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에 다시 나온 평전, 누구나 쉽게 읽기 좋아
23세에 목숨 건 폭탄 투척, 대한민국 독립에 공헌
명노승 “선각자적 농민운동가이자 뛰어난 문인이었다”
4월 29일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90주년 기념식의 다양한 표정. [홍태식 기자]
이 거사는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을 만나 한국의 독립운동을 논의하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장 총통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총리와 함께 서명해 1943년 12월 1일 발표한 카이로선언에 ‘코리아의 자유와 독립’을 다짐하는 문구가 담기는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활로를 만든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올해 90주년을 맞이했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회장 명노승, 이하 기념사업회)는 이를 기념해 4월 29일 그의 일생을 조명한 ‘매헌 윤봉길 의사 평전’(김학준 지음·동아일보사)을 출간하고, 서울 서초구 양재동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광장에서 ‘윤봉길 의사 상하이의거 9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이번 기념식은 기념사업회가 주관하고, 매헌윤봉길의사 의거 9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위원장 이종찬)가 주최했다. 식전 윤봉길 의사의 삶을 조명한 시극과 영상을 선보이고 나서 식이 거행됐다. 오전 10시 시작된 기념식에는 김부겸 국무총리를 비롯해 황기철 국가보훈처장과 박희태·김형오 전 국회의장, 황교안 전 국무총리,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김영배·서정숙·김승수·지성호 국회의원, 윤주경 의원·윤주웅 장손자 등 유족, 정창식 함장을 비롯한 윤봉길함 승조원, 선열단체장과 회원, 시민에 이르기까지 1000여 명이 참석했다.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윤석열 당시 대통령 당선인은 화환으로 대신했다.
文과 尹도 화환으로 참석
이종찬 9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장, 명노승 기념사업회장, 김부겸 국무총리, 이성섭 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정창식 윤봉길함장, 김학준 매헌연구원장 등이 연사로 나서서 식의 진행을 도왔다. 매헌서포터즈 대학생의 구국청년 선포식과 테너 임정화·소프라노 김샤론의 ‘윤봉길의사’ 노래와 축가, 또 윤봉길 노래를 합창한 역사청소년합창단의 무대는 딱딱하고 경건한 무대에 생기를 더해 큰 박수를 받았다.같은 날 매헌기념관 주차장 일대에서는 ‘상하이의거 90주년 기념 나라사랑 체험한마당’이라는 부대 행사가 열렸다. 단체로 사전 예약한 학생들이 대거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한 여학생은 “기념식을 지켜보며 윤봉길 의사가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새삼 알게 됐다”며 “윤 의사가 불과 20대 초반 나이에 거사를 실행했다는 것이 정말 놀랍다”고 말했다.
기념식은 황길수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의 만세삼창으로 끝났다. 황 명예회장은 “윤 의사의 의거가 대한민국의 독립을 이끌어냈다”며 “이번에 낸 평전이 널리 읽혀 윤 의사의 위대한 삶을 많은 사람이 되새기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부출가생불환’ 남기고 떠나
명노승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장은 윤봉길 의사가 19세에 직접 교재를 만들어 농민들을 가르친 점을 높이 평가했다. [지호영 기자]
저자는 1992년 펴낸 초판 도서를 바탕으로 하되, 한자가 많던 초판본의 어려운 글과 말 대신 한글로 쉽게 풀어 대중이 더욱 가깝게 읽고 이해할 수 있게 정리했다. 또한 지난 30년간 더해진 윤봉길 의사에 대한 연구, 새로 발견된 자료를 보태 집필했다.
평전에 따르면 장 총통이 윤 의사의 의거를 접하고 한 말에 대해 학계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들은 “중국군 30만 대군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고려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말했다고 하고, 다른 어떤 이들은 “중국의 100만 군인과 4억 국민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칭송했다고 주장. 어느 쪽이 맞든 윤 의사의 의거가 장 총통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준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윤 의사의 위대한 삶을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서 온 명노승 기념사업회장을 5월 3일 그의 집무실에서 만나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에 평전을 새로 냈다. 어떤 의미가 있나.
“윤 의사의 상하이 의거 90주년을 기념하는 평전이다. 60주년에 처음 평전을 냈는데 30년이 지나니 새로운 근거에 따라 수정할 것이 많이 생겼다. 무엇보다 그때는 한자가 많고 꽤 두꺼워 읽기 부담스러웠다. 이번에 낸 평전은 양도 많이 줄이고 새로 밝혀진 내용을 보강했으며 한자를 거의 쓰지 않았다. 일반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새로 쓰는 수준에서 다시 만들었다.”
나라를 구한 영웅이 많지만 윤 의사는 특별하다는 평을 받는다. 이유가 뭘까.
