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호

판 페르시 없는 맨유? 非역사적이다!

질문과 비판, 하려면 똑바로 해라

  • 오항녕│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입력2013-01-21 16: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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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 대중지 ‘더선’은 1월 8일자 기사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는 로빈 판 페르시가 없었다면 프리미어리그(EPL) 중위권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했다.
    • “판 페르시를 영입하지 않았다면 21라운드까지 5경기밖에 승리할 수 없었다”고 보도했다.
    • 이 기사를 지난 1월호에 이어 ‘역사의 오류’에 근거해 비판해보자.
    판 페르시 없는 맨유? 非역사적이다!

    박지성과 로빈 판 페르시. 박지성이 맨유 경기에 보이지 않아 아쉽지만, 그는 우리에게 많은 기쁨을 주었다. 과연 판 페르시가 없었다면 맨유는 중하위권으로 떨어졌을까?

    남자들은 모이면 군대 얘기를 하고, 군대 얘기 하면 꼭 축구 얘기를 한다는 유머가 있다. 그 핀잔을 들을까 걱정되지만, 아무튼 나도 축구를 좋아한다. 하는 것, 보는 것, 모두 좋아한다. 실제로 한국 선수들이 해외로 진출하면서 활약도 두드러지고 하니까 많은 분이 관심을 보이나보다. 나 역시 그래서 EPL이니, 프리메가 리그니 하는 말을 듣는 것이리라.

    생각해보니 국가대표 경기는 꽤 본 듯한데, 막상 EPL 경기는 하이라이트 빼곤 별로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얼마 전 아스날 경기를 본 적이 있는데, 90분이 휙 지나갔다. 잠시 눈 돌릴 틈도 없이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치는’, 이런 상투적인 표현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영화 한 편을 선수들이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당시 박주영 선수가 스타팅 멤버에 들어있지 않아 아쉬웠지만, 한편으로 ‘아, 저렇게 뛰어야 한다면 주전 자리를 꿰차기가 참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새삼 맨유에서 7년을 뛴 박지성 선수가 얼마나 높은 경기력을 가졌던 것인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사실 박지성이 이적하고 난 뒤 맨유 경기는 하이라이트로도 잘 보지 않는다. 들어보니 현재 맨유는 17승1무3패(승점 52점)로 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다고 한다. 승률이 81%다. 박지성이 없으면 좀 못해야 하는데…. 아스날에서 이적해온 판 페르시는 16골을 터뜨렸고, 어시스트도 6개란다. 맨유는 2위 맨체스터 시티(승점 45점)에 승점 7점 앞서 있다.

    이순신 장군과 판 페르시

    영국의 대중지 ‘더선’은 “하지만 판 페르시 없는 맨유는 승률이 23.8%밖에 되지 않는다. 승점도 절반인 26점으로 뚝 떨어진다. 이는 11위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와 같은 승점이다”고 말한다. “판 페르시가 없었으면 맨유는 중위권이다”라는 말이다. 실제 ‘더선’지(紙)는 1월 8일자 기사에서 “맨유에 판 페르시가 없었다면 프리미어리그(EPL) 중위권에 머물렀을 것이다”라고 했다. “작년 여름 아스날에서 판 페르시를 영입하지 않았다면 21라운드까지 5경기밖에 승리할 수 없었다”고 보도했다.



    이에 영국 네티즌의 반론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멍청한 기사다. 판 페르시가 없었다면 다른 공격수가 넣었을 것” “다른 10명은 무시하는 건가?” “판 페르시가 없을 때도 맨유는 중위권에 처진 적이 없다” 등등.

    네티즌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왜 아니겠는가. 루니 같은 다른 공격수는 보릿자루이며, 나머지 선수는 뭐냐, 박지성 선수가 있었을 때인 재작년에 거둔 성과는 어떻게 설명할 거냐…등등의 의미가 담긴 항변이다.

