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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은 20대 청춘 시절을 떠올리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여성에게 화양연화는 자신의 인생을 걸 만한 남자를 만나 절정의 사랑을 하는 시간일 수 있지만 산부인과 의사인 필자가 생각하는 포인트는 다르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잉태해서 열 달간 품고 있다가 마침내 산고(産苦)를 겪으며 낳아 품에 아기를 안을 때가 아닐까 싶다. 극도의 고통이 승화돼 어머니가 되는 바로 그날 말이다. 단순히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보다는 인고의 시간을 처절하게 겪어내며 맞이한 결과에서 인간은 최고의 감동을 느끼는 법이다.
요즘 필자는 뜻밖의 흥미로운 얘기를 듣곤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덕분에 늦둥이가 생겼는데 낳아야 할지 고민하는 중년 부부가 꽤 있다. ‘난데없이 웬 코로나 임신’이라고 하겠지만, 코로나19 덕분에 의도하지 않게 ‘방콕’ 신세가 된 부부들이 저지른 희극이 아닐까 싶다. 사회적 거리두기랍시고 몇 달간 집밥을 챙겨 먹다가 아뿔싸! 부부가 애 만드는 볼일까지 봐버린 게 아니고 뭐겠는가. 생각지도 못한 임신에 난감해한다는 중년 부부들의 에피소드를 들으며 필자는 입가에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모름지기 자손이란 몇 명을 낳자고 계획하기보다 ‘덜컹 덜컹’ 생겨서 마지못해 ‘순풍 순풍’ 낳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실 임신하려고 덤비는 부부들은 난임이라는 긴 터널로 진입하는 게 다반사지만, 임신에 관심없는 부부에게는 임신이 어렵지 않게 찾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로부터 “부부는 싸워도 각방 쓰지 않고 한 이불만 덮고 자면 애가 잘 들어선다”고 했다. 같은 공간에서 긴 시간 같이 생활하게 되면 아무래도 아기 만들 기회가 자주 생긴다는 얘기다. 새벽잠이 없는 중년 부부에게 늦둥이 소식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로 시작하는 ‘기찻길 옆’(윤석중 작사, 윤극영 작곡)이라는 동요가 있지 않은가. 한밤중 기차가 지나가면 요란한 기차 바퀴 소리에 주민들은 잠을 설쳤을 것이다.
부부는 잠재된 뜨거운 남녀
요즘 젊은 부부 중에는 스트레스 때문에 임신이 잘 안 된다고 예단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때 그 시절 기찻길 옆 판자촌에 사는 노동자 아빠는 ‘내일도 일감이 있을까’ 하며 걱정했다. 엄마들은 조금이나마 생활비에 보탬이 되고자 아기를 업은 채 광주리를 이고 시장에 나가 좌판을 깔고 앉았다. 쉴 틈 없이 밀려오는 불확실한 미래는 얼마나 스트레스였을까. 새근새근 잠을 자고, 방싯 웃는 자식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제아무리 깊은 시름도 봄날 눈 녹듯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어쩌면 모든 스트레스가 한방에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이처럼 그때 그 시절 부부들은 지금 부부들보다도 더 막막한 현실 속에서 지금보다 더 힘든 스트레스에 시달렸지만 자식을 키우면서 잊고 살았다. 스트레스를 없애거나 낮출 수 없다면 이들과 공존할 방법을 생각해 냈다. 사실 아기는 기차 소리가 전혀 방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차 소리를 자장가로 들었을 것이다.
국내에서 꽤 유명한 풍수이론가 최창조 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는 ‘도시 풍수’라는 책에서 “상식적으로 ‘기찻길 옆에서 아기가 잘 수 있나’ 싶겠지만 아기한테는 그곳이 명당”이라며 “(아기 입장에서) 어머니 자궁 안에서 열 달간 들었던 소리(소음)에 비한다면 기차 소리는 대수롭지 않다”라고 소개한 바 있다.
