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호

“제주도 전체가 지붕 없는 공연장”

문화와 예술의 섬, 인뎁스 체험 6選

  • 황승경 공연칼럼니스트·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20-05-3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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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굼부리 자연, 항파두리 역사, 이중섭 예술

    • 금빛 나팔바람 흐르는 국제관악제

    • 삼별초가 아픔이었던 독특한 제주 문화

    • 고흐와 고갱 걸작 만나는 ‘빛의 벙커’

    • ‘보는’ 제주에서 ‘느끼는’ 제주로

    제주도 어디서든 팔베개를 하고 누우면 한 점의 미술 작품, 한 편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여기에 역사와 문화, 음악이 더해지면 섬 전체가 ‘지붕 없는 공연장’이 된다. 제주도에서는 관광버스에서 우르르 내려서 사진 찍고 서둘러 차에 올라타는 ‘보여주는 관광’은 잊으시라. 대신 문화와 예술이 숨 쉬는 공간에서 바람이 불면 살짝 눈을 감아보자.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감미로운 제주 6곳을 소개한다.

    1. 2만 년 세월이 준 신비로움 ‘산굼부리’

    하늘에서 본 산굼부리. 멀리 한라산이 보인다. [제주특별자치도 제공]

    하늘에서 본 산굼부리. 멀리 한라산이 보인다. [제주특별자치도 제공]

    제주 방언으로 산에 생긴 구멍(굼), 즉 분화구인 ‘산굼부리’는 약 2만 년 전 해발 400m 고지에 생성된 세계 유일의 평지 분화구다. 억새의 금빛 물결을 마주하며 10분 남짓 정상까지 걷다 보면 내가 자연인지, 자연이 나인지 무아지경에 빠진다. 

    산굼부리 분화구(둘레 756m, 깊이 130m)는 한라산 백록담보다 크다. 생태학적으로도 난대·온대성 수목 450여 종이 공존해 자연적 가치가 높고, 특히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분화구가 아니라 지각변동으로 마그마가 새어 나간 공간에 형성된 함몰형 분화구여서 세계적으로도 희귀하다. 정상 전망대에 오르면 2만 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온 것 같다. 광활한 자연 앞에 서면 인간의 욕망도, 시기도 녹아내린다. 

    이쯤 되면 전설도 녹아 있을 터. 옛날 옥황상제의 말잣딸(셋째 공주)과 한감(한별)이라는 별이 애틋한 사랑을 했는데, 둘은 옥황상제의 노여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름길과 바람길을 따라 산굼부리로 내려왔다. 산굼부리는 채식주의자 말잣딸과 육식주의자 한감을 모두 만족시킬 자연의 보고(寶庫)였다. 그러나 말잣딸은 짐승 냄새를 피해 제주 남문 밖으로 떠나 무속신앙의 신이 됐고, 한감은 산굼부리에서 사냥꾼들의 소망을 들어주는 산신이 됐다고 한다. 옥황상제의 뜻을 거스른 지독한 사랑의 말로는 허무하다. 자연의 섭리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은 존재라는 제주도민들의 자연관이 엿보인다. 그래서일까. 산굼부리를 찾는 사람이 큰 소리를 지르거나 부정한 짓을 하면 한감이 격노해 삽시간에 안개가 퍼져 앞을 분간할 수 없게 된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다행히 필자가 찾은 4월 말 날씨는 화창했다.  

    홑이불처럼 사각거리며 바람에 날리는 산굼부리 억새 또한 일품이다. 영화 ‘연풍연가’의 촬영지로도 유명하지만,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억새 길을 걷다 보면 바람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들려 영화 스크린 속에 내가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2만 년 자연 속에서 사색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제주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산38

    2. 건국이라는 베일에 싸인 구비문학 ‘삼성혈(三姓穴)’