“윤 의사는 23세에 집을 떠날 때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을 남기고 갔다. 사나이가 뜻을 세워 집을 나가니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의미다. 그리고 칭다오에서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해 이 길을 택했다’는 내용이다. 그런 몇 가지 정황을 살펴보면 죽음을 각오하고 집을 나간 것임을 알 수 있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한 거다. 23세 때 이미 자기 목숨을 버릴 각오로 거사를 일으킨 윤 의사는 위대한 영웅이다. 앞으로도 우리가 영웅으로 모셔야 할 분이다.”
윤 의사가 우리나라 독립에 미친 영향이 크다고 들었다.
“그 일을 계기로 장제스의 마음을 움직여 장제스가 우리 임시정부를 도왔고, 카이로선언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을 설득해 유독 우리나라만 독립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담기도록 했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그 내용을 넣자고) 주장했다는 설도 있다. 근데 그 사정은 이승만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가장 잘 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서 루스벨트를 움직이려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분이 책을 통해 ‘카이로선언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보장받은 건 윤봉길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밝혔다. 윤 의사가 한국 독립에 공이 있다는 얘기다.”
19세 때부터 직접 만든 교재로 농민 가르쳐
평전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고달픈 일제강점기에 자신의 목숨을 걸 정도의 애국심을 발휘한 윤봉길 의사의 일생을 평전을 통해 접하다 보면 나라를 한 번 더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요즘 젊은이들이 나라를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한 번 더 주마가편(走馬加鞭)이 되길 바란다. 우리나라 독립이 윤 의사 한 사람에 의해 이뤄진 건 아니다. 숱하게 많은 독립운동가가 헌신하시고, 3·1운동과 국민의 저항 정신 등 많은 이의 노력이 이뤄낸 결과다.”
윤 의사가 한 일 가운데 인상적인 것을 떠올린다면.
“윤봉길 의사는 독특하게 선각자적 면이 있었다. 19세부터 농민을 상대로 야학을 열었다. 윤 의사의 생가를 2002년에 처음 가봤는데 ‘농민농본’이라는 야학 교재를 직접 만들어 농민을 가르쳤더라. 그 당시의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다. 내가 그 나이에 뭘했나 돌아보니 입시 공부하기에 바빴다. 근데 윤 의사는 배움이 차고 넘쳐 농민을 무지에서 구제하고자 직접 만든 교재로 농민들에게 강의한 것이다. 그렇게 19세부터 23세까지 야학을 운영하고 구국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뿐만이 아니다. 윤 의사는 16세 때 오치서숙의 동접·노소 유생들과 함께 참가한 중추절 시회에서 독장원을 차지했을 정도로 상당한 수준의 문인이었다. 스승이 이조시대 최고 선비인 성삼문 동생의 후손인 성주록 선생이었는데 그분이 19세가 된 윤봉길에게 더 가르칠 게 없다며 매헌이라는 호를 지어주셨다. 성삼문의 호가 매죽헌이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기개를 가르친 것이다. 그래서인지 윤봉길 의사는 선비의 기개와 절개를 갖췄다. 또한 독립운동가 중 결점이 없는 사람이다. 거사에 실패한 적이 없다. 철두철미하고 완벽했다.”
윤 의사를 김구 선생의 행동대원으로 아는 이도 있다.
“윤봉길 의사가 김구 선생을 만났고 김구 선생이 폭탄을 구해 준 건 맞다. 하지만 김구 선생이 시켜서 폭탄 던진 게 아니다. 윤 의사는 폭탄을 구할 수 없으니까 김구 선생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고 김구 선생의 영향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늘 김구 선생과 상의해 거사를 했다. 그리고 아무리 김구 선생이 훌륭해도 산 사람을 죽을 자리에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죽을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의롭게 죽으라고 하면 목숨을 던지겠나. 그건 형법상 자살방조죄다. 윤 의사는 이미 죽을 각오가 돼 있었기에 자살 방조가 성립되지 않는다.”
통일에 대한 기대가 있나.
“간절히 바란다. 윤봉길 의사는 야학을 운영하며 한국 지도도 가르쳤다. 그 지도에는 함경남도와 함경북도가 다 표시돼 있다. 일본인들이 당시 일본해라 하던 곳을 동해라고 표기해 가르쳤다. 우리 민족이 하나로 통일되길 바란 것이다.”
지금은 어떤 시대정신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빨리 통일해서 남북이 다 잘사는 게 시대정신이다. 남북이 이질적이라 통일이 돼도 융화가 힘들지 않을까 하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는데 대한민국 독립보다는 쉽지 않겠나. 어렵지만 같은 말 쓰고 얼굴색도 같은 하나의 민족 아닌가.”
기념사업회는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의거 90주년을 기념해 서예전시회, 탄신음악회, 특별전시회, 시낭송대회, 전국서예휘호대회, 국제학술회의 등 다채로운 행사를 매헌기념관에서 펼칠 예정이다. 6월 7일에는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하이의거 90주년 기념음악회가 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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