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20일 지나자 조문객 200명 밑으로 ‘뚝’
“주변에선 이미 이천사고 수습 끝난 줄 알더라”
“분향소 썰렁…희생자 넋 달래려 집에도 못가”
“대통령, 2017년 제천 화재사고(29명 사망) 땐 다음날 가더니…”
“대통령이 관심 안 갖는데, 시민들 관심 갖겠나”
“대통령 직접 와서 ‘노력하겠다’ 한 마디만 해 달라”
사고 생존자 절체절명의 탈출 트라우마로 극심한 두통 호소
유가족대책위 29일 서울에서 기자회견 계획
박종필 유가족대책위원회 수석대표. [최진렬 기자]
“아무도 우리 목소리 들어주지 않아”
박종필 유가족대책위원회 수석대표가 25일 경기 이천시 서희청소년문화센터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서 희생자들을 위해 향을 피우고 있다. [최진렬 기자]
국화는 점차 느리게 쌓여갔다. 하루 조문객이 1228명(4일)에 달하는 날도 있었지만 이제는 옛말이다. 자원봉사자 이모(35)씨는 “처음보다 조문객들이 줄어든 편이다. 그럼에도 방문하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마음으로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문객은 18일을 기점으로 200명 이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날 역시 6명의 자원봉사자만이 텅 빈 합동분향소를 지키고 있었다.
조문객이 줄면서 서희청소년문화센터에는 적막감이 흘렀다. 외지인들은 좀체 이곳을 찾지 않았고, 면면이 익숙한 유가족들만이 자리를 지켰다. 이곳에서 한 달 여 동안 주차 안내 봉사를 한 신정우(67)씨의 말이다.
“처음에는 조문객들이 너무 많아 인근 교회로부터 주차장을 빌렸다. 하지만 2주가 지나고부터는 방문객이 줄어 더 이상 주차장을 빌리지 않는다. 이달 초만 하더라도 오전 10시 30분이면 더 이상 주차할 곳이 없었다. 지금은 점심시간이 지나도록 주차 구역이 많다. 유가족과 시청직원 등의 차를 제외하면 구급차·소방차·소독차 등만이 주차장을 차지하고 있다.”
유가족들은 오랜 시간 이 광경을 씁쓸히 지켜봤다. 사안은 여전히 제자리걸음하고 있다. 12일 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4차 합동감식을 벌였지만 아직도 화재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자연히 책임자에 대한 처벌도 미뤄졌다. 박종필(60) 유가족대책위원회 수석대표는 “경찰 측이 진상규명에 3주 정도 시간이 추가로 걸릴 것 같다고 전해왔다”며 답답함을 나타냈다.
유가족들은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심정이다. 많은 유가족이 생업도 중단한 채 이곳에 모여 있다. 언제까지 마음 편히 정부 발표를 기다릴 수 없는 이유다. 이천사고가 점차 국민들에게 잊히고 있다는 사실은 불안감을 더했다. 결국 유가족들은 합동분향소 밖으로 나서기로 결심했다. 박 수석대표는 “분향소가 썰렁해 마음이 아프다. 너무나 쉽게 잊힌다. 여기 있어봐야 아무도 우리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다. 29일 유가족들이 서울로 가서 기자회견을 하려 한다”고 말했다.
기자회견을 갖는 5월 29일은 이천사고가 발생한 4월 29일로부터 한 달이 되는 날이다.
“대통령이 와서 한 마디만 해줬다면”
유가족 전수진 씨가 합동분향소가 있는 경기 이천시 서희청소년문화센터 곳곳에 붙인 국민청원 안내문. [최진렬 기자]
전씨는 국민청원을 통해 다시금 이천사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키우려 했다. 11일 ‘**익스프레스 이천 물류창고 화재사고 빠른 해결을 위해 나서주세요!!’라는 제목으로 국민청원을 진행한 것이다. 하지만 청원 후 2주가 넘어서도록 참여인원은 7780여 명(25일 오후4시 기준)밖에 도달하지 못했다. 같은 날 국민청원에 올라온 서울 강북구 경비원 자살 사건이 42만 여 명의 참여를 받은 것과 대조적이다. 전씨는 “국민청원을 하루라도 빨리 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많이 든다. 이천사고에 대한 관심이 커졌을 당시에 국민청원을 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아무 것도 마무리된 것이 없는데 한 달 가까이 시간이 지나자 주변에서는 이천사고가 잘 마무리된 줄 알고 있다”며 답답해했다.
