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시작되기 전에 집에서 가까운 부암동(서울 종로구) 산책에 나섰다. 오래된 골목에 새로운 상점도 많이 들어섰고, 청와대 개방 덕인지 동네를 채우는 공기에 은근한 활기가 느껴졌다. 상점이 조르르 서 있는 부암동의 좁다란 길거리도 좋지만 건물들 뒤로 구불구불 걸을 수 있는 숨은 산길 또한 매력적인 곳이 많다. 부암동 상점거리는 꽤 지대가 높은 곳에 형성돼 있기에 뒷산을 조금만 올라도 서울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산길은 오가는 사람이 적고, 거리의 소음이 와 닿지 않아 조용하다. 간혹 동네 고양이를 마주치기도 하고 아주 드물게는 사람 소리에 놀라 도망가는 멧돼지의 커다란 엉덩이를 보게 될 때도 있다. 점심을 먹기 전에 어슬렁어슬렁 산길을 오르는데 작은 시멘트 계단에 검붉은 자욱이 잔뜩 묻었다. 마치 붉은 비라도 내린 듯 방울방울 터진 자국이 자욱하다. 머리 위를 쳐다보면 백발백중 뽕나무가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뽕나무의 열매는 오디고, 지금이 푹 익어 제일 맛있을 때다.
과즙 풍부한 뽕나무 열매 오디
시장에 오디(mulberry)가 나오면 산딸기와 복분자도 먹을 때가 됐다는 얘기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나무에서 열리는 달콤한 열매로 닮은 점도 많지만 완전히 다르다. 내가 산에서 본 뽕나무 열매는 아주 작지만 상품으로 재배돼 나오는 오디는 꽤나 큼직하다. 마치 알이 빈틈없이 차오른 검붉은 포도송이처럼 생겼고, 어른 손가락 한두 마디만 하며, 타원형으로 매우 오동통하다. 오디는 초록색으로 열매가 맺혀 농익을수록 검붉어지며 단맛도 아주 진하고 깊어진다. 통째로 먹으면 되는데 아주 부드럽고 과즙이 풍부하다. 꼭지에 가느다란 가지 같은 게 붙어 있지만 입에 들어가면 이물감이 없으니 굳이 뗄 필요는 없다. 오디 과즙의 색이 무척 진하니 베어 물다 터뜨려 옷에 튀기는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좋다. 오디는 클수록 쉽게 무르기 때문에 구입 후 바로 먹는 게 좋고, 남으면 설탕을 솔솔 뿌려 살짝 버무려 두었다가 먹어도 된다. 냉동했다가 주스나 스무디로 만들어 먹어도 되고, 잼으로 만들면 풍미와 식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워낙 단맛이 좋기에 잼을 만들 때 설탕을 많이 넣을 필요는 없다. 잼의 농도가 되도록 뭉근히 끓여 수분을 날리되, 과육을 너무 으깨 무르게 하지 않아야 먹을 때 더 즐겁다.
색이 살짝 진해졌을 때 풍미 좋은 산딸기
산딸기는 오디나 복분자보다 과육이 탱탱하다. [gettyimage]
산딸기(raspberry)는 오디보다 시장에서 만나기가 조금 더 수월한 과일이다. 물론 맛볼 수 있는 기간이 짧으니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건 마찬가지이다. 나는 주로 경동시장에 가서 급랭한 산딸기를 구해 먹는 편인데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해 농장 직거래로 구매할 수 있는 곳이 늘어낫다. 산뜻한 붉은 색의 탱탱한 산딸기는 하루 정도 후숙해 색이 살짝 진해졌을 때 먹는 풍미가 훨씬 좋은 것 같다. 귀하고 신선한 산딸기를 맛있게 먹는 방법은 뭐니 뭐니 해도 입에 한 움큼 채워 넣고 우물우물 씹는 게 최고다. 탱탱한 과육과 아작거리는 씨를 동시에 씹으면 새콤달콤한 과즙이 터져 나오며 산뜻한 과일향이 콧구멍에 차오른다. 상쾌함에 눈이 반짝 떠지고 기분에도 초록불이 켜진다. 싱싱할 때 실컷 즐기는 게 좋지만 행여 두고 먹고 싶다면 냉동하기를 추천한다. 산딸기는 조리해 먹으면 그 풍미가 점점 퇴색된다. 분명 개성 있는 맛과 향을 갖고 있지만 생생할 때 가장 폭발적이다. 조리나 저장 과정을 거쳐도 잘 보존되는 오디나 복분자의 풍미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그러니 조리하기 보다는 얼려두었다가 아이스크림이나 얼음 등과 살짝 갈아 즐기거나, 음료나 칵테일에 대강 으깨 넣고 함께 먹는 정도로 싱그러움을 되살려 맛보기를 추천한다.
새콤한 듯 쌉싸래한 복분자
복분자는 끄트머리가 뾰족하고 구의 형태에 가깝다. [gettyimage]
복분자는 산딸기와 사촌쯤 되는 우리나라 토종 과일이다. 산딸기의 탱탱함 대신 오디의 부드러움을 지녔고, 새콤한 맛이 먼저 난 다음 진한 단맛, 그리고 끄트머리에 쌉싸래함이 찾아오는 독특한 풍미를 지녔다. 산딸기는 한쪽 끄트머리가 뾰족한데 복분자는 구의 형태에 가깝게 골고루 둥글다. 산딸기 꽃은 희고, 열매는 아무리 익어도 빨간 반면 복분자 꽃은 분홍이고, 익을수록 열매는 검붉어진다. 언뜻 두 가지가 헷갈릴 것 같지만 한 자리에 놓고 보면 아주 다르다. 오디, 산딸기, 복분자 중 도심의 시장에서 구해 먹기 제일 어려운 게 복분자다. 술, 잼, 청, 식초 등 여러 가지 형태로 가공해 판매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며 생 것 그대로 먹었을 때 오디나 산딸기보다 생경한 맛이 나서 찾는 이가 드물 수도 있다. 복분자는 통째로 먹었을 때 씨의 존재감도 꽤 있기에 믹서에 아주 곱게 갈아 즐기는 경우가 많다. 복합적 풍미가 아주 강건하게 오래가며, 색도 무척 곱기에 잼, 청, 술 등의 재료로는 가장 좋다. 생생하게 잘 익은 복분자를 구했다면 몇 알은 그대로 즐기고, 또 몇 알은 시럽이나 설탕 뿌려 맛보고 나머지는 잘 얼렸다 갈아 먹자. 그러고도 남은 것은 잘 끓여 과육을 무르게 해두었다가 잼도 만들고, 과일 드레싱도 만들고, 요거트 등에도 섞어 먹으면 된다.
나무에서 열리는 작고도 탐스러운 이 과일들은 저마다의 진한 색이 알려주듯 안토시아닌 같은 항산화 성분을 몸에 잔뜩 지니고 있다. 비타민과 식이섬유는 물론이며 우리 몸을 흔들어 깨우고, 혈액순환을 돕는 영양성분이 풍부하다. 여름이 오기 전 단단히 준비하라는 의미에서 자연이 내어주는 앙증맞은 영양 폭탄이니 싱그러울 때 듬뿍 챙겨 먹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