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는 미국에서, 생산은 한국에서
호암이 골프화 신고 달려온 이유
마약하는 사람들로 오해받기도
인텔 이기다니, 상상조차 못했다
이임성 박사는 일찍이 미국 유학을 떠나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GE와 IBM에서 일하다 일본 샤프의 고문을 맡았다. 이 회사의 사사키 박사(부사장)는 기술 도입에 도움을 청해온 강진구 회장과 만난 자리에서 이 박사를 바로 연결해줬다. 삼성 직원들을 위한 기술 연수도 해주겠다고 했다. 강 회장은 회고록에서 당시 느꼈던 고마움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사사키 부사장은 ‘가전용 IC(집적회로) 사업을 하다가 갑자기 초대규모집적회로(VLSI) 사업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기억소자는 아니지만 계산기에 들어가는 IC인 마이콤(Micom, Micro computer Chip)을 샤프 사에서 생산하고 있으니 삼성 직원들을 보내면 기술 연수를 시켜드리겠다’고 했다. 당시 우리 상황은 자전거 타는 걸 겨우 배운 사람이 하늘을 날아야 하는 도전에 직면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앞이 안 보이는 참으로 막막한 상황에서 사사키 박사의 조언과 도움은 가뭄 끝 단비처럼 고마운 것이었다.”
1982년 기공식을 가진 경기 부천반도체 연구소. 호암은 이듬해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진출한다는 폭탄선언을 한다. [동아DB]
총탄만 없는 혈투
삼성 반도체의 출발이 일본 샤프와의 협력 관계에서 비롯했다는 점은 한일 산업사(史)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물론 삼성이 세계 최고가 될 때까지 한일 간에 반도체를 둘러싼 전쟁은 총탄만 없는 혈투나 다름없었다. 일본 업체들은 삼성이 첨단 반도체 개발에 있어 기적이라고 할 만한 성취를 이룰 때마다 파격적인 덤핑 공세를 펴 삼성을 괴롭혔다. 오죽했으면 삼성은 새로운 기술개발을 할 때마다 일본의 견제가 두려워 발표하지 않으려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삼성이 처음으로 반도체를 시작했을 때 샤프 사사키 박사의 조언은 거의 결정적이었다. 호암도 ‘호암자전’을 통해 샤프에 대한 고마움을 언급하고 있다.
“일본 반도체 업계는 한국에 대한 초대규모 집적회로(VLSI) 기술 제공에 불응했지만, 샤프 사의 각별한 호의로 그 기술을 도입할 수 있었다. 일본으로서는 외국에 대하여 반도체 기술을 처음으로 제공하는 것이었고, 한국으로서는 일본으로부터 반도체 기술을 처음으로 도입하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 업계 중에서는 샤프 사를 국익을 해치는 국적(國賊)이라고 혹평하는 업자도 있었다. 그러다가 불과 3개월도 안 되어 히타치가 IBM 기술을 훔치는 스파이 사건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샤프 사를 선견지명이 있는 훌륭한 회사라고 격찬했다.”
호암은 1983년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최강자 일본을 따라잡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그는 ‘첨단 반도체를 일본보다 먼저 개발하자’는 비전을 품었다. 이 비전은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파나소닉, 도시바, 샤프 등이 삼성에 밀려 반도체 사업에서 철수하거나 관련 사업을 대만 반도체 업체에 매각하면서 결국 현실이 됐다. 삼성에 반도체 기술을 전수한 샤프는 2016년 대만 홍하이에 매각됐다.
진대제의 기억
호암은 독자적 반도체 기술 개발을 통해 일본을 이기자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것은 현실화됐다. 1983년 삼성이 낸 신문 광고. [동아DB]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진대제 전 삼성전자 사장이 쓴 회고록 ‘열정을 경영하라’에 나오는 대목이다. 진 전 사장은 스탠퍼드대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IBM에서 일하다 1985년 삼성에 영입됐다. 기흥반도체연구소에서 4MD램과 16MD램 개발책임자로 일하던 그는 1987년 가을 어느 날 예기치 않게 호암과 만난다.
