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호

김충립 前 수경사 보안반장 육필수기 ‘음모와 암투’

‘청와대 부통령님’께 받들어 총!

오만한 ‘경호실 권력’과 정치군인들

  • 김충립 | 前 수경사 보안반장 kimchoonglib@naver.com

    입력2016-05-12 17: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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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지철, 친위대 구축하며 2인자 행세
    • 황영시 군단장, 부하 전두환 와야 회식 시작
    • 대대장 월북사건으로 보안사 위태…全, 권력 핵심에
    • 車, 10·26 일주일 전 김재규 ‘안일한 대응’ 면박
    • 삶 포기한 김재규, 변호인 만나고 “민주화 영웅” 주장
    ‘윤필용 장군 쿠데타 음모사건’ (1973년 3월)의 최대 수혜자는 전두환 장군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윤필용 사건 이후 청와대 권력지형에 변화가 왔고, 그것이 전두환에게 이어졌다. 전두환은 1976년 3월 제1공수여단장을 마치고 바로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발탁돼 경호실 작전차장보에 임명된 후, 1977년 소장으로 진급하고 1978년 1월 제1사단장에 부임한다. 그리고 1년 2개월 만인 1979년 3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된다. 이어 10·26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중심으로 한 ‘음모와 암투’의 중심에 선다.

    윤필용 사건 당시 청와대 핵심 권력자들은 대통령비서실장 김정렴, 경호실장 박종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보안사령관 강창성 장군 등이었다. 사건 이후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 후임에는 진종채 장군, 강창성 보안사령관 후임에는 김종환 장군이 보직됐다. 그해 12월에는 김대중(DJ) 납치 사건으로 이후락 중정부장이 해임되고, 검사 출신 신직수 부장이 임명됐다. 다음 해인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게 피격돼 서거하면서 박종규는 물러나고 5·16 혁명에 가담한 공수부대 출신 차지철 의원이 경호실장에 보직된다. 1975년은 윤필용·손영길 장군 등이 안양교도소에서 형집행정지로 출감하는 등 조용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1976년 신직수 중정부장이 해임되고, 후임에 김재규 부장이 보직되자 청와대 주변 정보·보안 분야 권력자들 중 대통령을 수시로 면담하고 보고할 수 있는 ‘문고리 권력’ 서열이 바뀌게 된다. 당시 일반적으로 알려진 문고리 권력은 1위 비서실장, 2위 중앙정보부장, 3위 경호실장, 4위 보안사령관 순이었다. 그런데 1974년 차지철이 경호실장이 되면서 이런 구도가 바뀌고, 서열 3위 경호실장이 1위로 올라섰다.



     一人之下 萬人之上

    이런 변화는 청와대 공식 행사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다. 1위 김정렴은 대통령의 오른쪽 상위 자리를 차지철에게 내주고, 자신은 2위 자리인 대통령 왼쪽 자리에 앉게 된다. 차량으로 수행할 경우 대통령 차량 바로 뒤를 경호실장 차량이 수행했다. 이런 ‘서열 변화’는 김정렴이 차지철에게 양보하는 가운데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이뤄졌고, 김재규가 부임하기 전 서열 2위였던 신직수도 비교적 너그러운 마음으로 마찰 없이 무난하게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김재규는 달랐다. 1976년 신직수 후임으로 중정부장에 임명된 김재규는 박 대통령과 자신이 육사 2기 동기생이자 동향(경북 선산)이라는 각별한 관계를 내세워 차지철과 충성경쟁을 시작했다. 김정렴 비서실장이 서열 1위를 지켜야 하고, 자신은 공식 서열 2위라고 주장하면서 차지철이 서열을 무시하고 대통령과의 면담을 통제하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차지철은 조선시대의 영의정을 자처했다. 청와대 내에서 대통령 다음 ‘2인자’로서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이루려 했다. 김재규도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을 꿈꿨다. 차지철 못지않은 권력욕과 명예욕으로 들끓었다. 둘의 마찰음은 세월이 흐를수록 격화한다.

