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호

[김학준의 6·25재조명①] 내전이었나 국제전이었나

내쟁적 요소를 지닌 국제전

  •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

    입력2020-06-06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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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덧 광복 이후 최대의 민족 참사였으며 오늘날까지도 한민족 모두에게 큰 부담을 안기는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했다. 이 계제에 이 전쟁을 둘러싼 수많은 쟁점 가운데 16가지만 가려 그 내용을 5회로 나눠 살펴보기로 한다.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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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1953년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의 쟁점들 가운데 출발점은 명칭에 관한 논쟁인데, 이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전쟁의 명칭을 규정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학계에서 어떤 전쟁의 명칭을 정할 때 몇 개의 기준이 있다. 첫째, 전쟁이 일어난 장소 또는 국가의 이름을 따는 방식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스파르타의 승리로 매듭지어진 전쟁은 펠로폰네소스전쟁으로 명명했고, 19세기 초기에 미국이 멕시코의 텍사스를 차지하기 위해 멕시코와 벌였고 결국 미국의 승리로 귀결된 전쟁-이 전쟁에 저 유명한 알라모전투가 포함된다-은 멕시코전쟁으로 명명했다.

    논의의 출발점: 전쟁의 명칭을 규정하는 방식

    19세기 중엽 제정러시아가 터키의 크리미아반도를 군사점령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함께 파병해 러시아를 패퇴시킨 전쟁은 크리미아전쟁으로 명명했다. 바로 이 전쟁 때 영국의 간호사 나이팅게일의 명성이 확립됐다. 

    20세기에 들어와 일제는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고 마침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다가 패망하고 말았는데, 스스로 이 전쟁을 ‘대동아전쟁’ 또는 ‘대동아민족해방전쟁’이라고 불렀다. 다른 한편으로, 일제에 대항해 싸운 미국은 이 전쟁을 ‘태평양전쟁’으로 명명했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에 일어난 전쟁들을 살펴보자. 베트남에서 일어난 남·북베트남 사이의 전쟁에 미국이 참전했으며 결국 북베트남의 승리로 귀결된 전쟁은 베트남전쟁으로 명명했고, 이 전쟁의 전개 과정에서 전장(戰場)이 이웃 라오스와 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되자 인도차이나전쟁으로 명명했다. 194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네 차례에 걸쳐 중동에서 일어난 이스라엘과 아랍권 사이의 전쟁은 경우에 따라 팔레스타인전쟁 또는 수에즈전쟁으로 불렀으나 전반적으로 중동전쟁으로 명명했다. 

    1970년대 영국이 포클랜드를 되찾으려는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벌여 승리를 거둔 전쟁은 포클랜드전쟁으로, 그리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괴뢰정부를 세우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결국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전쟁은 아프가니스탄전쟁으로 명명했다. 



    둘째, 전쟁의 상대방 이름을 따는 방식이다. 고대 로마가 오늘날의 레바논 일대에서 상업국가를 세웠고 오늘날의 튀니지 일대에 진출한 페니키아(당시 로마인들의 발음으로는 포에니) 사람들을 상대로 두 차례에 걸쳐 싸운 전쟁은 포에니전쟁으로 명명했다. 오늘날의 튀니지에 자리를 잡았던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은 제2차 포에니전쟁 때 활약했다. 

    19세기 전반에 영국과 러시아가 중심이 된 연합국은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상대로 싸우면서, 이 전쟁을 나폴레옹전쟁이라고 불렀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사이에 영국은 자신의 식민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아프리카 남부에 이미 정착해 국가를 세운 네덜란드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는데 그 네덜란드인을 통칭한 보어(Boer)를 따서 보어전쟁이라고 불렀다. 훗날 영국의 총리로 선출돼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일정하게 이바지한 처칠은 이때 종군기자로 참전해 전쟁의 실상을 영국에 널리 알렸다. 

    셋째, 교전국 쌍방의 이름을 함께 넣는 방식이다. 유럽에서 프로이센(한문으로 普露西亞, 영어로 프러시아)과 프랑스가 벌인 보불전쟁이 그 한 보기다. 이 전쟁의 이름을 들으면 곧바로 떠오르는 것이 알자스로렌이다. 전쟁에서 패전한 프랑스는 이 지역을 프로이센에 할양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방식으로 명명된 사례는, 아시아에서 청국과 일본이 벌인 청일전쟁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러일전쟁, 미주에서 미국과 스페인(한문으로 西班牙)이 싸운 미·서전쟁, 1937년 일제가 중국을 침략함으로써 시작된 중·일전쟁 등이다. 중국이 통일된 베트남(한문으로 越南)을 상대로 벌였으나 승패가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끝난 전쟁은 중·월전쟁으로 명명됐다. 

