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을 먹느냐는 인간 삶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필수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해야 건강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는 매우 많다. 최근 정부가 경제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있는 취약계층에게 국산 농식품을 지원하는 복지 프로그램 ‘농식품바우처’ 제도 도입을 추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 프로그램의 특징과 기대효과 등을 살펴봤다.
농식품바우처 이용자는 지정된 마트에서 원하는 국산 채소, 과일, 우유 등을 골라 바우처로 계산할 수 있다. 이때 지원 대상이 아닌 품목이 포함돼 있으면 결제 단계에서 자동으로 제외된다. 오른쪽 모니터에서 전체 물품 가격(3만1390원) 가운데 일부(2만5930원)만 바우처로 계산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지호영 기자]
당시 완주에서 이 연구에 참여한 A씨(51)는 “바우처를 받는 동안 신선한 음식을 평소보다 훨씬 많이 먹었다”고 말했다. 신체장애로 소득 활동을 하기 어려운 A씨는 기초생활보장수급자다. 외국인 아내가 아르바이트로 조금씩 돈을 벌기는 하지만, 초등학생과 유치원생 두 자녀에게 좋은 음식을 충분히 먹이는 건 힘에 부쳤다고 한다. 그는 “농식품바우처 실증연구 대상자로 뽑힌 뒤 가장 좋았던 건 애들 우유를 걱정 없이 사 먹인 것”이라며 “두 딸이 무척 좋아했다”고 말했다.
A씨는 매달 6만 원이 입금되는 전자카드 형태의 바우처를 받았다. 바우처 사용 장소로 지정된 마트에 가면 그 돈으로 국산 쌀·채소·과일·우유 등을 살 수 있었다. 마트 결제 시스템에 구매가능 품목이 등록돼 있어 다른 물건을 사려 하면 계산이 안 됐다.
신선한 채소·과일 먹을 수 있게 지원
서울 서대문구 농협 하나로마트 매장에 놓여 있는 과일, 채소. 전문가들은 신선한 원물로 식단을 구성하면 비타민 무기질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어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지호영 기자]
“늘 한참을 망설이다 떨이로 파는 시든 채소를 한 무더기씩 사오곤 했어요. 농식품바우처를 받은 뒤 큰맘 먹고 신선한 국산 파프리카를 사봤죠. 얼마나 맛있던지요. 채소 과일을 국산만 살 수 있게 제한해 놓으니 저렴한 물건보다 품질 좋은 제품을 골라 먹게 돼 참 좋았어요.”
B씨 얘기다. 그는 “농식품바우처 지원이 끝난 뒤 다시 예전처럼 값싼 식재료를 고르게 되긴 했지만, 최소한 라면 등 가공식품 소비는 줄이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당시 월 지원액은 1인 가구 3만 원, 2인 가구 4만2000원, 3인 가구 5만2000원, 4인 이상 가구 6만 원이었다. 정부는 수혜자들에게 이 금액 상당의 바우처를 주고, 건강한 식품 선택법 등에 대한 교육도 진행했다. 이후 연구 대상 가구의 식생활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조사했다. 이를 위해 가계부 분석과 인터뷰 등을 진행했다.
2019년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농식품바우처를 받은 가구의 식품소비 지출액은 월평균 약 3만4000원 늘었다. 곡물 소비 증가율이 9.69%로 가장 높았고, 채소(7.08%), 과일(4.98%), 우유(3.50%) 등이 뒤를 이었다. 춘천에 사는 C씨(47)도 “이 쿠폰으로 햅쌀을 사서 맛있는 밥을 지어 먹었다”며 “평소 눈여겨보던 브랜드의 쌀을 고르고 아이가 좋아하는 사과를 양껏 사면서 참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한편 농식품바우처 실증연구 참여자의 가공식품 소비는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식품비 지출에서 가공식품이 차지한 비중은 바우처 제공 전 55%에서 38%로 20%포인트 가까이 낮아졌다. 이들의 식생활이 ‘간단하게 한 끼를 때우는 것’에서 ‘신선한 재료로 직접 식단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완주에 사는 D씨(43)는 “식품을 고를 때 원산지를 보게 된 것”을 전과 달라진 점으로 꼽았다. 그는 “처음엔 가격 위주로 물건을 골랐기 때문에 농식품바우처로 국산 농식품만 살 수 있게 제한해 놓은 게 번거롭게 느껴졌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원산지를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고, 되도록이면 우리 땅에서 생산된 신선한 제품을 먹자는 마음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보고서에는 이러한 변화 모습도 기록돼 있다. 농식품바우처를 지원받기 전 참여자들의 국내산 농산물에 대한 관심도는 3.31점(5점 만점)이었다. 연구 참여 후 이 점수가 3.64점으로 높아졌다. 향후 농식품바우처 사업이 실시되면 참여할 의향이 있는지 묻는 항목에는 조사 대상자의 84.3%가 ‘그렇다’고 답했다.