    지난 1월호의 논의에 이어 ‘더선’지의 기사를 비판하면 이는 ‘허구 질문의 오류’에 속한다.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다면(History Rewritten)’이라고 말하는 사례다. ‘나폴레옹이 미국으로 도망쳤다면’ ‘임진왜란 때 조선이 망했다면’ 등과 같은 질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기사를 자세히 살펴보자. 첫째, 판 페르시가 ‘없었다면’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은, 우습게도 판 페르시가 경기장에서 ‘실제로 뛰는 조건’에서 뽑아낸 것이다. 판 페르시가 없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상황을 판 페르시가 ‘있는=뛰는’ 상황에서 산출해낸 결과, 즉 당초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증명이 성립할 수 없는 근거를 가지고 추론을 한 셈이다.

    판 페르시 없는 맨유? 非역사적이다!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獻陵). 태종은 과연 전제정치를 펼쳤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전제정치’가 무엇이냐는 논란부터 종식되어야 한다.



    둘째, 네티즌의 주장에서 정확하게 드러났듯이 ‘더선’의 기사는 판 페르시의 대체 선수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완전히 무시된 채 작성됐다는, 더 심각한 결점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의 해전 승리에 ‘필수불가결한’ 인물이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으며, 이순신 장군이 그 일을 했다는 사실이 곧 ‘당연히 이순신 장군이 필수불가결한 인물’이었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추앙하는 마음에서 심정적으로 그렇게 주장할 수 있어도, 그것이 경험적으로(역사적으로) 증명되는 일, 증명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의도적으로 감행할 수도 있다. 이번 전공수업 2학기 기말고사에 다음과 같은 문제를 냈다.

    ‘나에게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는 기념비가 될까, 트라우마가 될까?’

    트라우마(trauma), 정신적 외상(外傷)이라고 하는 이 현상은 사고로 인한 외상이나 정신적 충격 때문에 그와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 때 마찬가지로 불안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트라우마는 심리적 형상이 아닌 신체에 각인(刻印)된 기억의 하나다. 인간의 몸에서 제거할 수 없는 일부이지만, 그렇다고 나의 정체성에 동화(同化)될 수도 없는 어떤 것. 우리가 베트남전 같은 전쟁을 다룬 영화를 볼 때 제대 군인들이 종종 현실 적응에 실패하고 방황하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많은 경우 트라우마를 보여준다.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역사 기록 또는 기억의 왜곡과 관련해 또 다룰 기회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로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다.

    기념비냐, 트라우마냐?

    내가 기말고사에 낸 문제는 조금 괘씸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른바 ‘지방사립대’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수능 점수가 낮아 가고 싶은 대학에 못 가고, 밀려서 할 수 없이 이 학교에 다닌다고 생각하는(생각할지 모르는) 자기의식’을 대면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우리 학과의 동료 교수와 학생들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는 막연한 말이 아니라 동료 교수들의 구체적인 활동과 실천, 학생들의 열의와 태도에 기초한, 즉 데이터에 근거해 형성된 역사학자의 관점이다. 이런 나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아니 믿음에 기반을 두고 1학년 전공수업을 활용해 가장 아플지도 모르는 테스트를 감행했다. 그리고 그 테스트는 답안을 제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은 물론 나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다.

    논의를 따라온 독자라면 짐작했듯이, 또 수업을 착실하게 들은 몇몇 학생이 정확히 지적했듯이 이번 문제는 ‘역사학적인 질문’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직 발생하지 않은 ‘허구적 질문’이므로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 졸업도 하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역사 공부가 미래를 예견할 수는 없다 해도 미래에 작은 등불이 될 수 있다. 역사학자가 꼭 역사학적인 질문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학자가 역사학적인 질문이 아닌 질문을 놓고 논쟁을 할 수는 없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고전의 향연’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해 시민에게 역사와 고전에 대한 수준 높은 강좌를 제공한 적이 있다. 나는 조선시대에 대해 네 차례에 걸쳐 특강을 했고, 그중 한 꼭지를 조선의 문치주의에 할당했다. 조선의 활발한 언론 활동을 소개하는 자료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양사(兩司)가 공주의 집을 짓는 일에 대해서 끊임없이 쟁론하였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을뿐더러 내관을 시켜 집 짓는 일을 계속 감독하게 하였다. 정언 이헌(李 )이 상소하기를,

    “신은 정성이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말을 해도 신임을 받지 못하니, 관직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길 가는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오늘날 대간의 관원은 있으나 마나 한 인물들이다’라고 합니다. 신이 대간에 있으나 마나 한 인물로서 나라 사람의 비평을 많이 받고 있으니 파직하십시오.”

