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명 사망한 화재 원인 아직 못 밝혀
“당국 ‘법이 그렇다’만 반복, 국민 관심은 식어가”
현장도 직접 버스 빌려 방문…‘피눈물’ 뭔지 알았다
“각 단체 광화문 분향소·타워크레인 현수막·모금활동 제안”
일방적으로 신원미상 시신 부검 후 통보하기도
“변질 우려에 시민단체에도 손 못 내밀어”
보상금 더 받으려 그러느냐 악플 달리기도
5월 12일 경기 이천시 물류창고 화재 현장을 방문한 유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다.
5월 13일 박종필(60) 이천 물류창고 화재사고 유가족대책위원회 수석대표가 말했다. 이날은 유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해 입관식을 치른 날이었다. 박 수석대표 역시 화마로 잃은 동생(51)을 관으로 옮겼다. 시신은 화장 후 이천시립추모의집에 안치했다. 사고 후 보름 만이었다.
화재 발생 2주 후에야 현장 ‘앞’ 방문
5월 12일 경기 이천시 물류창고 화재현장에서 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측에서 4차 합동감식을 진행하고 있다.
배용주 경기남부청장은 5월 11일 기자간담회에서 “물류창고 지하 1층과 지상 1층, 지상 3층 등 3개 층에서 우레탄 폼 작업이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우레탄 폼 작업 때 나오는 유증기는 이번 폭발 참사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유가족들은 지금도 정확한 화재 원인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현실은 컴컴하다. 유가족 측은 “고맙게도 이천시에서 유가족들에게 의료나 숙소 등을 지원해 주고 있다”고 말했지만 여타 기관의 대응에는 “쉽게 마음이 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진상 규명은커녕 고인의 마지막 순간을 간직한 물류창고도 사고 발생 2주 후인 5월 12일에야 방문했다. 박 수석대표는 “이마저도 유가족이 자체적으로 움직여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나 경기남부청 경찰이 방문했을 때마다 우리도 감식 현장에 가고 싶다 말했다. 그러면 말로만 ‘이해한다’고 하지 아무것도 실천되지 않는다. 화가 나 4차 감식 날 유가족들이 버스를 빌려 막무가내로 현장에 갔다. 처음에는 붕괴 위험이 있다며 현장은커녕 건물 앞에도 못 가게 했다. 유가족들은 그 때문에 오열했다. 유가족의 마음을 알면 (당국이) 그렇게는 못 한다.”
경찰이 일방적으로 시신을 부검한 후 유가족에 통보하는 일도 있었다. 경찰은 사인 파악을 위해 38명의 화재 사망자 중 18명을 부검했다. 박 수석대표는 “이 중에는 경찰이 유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부검한 경우도 있었다. 아무리 영장이 발부됐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처리하면 누가 정부를 인정하겠나”라고 말했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 관계자는 “시신과 소지품의 훼손이 심해 유가족이 누군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있어 공지하기 어려웠다. 부검의 경우 형사소송법에 따라 변사자의 사인을 확인하기 위해 진행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형사소송법 제140조(검증과 필요한 처분)는 사인 검증을 목적으로 한 사체의 해부를 인정하고 있다.
“시민단체가 도와준대도 걱정된다”
“법이 그렇다.”지난 2주간 하루도 쉬지 않고 유가족의 마음을 후벼 판 다섯 글자다. 박강재(62) 유가족대책위 공동대표 역시 이번 화재 사고로 동생을 잃었다. 박 대표는 하루빨리 동생(50)의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고 답답해했지만 번번이 현실에 가로막혔다. 화재 원인이 확정되지 않아 처벌과 보상이 모두 미뤄졌기 때문이다.
그는 “유가족들은 생업 활동을 멈추고 임시 숙소에 머무르고 있다. 상황이 진전되지 않아 우리도 답답하다. 아니 우리만 답답하다”고 아쉬움을 보였다. 이천 물류창고 화재사고에 대해 국민의 관심이 식어가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정체된 현실을 움직이는 데 국민적 관심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하지만 사고 원인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국민의 관심은 나날이 줄고 있다. 최명식(52) 유가족대책위 공동대표는 이번 사고로 매형(51)을 떠나보냈다. 최 대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문제나 고성 산불 등 여러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면서 이천 물류창고 이슈가 상대적으로 묻힌 것 같다”고 말했다.
여러 시민사회단체에서 손을 내밀기도 했지만 유가족들은 거부했다. 자칫 활동 목적이 변질될 수 있다는 걱정 탓이다. 최 대표가 말했다.
“참여연대나 민주노총, 한국노총에서 도와주겠다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광화문에 분향소를 설치해 주겠다, 전국에 있는 타워크레인에 현수막을 걸어주겠다, 모금 활동을 해주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단체와 함께 활동하다 보면 사회적 관심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이들의 도움이 나중에 변질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유가족들에 대한) 국민 여론도 찬반으로 갈릴까 걱정했다. 단체의 도움을 받지 않다 보니 이천 화재사고가 많이 묻히는 것 같다. 답답한 부분이 너무 많다. 국민들이 이천 화재를 많이 이야기해야 하는데….”
최 대표는 “유가족들은 그저 앞으로 비슷한 화재 사고가 되풀이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라고 덧붙였다.
정치권에서 다가와도 돌아오는 건 ‘악플’뿐
정치권에서 내민 손길은 오히려 상처로 돌아왔다.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5월 5일 합동분향소를 방문할 때 빚어진 논란이 대표적 예다. 당시 이 전 총리는 재발 방지를 부탁하는 유가족 측에 “제가 지금 현직에 있지 않습니다. 책임이 있는 위치에 있는 게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박종필 수석대표는 “지금 당장은 힘이 없더라도 차후에 국회에 입성한다면 이러이러한 것을 추진하고 유가족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그 한 마디만 해줬더라도 유가족들이 덜 상처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불똥은 엉뚱한 데로 튀었다. 논란이 보도된 후 유가족에 대한 ‘악플’이 이어진 것이다. 유가족 측에 따르면 “돈 달라고 그러냐” 등의 악성 댓글이 여러 뉴스에 달렸다. 유가족 측은 현재 희생자와 유가족을 대상으로 악성 댓글을 단 작성자들을 고소한 상태다.
사회적 관심이 식어가는 이천 화재사건 현장에서는 유가족들이 서로를 보듬고 있었다. 이번 사고를 겪으며 “‘피눈물’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는 박강재 대표는 이렇게 덧붙였다.
“고맙게도 이천시민들이 합동분향소를 많이 찾아주세요. 하지만 이천 바깥에서는 상대적으로 이곳을 잘 찾지 않아요. 그게 정말 눈물이 나는 거죠.”
그는 “여기 모인 유가족들은 과부이거나 부모님을 잃은 자녀들”이라면서 “이곳에서는 유가족들이 서로 다독이고 위로하고 있다”며 말을 끝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