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호

세자빈에서 대비까지…조선 왕후의 일생

세종, “왕세자빈은 婦德이 중요하나 자세 또한 아름다워야…”

  • 변원림 재독(在獨) 역사학자

    입력2006-10-10 10: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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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세자빈으로 입궁한 왕비 6명, ‘우회상장’으로 왕비 된 경우 18명
    • 왕세자빈 위한 공식 교육 전무…동성연애와 푸닥거리로 무료함 달래
    • 왕비가 관리하는 살림은 왕도 손 못 대
    • 내외법 강조한 세종 이후 왕과 왕비 별거 생활
    • 성종 비 윤씨, “눈 도려내리라” “손목 자르리라” 하며 왕과 싸워
    • 정치교육 못 받은 왕비·왕대비의 섭정, 왕권 약화로 이어져
    세자빈에서 대비까지…조선 왕후의 일생
    필자는 최근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왕세자빈이나 왕비로 책봉됐던 여인들의 생활상을 살펴본 ‘조선의 왕후’(일지사)를 펴냈다. 이 책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에서 정치가로 일생을 보낸 여성의 생활과 활동에 대한 연구이며, 동시에 조선의 결혼과 상례 등을 다룬 풍속사이기도 하다. 이 중에서 조선 왕후의 간택과 입궁 과정, 왕세자빈, 왕비, 왕대비 시절을 간추려 소개함으로써 조선의 정계에 몸담은 여인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생활했는지 살펴보려 한다.

    조선시대 왕은 27명인 반면 왕비는 37명으로 10명이나 더 많다. 이는 훗날 왕비로 추증(追贈)된 경우는 빼고, 왕비로 책봉됐으나 폐비가 되어 선원계보(왕실족보)에는 기록되지 않은 왕비를 더한 수다. 이 중 어린 나이에 왕세자빈으로 가례를 치르고 남편인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왕비가 되고, 왕이 죽은 뒤 자신의 친아들이 즉위함으로써 대비가 되어 죽은, 전형적인 왕후의 삶을 산 이는 현종 비 명성왕후 김씨 단 한 명뿐이다. 이를 포함해 왕세자빈으로 가례를 치르고 궁에 들어가 왕비가 된 경우도 6명에 불과하다. 반면 결혼 후 남편이 변칙으로 왕이 되는 바람에 왕비가 된 이는 11명, 왕의 후궁으로서 왕비가 된 경우도 7명이나 된다. 이러한 통계는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하는 것이 미래에 대한 아무런 보장이 되지 않으며, 궁궐 내 생활이 얼마나 불안하고 살벌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元에 처녀 조공하면서 간택 시작

    조선시대에 대부분의 왕은 10세 안팎에 나이가 비슷한 처녀와 결혼을 했다. 따라서 왕세자빈도 대개 10세 전후에 입궁했는데, 그전에 ‘간택’이라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조선 왕실은 왕세자의 결혼을 앞두고 왕세자의 나이와 비슷한, 9∼13세 처녀의 금혼령을 내린 후 전국의 처녀들 중에서 왕세자빈을 뽑았다. 초기에는 간택사를 지방으로 내려보내 처녀를 뽑아 서울로 데려오도록 한 후, 다시 왕궁에서 왕실의 인원과 정부요인들이 모여 오늘날 미인대회를 하듯이 이들의 인물을 보고 그중에서 왕세자빈을 뽑았다. 중종 때부터는 부모의 성명과 아버지의 관직 혹은 작위를 적은 처녀단자를 받아 그중에서 1차로 뽑힌 처녀를 궁중에 모아놓고 세 번의 간택을 했다.