    하자, 상이 체직(遞職·해임)시키도록 했다. 이에 집의(執義·사헌부 종3품 관직) 신명규 등이 모두 이헌의 상소 내용을 끌어대어 피혐(避嫌)했는데, 홍문관이 처치(處置)해 모두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현종실록 10년 6월 11일)

    사안은 이렇다. 현종은 효종의 딸, 즉 자신의 여동생들인 숙안(淑安)공주와 숙명(淑明)공주의 저택을 조금 늘려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걸로 충분하다며 정책 비판을 담당하던 관청인 사헌부와 사간원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이 두 관청은 각각 감찰과 언론을 담당했는데, 합쳐서 양사라고 불렀다. 통상 정책이나 행정에 비판할 일이 생기면 두 관청이 함께 의견을 모아 비판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처치하라”

    원래 ‘경국대전’ 공전(工典)에 보면, 공주의 집은 50칸으로 제한하고 있었다. 그런데 숙안공주와 숙명공주의 집은 각각 27칸, 33칸으로 그리 크지 않았다. 아마 현종은 그것 때문에 집을 조금 늘려주려고 했는데,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렇게 심하다 싶은 경우가 조선 조정에서는 왕왕 있었다.

    아무튼 이 와중에서 확실히 반대 의견을 관철시킨 양사 관원들에 대한 여론의 비판이 쏟아졌고, 그렇게 되자 양사 관원들은 관직을 내놓고 ‘피혐’이란 것을 하였다. 피혐이란, 직역하면 ‘혐의를 피한다’이지만 여기에서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비난이 일자 관직을 내놓았다는 의미로 쓰였다. 그러자 홍문관에서 ‘처치’를 했다. 이 대목에 유의하자.

    ‘고전의 향연’에서 함께 강의를 진행하던 김용옥 선생께서 “처치? 처치가 뭐지?”라고 물었다. 이만한 일로 ‘처치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당치 않다는 표정으로. 처치는 ‘없애는 것’이 아니라 ‘조치한다’ ‘조정한다’는 뜻이지, 요즘 영화에서 가끔 나오듯이 살벌한 뜻을 담은 용어가 아니었다. 의미론적(semantic) 차이이다.

    판 페르시 없는 맨유? 非역사적이다!

    마키아벨리는 “모든 나라는 공화정이거나 왕정이다”라 했고, 한편으로 “공화정은 ‘왕정이 아닌 것’”이라고 정의했다. 명백한 이분법이자 동어반복이다.

    우리가 서양의 절대주의 시대, 즉 봉건국가 말기와 근대국가 초기에 나타나는 상비군(예를 들면 국군)과 관료제를 기반으로 한 중앙집권적 왕권의 시대를 ‘절대왕정(absolute monarchism)’이라고 한다. 봉건 귀족의 보수적 지지와 특권적 모험상인(그들은 당시 미숙했던 부르주아지인데, 제국주의의 선조들을 이렇게 부른다)의 계급적 이해 위에서 성립한 체제였다.

    나의 관찰과 기억으로는, 서양의 어떤 왕정도 ‘전제적(專制的·despotic)’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가장 ‘전제적’이었을 때조차 그들은 ‘봉건적(封建的·feudal)’이라거나 ‘절대적’이라고 학술용어로 점잖게 부른다.

    의미론적 질문의 오류

    이와는 달리, ‘전제적’이란 말은 ‘동양’과 관련되지 않고서는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전제주의(despotism)’란 말은 동양 사회의 정치적 특성, 아니 단지 정치영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동양 사회의 일반적 특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나온 ‘예견된’ 개념이라는 점이다.

