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트롯’ 인기에 2030 연령층 새롭게 유입
재밌고 흥이 나는 음악으로 인식
아이돌 못지않은 트로트 가수들 외모에 반해 ‘입덕’
“트로트 감상하던 아버지 모습, 인간적으로 느껴져”
화려한 편곡, 파워풀한 댄스, 무대장치 “신선하고 정겹다”
노래방에선 아이돌 음악보다 트로트가 인기
대학원생 윤다은(23) 씨 얘기다. 그가 트로트를 듣기 시작한 건 올 초부터다. 트로트라는 장르를 알고 있었지만 자주 들어볼 기회가 없던 까닭에 전에는 그 매력을 몰랐다고 한다. 우연히 트로트를 듣게 돼도 다소 촌스럽다는 편견 때문에 거부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 그런데 이제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 노래 진짜 신난다’ ‘듣다 보면 내적 댄스를 추게 된다’며 자신의 플레이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트로트 곡을 추천하기 바쁘다.
내재된 ‘흥’ 깨워
‘미스터트롯’ 최종 결승전 진출자들. 첫째 줄 왼쪽부터 임영웅, 영탁, 이찬원, 김호중, 정동원, 장민호, 김희재. [TV조선 제공]
윤씨는 요즘 논문 작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집과 학교, 연구실을 오가는 길에 틈틈이 트로트를 듣는다고 했다. 기분이 울적하거나 학업 스트레스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할 때도 트로트를 들으며 기분 전환을 시도한다. 그는 “흥을 돋우는 트로트는 내게 힐링 아이템”이라고 했다.
“요즘 코로나19 탓에 집에 콕 박혀 지내잖아요. 논문 쓰느라 바쁘기도 하고요. 주말에도 연구 내용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가슴이 답답한데 트로트를 듣는 동안만큼은 그 리듬과 박자에 집중하게 되니 엔도르핀이 샘솟아요. 노래 후렴구에 등장하는 고음과 꺾기 창법이 주는 쾌감도 이루 말할 수 없고요. 논문 작성과 진로 고민으로 쌓인 스트레스가 말끔히 날아갈 정도라니까요.”
윤씨처럼 일부러 트로트를 찾아 듣지 않더라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회식, 모임, 장기자랑, 체육대회 같은 곳에서 트로트가 선사하는 흥에 취해 몸을 들썩여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짜짜라 짜라짜라짜짜짜, 무조건 무조건이야~’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은 아무나 하나~’ ‘어머나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 여자의 마음은 갈대랍니다~’ 멜로디를 떠올려보자. 나도 모르게 노랫말이 입속에서 맴돌고 심장이 요동치는가. 동시에 몸이 자동 반응하며 뭉친 근육을 뚫고 신명 나게 어깨를 들썩이고 싶은 욕구가 솟구치는 게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당신도 이미 트로트 마니아다.
트로트 열풍을 이끈 일등공신은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터트롯’이다. ‘미스터트롯’은 3월 12일 결승전 시청률 35.7%를 기록하며 종합편성채널의 새 역사를 썼다. 1등에 해당하는 진(眞) 선발 문자 투표에 대한민국 인구의 15%인 773만 명이 참여해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직장인 백혜령(31) 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미스터트롯’ 방영 당시 ‘모든 대화는 미스터트롯으로 시작해 미스터트롯으로 끝난다’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미스터트롯’ 얘기만 했다. 나도 주변에서 사람들이 하도 얘기하기에 몇 번 챙겨 보다 푹 빠지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회사에서 동료들과 삼삼오오 모이면 미스터트롯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고 한다.
“나 20대인데 요즘 트로트 듣는다”
재밌는 건 트로트 열풍이 20, 30대 밀레니얼 세대를 주축으로 달아오르고 있다는 사실. ‘미스터트롯’ 서울 콘서트의 경우 예매자의 43.4%가 20대여서 눈길을 끌었다. 지난해 인기를 끈 여성 트로트가수 대상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트롯’ 콘서트의 20대 예매자 비율이 23.4%인 것과 비교하면 약 두 배 수준이다. 일부 20대가 장·노년층을 위해 대신 예매했을 가능성을 감안해도 트로트 음악계에 젊은 팬이 많아진 건 분명해 보인다.톱 아이돌 가수의 인기 척도로 통하는 지하철 스크린 광고판에 최근 트로트 가수를 응원하는 대형 사진·영상 광고가 자주 걸리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강력한 팬덤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아이돌 팬덤 문화를 이끄는 젊은 층이 트로트로 눈을 돌렸다는 얘기도 나온다. 실제 각종 커뮤니티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나 20대인데, 요즘 내 동년배들 다 트로트 듣는다”라는 유머를 적은 게시물이 많이 올라온다.
