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29일 연세대에서 열린 교과서 포럼에 참석해 토론중인 역사학자들. 왼쪽부터 이인호 명지대 석좌교수, 이주영 건국대 교수, 이기동 동국대 교수,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
그런데 지난 20여 년 동안 국내 역사학계에는 민족의 자주화, 민주화, 통일을 강조하는 새로운 학파가 부각되면서 역사학의 역할과 위상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역사 지식이 사회변혁의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역사학을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김대중 정부의 ‘제2 건국’ ‘제주 4·3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의지 표명’ ‘백범기념관 건립 지원’ 등은 역사 지식이 사회변혁의 수단을 넘어 정권의 성격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말해주는 단적인 사례다. 이 가운데 백범기념관 건립을 지원한 것은 백범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반대했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흐름은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친일행위를 비롯한 과거사 진상조사’는 경우에 따라서 역사 지식이 한 사회 세력의 다른 사회 세력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위한 무기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최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정부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로부터 경비 일부(언론보도에 따르면 5억원)를 지원받아 친일파 명단을 발표하면서 일으킨 사회적 파장에서 확인된다. 3000여 명의 명단 가운데는 자유주의적이고 반공주의적인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키고 발전시켰던 인사가 상당수 포함돼 있다.
이는 경우에 따라 역사 지식이 국가의 성격과 진로도 바꿀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역사학이 최근 화두로 떠오른 ‘대한민국의 정체성 위기’와 결코 무관치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이 논문은 ‘정말 그럴까’ 하는 기본적인 의문에서 출발해 만약 사실이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그 대안을 마련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만족할 만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국사학계 전반에 걸친 종합적인 검토가 있어야겠지만, 발표자의 역량 부족으로 근현대사 분야, 특히 현대사 분야에 한정하고자 한다.
무섭게 떠오른 ‘민중사학’
역사학의 역할과 위상의 변화는 1980년대 초 대학원생 연령대의 급진적인 젊은 연구자들이 기존의 역사연구가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비판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면서 그들이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민중(民衆)사학’이다. 그것은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보는 시각에서 현재의 계급문제와 민족문제를 해결하려는 새로운 학풍이었고, 그들은 그것을 ‘과학적·실천적 역사학’으로 불렀다.
그들은 기성학회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망원한국사연구실’(1984), ‘구로역사연구소’(1988) 같은 학회를 조직하는 한편, ‘역사와 현실(한국역사연구회)’ ‘역사비평(역사문제연구소)’ ‘역사연구(역사학연구소)’ 같은 학술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사회의식과 학문적 열정이 매우 강한 그들이 국사학계 내부에 미치는 영향력은 급속도로 커져 갔다.
그들은 한국사회의 민주적 변혁과 분단의 자주적 극복을 목표로 내세우고 그것을 실천할 주체로 민중을 설정했다. 또 개항 이후의 한국 역사를 반봉건적 근대화와 반제국주의적 자주화를 위한 농민, 노동자, 사회주의자들의 민중항쟁 과정으로 파악했다. 그들은 연구 과정에서 ‘유물사관’이나 ‘사회구성체 이론’을 도입하는 실험도 했다. 그런 까닭에 조심을 미덕처럼 여기던 기성학자의 눈에 그들은 무서운 젊은이들로 보였다. 이러한 민중주의적 민족주의의 열기 속에서 ‘한국 민중사’ 시리즈가 나왔고, 뒤이어 그 책을 제작한 풀빛출판사 대표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입건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