    의심나면 발음해보면 된다. ‘오리엔탈 데스포티즘(oriental despotism)’, 얼마나 부드러운가. 반면에 ‘웨스턴 데스포티즘(western despotism)’이나 ‘옥시덴탈 데스포티즘(occidental despotism)’을 발음해보라. 더 상식적인 실험을 해보자. ‘전제왕권’ 하면 머리에 무엇이 연상되는가. 루이 14세인가, 태종(太宗)인가. 단연코 후자일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해보자. ‘조선 왕정은 전제적인가, 아닌가?’ 사실 ‘조선 왕권의 전제성’은 종종 검증되지도 않고, 즉 이런 질문을 거치지 않고 ‘전제적인 왕조 정부 운운’ 하며 서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질문 자체가 무색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질문조차 정확한 질문은 아니다.

    이 질문은 곧장 우리에게 ‘전제적’이란 무슨 뜻인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전제정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국가 권력을 개인이 장악하여 민의나 법률에 제약을 받지 않고 실시하는 정치’라고 정의되어 있다. 아직 조선 왕정에 대해 이 이상의 개념 규정을 가지고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종종 이러한 질문은 ‘조선시대 정치구조는 어떠했는가’에 관심이 있다기보다, ‘조선시대 정치를 뭐라고 이름 붙일까’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왕정의 전제성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이뤄진 적도 없지만, 이뤄진다 해도 ‘이 얼룩말이 검은 줄을 친 흰 동물이냐, 흰 줄을 친 검은 동물이냐?’ 이상의 생산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모든 역사적 질문은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는 의미론적 맥락에서 제기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나 기호와, 우리가 확보한 과거의 증거 사이에서 어떤 이해할 수 있는 연관성을 확보할 것인지가 역사학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개념사가 풍부하게 보여줬던 것처럼 어떤 용어가 의미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용어로 과거의 사실을 규정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불임(不姙)의 논법은 더 이상 안 된다. 의미론적 질문의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

    그럼 너는 잘했냐?

    판 페르시 없는 맨유? 非역사적이다!

    1956년 대통령선거 당시 포스터. 야당인 민주당이 ‘못살겠다 갈아보자’라고 했더니, 자유당에서 ‘갈아봤자 더 못산다’고 했다. 이런 반론은 법정에서는 물론, 역사 공부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얼마 전 나는 원치 않게 논쟁에 휘말린 적이 있다. 내가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을 출판했던 시기가 하필이면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개봉 시기와 겹쳤기 때문인데, 나는 기존 학계의 통설과 다른 해석을 내놓았던 터이므로 세인들의 궁금증과 관심을 자아내게 됐던 것이다. 나에 대한 반론도 있었는데, 그중 이런 것이 있었다.

    “광해군을 쫓아낸 이들이 내세운 명분은 지켜졌는가. 그 명분은 잘 지켜지지 않은 것 같다. 광해군 시기에 벌어진 부정을 바로잡겠다던 이들은 광해군 때 권신들이 했던 나쁜 관행을 답습했다. 예컨대 광해군 때 권신들이 백성 등에게서 뺏은 토지는 광해군을 몰아낸 세력의 손에 넘어갔고, 이를 비난하는 상시가(傷時歌)라는 노래가 시중에서 불렸으며 익명서도 나돌았다.”

    광해군대의 어지러운 정치 때문에 반정을 했다고 하지만, 반정 이후에도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는 논리다. 말하자면 ‘그놈이 그놈이다’ ‘갈아봤자 별수 없다’는 선거 구호를 조선 버전으로 바꾼 셈이다. 실제로 광해군대 세력가들이나 반정 이후 공신(功臣)들이나 마찬가지라는 사료도 있다.

    그러나 공신들의 이러한 특권 세력화가 끊임없이 견제되고 공론화됐던 것이 인조대의 정치사였다. 즉 곪아서 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서 딱지가 앉는 과정이었다고 할 것이다. 더욱이 인조 초반의 재정이나 민생 등 경제적 어려움은 광해군의 실정(失政)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있지 않다.