    김재규의 ‘2인자 욕망’은 그가 1971년 윤필용 장군 제거를 위한 감청사건(신동아 2월호 140~153쪽 참조)을 일으켰을 때부터 드러났다. 그는 자신보다 앞서가는 윤필용 장군을 제거하려다 발각돼 보안사령관직에서 해임되고 3군단장으로 좌천된 후 권력에서 밀려나는 쓰라림을 맛봤다. 박 대통령에 대한 분노와 반감을 가슴에 품었다. 그러나 중정부장이 되고 나서는 박 대통령이 명실 공히 자타가 인정하는 2인자 자리에 자신을 재기용했다고 확신했다. 그러니 여덟 살 어린 차지철에게 밀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신경전이 지속되던 중, 1978년 비서실장에 중정부장 출신 김계원이 들어서자 김재규의 입지는 차지철에 비해 더 좁아지게 된다. 비서실장으로서 김계원의 권위는 김정렴 때보다 더 약해졌다. 4선(選)의 국회의원과 3개 상임위원장 경력을 가진 차지철의 정치 분야 정보보고는 김재규의 정보보다 더 정확한 고급 정보였다. 가장 중요한 정치 정보보고 업무를 차지철에게 빼앗길 형편이었다.

    필자는 1976년 건설부 장관이던 김재규가 중정부장에 임명되는 것을 보고, 만약 1973년 윤필용 장군 모함 사건이 없었더라면 윤필용·손영길 장군과 권익현·정동철 대령 등 인재들이 제거되지 않았을 것이고, 윤필용 제거 음모를 시도한 김재규도 중정부장 자리에 기용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불행하고 치욕적인 10·26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충격과 슬픔 속에 비슷한 생각을 했다.



    죽음의 지옥훈련

    전두환과 차지철의 인연은 1951년 육사 입학시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두환은 초등학교를 거쳐 5년제 대구공고를 졸업한 뒤,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9월 육사 입학시험에 응시했다. 1차 합격자 명단에는 없었지만 예비후보로 합격하고 1955년에 육사 11기로 임관했다. 차지철은 서울 용산고를 졸업하고 육사에 응시했지만 불합격하자 간부 후보생 과정을 거쳐 1953년 장교로 임관한다. 따라서 차지철은 전두환보다 2년 앞서 장교로 임관돼 군에서는 선배이고 나이는 세 살 어렸다.

    육사에 입학한 전두환 생도는 숙소에서 소등 후 등잔불을 밝히고 공부해도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우수 생도가 하는 소대장 생도를 한 번도 해 보지 못했고, 군번이 낮아 열등의식을 갖고 있었다. 당시엔 학업 우수 생도에게 빠른 군번을 줬다. 임관 후에는 선두 주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지녔던 전두환은 1958년 육사 동기들, 그리고 13기 최세창과 함께 새로 창설하는 공수단에 지원한다. 이때 차지철 대위와 만나 인연을 맺게 된다.



    전두환, 차지철 대위가 더 깊은 인연으로 연결된 것은 1960년 미국 육군보병학교 특수전 교육에 차출되면서다. 당시 정규 육사 출신으로는 전두환(11기), 장기오(12기), 최세창(13기) 등 3명이 차출됐고, 일반 장교 출신으로는 태권도(5단), 합기도(5단), 검도(3단)가 도합 13단인 차지철 대위가 차출돼 미국 특수전 교육(레인저 코스)에 함께 참가한다. ‘죽음의 지옥훈련’으로 알려진 이 교육을 같이 받은 전우는 생사고락 속에서 강한 결속력을 갖게 되는데, 전두환과 차지철은 이때 깊은 인간관계를 맺은 것이다.   

    공수단에서 끈끈한 인연을 쌓은 두 사람은 1961년 5·16군사혁명이 일어난 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함께 근무하게 된다. 차지철은 5·16혁명 한 달 전 친분이 깊던 박종규와 함께 명동의 한 다방에서 박정희 소장을 만난 후 5·16군사혁명에 가담해 최고회의 의장 경호단장이던 박종규 소령과 같이 근무했다. 당시 전두환은 최고회의비서실에서 근무하면서 둘은 다시 인연을 맺는다. 민정 이양 당시 전두환 대위는 군으로 복귀한 후 1973년 1월 1일 준장으로 진급해 제1공수여단장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차지철 대위는 정치인이 돼 4선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74년 경호실장이 됐다.

    1974년 경호실장에 임명된 차지철은 경호업무는 대통령의 신변 보호뿐만 아니라 ‘정권 유지’ 책임도 져야 한다며 경호실을 확대 개편했다. 특히 경호업무는 군 출신이 중심이 돼야 한다며 군 출신을 대거 영입해 군단 규모로 경호실을 보강했는데, 경호차장에 육군 소장, 작전차장보에 준장급 장성을 앉혔다. 차지철은 군부 내에 자신의 지지세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육사 11기들을 작전차장보에 보직하기로 하고, 전두환 공수여단장을 경호실 작전차장보에 앉힌 후 그 후임으로 노태우·김복동 장군을 연이어 보직했다. 이로써 차지철과 전두환은 세 번째로 직속상관과 부하 관계가 된다.