모든 방법이 가로막힌 상황. 유가족 측은 마지막 희망을 품고 이천사고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관심을 촉구했다. 지난 한 달 간 많은 정치인들이 분향소를 찾았다. 합동분향소에 놓인 영정사진 좌우측에는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 심상정 정의당 대표와 정세균 국무총리 및 이재명 경기도지사 등이 보낸 근조 화환이 있었다. 모두 합동분향소를 방문한 이들이다. 문 대통령의 근조 화환도 놓여있었지만 문 대통령은 합동분향소를 방문하지 않았다.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이 지난 3일 문 대통령을 대신해 합동분향소를 찾았을 뿐이다.
박 수석대표는 “대통령 빼고 웬만한 분은 다 다녀갔다”며 “말뿐이라도 도와준다고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지 않나. 소리를 질러야 (원하는) 모든 게 이뤄지나 생각이 들어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박 수석대표가 말했다.
“더 바라는 것도 없다. 그저 대통령이 ‘유사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강력하게 조처하겠다. 믿어 달라’고 말해주기만 하면 된다. 이 한 마디를 와서 해주지 않는다. 서울에 가서 기자회견 마지막에 대통령이 분향소에 와서 그 한 마디만 해준다면 38명의 사망자들이 편히 떠날 것이라고 말할 생각이다.”
박 수석대표는 유가족들이 대통령을 찾으러 간다는 사실에 대해 “창피한 일이지만 사람들이 관심이 없고 너무 쉽게 잊으니 마음이 아파서 그렇다. 저기 원령들 억울하게 죽은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어 “대통령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데 시민들이 관심을 가져주겠나. 2017년에 29명의 목숨을 앗아간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의 경우 대통령이 사고 다음날 현장을 방문했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천시청 관계자는 “행정절차상 기초자치단체에서 대통령 방문을 요청할 수 없다”면서 “유가족들이 직접 요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기자회견 하겠다”
유가족대책위원회 측은 자체적으로 수집한 자료에 생존자들의 증언을 더해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다. 유가족대책위 천막 사무실 책상 위에는 산업안전보건법이 A4 42쪽 분량으로 프린트돼 놓여있었다.준비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생존자들에게는 사고 당일 기억을 떠올린다는 사실 자체가 고통스럽다. 이천사고 당시 물류창고 지하 2층에서 작업 중이었던 A(59)씨가 대표적 예다. A씨는 “‘불이야’ 소리를 듣자마자 미친 듯이 뛰었다. 10초도 되지 않아 건물을 빠져나와 살 수 있었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인기척이 들렸는데 이들은 나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A씨는 “당시의 경험으로 트라우마가 생겼다.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4차 합동감식일 당시 현장을 방문했는데 두통에 시달렸다”며 “당시를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되풀이했다. 하지만 A씨 역시 진상규명을 위해 천막사무실에서 다른 유가족들과 사고 당일의 기억을 되짚고 있는 중이다.
29일 기자회견에는 유가족과 이천사고 생존자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유가족 측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큰 만큼 기자회견 역시 최소한의 사람이 참석한 형태로 진행할 계획을 갖고 있다.
박종필 유가족대책위원회 수석대표는 “너무 지치고 힘이 들지만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유가족들은 집에도 가지 못하고 분향소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진상규명이 늦어지면서 유가족들도 생계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유가족들은 이번 이천사고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서울에서 29일 기자회견을 열고 사고원인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세 가지를 이야기할 계획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