    17세기 유학자 유형원(柳馨遠)은 그의 저서 ‘반계수록(磻溪隨錄)’에서 조선 태종 때 간택이 시작됐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간택은 이미 고려 때 원나라에 처녀 조공을 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게 맞다. 조선이 선 후에도 명나라가 계속 처녀 조공을 원해, 사신이 올 때마다 간택사들이 전국에서 간택한 처녀들을 서울로 데려오면 왕이 이들을 경복궁에 모아놓고 직접 뽑아서 명나라로 보냈다. 태종은 한 번에 250∼300명의 처녀 중 40∼50명을 뽑았는데, 이들은 명에 보내져 왕후공작들의 첩으로 분배됐다. 이를 본떠 태종도 간택사를 각 지방으로 보내 처녀를 간택,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다.



    그러나 간택은 처음부터 논란이 많았다. 세종이 간택을 통해 3년간 고르고 골라 맞아들인 왕세자(문종)빈 휘빈 김씨를 2년 만에 투기죄로 이혼시키고 다시 왕세자빈을 간택하려 하자 “간택은 인물만 보는 것이지 부인의 덕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관리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세종은 “왕세자빈은 부덕(婦德)이 중요하나 자세 또한 아름답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반박했다.

    그 뒤로도 정부 대신 중에는 간택제도를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있었다. 선조의 결혼을 앞두고 이이(李珥)와 오건(吳健)이 나서 “가법이 올바르며 인자하고 현명한 이의 딸을 왕비로 맞이해야 하는데, 간택은 단지 인물만 보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하지만 선조는 “왕망(王莽)의 딸도 아버지는 역적이나 효부였으니 반드시 부모를 들출 게 없다”며 간택을 고집했다.

    반면 정조는 간택제도에 회의적이었다. 정조는 왕세자빈을 간택할 때 “이제 간택의 제도를 버리고 중매를 통해 명문의 숙녀를 널리 구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는가. 어느 집안의 처자인지 알지 못하니 하늘이 정해주지 않는 것이 없다. 어찌 인력이겠는가. 오직 하늘의 도움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경들은 인척 중에 서로 전하여 알아보라”고 명했다. 간택제도는 이처럼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나 세종 이후 하나의 형식으로 굳어져 조선 왕조가 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내가 문자를 모르니 어찌하겠는가”

    왕세자빈이 정해지면 혼례는 주자(朱子)가 정한 가례에 따라 여섯 번의 의례로 치러졌다. 먼저 왕세자의 부모가 왕세자빈 후보의 부모에게 혼사를 청하는 서한을 보내고(납채례), 그 다음으로 혼수를 보내고(납징례), 신부 집에 혼인 날짜를 알리는 의식인 고기례를 치렀다. 왕세자빈 후보는 혼례를 치름으로써 왕세자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왕세자빈으로 책봉받은 후에 왕세자와 결혼했다. 결혼식이 있기 전에 왕세자빈의 책빈례를 행하고, 그 후에 왕세자가 왕세자빈의 집으로 가서 왕세자빈을 친히 맞이하는 친영례를 행한 다음 왕세자빈을 궁으로 인도하여 궁에서 결혼식에 해당하는 동뢰연을 치렀다. 조선이 존재한 519년 동안 치러진 왕의 결혼을 살펴보면 간택을 앞두고 처녀들의 금혼령을 내리는 것부터 혼례를 치르기까지 최소 6개월에서 최장 3년이 넘게 걸렸다.

    조선의 왕세자빈은 대부분 10세 전후에 입궁했다. 따라서 어린 왕세자빈을 교육해야 했지만 조선 초에는 왕세자빈을 위한 특별한 교육이 없었던 듯하다. 세종이 문종의 첫 부인인 휘빈 김씨가 시앗을 질투했다고 폐한 뒤에 이러한 일이 다시 없기를 바라고 학식이 있는 여자궁인으로 하여금 두 번째 부인 봉씨에게 ‘열녀전’을 가르치도록 했다. 그러나 2∼3일 동안 배운 후 봉씨가 책을 정원에 던지면서 “내가 어찌 이것을 배운 후에 생활하겠는가” 하며 배우려 하지 않았다. 이에 세종이 “‘열녀전’을 배우도록 한 것이 나인데, 봉씨가 이와 같이 예의 없이 행동하니 어찌 며느리의 도이겠는가. 부인에게 문자를 가르쳐 정치에 간섭하는 문을 열 필요가 없으므로, 내가 다시 수업하도록 하지 않았다”고 했다. 성군(聖君)으로 손꼽히는 세종이 왕세자빈에 대해서만은 정치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교육을 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에는 왕비와 왕세자빈을 비롯해 시비들에게 훈민정음을 가르쳤다.