    차지철의 대권 욕망

    당시 주요 정보파트 인사들은 차지철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5·16군사혁명에 참여한 경험에 비춰 자신도 군부의 지원만 받으면 혁명이 가능하다는 대권 욕망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었다. 경호실 차장으로 정병주·문홍구·전성각·이재전 소장 등 우수한 장성들을 기용해 육군 중장으로 승진시킨 후 요직에 앉혔고, 작전차장보로 이광로·전두환·노태우·김복동 준장 등 육사 출신 장군을 기용해 승진시켜 요직에 진출케 한 것은 군부를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차지철은 든든한 군부 인맥을 갖추고 김재규 중정부장을 압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위에 언급한 8명의 장성은 차지철 스스로 ‘부통령’ 또는 ‘부각하’가 된 것 같은 영웅심을 갖게 했다. 특히 차지철이 군부에서 가장 신뢰한 인물은 육사 11기 전두환과 노태우 두 장군이었다.

    이들이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근무하면서 차지철에게 맹종한 행위는 결과적으로 육사의 명예와 권위를 실추시킨 행위로 규탄받아 마땅하다. 차지철의 그릇된 영웅심리를 키워 자만심에 빠지게 했고, 결국 차지철이 김재규를 넘어서려다가 10·26사건을 유발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일말의 역사적 책임이 있다(상자기사 참조).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근무하던 전두환은 1978년 1월 1사단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필자는 같은 6군단 내 사단인 30사단 보안부대 운영과장을 맡아 30사단장과 인접 보안부대 동료들의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당시 30사단장은 군단장 회의에 다녀오면 필자를 불러 차를 한잔 하자고 했다. 그리고 군단장 황영시 장군과 1사단장 전두환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필자는 그의 말이 보안사령관에게 보고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주된 내용은 “황영시는 군단장 자격이 없고, 전두환은 군단장보다 상위 장군으로 행세하니 군기가 이래서야 되겠느냐”는 하소연이었다. 한 예로 군단장이 회식을 준비했는데, 전두환을 제외한 군단 내 모든 장군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전두환이 도착할 때까지 1시간가량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모임 장소에 도착하자 군단장이 입구로 달려가 ‘모시고’ 들어왔다. 회식도 그때서야 시작됐다. 이로 인해 다른 사단장 모두가 군단장을 존경하지 않게 됐고, 군의 기강이 제대로 서지 않는다며 불평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필자는 이 정보를 사령부에 보고했다.



    대대장 월북사건

    사단장 보직은 통상 2년이 기본 연한이었다. 그런데 전두환은 사단장 보직 1년 2개월 만인 1979년 보통 군단장급인 육군 중장이 보직을 맡는 보안사령관에 전격 등용됐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전두환의 보안사령관 등용에는 큰 사건이 배경이 됐다.

    1977년 10월 중부전선 ○○지역 보병 제20사단에서 GOP 철책선 방어업무를 맡은 ○○연대 2대대장 유모 중령이 사단 내 대대급 전술 평가에서 최하위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제20사단 보안부대는 유 중령이 담당하던 방책선에 구멍이 났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1주일 정도 내사했으나 사실 규명이 어려웠다. 보안부대장은 사단장에게 “유 중령 근무 지역 방책선에 구멍이 난 사건이 일어났으니 대대장을 즉시 교체하고 사건을 조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보고를 받은 사단장은 대대장에 대한 인사조치 없이 즉시 사단 참모 2명에게 “현장 조사를 하라”고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사단 조사관들이 야간에 62연대에 도착해 “현장 조사를 하자”고 하자 62연대장은 “날이 밝으면 조사를 하자”며 조사관을 사단으로 돌려보내고 유 대대장에게도 날이 밝으면 현장 조사를 하겠다고 통보했다. 유 대대장은 20사단 보안부대의 내사에 압박을 받아오던 중, 사단에서 현장 조사가 나온다는 통보를 받자 처벌이 두려워 월북을 결심했다. 날이 밝자 대대장 지프에 통신병을 태우고 북방 한계선 가까이 가서는 운전병과 통신병에게 같이 월북할 것을 강요했고, 운전병이 이를 거절하자 다리에 총을 쏴 운전을 못하도록 하고는 통신병과 함께 월북했다.