대학생 황도훈(21) 씨는 “신예 트로트 팬덤 커뮤니티에는 ‘오늘부터 트로트 가수 ◯◯◯를 덕질(좋아하는 연예인에 심취하는 일)하려 한다’ ‘음악 방송 응원하러 가서 노래 따라 부르려면 이제부터 트로트를 많이 들어야겠다’ 같은 내용의 게시글이 많이 올라온다. 아이돌 팬덤에서 넘어온 이도 꽤 있는 듯하다”고 밝혔다. “커뮤니티에 24시간 스트리밍, 응원 구호, 도시락 선물, 굿즈 제작 등 아이돌 팬덤 특유의 총공(총공격의 줄임말) 문화가 자리 잡게 된 것도 이들의 유입 덕분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여유로움과 능글맞은 표정으로 좌중 압도
여유로움과 능글맞은 표정으로 좌중을 압도해 청년 세대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신예 트로트 가수 이찬원. [TV조선 제공]
“트로트 가수는 나이 지긋한 사람일 거라는 편견이 있었는데, 방송을 본 뒤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어요. 아이돌 못지않은 훈훈한 외모에 어떤 옷을 걸쳐도 멋지게 소화하는 패션 센스를 가진 젊은 트로트 가수가 많아 깜짝 놀랐거든요. 귀여운 외모와 달리 노래를 ‘구수하게’ 잘 부르고 예능감까지 탁월하니 단숨에 반했죠. 여유로움과 능글맞은 표정으로 좌중을 압도할 때의 매력이 엄청나요. 요즘 아이돌한테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이랄까요.”
코로나19로 문밖을 나서기 힘든 시기, 트로트는 TV 앞으로 가족을 불러 모으고 부모와 자녀 세대가 소통 및 화합하게 하는 구실도 한다. 올해 스무 살이 된 강수아 씨는 “‘미스터트롯’ 투표를 하면서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투표 때와는 다른 세대 통합의 즐거움을 경험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은 보통 최종 우승자를 결정할 때 ‘국민투표’ 결과를 반영한다. ‘미스터트롯’도 마찬가지였다.
“트로트 감상하는 아버지, 인간적으로 느껴져”
4월 4일 MBC 음악 방송 ‘쇼! 음악중심’에서 신곡 ‘이제 나를 믿어요’를 첫 공개한 ‘미스터트롯’ 우승자 임영웅. [MBC 제공]
아버지가 틀어놓은 ‘미스터트롯’을 옆에서 구경하다 트로트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대학생 한소라(24) 씨도 “향수에 젖은 채 트로트를 감상하시던 아버지 모습이 인간적으로 느껴졌다”며 웃었다.
“관심사가 서로 다르다 보니 20대 자녀와 50대 부모님이 소통하는 게 결코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 경연 기간 만큼은 부모님과 음악을 소재로 대화하면서 진정한 소통을 이뤘어요.”
가수 이찬원을 응원하는 유튜브 팬 계정.
일부 젊은 트로트팬 가운데는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일부러 ‘금례’ ‘영자’ 등 예스러운 이름을 사용하면서 어른인 양 활동하는 이도 있다. 네이버 이찬원 팬 카페 ‘찬원마을’ 부매니저 A씨는 유튜브에서 ‘전금례’라는 이름으로 이찬원 유튜브 팬 계정을 운영한다. 그는 30대 여성 직장인으로 알려졌다.
노래방에선 아이돌 음악보다 트로트가 인기
유명 유튜버가 진행하는 길거리 노래방 무대에서 트로트를 부르는 20대 참가자.
“트로트의 특징은 구수하고 정감 가는 멜로디와 향락적인 가사라고 생각했는데 최근엔 파워풀한 댄스를 접목하는 등 색다른 시도를 하는 곡이 많아졌어요. 임영웅 신곡 ‘이제 나만 믿어요’는 발라드에 트로트를 가미했더라고요. 어디서 들어본 듯한 멜로디지만 트로트 특유의 ‘뽕짝’ 느낌이 덜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트로트를 듣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직접 부르는 젊은이도 많다. 젊은 층이 많이 찾는 코인 노래방 애창곡 상위권 목록에는 ‘안동역에서’ ‘한 잔해’ ‘오늘 밤에’ ‘초혼’ ‘미운 사랑’ ‘아모르 파티’ ‘사랑의 배터리’ 같은 트로트가 다수 올라 있다. 노래방 업계에 따르면 2010년대부터 젊은 층 사이에서 트로트를 즐겨 부르는 분위기가 생겼다. 최근에는 트로트 예능 프로그램 등의 영향으로 젊은 층의 트로트 선곡이 더욱 늘었다.