    나는 내 책에 가해진 ‘그놈이 그놈이었다’는 식의 반론을 ‘물타기’라고 불렀다. 물타기는 그 자체로 역시 탈정치화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4·19 혁명 이후 장면 정권이 무능했다고 해서 이승만 독재와 부패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타자에 기대어 자신의 불의를 합리화하는 데 이르면, 물타기 논리는 곧 비열한 타락의 논리이기도 하다. 부부싸움에서 이런 어법이 지속되면 파탄이 멀지 않았다.

    위와 같은 반대질문(counter-question)은 법정에서 유효할지 모르지만 역사 공부 세미나에서는 의미 없다. 법정은 목표가 정의(正義)를 얻는 것이지만, 세미나룸의 목적은 먼저 역사의 진실을 좀 더 정밀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A냐, B냐를 둘러싼 싸움은 사실 C가 진실일지 어떨지를 판단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A와 비(非)-A 사이의 차이는 단지 영(零)일 뿐이다.

    판 페르시 없는 맨유? 非역사적이다!

    제18대 대통령선거 포스터. 박근혜, 문재인 두 후보는 각각 51.6%와 48%의 표를 얻었다. 언론과 국민은 이를 보수표와 진보표로 나눈다. 이 구분은 논리적으로 올바른가?

    다시 살펴보자. 앞서 광해군에 대한 나의 서술을 비판하기 위해 인조대 공신들의 ‘난정(亂政)’을 들고 나온 물타기 논리를 소개했다. 일단, 정말 인조대 정치가 난정이었더라도 위의 비판은 나의 광해군대 서술에 대한 비판이 되지 못한다. 난 인조대가 아니라 광해군대를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질문의 결점은 더 심각한 데 있다. 비판을 받는 원래 문제의식, 즉 나의 광해군대 서술이 잘못됐다면 나의 문제의식이 딛고 있는 기초적 전제가 아마 오류일 것이다. 그러나 반대질문은 본래 질문의 전제나 오류를 반사적으로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즉, ‘갈아봤자 별수 없다’는 말은 ‘갈기 전의 상태가 엉망이다’라는 본래의 문제의식을 전제로 한 반론이라는 것이다. 결국 반대질문은 본래 진술의 결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진술의 전제를 반복하는 것이다. 결과만의 수정은 그것이 수정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든 게 아니라, 그 수정이 불완전하고 피상적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하나 더. 이런 반대질문은 결과만을 부정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전제나 증명 과정에 관심이 없다. 따라서 결론의 변경 이외에 어떤 책임도 지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질문의 오류가 종종 음모론(conspiracy theory)으로 귀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음모론이 반대질문의 오류에서보다 정부를 포함한 특정집단의 정보 독점과 설득 부재 때문에, 즉 전제나 증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생기는 사회병리 현상인 경우도 많지만.

    동어반복

    한편 정의상 자기-모순 없이는 경험적으로 모순될 수 없는 질문 설정 방식을 동어반복의 오류라고 한다. 사실 동어반복적 질문은 질문이라기보다 하나의 선언이다. 이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한 같은 사안을 두 번 주장한다는 점에서 선언적이다.

    이러한 오류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A인 것은 A이다’라는 주장이다. ‘사람들이 일터에서 내몰렸을 때, 비고용 상태가 된다.’ 우리가 평소 하는 말로 하면, ‘하나 마나 한 말’이 그것이다. 오래된 기억 하나.

    중학교 때 적십자 응급처치 훈련을 받은 적이 있다. 삐었을 때 부목을 대는 훈련, 인공호흡 훈련을 했다. 별안간 발을 삐면 왜 붓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물었다. “선생님, 발을 삐면 왜 부어요?” 그랬더니, 그분은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면서, “삐었으니까 붓지, 왜 붓겠어?”라고 대답하면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아이들도 그에 동조하듯, 또 나의 질문을 조롱하듯 소리 내어 웃었다.