    즉각 상황을 보고받은 보안사령관 진종채는 1차로 청와대에 “전방 20사단에서 대대장 유○○ 중령과 통신병이 행방불명된 사건이 발생했는데, 북괴에 납치된 것 같다”고 상황보고를 했다. 그가 ‘허위보고’를 한 것은 북한에 대한 대응책과 우리 군의 사기를 고려해 보안을 유지할 필요가 있고, 관계기관과 협의한 후 사건 전말을 보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車, 군 관련 報告 독점

    그런데 중정과 육군본부에서는 “납치된 것이 아니라 보안부대원의 책임 추궁 압력에 못 이겨 자진 월북한 사건”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보안사의 보고와 두 기관 보고 내용을 검토한 차지철은 격분했다. 그는 “내일 아침 대통령께 보고한 후 보안사령관을 허위보고 죄목으로 구속해야 한다”고 했다.  

    복기(復棋)해보면, 철책선에 구멍이 뚫린 것을 발생 즉시 보고하지 않은 채 내사를 한다며 1주일 정도 시간을 허비한 점, 철책선이 뚫린 원인을 규명하지 못한 점, 보안부대장의 지휘 조언처럼 대대장의 보직을 변경한 후 조사를 하지 않은 점이 대대장 월북 사건을 만든 것이다.  

    진종채는 차지철의 견제와 독선으로 대통령에게 직접 정보보고를 하는 데 많은 제약을 받던 중 이 사건이 발생하자 그마나 간간이 하던 대통령 독대 기회마저 박탈당했다. 보안사령부의 군 관련 각종 보고서는 차지철에게 보고되고, 차지철이 대통령에게 종합 보고하는 시스템이 굳어졌다.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은 군 관련 보고를 보안사령관이 직접 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갖고 있었다.

    김재규는 이 사건을 기화로 1978년부터 보안사 기능을 축소하고 중정이 보안사를 직접 통제 관리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즉 보안사 기존 편제인 ‘정보처’를 ‘방산처’로 바꾸고 모든 민간인 정보업무를 금지했으며 민간인은 국방부 관련 방산업체만 출입토록 했다. 그 동안 보안사 요원이 군부대 내에서 사복 근무를 하도록 한 것을 바꿔 군복을 입게 하는 등 보안사의 업무와 위상을 위축시켰다. 진종채는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1979년 3월 초, 차지철이 진종채를 경질할 작정을 하고 1977년 10월 진종채가 대통령에게 ‘허위보고’한 내용을 들춰내 이를 보고하려는 준비를 했다. 박 대통령이 이 사실을 보고받으면 진종채가 처벌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긴박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런 상황을 감지한 필자의 친구가 “급하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밤 12시가 지난 후 청와대 근처 효자동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그를 만나 한 시간가량 위와 같은 이야기를 전해 듣고 보니 매우 심각한 상황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차지철이 대통령에게 보고해 진종채 장군을 구속하라는 지시를 받아낼 수도 있어 진 장군이 매우 걱정됐다.    

    필자는 대화를 마치고 육사 근처 묵동에 있는 사령관 숙소로 향했다. 새벽 2시가 좀 넘은 시간에 진종채 장군을 깨워 자초지종을 보고하고, 아침 일찍 청와대에 들어가 차지철이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전 각하께 먼저 보고드릴 수 있도록 수행비서관과 협조해놓았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보안사령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도 했다. 진 장군은 “내일 아침 사건에 대해 자세한 보고를 드리고, 보안부대원이 관련된 사건인 만큼 보안사령관인 내가 책임을 지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軍 장악 술수

    그날 퇴근 후 필자는 다시 진종채 사령관을 찾았다. 진 장군으로부터 내용을 보고받은 박 대통령은 “1975년부터 4년이나 보안사령관을 맡아 수고했으니 자리를 옮길 때가 됐다”며 2군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기라고 했고, 후임에는 제1사단장인 전두환 장군을 전임시키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윤필용 장군 사건으로 우수한 장군들이 제거되어 적절한 인물이 없기 때문에 전두환 장군이 수혜자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청와대에 2인자로 자리를 굳힌 차지철은 군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자신과 가까운 인물을 보안사령관 자리에 앉히려는 계획을 실현한 꼴이 됐다.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된 것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실추된 보안사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차지철과 관계가 좋은 전두환을 추천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지만,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차지철이었다.

