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딤플의 시초
골프 초창기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볼이 사용됐다. 그러다 18세기 초부터 페더리라는 볼이 사용됐다. ‘페더리’는 말이나 황소의 젖은 가죽을 세 조각의 특이한 형태로 재단한 뒤 조그만 구멍 하나를 남겨놓은 채 꿰매고, 그 구멍에 젖은 깃털을 가득 채운 뒤 봉합해 건조시킨 것이다. 젖은 가죽은 수축되는 반면 깃털은 마르면서 팽창해 단단한 볼이 됐다. 페더리는 돌같이 딱딱해서 잘 날아갔다. 300야드 이상 날아갔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제작하기가 무척 힘들고 제작자의 건강에도 좋지 않았다. 더욱이 아주 숙련된 기술자도 하루에 겨우 서너 개밖에 만들지 못해 볼의 가격이 클럽보다 비싸다는 흠이 있었다. 샷을 하는 순간 실밥이 터져 주위가 온통 새 깃털로 뒤범벅이 되는 사고도 적지 않게 발생했는데, 이때에는 벌타 없이 다시 볼을 치게 했다. 페더리의 치명적인 결함은 물에 젖을 경우 납덩이처럼 무거워져 볼을 땅에서 띄우기조차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런 결점에도 페더리 볼은 발명된 뒤 200여 년 동안 골프볼의 주종을 이뤘다.
그러다 1848년경 열대지방의 페르카 나무에서 추출되는 고무 성질의 구타페르카가 발견되면서 골프볼은 혁명적인 변화를 맞게 된다. 이때부터 페더리 볼은 사라지고 ‘구티 볼’이 등장했다. 구타페르카 볼은 충치의 충전재로 사용되던 것을 어떤 골프광이 낙지를 굽는 원리를 이용해 볼로 전용한 것이다. 그런데 구티볼 또한 겨울에는 돌처럼 딱딱해졌다. 여름에는 흐물흐물해져서 라운드 도중 아이스박스에 볼을 넣어 들고 걷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일단 골프에 ‘감염’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깃털이나 충치 충전재를 끊임없이 쳐대면서 허스켈 볼이 등장하기까지 장구한 세월을 견뎌왔다.
최초의 구타페르카 볼은 손에 장갑을 끼고 만들거나 편평한 두 개의 판 사이에 뜨거운 재료를 굴려가면서 만들었는데 표면이 매우 매끈했다. 그런데 골퍼들은 잘못 쳐서 흠집이 생긴 볼이 새 볼보다 더 멀리 날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골퍼들은 새 볼에도 일부러 차가운 끌이나 망치의 노루발 끝으로 흠집을 냈다. 그것이 오늘날 골프볼에 일반화한 딤플의 시초다.
고무줄을 감아라!
1922년 12월14일자 미국의 ‘클리블랜드 프레스’에 다음과 같은 사망기사가 실렸다.
‘코번 허스켈. 향년 54세. 암으로 수개월 동안 와병 중이었다. 20년 전 한나사를 퇴사하고 조선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훌륭한 스포츠맨으로도 알려져 있고, 골프볼을 발명하기도 했다.’
코번 허스켈은 1868년 보스턴에서 태어나 하버드대를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길버트&설리반 극단에 들어가 미국 각지를 여행했다. 검은 머리칼의 잘생긴 이 청년은 곳곳에서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극단을 그만둔 뒤 꽤 오래 사업에 흥미를 갖긴 했지만, 매번 도중에 회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말타기나 수렵, 희귀본 수집에 몰입하곤 했다. 그는 크룩생크(고양이 종의 일종) 연구가로도 명성을 날렸는데, 이런 면모를 보면 마치 취미생활을 즐기려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는 1895년 결혼해서 메인 주의 블루힐에 여름용 별장을 지었는데, 그곳에서 세계적 부호 존 D. 록펠러와 알고 지낸 것이 골프를 시작한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