    아마 그들은 내 질문을 동어반복의 질문으로 받아들였지만, 내 뜻은 삐었다는 물리적 충격이 어떤 생리적 작용 때문에 살이 붓는 결과로 나타나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지금도 난 그 이유를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내 질문에는 남들이 웃을 만한, 그러니까 동어반복의 오류라고 부를 만한 점이 분명 있었다. 삐면 붓는 게 당연하니까.

    이런 동어반복의 반대편에 모순되는 진술이 있다. 1950년 6·25전쟁을 놓고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 불가항력에 의해 일어났다’고 서술을 시작한다면, 우리는 ‘있을 수 없는 일’과 ‘불가항력’ 사이의 모순을 발견한다. 이런 정도는 애교에 속하는 수사학이라고 할 수 있고, 또 역설이 주는 감동도 있다.

    자칫 빠지기 쉬운 동어반복의 유형은 ‘A이고 B인 것은 A이다’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검은 차는 검다’ ‘모든 아기는 어리다’. 내가 좋아했던 무어(Barrington Moore Jr)는 급진적 혁명은 폭력이라는 핵심적 성격과 함께 시작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미국 남북전쟁이라는 사례를 끄집어내 근거로 제시했고, 다른 훨씬 덜 폭력적이고 심지어 비폭력적인 변동이면서 그 결과에서 보면 심대했던 다른 혁명은 무시했다. 결국 그는 “폭력적이고 급진적인 혁명적 변화는 폭력적이다”라는 말을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슬픈 사례 하나 더. 동어반복의 또 다른 사례는 ‘어떤 것은 A 아니면 비(非)-A이다’라는 진술이다. 이분법에 익숙한 학자들이 잘 쓰는 방식인데 나는 이를 ‘콩쥐-팥쥐론’이라고 부른다. 마키아벨리는 “모든 나라는 공화정이거나 왕정이다”라고 했다. 한편으로 그는 공화정을 ‘왕정이 아닌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런 유의 동어반복이 슬픈 이유? 우리 현실에서 너무도 쉽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18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끝났다. 보수와 진보를 대표한다는 두 후보가 경합했고, 언론은 보수 후보가 승리했다고 알렸다. 이 땅에서는 안타깝게 보수는 비-진보이고, 진보는 비-보수이다. 지금까지의 학습 결과, 다음 진술은 동어반복인가, 아닌가?

    ‘모든 국민은 보수 아니면 진보이다.’

    정리

    지금까지 우리가 역사 공부를 할 때 설정하는 질문, 문제의식에서 나타날 수 있는 오류를 쭉 훑어보았다. 그것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제대로 된 역사(학)적 질문은 경험적인 용어로 인수분해할 수 있게끔 쓸모가 있어야(operational) 한다. 둘째, 질문은 끝이 열려 있어야(open-ended) 한다. 그 질문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사실들을 불러올 수 있어야 한다.

    판 페르시 없는 맨유? 非역사적이다!
    오항녕

    전주대학교 인문대학 역사문화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조선시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곡서당(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국가기록원 팀장으로 기록관리도 공부했다.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기록한다는 것’(너머학교), ‘조선초기 성리학과 역사학’(고대 민연) 등 10여 편의 저·역서가 있으며, 그 외 논문 50여 편이 있다.


    셋째, 질문은 탄력적이어야 한다. 역사가는 자신의 문제의식과 가정이 근사치, 즉 앞으로 끊임없이 재정리될 수밖에 없는 근사치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역사가는 ‘모든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것’에서 출발한다. 넷째, 질문은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의 문제의식을 각각의 구성 부분으로 쪼개어 하나하나 탐구해나갈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질문은 명료하고 정확해야 한다. 독자를 위해서라기보다 연구자 자신을 위해 가능한 한 상세히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 개방성을 부정확과, 탄력성을 혼란과, 지혜를 모호함과 혼동하는 역사가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여섯째, 질문은 테스트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학의 질문은 그것이 검증될 수 있는 딱 그만큼만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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