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조심스럽게 사방을 둘러보더니 은밀히 속몽암(續夢庵) 쪽으로 휘청거리며 걸어갔다. 더할 나위 없이 한적한 속몽암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벌써 훤하게 밝은 뒤였다. 그는 등에서 자그마한 보따리와 우산을 내려놓은 다음 돌의자에 걸터앉아 하늘을 바라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보따리에서 큰 붓을 꺼내 먹을 듬뿍 찍어서는 바위에 글을 썼다.
‘육경(六經)은 나를 눈뜨게 했으나, 하늘은 일곱 자 이 몸을 버리는구나!’
“제왕은 다 도적들”
이 남자가 바로 후세에 ‘위기의 사상가’로 일컬어지는 명말 청초의 애국지사 왕부지(王夫之·1619~1692)다. 멸망한 명의 잔여 세력이 세운 남명(南明) 정권에 가담한 그는 명을 멸망시킨 청에 대항해 투쟁했으나 잇달아 좌절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인적이 드문 이곳에 정착, 낮에는 숨고 밤에만 움직이는 고달픈 피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시를 다 써내려간 왕부지는 바위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지러운 전세 속에서 부모 형제와 처자식들이 잇따라 세상을 등졌다. 왕부지는 천지개벽과도 같은 역사의 전환점 앞에서 놀라고 비관하고 실망했으며 의분을 금할 길이 없었다. 명 왕조의 철저한 복멸(覆滅)을 두 눈으로 지켜봤고, 가족의 파멸이라는 무한대의 고통을 경험했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고 국면을 되돌릴 힘은 없었다. 그는 조용한 곳에 은거해 칼 대신 붓으로 명 왕조 멸망의 교훈을 살펴보고 사상, 문화, 교육의 영역에서 항청(抗淸) 투쟁을 계속하려고 마음먹었다. 보따리를 얹은 돌의자에 다시 앉아 생각에 잠겼다. 명 왕조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은 정치의 부패, 정부의 무능함에 있었다. 그런 부패와 무능의 배경에는 교육의 결함이 자리잡고 있었고, 근본적으로는 권력을 멋대로 휘두른 절대권력자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국가교육의 큰 줄기는 천하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을 가진 통치자들이 장악해야지, 못된 소인배나 썩은 당파의 수중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왕부지 이후 중국에서는 절대권력을 쥔 왕조체제를 비판하는 사상가들이 속속 출현했다. 왕부지보다 10년 정도 늦게 태어난 당견(唐甄·1630~1704)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잠서(潛書)’에서 “진(秦) 이래 제왕은 모조리 다 도적들이었다”라고 쓰고 이런 주석을 달았다.
한 사람을 죽이고 옷감이며 양식을 빼앗는 자를 도적이라 한다. 그렇다면 천하 사람을 모조리 죽여 그 재물과 부를 차지하는 자를 도적이라 부르지 않고 뭐라 부를까.
도륙, 약탈, 음탕, 쾌락…
진나라 이전 하(夏)-상(商)-주(周)로 이어진 3대 국군(國君)은 어느 정도 추대의 성격이 있었다. 진 이후 황제라는 칭호가 등장하고, 황제의 강산(江山)은 싸워서, 또 대규모 약탈을 통해서 얻기에 이르렀으니 황제가 도적이 아니면 무엇인가라는 문제 제기였다. 그리고 이런 글이 덧붙었다.
천하가 평정되고 싸움은 없지만 전쟁에서 죽은 백성과 전쟁 때문에 죽은 사람이 열에 대여섯이다. 해골을 거두지도 못했고, 곡소리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고, 눈물이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 곤룡포를 입고 가마를 타고 대전에 앉아 축하의 인사를 받는다. 높은 궁궐, 넓은 정원에 처첩들은 귀해지고 자식들은 살이 찐다.
황종희(黃宗羲·1610~1695)는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에서 전제 황제는 천하에 큰 피해를 주는 존재라고 했다. 이어 강산을 빼앗는 이 ‘강도’들의 열악한 심리 상태를 다음과 같이 폭로했다.
천하를 미처 얻지 못했을 때는 천하 사람을 도륙하고 아들딸들을 찢어놓아 저 한 사람의 산업으로 삼으면서도 전혀 아무렇지 않은 듯 ‘진실로 자손을 위한 창업이다’라고 말한다. 강산을 얻고 나면 천하의 골수를 벗기고 자녀를 이별시켜 저 혼자만의 음탕과 쾌락을 받들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이것은 내 산업의 배당금이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