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덧 광복 이후 최대의 민족 참사였으며 오늘날까지도 한민족 모두에게 큰 부담을 안기는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했다. 이 계제에 이 전쟁을 둘러싼 수많은 쟁점 가운데 16가지만 가려 그 내용을 5회로 나눠 살펴보기로 한다.
쟁점 : 북한은 애초에 제한전을 추구했는가, 전면전을 추구했는가
6·25전쟁 중 수원에서 북진하는 유엔군 탱크부대. [동아DB]
그러나 이 추론 역시 사실이 아니다. 다른 문서들도 그러했지만 특히 옐친문서는 북한이 처음부터 전면전을 계획하고 있었음을 보여줬다.
쟁점 : 북한군은 왜 사흘 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었나
앞에서 방금 말했듯,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은 6월 28일에 서울을 점령하고 더는 남행하지 않은 채 서울에 머물렀다. 이 사흘은, 막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겸 3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정일권이 회고했듯, 대한민국을 살려준 귀중한 시간이었다. 정 총장에 따르면, 이때 북한군이 서울에 머물러 있지 않고 남행을 계속했더라면 미군이 개입할 시간 여유가 없었고 대한민국은 결국 궤멸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북한군의 사흘 서울 체류에 대해 토론을 계속했다.그 결과, 춘천지구에서 국군의 선전과 선방으로 북한군 가운데 주요 부분이 그곳에 묶여 서울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훗날 공개된 소련 문서에 따르면, 북한군이 서울을 ‘완전’ 점령했다는 기존의 설명에 문제가 있었다. 서울의 중요한 부분들을 점령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영등포를 비롯한 외곽 지역은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소련 문서에 따르면, 서울에 들어온 북한군과 평양의 본부 사이에 교신이 불충분해 본부가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남행 지시를 서둘러 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쟁점 :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의 개입은 정당했는가, 정당하지 않았는가
또 하나의 쟁점은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의 개입이 정당했는지에 연관된다. 북한은 물론이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들 모두 그리고 중립국가들 가운데 일부는 정당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내전설을 제시하는 연구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것이 정당하지 않았다고 역설했다. 한 민족 사이의 내전에 왜 외부 세력이 개입했느냐고 그들은 힐난했다.서방세계에서 좀 더 극단적 견해를 제시한 연구자는 호주국립대학교의 저명한 역사학자 게이븐 매코맥(Gavan McCormack) 교수였다. 그는 “그때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이 전쟁은 북한의 승리로 빨리 끝났을 것이며 비록 숙청이 뒤따랐다고 해도 그 숙청은 친일파를 비롯한 반민족 세력에 국한됐을 것이고 그 수는 많지 않았을 것인데도 그들이 개입함으로써 전쟁이 3년 이상 계속되면서 너무 많은 사람이 죽게 됐다”라고까지 썼다.
필자는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의 개입은 정당했다고 판단한다. 대한민국의 탄생 과정에 이미 유엔이 관여했으며, 만일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이 유엔의 결의에 따라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대한민국의 붕괴는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만일 대한민국이 북한에 의해 붕괴됐더라면 남한에 대해서도 북한식의 무자비한 공산통치가 시행됐을 것인데, 그것이 가져왔을 참극은 참으로 끔찍했을 것이다.
현대 문명국가에서는 어떠한 ‘죄인’이라도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 이 권리가 부인되는 국가는 비문명적이면서 폭압적인 전체주의 국가일 뿐이다. 아무리 ‘친일파’였고, 또 북한이 말하는 ‘반민족분자’ 또는 ‘반동분자’라고 해도 정당한 재판을 받아 자신의 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북한이 남침 직후의 일정한 기간에 걸쳐 자신의 점령 지역에서 자행한 ‘인민재판’은 결코 허용될 수 없다.
쟁점 : 유엔군의 38도선 월경과 북진은 정당했는가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군의 반격이 개시되고 대한민국으로서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었던 낙동강전투에서 북한군을 패퇴시킴으로써 승기를 잡은 유엔군 그리고 국군은 북진을 계속했으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통해 마침내 서울을 수복하고 38도선으로 북진을 계속했다. 이 시점에서, 노동당이 이끄는 영국 정부를 비롯해 서방국가들 안에서는 38도선에서 정지할 것을 제의했다. 이제 이른바 전전원상(戰前原狀)이 회복된 만큼 여기서 전쟁을 멈춰야 하며, 만일 38도선 이북으로 진군을 계속하면 전쟁이 확대되면서 소련군이나 중공군이 개입할 수도 있고, 만일 그렇게 된다면 3차 대전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이 논리는 그 이후에도 몇몇 학자에 의해 되풀이됐다. 그때 전쟁을 멈췄더라면, 이 전쟁은 약 3개월 만에 끝날 수 있었고 피해도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이 전쟁은 결국 1953년 7월 27일 휴전으로 귀결됐는데 휴전선이 38도선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2년을 더 싸우며 엄청난 피해를 낸 뒤 사실상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으니 이런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느냐고 그들은 반문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수긍할 만한 점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깊이 더 생각해 봐야 할 점이 있다. 우선 당시 대한민국 국민 사이에 확산돼 있던 “이 기회에 통일을 성취하자”는 열망이었다. 특히 8·15 광복 이후 북한에서 공산통치를 경험하고 혐오를 느껴 월남한 국민은 거의 모두가 북진통일을 고대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대한민국의 어떤 통치자가 억제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미국 정부는 북진통일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래서 미국 정부의 주도 아래 유엔 총회는 유엔군의 38도선 월경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전쟁을 개시한 북한은 패퇴를 거듭하면서도 정전할 뜻이 전혀 없었다. 훗날 공개된 중국 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은 중국 정부에 대해 “우리는 산으로 들어가서라도 끝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쟁점 : 북진을 원산만~대동강 선에서 멈추는 것이 현명하지 않았을까
학계 일각에서는, 유엔군의 38도선 이북 진격을 지지하면서도 ‘그때 북진을 원산만과 대동강을 잇는 선에서 멈추는 것이 현명하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을 제기했다. 이 선에서 멈췄더라면, 훗날 중공군이 개입할 여지를 없앨 수 있었고, 또 그 선에서 멈춘 경우 북한의 ‘영토’는 극도로 제한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북한이 하나의 ‘국가’ 또는 ‘정권’으로 존속하기 어려워 결국 자연스럽게 붕괴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그러나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때의 국민적 분위기를 고려할 때 도저히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만일 이승만 대통령이 그러한 결정을 내렸더라면 우선 군부의 저항 더 나아가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을 개연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