    15세기 후반, 성종의 어머니 소혜의 의지로 왕세자빈에 대한 기본 교육이 자리를 잡는 듯했다. 소혜는 “남편이 어질지 못하면 부인을 제어할 수 없고, 부인이 어질지 못하면 남편을 섬길 수 없다. 오직 남자만을 가르치고 여자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피차에 대한 헤아림이 부족한 때문”이라며 여자를 교육하지 않는 관습을 비판했다. 소혜는 스스로 내훈(內訓)을 지어 왕비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후세의 왕비들에게 가르치려 했다. 그리하여 성종 때부터 왕세자빈에게 소혜의 내훈과 유학의 기본서인 ‘효경’ ‘소학’을 가르쳤다.

    왕비 되면서 갑자기 정치 참여

    그러나 이 또한 왕세자 교육제도와 같이 체계적이거나 의무적인 것이 아니어서 중종의 비 문정이나 고종의 비 명성과 같은 몇몇 야심 있는 왕비만 소혜의 가르침을 따랐다. 왕세자빈이나 왕비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니 선조 초에 명종의 비 인순이 섭정을 해야 할 처지가 되자 “내가 문자를 모르니 어찌하겠는가?” 하는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왕실은 이처럼 왕세자빈을 교육하는 데 소홀하고, 오직 왕자를 낳는 일에 관심을 쏟았다. 따라서 왕세자빈도 왕세자의 사랑을 받아 아들을 낳을 일에만 전념했다. 문종의 첫부인 김씨가 시중드는 하녀에게 남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비밀리에 전해오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졸랐다거나, 문종의 둘째부인 봉씨가 세자빈궁전의 늙은 궁인에게 “할미는 어찌 내 뜻을 모르는가” 하며 밤마다 세자를 데려오라고 했으며, 세자가 다른 곳에서 공부를 하면 찾아가 벽에 구멍을 뚫고 엿보고, 시녀로 하여금 남자를 그리는 노래를 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봉씨는 잉태하기에 전력을 다했음에도 임신하지 못하고 후궁 권씨가 아이를 배자 “권씨가 아들을 낳으면 나는 쫓겨날 것이다”라며 소리쳐 울었고, 한번은 임신했다고 거짓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들을 낳아도 자식 키우는 재미를 볼 수 없었다. 자식을 낳으면 유모가 육아를 도맡았으며, 연산이 여덟 살 때까지 강희맹과 영응대군 집에서 자란 것처럼 궁중에서 키우지 않고 관리나 왕실 친척의 집으로 내보내 키우기도 했다. 그러므로 왕세자빈은 시어머니인 왕비를 따라 국가행사에 참여하는 일 이외에 별 의무도, 권리도 없었다. 봉씨가 시비들과 동성연애를 했다거나, 김씨가 푸닥거리를 했다는 기록은 왕세자빈들이 무료함을 어떻게 달랬는지 짐작케 한다.

