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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에 길을 묻다

목숨 건 直筆 세상을 밝히다

‘동호직필’ ‘춘추필법’ 다시 읽기

  • 김영수 | 사학자, 중국 史記 전문가

목숨 건 直筆 세상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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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건 直筆 세상을 밝히다

역사가의 자세와 정신을 보여준 사마천.

돈도 없고 누구 하나 자신을 변호하러 나서지 않는 상황이었다. 사마천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깊게 성찰했다. 냉랭한 세태와 민심, 그리고 그 뒤에 음침하게 웅크린 잔인한 권력의 속성을 확인했다. 그는 자신의 관점을 완전히 수정했다.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그 결과 사마천은 역사를 움직이는 거대한 힘은 수많은 보통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엄연한 사실을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역사관을 온전하게 담은 역사서를 반드시 남겨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49세 때 그는 성기를 자르는 궁형을 자청했다.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서로 평가받는 ‘사기’는 이런 치욕과 고난 속에서 탄생했다.
사마천은 역사서를 집필하게 된 동기와 목적에 대해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究天人之際),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관통해(通古今之變), 일가의 말씀을 이루고자 했다(成一家之言)”고 밝혔다. 그러면서 자신의 뜻을 바꾸지 않고 평생 지조를 지켜온 사람이라면 누구든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단언했고, 그런 사람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그리하여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 봉기군 수령 진승(陳勝)의 입을 통해 사마천은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의 씨가 따로 있더란 말이냐(王侯將相寧有種乎)”고 외쳤다.

‘사관’이 기록당하는 세상

사마천은 이런 진보적 역사관을 수많은 보통 사람의 행적 속에 반영해 무미건조한 사건과 사실의 나열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행적을 집요하게 통찰함으로써 그 이면에 숨은 진실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는 직필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역사학의 경지를 개척한 쾌거였다.
사마천은 역사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지난 일을 기술해 다가올 미래를 생각한다(述往史 思來者)”라고 했으며, 또 “지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은 뒷일의 스승이 된다(前事之不忘 後事之師也)”고 했다. 특히 뒤의 구절은 일제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난징 대도살 기념관’의 현판에 적힌 글귀이기도 하다.
권력 찬탈의 주동자를 정확하게 직시한 동호의 직필, 죽음을 불사한 제나라 태사 형제들의 사필, 대의명분과 포폄을 분명히 한 공자의 춘추필법은 서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역사정신이다. 우리 역사 속 사관들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말을 타다 실수로 떨어진 왕이 곁에 있던 사관에게 “이번 일은 실수이니 기록하지 말라”고 하자 자신에게 그 사실을 기록하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까지 기록했다는 사관의 일화는 우리 역사 기술의 정신이 얼마나 엄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떤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싸고 수많은 사학자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일찍이 사관의 명예와 지위가 이렇게까지 추락한 적이 있을까 싶다. 사관정신은 쇠퇴한 지 오래다. 사관의 역할 또한 전통 사회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은 모든 사람이 역사를 기록한다. 역사를 전문적으로 기록하는 사관마저 수많은 사람에 의해 기록당하는 세상이 됐다.
역사의 평가는 이제 훗날의 일이 아니다. 지금 당장 평가가 내려지고, 비판이 가해지고, 비방이 쏟아진다. 인신공격은 기본이고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신상까지 만천하에 공개된다. 이제 역사가의 붓이 세상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보통 사람의 눈과 귀, 손가락이 세상을 구석구석 남김없이 밝힌다. 역사의 평가가 과거보다 훨씬 무서워졌다. 역사가의 붓이 문제가 아니라 역사가 자신들의 언행이 문제가 돼버렸다. 정신을 버렸기 때문에 말이 많아지고 행동이 삐뚤어진 것이다.
생각해보라. 엄정한 사관의 자세를 지킨 동호나 태사 형제들, 공자나 사마천이 이 시대를 산다면 지금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에 대해 뭐라고 할까. 그리고 그 일에 앞장선 사람들이나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까. 어느 쪽이든 비극적이고 비참한 평가를 피할 수 없지 않을까 싶다. 


신동아 2016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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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 사학자, 중국 史記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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