    필자는 1970~80년대 보안부대에서 정보 보안 업무를 담당하면서 군 장교들과 장성들의 군인정신, 국가관, 애국관을 평가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할 정신 자세를 가지고 있느냐는 군인으로서 당연히 갖춰야 할 덕목으로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이었다. 그리고 장성이나 대전복(對顚覆) 중요 부대장의 개인적 가치관과 애국심은 더욱 중요하게 평가했다. 가치관과 애국심에 대한 평가 기준은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개인적이고 이기주의자인가, 아니면 이타적이고 공익과 민족과 국가를 위해 얼마나 헌신적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욕망이 어느 정도인가다.

    필자가 보안사에서 ‘옐로 카드’(인사기록카드)를 작성하면서 군인들을 평가한 경험에 의하면, 정상적인 군인은 오직 군과 국가를 위해 성실하고 충실하게 복무한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어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으며 대통령이 될 기회가 와도 이를 거절한다. 다른 부류의 군인은 개인의 이득 추구는 물론 이를 이용해 정치적 욕망을 달성하려고 세력을 형성하고, 무리를 짓고, 여건만 되면 쿠데타를 해서라도 대권을 잡으려는 욕망을 가졌다.



    김재규 목 죈 차지철

    전자에 속한 장성으로는 윤필용, 진종채, 정승화, 장태완, 손영길, 정호용 등을 꼽을 수 있다. 후자에는 김재규, 김형욱, 강창성, 차지철, 전두환, 노태우 등이 있다. 후자는 군인이 된 후 지속적으로 정치적 욕망을 키우며 대권욕을 불태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기회 있을 때마다 정적을 제거하려고 권모술수, 음모, 암투를 마다하지 않은 인물로 평가했다.

    비록 공인의 범주에 드는 이들이긴 해도 인물에 대한 평가는 여러 사람의 종합적인 평가여야 하며, 이를 공개하는 것은 무례한 일일 수도 있다. 필자는 대권욕을 가졌느냐를 기준에 두고 주관적으로 평가한 것임을 밝힌다. 필자와 다른 평가를 하는 분들의 이해를 구한다. 필자가 경험한 인물 가운데 존경할 만한 인물은 진종채, 정치적 욕망이 없고 순수한 군인이기를 바랐던 인물은 정호용이다.  

    1974년 경호실장으로 임명된 차지철은 박종규 전임 실장과는 달랐다. 경호실장은 대통령의 신변뿐만 아니라 정권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며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모든 문건은 사전에 경호실장에게 제출하라고 강요했다. 문건에 독극물이 있는지를 조사해야 한다는 이유를 댔다.



    1978년 들어 차지철은 중정부장의 대통령 직접 보고도 방해하기 시작했다. 차지철이 정치 관련 보고를 독점해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려 했기 때문이다. 4선 의원의 경험을 바탕으로 중정부장보다 더 정확한 정치 보고를 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기도 했다. 그는 경호실장 밑에 두고 활용한 ‘이규광 정보팀’(육사 3기 이규광 전 헌병감이 지휘해 붙은 이름)을 통해 백두진 제10대 국회의장 선출 정보와 김영삼(YS) 의원 제명 관련 정보를 수집해 보고했는데, 여기엔 김재규의 보고보다 더 정확한 내용이 담겨 김재규의 입지를 위축시켰다.

    1979년 10월 20일, 김재규는 부마(釜馬)사태와 관련된 보고 또한 잘못됐다는 문책을 받았고, 차지철은 ‘신민당이든 학생이든 탱크로 밀어붙이라’는 지시를 하기도 했다. 김재규는 중정의 고유 업무를 차지철에게 빼앗긴 데다 차지철이 부마사태 처리까지 언급하자 그를 제거하려는 결심을 하고 기회를 엿보다 마침내 10월 26일 거사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10·26 일주일 전 새벽