    이렇듯 무료한 나날은 왕비가 되면서 깨끗이 사라지고 갑자기 정계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여러 국가행사에 참여해야 하고 궁궐 내 살림을 돌봐야 했던 것. 조선 초에 왕비는 왕과 동좌해 정치에 참여했다. 태조가 죽고 명나라 황제가 조문사를 보내왔을 때 “왕은 상복을 입고 대문 밖에 나가 영접했고, 정비는 경연청에서 시녀를 거느리고 서서 특사를 맞이했다”는 기록이나, 태종 6년에 태종이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신하들을 불렀을 때 신하들이 이에 반대하고 돌아가며 “왕과 왕비에게 4번 절하고 나갔다”고 한 기록은 왕비가 왕과 함께 앉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세종이 내외법을 적용해 왕비로 하여금 남자 신하들을 대하지 못하게 했으나, 17세기 이전까지는 이 법이 잘 지켜지지 않아 왕비들이 남자 신하들을 대했다. 왕이 일반 국가의 일을 보는 사정전 혹은 선정전에서 왕비도 백관(百官)의 인사를 받았고,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이들을 영접하는 행사에 참석하곤 했다. 또한 소헌왕후(세종의 비)가 온천장에 갔다 돌아올 때 구경꾼들이 왕비의 행차를 환영했다거나, 소혜(덕종의 비)와 정현왕후(성종의 계비)가 성종의 능에 제사지내고 돌아올 때 병사들이 사열해 날짐승을 날린 일 등은 왕비가 백성에게 통치자로 비쳐졌음을 증명한다.

    세자빈에서 대비까지…조선 왕후의 일생

    배우 윤석화씨가 왕비로 출연해 궁중 친잠례를 재현하는 광경. 친잠례는 궁궐에 쌓은 친잠단에서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는 의식이다. 이로써 풍년을 기원하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했다.

    왕의 대리인이자 다음 왕 지명자

    17세기 병자호란을 겪은 뒤에는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왕실에서도 내외법이 엄격하게 지켜져 왕비가 국가행사에 참석하거나 거리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어졌다. 그 대신 궁내에 정부 관리의 부인들을 초대해 친잠례, 양로연 등의 행사를 치렀고, 정계의 움직임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관리의 부인들과 정치를 논했다. 직접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왕을 통해 혹은 관리의 부인들을 통해 정치적인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국가에 재난이 닥치면 왕비가 국모로서 백성의 아픔을 보듬었다. 현종 비 명성은 나라에 기근이 들어 백성이 굶는다는 소리를 듣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쌀과 옷감을 해당 관서에 보내 백성을 구호하는 데 쓰도록 했으며, 순조 비 순원은 왕실 재산 중 은 1500냥을 가뭄이 든 지방으로 보냈다.

    왕이 궁을 비울 경우엔 왕비가 왕 노릇을 대신했다. 고종 비 명성황후가 비밀리에 러시아로 밀사를 보낸 사실이 일본에 발각되어 살해당한 것은 왕비가 특명을 내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국가의 수장으로서 실권을 행사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명성황후처럼 직접 정치에 관여한 왕비는 드물고, 대개 왕으로 하여금 친정 사람을 관리로 임명하도록 하여 그들을 통해 왕비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왕비의 마지막 권한은 왕이 죽었을 때 다음 왕을 결정하는 것이다. 명종이 유언 한마디 남기지 않고 죽자 영의정 이준경은 “중전이 마땅히 정해야 한다”고 말했고, 중전 심씨는 덕흥군의 제3자를 왕으로 결정했다. 선조가 죽었을 때는 인목왕후가 광해군의 즉위에 반대, 왕의 인장을 시신을 모신 빈청에 두고 정부요인들에게 비밀리에 서한을 보내 영창대군을 왕위에 앉히려고 했다. 왕비는 왕이 죽으면 금보(金寶·왕의 공식적인 인장)와 계자(啓字·일반 국가 서류에 왕의 결재를 알리기 위해 찍는 인장)를 갖고 있다가, 이를 다음 왕에게 전함으로써 다음 왕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졌다.