한국으로 돌아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9월 말의 어느 날 아침, 서울에서 부리나케 연락이 왔다. 이병철 회장이 차를 타고 지금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으니 남쪽에 있는 임원들은 전부 대기하라는 거였다. 어디로 간다는 얘기도 없이 무조건 남쪽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하고 평상시처럼 일을 했다. 당시 이병철 회장은 폐암으로 몸이 많이 편찮아서 사업현장을 찾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저 안양 골프장이나 용인 자연농원에 바람을 씌러 가끔 들르는 정도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자연농원에 가나 보다 했다. 그런데 다급한 목소리로 속보가 계속 날아들었다.
“영동고속도로 통과! 그 아래 임원들은 자리 뜨지 말고 대기!”
그 아래라면 수원 공장이든가, 아니면 기흥종합연구소(현재의 기술원)든가, 그것도 아니면 반도체였다. 조금 있자니 또 긴급연락이 왔다.
“어? 수원톨게이트 통과!”
그렇다면 종합연구소 아니면 반도체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종합연구소와 반도체 공장 임원들은 모두 모일 준비를 하라는 연락이 왔다.
“기흥 톨게이트에서 나오셨다. 어? 종합연구소 정문 통과…. 앗! 반도체로 가신다, 즉시 회장실로 집합하시오!”
사무실이 있었던 연구소 3층에서 부리나케 뛰어 내려가는 데 벌써 회장이 탄 벤츠가 착 지나갔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앞에다 꾸벅 인사를 하고 회장실이 있는 빌딩 앞으로 달려갔다.
이병철 회장이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우리 사무동 앞에는 층계가 세 개 있었는데 이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회장이 그 층계를 다 오르지 못하고 중간에 넘어진 것이었다. 발목이 까져서 피까지 났다.
회장은 폐암 말기여서 그랬는지 기동이 많이 불편한 듯했다. 회장실에서 수행원들이 회장의 구두를 바꿔 신겨주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깥에서 신는 구두와 실내에서 신는 구두가 따로 있나?
많은 임원들이 출장을 가고 없어서 당시 회장실에 집합한 사람은 이윤우 공장장(당시 전무), 연구소장, 나 정도였다.
한참 지난 후, 서울에서 내려온 비서실장이 헐레벌떡 따라 들어와 배석했다. 회장이 평소와는 달리 행선지를 밝히지 않고 갑자기 내려오는 바람에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길이었다.
회장은 약간 거칠게 숨을 들이 쉬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오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회장이 입을 열며 조용히 말했다. 차분했지만 노기가 섞인 목소리였다
“봤제?”
사람들이 움찔했다. 우리는 대번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만 아무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한참 있다가 이윤우 공장장이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예 봤습니다.”
그날 아침 조간에 난 신문기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긴 기사를 보고 우리도 깜짝 놀랐었다.
‘우리나라 반도체는 전부 다 일본 것을 베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가 다 사실은 아니었지만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었다. 삼성을 비롯한 한국 반도체 업체들은 후발주자로서 일본 것을 많이 참고하고 있었다. 선진업체들을 따라가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우리가 일본 것을 베꼈다는 게 사실인가? 내가 기껏 남의 거 베끼려고 평생을 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줄 아나? 영국은 증기기관 하나를 개발해서 세계를 제패했다! 우리 반도체도 그런 역할을 하라고 시작한 것 아닌가?”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사업을 시작한 취지와 목표는 영국처럼 한국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기술로 세계의 정상에 올라서는 것이었다. 모두 찍소리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데 이 공장장이 급히 대답했다.
“근데 그게 삼성더러 하는 소리가 아니고 다론 회사들이 하도 베끼니까 하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회장의 분노는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다 이 공장장과 나는 독창적인 제품을 만들어 다시는 그런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반드시 16M D램을 독자개발해서 모방을 했다는 얘기가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정도의 비장감마저 섞여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고간 뒤에야 회장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는지 내게 이렇게 물었다.
“진군, 그래 개발팀은 만들었나?”
“예, 조그마하게 만들어 시작을 했습니다.”
“그래? 여러 인재를 모아오라고.”