노래반주기 제작사인 금영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아이돌 음악이 듣기엔 좋을지 몰라도 노래방에서 부르기는 참 어렵다. 멜로디 진행이 복잡하고 박자가 잘게 쪼개져 있기 때문이다. 반면 트로트는 멜로디가 단조롭고 기승전결 곡 구조가 뚜렷해 부르기 쉽다. 또 한두 곡만 불러도 분위기가 확 살아나 젊은 사람들도 즐겨 부르는 편”이라고 밝혔다.
대중 앞에서 노래 실력을 뽐내는 노래경연대회에서도 트로트를 부르는 젊은 층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구독자 240만 명을 보유한 한 유튜버가 진행한 길거리 노래방에 출연한 적 있는 이아연(21·가명) 씨는 “20대가 심사위원과 관객에게 노래 실력을 뽐내면서 존재감까지 각인시키기에 트로트만큼 좋은 게 없다”고 했다. 그는 “아이돌 못지않은 외모와 넘치는 끼를 가진 트로트 연습생도 있다고 들었다”고 밝혔다.
최근엔 트로트를 배우려 보컬 아카데미로 향하는 젊은 층도 늘고 있다. 슈퍼보컬아카데미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노래방에서 트로트를 좀 더 잘 부르고 싶다’며 레슨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생겼다”며 “중장년보다 수는 적지만 10~30대 수강생도 있다”고 했다. 그는 “트로트는 리듬과 박자, 발성을 두루두루 연습하기에 좋은 장르”라며 “중장년 세대의 향수를 자극하고 젊은이에겐 신선한 매력을 선사해 꾸준히 인기를 끄는 것 같다”고 했다.
찻잔 속 태풍에 그칠 수도
지난해 개그맨 유재석이 신인 트로트 가수 ‘유산슬’로 변신해 출연한 MBC 예능프로그램 ‘놀면 뭐하니’는 밀레니얼 세대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다. [MBC 제공]
이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시선도 있다. 차우진 음악평론가의 말이다.
“뉴트로는 과거 시대를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세대가 과거 콘텐츠를 재해석하는 것에 기반을 둡니다. 그런데 현재 밀레니얼 세대가 호응하는 트로트는 1970~80년대 음악이 아니라 1990년대 이후 나온 새로운 트로트예요. 밀레니얼 세대의 트로트 열풍을 뉴트로 현상이라고 보기는 애매하죠.”
전문가들에 따르면 과거에도 젊은 층이 트로트를 빈번하게 소비했다. 2003년 ‘어머나’를 발매한 장윤정이 인기를 끌며 트로트계 ‘잔 다르크’로 떠올랐고, 박현빈의 ‘곤드레만드레’(2006), 홍진영의 ‘사랑의 배터리’(2009)가 계보를 이어가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당시 이들은 20대 나이를 무기로 내세우며 세미트로트라는 장르를 개척했고, 그 덕분에 트로트가 마을 잔치나 지역 행사장뿐 아니라 대학가 축제에서도 들리기 시작했다.
차 음악평론가는 “3세대 트로트 가수로 불리는 장윤정, 박현빈, 홍진영 등의 꾸준한 활동 덕분에 밀레니얼 세대가 학창 시절부터 트로트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졌다. 거기에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의 인기가 결합하면서 트로트 열풍이 분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트로트가 예능에 녹아든 것도 최근의 인기에 한몫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작가 음악평론가는 “유재석이 신인 트로트 가수 ‘유산슬’로 변신해 출연한 MBC 예능프로그램 ‘놀면 뭐하니’를 통해 밀레니얼 세대가 트로트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갖게 됐다. 유재석의 친숙한 이미지와 따라 부르기 쉬운 노래가 인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유재석이 유산슬이라는 예명으로 발매한 트로트 ‘합정역 5번 출구’는 여러 세대에서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젊은 층의 트로트 열풍은 계속 이어질까. 김 음악평론가는 “젊은 층은 트로트 자체보다 특정 가수가 좋아 트로트에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며 “이들을 계속 유혹할 만한 콘텐츠가 없다면 찻잔 속 태풍에 그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