    왕비와 후궁의 살벌한 관계

    태종 치세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궁인 무작의 어머니가 병이 났으나 약을 쓸 재력이 없어 귀신에게 빌 뿐이라는 말을 전해 들은 태종이 무작을 불쌍히 여기고 궁중에 있던 옷감 10여 필을 내줬는데, 중궁이 궁중의 물건이라며 도로 빼앗은 것. 이는 왕비가 궁궐의 안주인으로서 경제권을 쥐고 있었으며 왕이라 해도 왕실 살림에 함부로 손댈 수 없었던 사정을 보여준다. 왕비는 형벌로 궁인을 다스리기도 했는데, “연산비가 ‘만일 본궁의 노자들 가운데 횡포한 자가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반드시 먼저 매를 쳐서 죽이리라’ 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왕비가 궁궐 안살림의 전권을 쥐었다고는 하나 권세가의 딸이나 왕의 사랑을 받는 후궁들은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후궁들은 비록 아무런 권한이 없었지만 왕의 사랑을 믿고, 혹은 정부의 관리들과 결탁해 왕비를 모함하거나 업신여기기 일쑤였다. 선조의 후궁인 인빈이 임진왜란 때 평양에 머물던 중 자신이 먹고 난 상을 대신들에게 물리자 정철이 “정철이 비록 못났으나, 어찌 김숙의의 퇴선을 먹겠느냐?” 하고 화를 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본래 자신이 먹고 난 상을 신하에게 물리는 건 왕과 왕비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인빈 김씨가 이같이 행동한 것은 스스로 왕비에 버금가는 위치에 있음을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조 때엔 왕의 총애를 받은 소용 조씨가 왕비 장렬왕후를 별궁으로 몰아내고 자신이 왕궁에서 왕비 노릇을 하기도 했다. 숙종 때에는 인현왕후가 폐해졌다가 다시 왕비가 된 후, “갑술에 내가 다시 왕비가 되었으나 조정의 의논이 세자의 어머니라 하여 희빈을 다른 빈들과 다르게 대하고, 궁중인들이 모두 희빈을 더 중하게 여겼으며, 옛 법규에는 빈에 속한 시비가 대내 근처에는 감히 드나들지 못하는데 희빈 소속 시녀들이 항상 왕래하고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일까지 있으나 침전의 시녀들이 감히 금하지 못하니 한심해도 어찌하겠는가” 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인현왕후전’은 장희빈이 왕비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궁궐에서 계속 왕비를 업신여기며 안주인 행세를 했다고 알리고 있다.

    조선시대에 폐비가 8명이나 되며, 왕의 후궁으로서 왕비로 된 예가 7명이다. 왕비가 궁궐 내 살벌한 암투와 음모 사이에서 얼마나 힘들게 생활했는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소원한 부부생활

    경복궁 배치도를 보면 대전인 강녕전 뒤에 왕비의 내전인 교태전이 있다. 왕과 왕비가 각기 다른 공간에서 생활한 것. 창덕궁도 마찬가지여서 대전인 희정당 뒤에 내전인 대조전이 있다. 그러나 조선 초까지만 해도 왕과 왕비는 한집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가 왕세자를 정하기 위해 대신들과 의논하던 중 신의왕후의 자손 쪽으로 이야기가 흐르자 신덕왕후 강씨가 침실에서 듣고 울음소리를 내어 대신들이 강씨의 아들 방석으로 왕세자를 정했다는 기록이 그러한 추측을 낳는다.

    왕 부부가 별거하기 시작한 것은 세종이 내외법을 시행한 이후인 듯하다. 세종 치세에 대전과 내전의 종속 인원을 열거한 기록을 보면, 왕과 왕비의 의식주를 담당하는 기관이 따로 있었다. 왕비가 왕의 의식주를 챙기는 일은 기록에 남을 정도로 극히 드물었다. 이를테면 “인종이 병이 나 음식을 들지 못하자 중전이 안으로부터 음식을 만들어 왕에게 권했다”거나 영종의 임종시에 “왕세손(정조)이 내전(정순)에서 보내온 속미음을 들여보내라 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왕비가 왕에게 음식을 올리는 것은 일상적이지 않았다.