    이집트는 태양신의 후예, 로마는 늑대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 고조선은 곰이 여인이 돼 낳은 단군을 건국 시조로 본다. 제주도의 첫 왕국 탐라는 3명의 을라(고을라, 양을라, 부을라)가 용출해서 세운 시조설화가 바탕이다. ‘삼성혈(三姓穴)’에는 그들이 각각 땅속에서 솟아오른 세 구멍이 자리한다. 물론 황당무계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이주민이 건국한 나라에 신비로운 권위를 선사하려는 제주도민들의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이 살지 않던 4300년 전 바람 소리, 새소리만 들리는 정적을 깨고 한라산 정기를 받아 사람의 모습을 한 신 3명이 땅에서 솟았다. 이들은 동쪽에서 목선을 타고 온 벽랑국 삼공주와 혼인하고 각각 제주 고씨, 제주 양씨, 제주 부씨 시조가 된다. 이후 한라산 중턱에 올라 활을 쏴 돌을 맞혀 일도(양씨), 이도(고씨), 삼도(부씨)에 각자 둥지를 튼다. 이 건국 스토리에서 유래하는 제주시 일도동, 이도동, 삼도동이란 명칭에서 제주민들의 긍지가 느껴진다. 

    제주의 시작을 눈으로 확인하는 이곳은 도심에 있지만 녹나무, 제주곰솔(해송) 등 귀한 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뤄 주변 도심 기온보다 2도 정도 낮다. 특히 삼성혈 주변 나무군락은 삼성혈을 향해 자라는 신비로운 광경을 연출한다.
    *제주 제주시 삼성로 22

    3. 고려군의 기개, 민초의 눈물…‘항파두리’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제주특별자치도 제공]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제주특별자치도 제공]

    1270년(원종 11) 2월 몽골의 침입을 받은 고려 조정이 굴욕적인 강화를 맺자 삼별초부대는 끝까지 투항할 것을 결의하고 반란을 일으켜 항쟁했다. 그들은 강화도에서 남하해 진도에서 대몽항전을 이어갔으나 진도마저 함락당했고, 설상가상 그들을 이끌던 배중손 장군마저 전사하자 제주도로 향했다. 김통정 장군 통솔아래 삼별초는 항파두리 요새를 보루로 삼아 고려인의 자주 호국 정신을 불태웠지만, 1273년에 1만2000여 명의 여몽 연합군 총공격을 받고 전원 순의(殉義)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후 최영 장군이 몽골군을 토벌할 때까지 100년 동안 제주도민들은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제주의 민초 속으로 들어가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거친 자연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중앙에서 부임하는 관리의 핍박과 수탈을 감내해야 했던 민초들에게 삼별초군대 역시 해방군이자 또 하나의 수탈자였다. 김통정 장군을 비롯한 삼별초군조차 몽골군과 같은 외부 세력으로 규정한 제주 민초의 한은 민요와 신화, 전설로 전해진다. 이렇듯 항몽 유적지 항파두리는 우리에게 역사와 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귀중한 곳이다. 

    *제주 제주시 애월읍 항파두리로

    4. 제주 정감이 느껴지는 ‘이중섭 거리’

    이중섭 거리에 있는 시비(詩碑)와 이중섭 가족이 세들어 살던 집. [황승경]

    이중섭 거리에 있는 시비(詩碑)와 이중섭 가족이 세들어 살던 집. [황승경]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천재 화가 이중섭이 잠든 곳은 서울 망우리공원이지만 제주도에는 그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는 ‘이중섭 거리’가 있다. 40세에 요절한 그는  1951년 1·4후퇴 때 함경남도 원산을 떠나 가족과 서귀포로 피난을 와서 1년 가까이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작품에 담았다. 남부럽지 않게 부유하게 살던 이중섭과 가족은 전쟁의 포화 속에 모든 것을 잃고 어른 한 명 눕기도 부족한 1.4평(4.63㎡) 셋방에 둥지를 틀었다.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시절이었지만 가족이 모두 함께해 그는 생애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이중섭은 가장 한국적인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작가다.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은 창의력이 돋보인다. 그가 짚 앞 담쟁이넝쿨 우거진 돌담길을 지나 이 거리를 거닐며 창작했을 ‘서귀포의 환상’ ‘게와 어린이’ ‘바닷가의 아이들’ ‘섶섬이 보이는 풍경’ 등 제주도의 정감 어린 작품은 지금도 관람객들의 찬사를 자아낸다. 