    넷째, 전쟁의 어떤 뚜렷한 특징으로써 명명하는 방식이다. 19세기 중반 영국이 청을 상대로 아편을 마구 팔아 아편중독자가 늘어나자 청에 수입된 영국의 아편을 불태워버림으로써 일어났고, 결국 영국의 승리로 귀결된 전쟁을 아편전쟁으로 명명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비슷한 사례가 제4차 중동전쟁인 ‘욤 키푸르 전쟁’이다. 제3차 중동전쟁에서 참패한 이집트와 시리아는 복수심에 불타 만반의 준비를 갖춘 뒤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바로 이날은 유대인의 전국적 큰 행사 ‘욤 키푸르’ 곧 ‘성스러운 속죄일’이었다. 이스라엘이 방심한 틈을 노린 것이었다.

    다섯째, 전쟁의 기간을 중심으로 명명하는 방식이다. 14세기로부터 15세기까지 1세기에 걸쳐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간헐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일어난 전쟁은 백년전쟁으로 명명됐다. 1967년 발발해 이스라엘의 승리로 귀결된 제3차 중동전쟁은 6일 만에 끝났기에 6일전쟁으로도 불렸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국방장관 모세 다얀이 세계적인 장군으로 떠올랐다. 

    여섯째, 많은 열강이 개입한 세계 규모의 전쟁으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과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대표적 사례다.

    쟁점 : 전쟁의 명칭을 둘러싼 논쟁

    그러면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7개월에 걸쳐 진행된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어떻게 명명돼 왔는가. 일본은 남북한 전체를 ‘조선’으로 통칭하는 관행을 적용해 ‘조선전쟁’으로 명명했다.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에서는 압도적으로 ‘코리안 워(Korean War)’를 사용했다. 프랑스어권이나 독일어권 그리고 러시아어권에서는 모두 ‘코리아의 전쟁’으로 번역될 수 있는 명칭을 사용했다. 

    대한민국의 경우, 개전 초기에는 ‘6·25사변’ ‘6·25동란’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전쟁이 확대되면서 그것이 ‘사변’이나 ‘동란’의 범위를 훨씬 벗어나 국제정치학이 말하는 전쟁의 범주에 속한다는 사실을 인정해 곧 ‘한국전쟁’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이 명명은 우리로서는 어색하다. 흔히 ‘한국’이라고 하면 그것은 대한민국을 가리키는데, ‘한국전쟁’이라고 하면 ‘대한민국 안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조선인민에 의한 정의의 조국전쟁’ 줄여서 ‘조국해방전쟁’ 또는 ‘정의의 조국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명명은 소련이 나치독일의 침략을 받아 거기에 저항한 전쟁을 ‘조국수호를 위한 위대한 애국전쟁’으로 부른 전례와 흐름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지나치게 북한 중심적인 것이면서 일방적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남침을 개시함으로써 민족적 참극을 초래한 사실을 가리고 있다. 

    유엔군의 성공적인 반격으로 북한 정권의 붕괴가 임박한 시점에서 북한 정권을 구출하기 위해 중국은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 아래 파병했는데, 이 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고 불렀다.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뜻이다. 우리로서는 일본의 명명이나 북한의 명명은 물론이고 중국의 명명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모두 자기네 입장에서의 명명이기 때문이다. 

    이 명명들을 모두 거부하면서, 김창순 전 북한연구소 이사장은 ‘6·25남침전쟁’이라는 명칭을 제시했다. 그것이 이 전쟁의 진상을 말해주는 것이기는 하나, 참전국들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많은 나라가 개입한 사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흠이 있고 또 외국의 연구자들로부터 ‘지나치게 일방적’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영춘 전 단국대 교수는 ‘김일성 공난(共亂)’이라는 명칭을 제시했다. 중국의 ‘예(禮)’에 따르면, 정통성을 가진 국가나 정부를 상대로 비정통 세력이 무력을 동원해 대항하는 경우를 ‘난’이라고 하며 그래서 한 예를 들면 홍경래의 무력 동원도 ‘홍경래의 난’이라고 하는데, 김일성의 남침전쟁이야말로 정통성을 가진 대한민국을 상대로 비정통 세력인 김일성이 무력을 동원해 대항했기에 ‘김일성의 난’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김일성이 ‘공산주의자’인 것을 강조한다는 뜻에서 ‘김일성 공난’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제의였다. 