    10·26 사건 발생 일주일 전 새벽 1시경, 성남 공군비행장에서 총리 전용기 편으로 김재규 중정부장이 부산으로 출동하는 범상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현장에 나와 있었고, 필자도 보안 업무를 위해 현장에 나가 있다가 비행장에 도착한 김재규와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을 봤다. 김재규는 술에 취한 것 같았고, 무척 격앙된 표정이었다. 공항에 영접 나온 누구에게도 인사를 하거나 눈길을 주지 않았다. 박흥주는 필자와 506보안부대에서 영등포팀장과 마포팀장으로 함께 근무해 친한 사이였지만, 그와도 눈인사만 건넸을 뿐 대화를 나눌 수 없는 분위기였다. 비행기가 준비될 순간까지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김재규 일행은 부산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날 정병주 사령관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박 대통령과 김재규, 차지철이 회식 중에 부마사태 해결 방안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더군. 차지철이 ‘강력하게 대처해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데 중정부장이 미온적으로 대처해 문제가 더 커지고 있다’며 김 부장을 몰아붙였다는 거야. 그러자 박 대통령이 김재규에게 ‘안일하게 대응해 사태를 악화시키지 말고 당장 현장에 달려가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한 거지. 그래서 김재규는 술자리가 끝나자마자 곧장 총리 전용기를 타고 부산으로 출동한 거라네.”

    김재규가 부산으로 떠난 다음 날 아침 “특전사령부와 서울지역 예하 3개 여단은 기차편으로 부산으로 출동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필자도 특전사령부 지휘부와 함께 부산으로 출동했다. 지휘부는 한성여대(현 경성대)에 자리 잡았고, 예하 여단은 부산대와 동아대 등에 주둔해 시위를 진압했다.



    민주화 위해 거사한 영웅?

    1주일쯤 지나자 부산지역 시위는 진압됐다. 이어 10월 27일에 1개 여단을 마산지역으로 출동시키기 위해 사전 준비를 하던 중 10·26 사건이 발생했다는 전화 연락을 받았다. 필자는 정병주와 함께 군 헬기편으로 급거 상경했다. 정병주는 차지철의 부하로 경호실 차장을 하다가 중장 진급과 함게 특전사령관으로 영전했고, 김재규와는 동향(김은 경북 선산, 정은 경북 영주) 선후배로 아주 친밀한 사이여서 큰 충격을 받았다.

    1979년 늦가을은 그렇듯 긴박하게 흘러갔다. 10·26 이후 정부의 공식 발표와 김재규 변호사들의 주장은 엇갈렸다. 먼저 김재규가 차지철과 박 대통령을 살해한 행위가 ‘계획된 거사’인지 우발적인 사건인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진실은 뭘까. 필자는 김재규가 오래 전부터 마음의 준비는 해왔지만, 당일 행위는 우발적인 사건이었다고 본다.

    김재규가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에게 당일 현장에서 거사에 관해 알린 것을 보면 그 자리에서 일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박흥주에게 미리 알렸더라면 그날 밤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박흥주는 보통 인물이 아니다. 어떻게든 사건을 막으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사 후 삼일고가도로를 달리던 승용차에서 김재규가 박흥주에게 ‘중정과 육군본부 중 어디로 갈까?’ 하고 물었다는 대목도 이 사건이 계획된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만약 육군본부로 가지 않고 남산 중정으로 가서 군 지휘관을 호출했다면 상황은 더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김재규가 민주화를 위해 거사를 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런 얘기가 나온 것은 재판 과정에서 변호사들이 김재규에게 그렇게 주장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김재규가 사건 후 육군교도소로 이감됐을 때 투입된 보안부대 소속 비밀 감시원들은 김재규가 자살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만큼 그는 삶을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재판이 시작되고 몇몇 반정부 성향 변호사들과 면접한 뒤부터 김재규의 언행은 180도 달라졌다. 구치소에서 자신이 ‘우리나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독재자를 살해한 영웅’이라고 큰소리를 치며 삶에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필자는 김재규 변호인 중 한 사람으로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강신옥 변호사를 서교동 호텔에서 만났다. 필자는 그에게 김재규가 재판 말기에 ‘민주화를 위해 독재자를 사살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개입됐다’고 발설한 것은 김재규의 변호사들 중 일부가 김재규에게 ‘교육’을 시킨 내용이지 사실이 아니라고 조언했다. 강 변호사도 김재규를 살리기 위해 변호사들이 노력해보는 것일 뿐이라는 식의 반응을 보인 것으로 기억한다.

    10·26사건 이후 차기 대권의 향방을 놓고 여러 가능성이 대두됐다. 여권에서는 야당에 정치활동을 허락하면 정국은 극도로 소용돌이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과도 정부의 대통령은 최규하 총리가 대행하고 다음 대권은 김종필 공화당 총재에게 돌아가는 것이 순리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러나 12·12사태가 발생하고 1980년에 접어들자 다음 대권이 김종필에게로 가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형성된다. 권력의 추가 전두환 보안사령관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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