‘먹는 것’은 인간 생존의 필수 요소다. 그런데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2위 경제 규모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적잖은 사람이 이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이계임 박사 등의 연구에 따르면 국내 기초생활보장수급자의 에너지 섭취량은 권장 섭취량 대비 81.4%에 불과하다. 칼슘(55.5%), 비타민 C(74.3%) 등의 섭취도 권장량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기초생활수급자 10만 명당 영양실조 진료자 수는 2011년 36.9명에서 2015년 48.3명으로 오히려 늘었다. 국민 전체 평균(10명)과 비교해 약 4.8배 수준이다.
삶의 질 높이는 포용적 복지
2019년 11월 4일 국회에서 열린 ‘먹거리 취약계층을 위한 농식품바우처 토론회’ 모습. 이 행사는 김현권·김정호·박완주·서삼석·오영훈·위성곤·윤준호 국회의원과 농림축산식품부가 공동 주최했다. [농식품부 제공]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연미영 박사는 “우리나라 취약계층은 식품 및 영양소 섭취가 부족한 상황”이라며 “특히 가임기 여성, 아동, 노인 등의 영양 부족 문제를 방치하면 사회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예를 들어 아동의 영양 부족은 성장 지연, 전염성 질환 감염 등을 초래할 수 있고, 나아가 사회심리적 손상, 학업성취도 저하, 학교 적응 실패 등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고 한다. 노인의 경우 영양 부족이 질병으로 이어지면 의료비 등 여러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킨다.
현재 우리나라가 이 문제 해결에 손을 놓고 있는 건 아니다. 2016년 현재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취약계층 식품 지원에 투입하는 예산만 1조9000억 원에 이른다. 문제는 보건복지부·농림축산식품부(농식품부)·식품의약품안전처·교육부·여성가족부 등 5개 중앙부처와 지자체가 다양한 법률에 근거해 개별적으로 정책을 집행하다 보니 각 사업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농식품비 현물 지원의 효과
미국의 취약계층 식생활 지원 프로그램 ‘SNAP’ 이용자가 2018년 미국 피츠버그 인근 마트에서 정부가 제공한 바우처로 식료품을 구매하고 있다(왼쪽). 미국 정부는 여성, 영아, 아동의 건강 증진을 위한 식생활 지원 프로그램 WIC(Women, Infants and Children)도 운영한다. [AP=뉴시스]
“라면을 먹어도 배는 부르잖아요. 채소 안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요. 그동안 늘 먹는 돈 아껴 다른 데 써왔으니까, 이번에도 아마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런데 농식품바우처로는 국산 농산품밖에 못 산다고 하고, 받은 날부터 한 달 안에 다 못 쓰면 돈이 없어져버린다고 하니까 먹을 거 사는 데 그 돈을 다 쓴 거죠. 처음엔 ‘사용 기간이라도 좀 길게 주지, 이게 뭐야’ 했어요. 지나고 보니 여러 제한이 있어서 그나마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것 같아요.”
농식품부 자료에 따르면 해외 선진국들은 이런 현실을 파악하고 일찍부터 현물 제공 방식의 식생활 지원 제도를 운영해 왔다. 미국은 식품 지원 예산의 80% 이상을 현물 지급 방식으로 집행할 정도다. 2019년 미국 농무부 예산의 51%를 투입한 ‘저소득층 영양 지원 프로그램’ SNAP(Supplemental Nutrition Assistance Program)이 대표 사례다. SNAP 수혜자는 정부에서 받은 전자카드를 이용해 식료품점에서 채소, 과일, 육류, 유제품 등을 구매한다. 유럽연합(EU)도 빈곤가정 아동과 노숙자 등에게 영양가 높은 식품을 제공하는 FEAD(Fund for European Aid to the most Deprived)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도 취약계층의 식품 소비를 늘려 그들의 영양 상태를 개선하고, 궁극적으로 건강을 향상시키려면 식생활 지원 정책을 좀 더 섬세하게 설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최근 그 방법으로 농식품바우처 도입을 적극 검토하는 분위기다. 2017년 사업 타당성 검토와 도입 방안 정책연구를 거쳐 2018년 실증연구를 진행한 농식품부는 올해 관련 예산 35억 원을 확보하고 하반기에 시범사업을 실시할 계획이다.