    이러한 모든 사례를 검토한 뒤 국내의 많은 연구자는 ‘6·25전쟁’이라는 명칭이 좋겠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물론 이 명칭에도 문제는 뒤따른다. 우선 세계의 어떤 전쟁에도 개전일을 앞세운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교수와 영국의 존 할러데이(Jon Halliday) 교수는 이 전쟁이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전쟁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1948년의 ‘제주도사건’-보기에 따라서는, ‘제주도반란’ 또는 ‘미군정의 단선단정노선에 반대하는 통일지향적 저항운동’-에서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의 ‘여순사건’ 및 38도선에서의 남북 무력 대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는 해석이다. 국내의 어떤 학자는 “이 명칭은 6·25 직후에 남한에서 고조된 반공적·반북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외치던 구호 ‘상기하자 6·25’를 연상시켜 남북 화해를 지향하는 분위기를 깨뜨릴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 명칭의 사용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38도선 주변에서 남과 북 사이의 무력 충돌은 1949년 이후, 특히 1950년에 들어와 이전 시기에 비해 현격히 줄어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한반도 내적 상황을 살펴보면 북한의 김일성이 개전하지 않았다면 이 전쟁은 회피될 수 있었다는 판단이다. 김일성은 1949년에 이어 1950년에도 소련을 찾아가 스탈린과 회담하면서 남침일을 6월 25일로 특정하는 데 합의했다. 그렇기에 ‘6·25전쟁’이라고 명명하는 데 일정하게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전쟁’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미국과 일본의 연구자들 가운데는 이 전쟁을 ‘제3차 세계대전을 대체한 동북아시아전쟁’으로 명명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경청할 만한 견해라고 생각한다.

    쟁점 : 내전이었나 국제전이었나

    이 전쟁을 둘러싼 또 하나의 쟁점은 내전이었나 국제전이었나에 관해서다. 미국과 영국의 어떤 연구자들은 이 전쟁이 내전이었다는 해석을 제시하면서, ‘코리안 시빌 워(Korean Civil War)’라고 명명했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남과 북으로 나뉜 쌍방이 대결한 전쟁이었다는 해석이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이 전쟁의 성격에 대해 ‘민족해방전쟁’ 또는 ‘인민해방전쟁’이라는 해석도 제시했다.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주축을 이룸으로써 민족사의 정통성을 지닌 북한이 친일파들이 주축이 됨으로써 민족사의 정통성을 지니지 못한, 극단적으로 말해, ‘반민족적’ 남한을 상대로 ‘해방전쟁’을 수행했다고까지 강변했다. 

    일본에서도 내전설이 유력하다. 다만 “내전으로 시작됐으나 미군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군의 참전으로 국제전으로 확대됐다”는 해석이 뒤따랐고, 오늘날에는 대체로 이 해석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국제적 내전설’이다. 

    대조적으로 서방세계의 연구자들은, 특히 한국의 연구자들은 이 전쟁을 국제전으로 파악한다. 개전에 앞서 스탈린과 김일성 사이에 밀약이 있었고 마오쩌둥이 이 밀약에 뒤늦게나마 가담했다는 사실에 미루어, 그리고 이 밀약에 따라 특히 스탈린이 여러 방면에서 김일성을 군사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지원했다는 사실에 미루어, 이 전쟁은 세 공산국가의 밀약에 따라 시작된 전쟁이었고, 거기에 대항해 서방국가들이 참전함에 따라 확대된 만큼 국제전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그것이 진상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 전쟁에는 내쟁적(內爭的) 요인이 깊이 개입돼 있다. 이 전쟁에 앞서 남과 북은 상대방을 자신에게 흡수시키려는 정책을 공공연히 추구했으며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비를 확충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필자는 이 전쟁은 국제전이었다는 해석을 지지한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듯, 스탈린과 김일성의 밀약, 개전에 대한 스탈린의 명시적 지시와 지원, 그리고 마오쩌둥의 동의 등이 이 전쟁의 성격을 분명히 말해준다. 그러나 내쟁적 성격을 일정하게 인정해 ‘내쟁적 요소를 지닌 국제전’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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