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레스
요컨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는 기술에 만족했을 뿐 왜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지에 대해선 궁구하지 않았다. 밀레투스 사람들, 나아가 그리스인은 이들과 달랐다. 그들은 원인을 물었으며 원인에 대한 관심은 일반화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다. 이집트인이나 바빌로니아인은 불이 벽돌을 딱딱하게 만들고, 집을 따뜻하게 하며, 광석에서 금속을 분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불의 본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다시 말해 ‘불의 고유한 특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지 못했다.
예컨대 바빌로니아인은 두 숫자를 곱한 값과 두 숫자를 더하거나 뺀 값을 제시하고서는 원래의 두 숫자를 구하라는 문제를 풀 수는 있었지만 계산할 때 필요한 수식을 일반화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이집트인은 기하학을 직사각형 형태의 개인 농장과 관련지어 생각했으나 그리스인은 어디에서든 동일한 특성을 갖는 직사각형의 본질을 궁리했다. 그리스인에게만 형상이 감각에서 개념으로 나아간 것이다.
결국 기원전 6세기 밀레투스인들은 실용적 차원을 넘어선 사유를 통해 철학을 일으켜 세웠다.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와 같은 최초의 서양철학자는 천문학, 수학, 우주론, 기상학, 생물학, 영혼론 등의 분야에서 철학자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이들이 서양철학을 어떻게 탄생시켰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최초의 서양철학자 탈레스는 기원전 6세기 7현인(탈레스, 피타코스, 비아스, 솔론, 클레오브로스, 킬론, 페리안드로스) 중 한 명이다. 그는 ‘항해용 천문 안내서’ ‘지점(至點·동지점과 하지점)에 관하여’ ‘분점(分點·춘분점과 추분점)에 관하여’라는 책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
탈레스는 우선 천문학자로 여겨진다. 천문학에서 탈레스의 가장 유명한 행적은 일식 예언이다. 탈레스는 기원전 585년 낮이 갑자기 밤으로 바뀌는 변화, 즉 일식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가 예언한 해에 실제로 일식이 일어났다.
탈레스는 수학에서도 여러 가지를 발견했다. 이집트에서 기하학을 배워 이를 밀레투스에 최초로 도입했다. 그리스 기하학은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에서 볼 수 있듯 측정이나 계산이 아니라 일반적 정의와 정리에 초점을 맞춘다.

아테네 학당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의 우주론에 관한 생각 두 가지를 후대에 전해주는데, 하나는 지구가 물 위에 떠 있다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물이 만물의 근원이라는 생각이다. 지구가 물 위에 떠 있다는 생각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신화적 우주론의 영향을 받아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는 지구가 물 위에 떠 있다는 생각이 폭넓게 퍼져 있었다.
물론 탈레스가 지구는 물 위에 떠 있다고 생각하면서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신화적 우주론을 단순히 답습했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그는 지진의 원인을 지하에 있는 물의 운동으로 설명하는데 이런 설명은 지구가 물 위에 떠 있다고 전제해야 가능하다. 지구가 물 위에 떠 있다는 탈레스의 발상은 지진과 같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나올 만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설파한 4원인[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은 한 사물에는 질료인(그것이 어떤 질료로 되어 있는가), 형상인(그것은 어떤 존재인가), 운동인(무엇이 그것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목적인(그것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존재하는가)이 존재하며, 이 네 가지 원인을 모두 설명했을 때 우리는 그 사물을 ‘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 탈레스가 말하는 물을 질료인으로 해석한다. 그는 모든 것의 자양분이 축축하다는 것, 열 자체가 물에서 생긴다는 것, 물에 의해 모든 것이 생존하는 것을 보고서 탈레스가 물이 만물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물이 만물의 근원이라는 생각은 모든 사물은 물로 이뤄져 있음을 의미한다. 탈레스는 ‘모든 사물이 무엇으로 이뤄졌는가’라는 질문을 최초로 제기한 후 물이 사물의 구성요소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과 달리 탈레스는 물이 세계의 기원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은 땅이 물 위에 떠 있다는 착상과 잘 연결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영향을 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신화에도 함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