그러고 나서 회장은 그 시점에 착공한 3공장 용수나 전기가 제대로 확보되었는지, 시장상황과 기술개발 등에 대해 여러 가지를 일일이 메모까지 하면서 점검했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이병철 회장이 기흥 회장실에 도착하자마자 갈아 신은 신발은 골프화였다. 안양 골프장에 하루 쉬러 갔다가 아침신문을 보고 골프화를 신은 채 그대로 달려온 것이었다. 비서실장을 대동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생각해 보니 그때 입었던 옷도 골프복장 비슷한 것이었다,
그때가 회장과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로부터 약 한 달여가 지난 11월에 타계했기 때문이다. “우리 기술로 독자 개발한 반도체로 세계를 제패하라”는 말씀이 사실상 마지막 유언이었던 셈이다.
지금 계시는 곳에서 얼마 받으십니까?
다시 강진구 회장이 사사키 박사와 만났던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강 회장은 그와의 면담내용을 호암에게 즉시 보고하고 호암의 지시에 따라 이임성 박사를 만난다. 이 박사는 강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미국에 있는 한국인 과학자들을 주목하라”면서 이렇게 조언했다.“미국으로 유학 가서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인들 중에는 귀국을 선택하려다 막상 한국에 일할 곳이 없다보니 그대로 눌러 앉게 된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들 기회가 되면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애국심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고급 두뇌들을 모아 미국에 연구소를 만들고 한국에 공장을 세워 미국 박사들이 설계한 것을 보내 한국에서 만들면 어떨까요.”
한마디로 설계는 미국에서, 생산은 한국에서 해보자는 이원화 전략이다. 그의 제안은 현실성이 있어 보였다. 강 회장은 바로 그에게 스카우트를 제안한다. 강 회장의 회고다.
“마음이 다급했던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박사님이 직접 삼성에 와서 도와줄 의향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오신다면 삼성반도체통신 고문으로 우선 모시겠습니다.’ ‘좋습니다.’ ‘지금 계시는 곳에서 보수를 얼마나 받으십니까?’ ‘연봉 20만 달러로 계약했습니다.’ ‘그보다 후하게 드리겠습니다. 당장에 재미 한인 과학자들을 모아 주십시오.’”
1983년 초여름의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박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같이 일하겠다는 한국인 메모리 개발 전문 기술자들을 모았다는 거였다. 이상준, 이일복, 이종길, 박용의 박사가 모였다. 이들은 인텔, 허니웰, 자일록, 내셔널 세미컨덕터, 웨스턴 디지털 등 미국 최첨단 반도체 회사와 연구소에서 일하던 인재들이다.
호암은 미국 연구소의 청사진이 얼추 그려지자 서울의 정예 요원 6명을 추려 미국으로 보낸 뒤 본격적인 사업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이때 개발실장 자격으로 출장 팀에 포함돼 간 사람이 이윤우 전 부회장이다. 그를 직접 만나 당시 상황을 들어봤다.
이윤우 前 부회장과의 대화
호암은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면서 미국에 있는 한국인 과학자들에 주목했다. 한국에서 사람을 구할 수 없던 상황에서 미국에 체류하던 고급 두뇌를 모아 연구소를 만들고, 한국에 공장을 세워 미국 박사들이 설계한 것을 생산하는 이원화 전략이었다. 결과적으로 매우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사진은 1980년 미국 실리콘밸리에 세워진 삼성반도체연구소 전경. [삼성전자 제공]
서울 강남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 들어서면 이건희 회장 얼굴을 철제로 만든 조각 작품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삼성의 초기 반도체 역사와 이건희 회장의 업적에 대한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했지만 그는 먼저 전제할 것이 있다면서 이렇게 말머리를 꺼냈다.
“이건희 회장은 단지 반도체 사업을 성공시켰다 정도로 의미 부여를 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세 가지 측면에서 고인의 업적을 봅니다. ①게임의 룰을 완전히 바꿨다. 즉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판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게임 체인저’였다고 생각합니다. ②단순한 ‘혁신’ 정도가 아니라 트랜스포메이션, 다시 말해 굼벵이를 나비로 만들 정도로 이전에는 없던 형태의 진화와 혁신을 이룬 기업인이었다는 겁니다. ③내수 시장만 바라보던 전 산업의 지형도를 명실상부 글로벌 스탠더드로 확장한 뒤 우리도 세계 1등이 될 수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줬습니다.