지속가능한 농식품 산업 기반 조성
우리나라에서 농식품바우처에 대한 논의가 처음 시작된 건 2017년,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과제에 관련 내용이 포함되면서부터다. 당시 정부는 농식품바우처가 취약계층의 식품접근성을 강화할 뿐 아니라 국산 농산물 소비체계를 안정적으로 구축해 ‘지속가능한 농식품 산업 기반’을 조성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농업경제학자 패트릭 캐닝이 지난해 미국 농무부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SNAP에 10억 달러를 투입하면 GDP가 15억 달러 증가하고, 농업 소득이 3200만 달러 늘어난다는 대목이 있다. 2018년 춘천과 완주에서 진행된 ‘농식품바우처 실증 연구’에서도 바우처 지원이 국산 곡물, 채소, 과일류 소비 증가로 이어지는 사실이 확인됐다. 농식품부는 전국 기초생활수급가구(생계급여수급가구 제외)에 매월 5만 원 상당의 농식품바우처를 지원하면 연간 1950억 원어치의 농산물이 추가로 소비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식량 안보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는 현실에서 국내 농업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농식품바우처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최근 국내 농가들은 안으로는 농식품 소비 감소, 밖으로는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한농연)에 따르면 국내 과채류 생산 면적의 94%를 차지하는 이른바 ‘7대 과채류(딸기, 수박, 토마토, 풋고추, 오이, 호박, 참외)’의 1인당 연간 소비량이 매년 줄어든다. 2005년 56.5kg에서 2018년 38.9kg으로 31%나 감소했다.
“취약계층, 농가, 국가 경제 모두 이익”
2018년 강원 춘천시와 전북 완주군에서 실시된 ‘농식품바우처 실증연구’ 당시 참여자들에게 제공된 식생활 교육 자료.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제공]
김상효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이 농식품바우처 제도를 “취약계층 국민뿐 아니라 농업인, 나아가 국가 경제 전반에 이익을 주는 ‘트리플 윈(win-win-win)’ 정책”이라고 설명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는 취약계층에게 농식품바우처를 통해 국산 농식품을 현물로 지원하는 제도가 정착되면 △취약계층 국민은 삶의 질이 향상되고 △농업인은 안정적인 수요 기반이 확대되며 △국가 전체적으로는 유효수요 창출을 통한 생산유발 및 취업유발, 미래 의료비 부담 완화, 불평등도 감소 등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2018년 펴낸 ‘농식품바우처 지원제도 도입방안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농식품바우처 도입 시 국내 의료비 절감액이 연간 최고 2045억 원, 생산유발액은 최고 913억 원 수준이다.
한편 농식품바우처가 성공적으로 정착하려면 수급자를 대상으로 건강한 식생활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함선옥 연세대 식품영양학과 교수 설명이다.
“취약계층은 생계를 꾸리느라 분주하고, 교육 정도도 상대적으로 높지 않다 보니 간편하게 빨리 먹을 수 있는 가공식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가공식품은 일반적으로 저장 기간이 길다 보니 염분이 많다. 또 포화지방, 콜레스테롤 등 특정 영양소가 과다 함유된 것이 많다. 소비자가 원재료로 직접 요리를 하면 비타민, 무기질을 충분히 섭취해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바람직한 식단 구성과 조리법 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알려줘야 한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2018년 춘천과 완주에서 진행된 농식품바우처 실증연구 당시 정부는 △다양한 식품 섭취 △아침밥 섭취 △국내산 식재료 사용 △가족 식사 독려 등의 내용을 담은 식생활 교육 자료를 제작해 참여 가정에 배포했다. 올 하반기 시범사업 때는 관련 교육을 좀 더 강화할 계획이다. 또 농식품바우처 구매 가능 매장 확대, 결제 시스템 개선 등도 진행하고 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우리 목표는 취약계층이 신선하고 품질 좋은 우리 농산물을 지속적으로 소비하는 구조를 만들어 궁극적으로 국가 전체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며 “이 목표가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