    제주도는 이중섭이 가족과 함께 거주하던 초가 일대를 1996년에 이중섭 거리로 조성했다. 거리에는 그의 작품을 본뜬 조형물을 비롯해 이중섭박물관과 기당미술관, 국내외 유망 작가들의 창작 스튜디오와 공방,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서귀포관광극장, 아기자기한 소품 상점 등이 들어서 소소한 문화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이중섭이 실거주했던 서귀포시 서귀동 매일시장에서 솔동산까지 360m 거리

    5. 명화의 주인공이 되는 ‘빛의 벙커’

    빛의 벙커 내부. [제주특별자치도 제공]

    빛의 벙커 내부. [제주특별자치도 제공]

    국가 통신망인 해저 광케이블을 관리하는 벙커였던 지상 900평(2975㎡)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이 우아한 미술관으로 변신했다. 적의 동향 관측을 대비해 위장하는 벙커는 흔히 지하에 구축하지만 ‘빛의 벙커’는 지상 콘크리트 건물 위에 흙을 덮고 숲으로 조성해 예술적 아우라가 느껴진다. 기능을 상실한 건물을 예술 공간으로 되살린 도시재생사업 일환으로 2018년에 개관한 ‘빛의 벙커’는 빛과 소리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1년 내내 섭씨 16도 내외의 쾌적한 온도를 유지해 미술관으로 최적이다. 

    벙커에 들어서자마자 관람객은 수십 대의 빔 프로젝터와 스피커에 둘러싸여 거장의 작품과 하나가 된다. 빛과 색에 대한 화가의 주관적인 느낌을 표현하려고 한 인상주의의 대표적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의 작품이 바닥과 벽면을 가득 채운다. 강렬한 색채와 뚜렷한 붓질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빛으로 색을 표현해 평면에서 입체적 질감과 온도가 와닿는 ‘빛의 벙커’는 독특한 판타지 예술 세계로 관람객을 이끈다. 고흐와 고갱의 위대한 걸작을 몰입형 미디어아트로 재해석해 사람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킨다.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2039-22

    6. 금빛 나팔바람이 흘러내리는 ‘제주 국제관악제’

    제주 국제관악제 공연 모습. [제주특별자치도 제공]

    제주 국제관악제 공연 모습. [제주특별자치도 제공]

    ‘제주 국제관악제’는 1995년 제주의 관악인들이 주축이 돼 시작한 행사로 매년 8월 제주 각지에서 펼쳐지는 세계적 관악 축제다. 올해로 25회째를 맞는다. 관객은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과 관악기가 뿜어내는 예술적 낭만에 푹 빠진다. 이 행사는 명곡을 연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매년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전통과 실험을 조화시키는 신작 공연으로 세계 음악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감격스러운 순간을 지켜보는 관객들도 음악 역사의 한 페이지를 함께 장식하는 기분이 든다. 불과 25년 만에 세계적으로 손에 꼽히는 관악 축제로 발돋움하면서 이때가 되면 국내외 저명한 연주자들이 제주를 찾는다. 또한 ‘관악기는 엄숙한 클래식에 적합한 악기’라는 편견도 씻어준다. 

    ‘제주 국제관악제’는 홀수 해에는 대중적 호응이 높고 축제성이 강한 반면, 짝수 해에는 전문성에 초점을 맞춰 행사를 진행한다. 관악제 기간에 정식 공연장부터 방송국 로비, 도서관, 포구, 해녀공연장까지 제주 구석구석에서 매일 저녁 수준 높은 연주가 울려 퍼진다. 특히 올해에는 관악제 4반세기를 기념해 도민 2500여 명이 참여하는 경축음악회(8월 15일)를 개최한다. 베토벤이 작곡한 ‘환희의 송가’ 등 인류의 화합을 노래한 세계적 명곡이 연주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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