누비던 레우웩은 딱 한 번 상대를 처치할 기회가 있었다. 지표면이 소금결정체로 뒤덮인 소금 행성의 한 도시에서였다.타파히는 소금 안에 응결된 채 죽은 박테리아를 추출해 식량으로 가공해 파는 상인으로 육화돼 있었다. 추출 사업이 번창할수록 타파히의 삶은 유복해졌고 그는 마침내 도시 지배층 지위에 올랐다. 방심한 타파히는 실수로 파동을 한 차례 사용했는데 그 사소한 잔흔이 예민한 추격자 레우웩에게 곧바로 감지됐다.
소금 채취 노동자 무리에 잠입한 레우웩은 끈질기게 기회를 노렸다. 신뢰를 쌓으며 조금씩 타파히에게 접근하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깊은 잠에 빠진 상대를 발견했다. 타파히는 넓은 평상에 누워 곯아떨어져 있었다. 상대 얼굴엔 미소가 일렁였고 한껏 부푼 흉골은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행복해 보였다. 레우웩은 파동을 가속하려다 망설였다. 무엇이 자기 동료를 이탈자로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타파히를 제거할 마지막 기회인 줄도 모른 채 레우웩은 살며시 상대의 꿈으로 스며들었다. 따뜻한 손 감촉과 자장가 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고 검푸른 하늘이 올려다보였다. 나른한 평화가 가득한 공간에 문득 굵은 남성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은 진화의 방해 요소일 뿐이야. 한숨 자고나면 자유를 얻는 거지.”
타파히 아빠가 엄마에게 하는 말 같았다. 문득 부드러운 손길이 다가와 온몸을 휩쓸었고 그 행동은 표현하기 힘든 기쁨을 몰고 왔다. 엄마가 말했다.
“함께 잠들면 우린 영생을 얻는 거야. 두려워 마, 우리 아가.”
순간 강력한 폭발음과 주위로 비산되는 파편이 눈앞에 펼쳐졌다. 놀란 레우웩은 가속했고 타파히는 자기 꿈에 몰래 끼어든 침입자를 눈치챘다. 순식간에 숙주의 육체를 벗어난 타파히가 외쳤다.
“무례하군! 그렇게 막 들어오기야?”
레우웩은 아차 싶었지만 절호의 기회를 이미 날린 뒤였다.
“타파히. 네 광기의 원인을 알고 싶었다. 그 꿈 말이다.”
“꿈? 이건 꿈이 아니라 엄연한 기억이야. 한때는 현실이었던 거라고!”
“그건 광기가 만든 환상이다. 돌아와라.”
“날 잡으라니까. 조금 빨리 움직여야 할 걸.”
타파히는 재빨리 이동했고 레우웩은 상대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윤채근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