    태종이 궁인 무작에게 준 옷감 10여 필을 원경왕후가 도로 빼앗았다는 기록을 보면 조선 초만 해도 왕과 왕비가 대등한 관계를 이뤘던 것 같다. 그러나 성종 비 윤씨가 투기죄로 사사(賜死)되면서 왕비는 왕에게 대항할 수 없게 됐다. 성종 치세에 정희(세조 비)가 언급한 바에 따르면 왕비 윤씨가 왕에게 “그 족적을 없애리라” “눈을 도려내리라” “손목을 절단하리라” 같은 말을 하며 싸웠다고 한다. 정희는 “우리가 비록 이름은 국모이나 본래 평인이다. 온 나라가 존경하는 것은 주상인데 오히려 경멸하여…” 하며 윤씨를 사형에 처했다. 그 후 조선의 왕비는 시일이 지날수록 그 위치가 하락해 남편을 대등한 처지에서 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종비 명성황후는 오랫동안 무시되어온 왕비의 권위를 왕과 동등하게 끌어올렸다. 김옥균이 갑신정변 직전에 고종과 청불전쟁에 대해 논의할 때, 명성이 침실에서 나와 함께 논의했으며 외국인들이 고종을 알현하는 자리에 장지문 하나를 사이에 두거나 병풍을 치고 혹은 가마 안에 앉아 동참했다. 명성이 죽은 후 고종은 항상 눈물을 흘리며 왕비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왕대비의 노련함

    남편인 왕이 죽고, 새 왕을 결정하고 나면 왕비는 왕대비가 되어 궁에서 확고한 위치를 다진다. 왕대비는 이제 쫓겨날 위험이 없고, 왕과 왕비의 효도를 받으면 된다. 어린 나이에 입궁해 무서운 정쟁의 소용돌이를 버텨내고 정계의 움직임을 파악했기에 왕대비는 비록 경서(經書)를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정치가로서의 노련함을 갖추게 된다. 더욱이 왕비 시절에 이미 친척들을 정부의 요직에 두루 배치한 터라 지원세력도 든든하다.

    조선 초 성종 비 윤씨가 사형에 처해진 것은 왕비가 왕대비에 대항할 경우 어떤 결과를 맞는지를 보여준 본보기가 됐다. 이후 왕대비의 권한은 계속해서 커진 반면 왕비의 권한은 축소되었다. 또한 시일이 지남에 따라 왕비가 참여해야 할 국가 행사가 늘어나 궁중 살림을 챙길 여유가 없어지자 왕비는 의례적인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본분을 다하고, 궁중 살림은 왕대비의 손아귀로 들어왔다. 혜경궁 홍씨가 남편이 죽었으니 왕비가 되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으나 왕대비가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한 것은 왕대비의 지위와 권한이 왕실 여인들이 가장 바라는 바였음을 짐작케 한다.

    왕대비는 섭정을 하지 않는 한 정부의 일에 관여할 어떠한 명문화된 권한도 없었다. 그러나 궁중의 어른이자 왕과 왕비의 조언자로 군림하며 궁내와 정부의 일에 관여했다.

    왕에게는 부모도 신하라지만, 실제로는 왕이 왕대비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웠다. 왕과 왕대비의 이러한 관계는 인종의 행동에서도 나타난다. 하루는 중종 비 문정이 “과첩(寡妾·왕대비 자신을 일컬음)과 약자(弱子·후에 명종이 된 자신의 아들을 가리킴)가 보전하기 어렵다”고 불평하자 인종이 병든 몸으로 뙤약볕이 내리쬐는 처마 밑에 엎드려 위로했던 것.