부부에게 애가 들어서는 일(임신)은 반가운 일이다. 1980년대 산부인과 전문의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치프 레지던트(chief resident) 때였다. 한번은 수술 제1조수를 담당했는데 두 번째 제왕절개술을 하려고 수술 테이블에 누운 중년의 산모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제2조수가 ‘이번 제왕절개 시 맹장도 떼고(요즘은 이 수술을 하지는 않는다) 나팔관도 묶겠다(영구피임술)’는 수술 허락을 받아놓았지만, 필자는 수술장에 집도의 교수가 들어오기 전에 다시 물어보았다. 나중에 법적인 문제로 가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1조수인 필자가 강한 어조로 대답을 강요하듯 물었는데도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산모는 입가에 웃음기를 띠면서 “이번 아기도 갖게 된 게 제게는 너무나 큰 축복이에요”라고 했다. 뭔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첫아기 분만 시 과다출혈로 생명이 위험했고 자칫 자궁을 떼낼 뻔했는데 둘째의 임신이 축복이라니…. 그 후 나팔관을 묶는 문제를 놓고 망설이는 산모에게는 절대 이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부부간 대화 시간이 늘었다는 이들이 많아졌다. 사회적 거리두기 덕분에 시간은 남아도는데, 게임에도 식상하고 TV 채널 돌려보기도 질려버린 남편들 눈에 아내가 보였던 것이다. 젊은 남자의 가슴에 잠재돼 있는 활화산처럼 뜨거운 불이 사회적 거리두기 문화 속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난임병원에서도 코로나19 감염이 두려워 시험관시술(IVF)을 잠시 쉬겠다던 부부가 자연 임신이 돼 방문한 사례가 늘었다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데면데면한 부부라도 모처럼 아내와 로맨스 영화 한 편 보다 보면 감정이 되살아날 수 있다. 부부는 ‘뜨거움이 잠재된’ 사이이기 때문이다.
4조5000억분의 1의 확률
난임전문의가 이렇게 말하면 무책임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자식은 운명이다. 한 번 사정에 아무리 수억 마리의 정자가 배출된다고 해도 정자가 난자를 만나는 일은 사하라사막에서 내가 버린 결혼반지를 찾는 일만큼 어렵다. 약 1만5000대 1의 경쟁을 뚫고 배란에 성공한 난자를 딱 그때 만나야 하는데 너무 힘들다.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24시간 장날에 딱 맞춰서 간다고 해도 내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기가 힘든 것과 같다. 수학적 계산으로 정자와 난자가 자연적으로 만나 수정될 확률이 4조5000억분의 1이라고 한다. 이는 우연보다는 필연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하자면 뜻밖의 임신이 됐다고 해도 미래의 경제적 두려움을 잠깐 내려놓고 ‘신(혹은 조상님)에게 큰 뜻이 있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면 좋겠다.서두에서 밝혔듯 필자는 여성에게 ‘화양연화’의 순간이 다름 아닌 생명을 잉태한 그 열 달이라고 굳건히 믿는다. 배부른 열 달간 너무 힘들지만 분만 과정을 함께한 산부인과 의사는 그들의 본심을 안다. 남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자궁에 자식을 품고 기다리는 열 달간의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또 하나 산부인과 전문의들은 공감하는 사실이 있다. 아무리 원치 않은 임신이라도, 심지어 분만을 하다 위험한 순간이 닥쳐도 임신부 대부분은 “아기는 꼭 살려주세요. 저는 괜찮아요”라고 절규한다는 사실을.
나를 기꺼이 포기하고 자식을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능일지 모른다. 이러한 모성이 팍팍한 현실과 상황에 살면서 변할지언정, 그 순간만은 본심이다. 인류가 오늘날까지 올 수 있었던 근원적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세상 여인들의 눈먼 사랑과 선택(임신과 출산)을 항상 고마워해야 한다.
조정현
● 연세대 의대 졸업
● 영동제일병원 부원장. 미즈메디 강남 원장. 강남차병원 산부인과 교수
● 現 사랑아이여성의원 원장
● 前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