저는 인텔 창업자 앤디 그로브를 책으로 공부한 사람입니다. 삼성이 인텔과 ‘맞짱’을 뜨고 더 나아가 인텔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반도체 업계에서 인텔은 거의 신(神)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건희 회장 덕분에 아, 인텔도 신이 아니구나, 우리도 신이 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을 갖게 됐습니다. 지금 한국의 유니콘 기업들도 그런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닐까요. 이건희 회장 전에는 국내 시장만 보고 싸우는 거였지만 이후는 기업인들의 시선이 글로벌 컴퍼니가 되자는 쪽으로 확장되었으니까요.
호암께서 ‘반도체는 산업의 쌀’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는데 이 과정에서 이건희 회장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83년 역사적인 ‘도쿄 선언’을 하면서 그룹의 존망을 걸고 사업을 시작했지만 호암은 수천억 적자 나는 것만 보고 돌아가셨습니다. 이걸 키운 분이 바로 이 회장이지요.”
그와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미국에서 한국인 인재를 끌어 모으고 연구소를 만드는 일부터 관여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상황을 좀 듣고 싶습니다.
“반도체란 게 결국 기술력 싸움이니까 최고 중심지인 실리콘밸리에서 가져와야겠다는 게 호암의 결심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발 거점을 만들고 박사급 연구원들을 채용해서 나중에 이들을 한국으로 옮기겠다는 구상이었던 거죠. 매우 현명하고 현실적 아이디어였다고 봅니다.
저는 선대회장 오더에 따라 실리콘밸리에 개발 거점 마련을 위한 초기 세팅을 하러 간 거였죠. 호암은 ‘제일 중요한 게 사람이다, 전문가를 찾아 모시라’는 특명을 내렸습니다. 우선 이임성 박사를 축으로 다른 사람들을 끌어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실리콘 밸리 서니베일에 머물면서 현지 조사에 들어갔는데 두 팀으로 나눠 한 팀은 정보 용역회사와 대학 연구소 등을 다니며 최신 기술 자료를 입수했고 다른 한 팀은 이 박사 등과 함께 사업계획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자신감이 떨어지고 막막함만 들었습니다.”
왜죠?
“D램 기술이란 게 생각보다 훨씬 첨단이었습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했던 생각이 얼마나 낡고 단순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자 덜컥 겁부터 났습니다. 국내에서 만들어간 보고서는 휴지조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사무실에 미국 경찰이 들이 닥쳤던 일도 있었다면서요.
“낮에는 현지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밤에는 서울로 보고하느라 거의 쉬지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제발 잠 좀 잤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라면물이 끓는 동안 엎드려 쪽잠을 잤던 기억도 있습니다. 너무나 힘이 들어 지옥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미국 경찰이 들이닥쳐 발칵 뒤집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24시간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으니까 주민들이 무슨 마약 제조하는 사람들 같다고 신고한 거죠. 당시 실리콘밸리 타블로이드판 지역신문에 ‘옐로우 인베이더(Yellow invader 황색 침입자)’라는 기사가 났을 정도였어요. 물론 모두 무혐의로 풀려나왔지만요.
어떻든 우리들은 앞으로 반도체 시장 상황은 어떻게 될 것인지, 개발은 어떻게 할 것인지, 인력 채용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등을 논의했죠. 마이크론, 샤프 사와 기술계약도 맺고요. 그러다 현지에서 이사 발령을 받게 됐습니다.”
마침내 미국 팀은 ‘1983년 가을부터 한국에 VLSI 양산 공장 건설에 착수하며 미국에는 연구개발센터와 시제품 생산설비를 갖춘 현지법인을 설립한다’는 계획을 세워 호암에게 보고했고 호암은 이를 즉각 승인했다.
이 전 부회장은 미국 현지에서 기흥 반도체 공장 건설 총 책임자로 귀국하라는 지시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