    왕이 죽었으나 왕세자가 어려 나라를 다스리기 어려울 땐 왕대비가 어린 왕을 대신해 정치에 나섰다. 조선시대에 성년이 되기 전 왕이 된 첫 번째 왕은 단종이다. 이때 왕의 삼촌인 수양대군은 단종을 도운다고 했다가 단종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됐다.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그 뒤로는 어린 왕이 즉위하면 왕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인 왕대비로 하여금 왕이 성년이 될 때까지 정치를 맡게 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 왕세자빈은 통치자로서 자질을 기르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왕비나 왕대비가 섭정을 하면 오히려 권세가들이 득세해 왕권이 약화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세조 비 정희왕후가 군적호패법을 없애며, “내가 옛적에 세조를 따라 같이 가던 중, 사람들이 군적호패법이 불편하다고 울면서 상소하는 것을 보았다. 백성의 고통이 이와 같은데 국가에 어떠한 이익이 되겠는가” 했다. 정희왕후는 군적호패법을 없애는 것이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실은 세조 말부터 실권을 쥔 한명회, 신숙주 등의 꾐에 빠진 것이다. 모든 백성을 등록하는 군적호패법을 없애면 소유한 노비가 파악되지 않아 국가에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이들이 감언이설로 정희왕후를 현혹했는데, 정희왕후가 이를 간파하지 못했다.

    준비 안 된 통치자의 시행착오

    이러한 실정(失政)은 영조 비 정순에게서 다시 나타난다. 순조 원년 정월에 정순대비는 내수사의 노비문서를 불살라 왕실에 몸값을 내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켰다. 이때에 정순은 “노비의 혁파는 조정의 신하들이 찬성한 것이며, 왕이 민을 돌보는 데 귀천이 없으며 상하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마저 심환지 등이 왕권을 약화하려는 의도에서 관철한 것이었다. 왕실의 노비가 모두 양민이 되면 국가에 세금을 내게 되니 왕실 수입이 정부로 옮겨진 것이나 다름없고, 정조가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애써 마련한 군사비를 왕실의 일반경비로 전환해 사용케 함에 따라 군사력마저 약화됐다. 순조 치세에 전국에 민란이 많이 일어난 이유는 왕실에서 이를 규제할 군사력과 경제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종 치세로부터 왕비에 대한 교육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는 기본 한문지식과 여인으로서의 행동지침에 지나지 않았다. 오직 부모에 대한 순종만을 가르치고 이를 미덕으로 장려했으며 개인의 인격을 키우게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비들은 오직 자신의 친정 사람들에게 관직을 주어 친정의 영화를 도모하는 일에 힘썼고, 왕과 자신이 일체가 되어 전 국가를 다스린다는 국모로서의 의식을 갖지 못했다. 이로 인해 조선시대엔 러시아 황제로서 친정인 독일에 대항했던 에카테리나 대제와 같은 여걸이 나올 수 없었다. 세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왕비의 교육에 힘쓰지 않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왕권이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세자빈에서 대비까지…조선 왕후의 일생
    변원림

    1948년 서울 출생

    고려대 사학과 졸업, 독일 에어랑엔대 박사(철학)

    고려대, 독일 트리어대·튀빙엔대 강사

    저서 : ‘역사 속의 한국 여인’ ‘고종과 명성’ ‘Der Pr둽entivkrieg Amerikas in Korea 1950(1950년 한반도에서 일어난 미국의 예비전)’ ‘조선의 왕후’ 외



    여성이 직접 정권을 잡은 시기는 조선 519년 중 29년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65년이다. 정희(세조 비), 문정(중종 비), 인순(명종 비), 정순(영조 비), 신정(고종의 어머니) 등 한번 집권했던 왕대비들은 왕이 장성하면 비록 겉으로는 왕에게 대권을 돌렸으나 죽을 때까지 왕을 뒤에서 조종했다.

    조선의 왕후들은 직접 대권을 쥐지 않아도 조선의 전 기간에 걸쳐 정치에 능동적으로 참여해 사생활과 정치를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여류정치가의 일생을 보냈다. 조선의 정치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왕후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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