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호

한국경제 도약의 지렛대, 박정희의 수출 드라이브

  •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 wblee@aks.ac.kr

    입력2007-02-12 15: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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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사정부는 집권 초기 자주경제 건설을 위해 자립화정책을 추구했다. 하지만 미국의 원조 감소에 따른 외자도입 부진과 국내의 열악한 저축상황에 직면한 후 수출과 외자 유치로 방향을 틀었다. 비록 지나친 대외의존적 경제구조로 IMF 외환위기를 배태한 폐해도 있지만, 박정희 정권의 수출지향적 산업화 전략은 낙후된 한국경제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대성공이었다.
    한국경제 도약의 지렛대, 박정희의 수출 드라이브
    2006년 12월5일 대한민국은 세계 11번째로 수출 3000억달러를 달성했다. 수출 1억달러 초과 달성일이 박정희 시대인 1964년 11월30일이므로 43년 만에 빛나는 성과를 이룩한 것이다.

    이 목표는 실적 지상주의에 의해 달성됐으며 그 성과에는 외화내빈, 속빈 강정인 측면이 있고 그 파이가 모두에게 돌아가지 못했으므로 어두운 면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수출이 우리 경제의 버팀목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우리의 수출지향적 발전 전략은 박정희 시대에 처음 추진됐는데 지금 우리의 위치를 돌아보기 위해서도 이를 살펴보는 것은 그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박정희에게 수출드라이브를 걸게 했다는 주장도 제기하고 있다. 당시 한국경제가 미국의 원조로 지탱되고 있었고, 미국이 한국경제의 효율적 운용을 위해 한국 정부에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것을 종용한 것은 맞다.

    하지만 미국이 유도한 것은 대외지향적 발전전략이 아니라 미국의 원조가 줄어도 버틸 수 있는 자립형 경제체제였다. 즉 미국의 주문은 수입대체 산업화를 통한 경제안정이었으며 이를 수출지향으로 방향을 바꾼 것은 한국 정부였다.

    1961년 5·16으로 정권을 틀어쥔 군부세력은 거사일 새벽에 방송된 혁명공약 4장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이에 따라 경제개발계획을 입안하고 추진했다.



    1962년 1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시행할 때에는 혁명공약에서 표방한 바와 같이 자주경제 재건을 위해 ‘자립화정책’을 추구했다. 5·16군사정변 세력이 국회를 해산하고 만든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유원식 최고위원(쿠데타 당시 대령, 1961년 8월10일 준장 진급)이 최고회의 의장 자문위원이던 민간 경제학자 박희범 서울대 상대 교수와 함께 ‘내포적 공업화 전략’을 마련했다. 이들 자력갱생파이자 ‘급진파’의 경제 살리기 방안은 ‘자립경제를 지향하는 자주적 공업화 전략’이었다.

    박희범식 내포적 공업화 전략은 외향적이며 개방적인 수출지향적산업화전략과는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렇지만 자본이 부족했던 한국 정부가 이러한 내포적 산업화 발전 전략을 추진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으며 기업가와 관료가 반대한 탓에 계속 추진하는 것이 불투명해졌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고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유원식 준장 등은 1962년 6월 통화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미국의 반대로 개혁은 곧 실패로 끝났다. 그에 따라 자력갱생파는 밀려나고 대외개방적 공업화를 추구하려던 이병철 등의 기업가와 박충훈·김정렴·천병규 등 신진엘리트 관료 그룹, 미국 경제고문단 3자가 연합한 ‘실용주의’ 노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당시 소외됐던 미국과 기업가들이 1962년 7월부터 서서히 전면에 등장할 조짐을 보인 것이다.

    결국 한일회담을 본격 추진한 1964년 후반 이후 자립화정책과는 반대 방향으로 전환했다. 즉 외향적 개방방식인 ‘개방정책’으로 전환될 조짐을 보여 결과적으로는 개발 자금을 외부에서 구하는 외자의존형 개발 모델을 채용한 셈이다.

    정부 주도의 경제자립화를 포기하면서 경제개발에서 민간기업의 주도권을 보장하고 개방체제를 지향해 외국자본을 적극 도입하는 정책으로 전환했다. 한국정부는 제철 등의 기초적 생산재 공업을 육성해 자립적인 공업화를 추진하려 했으나 1963년까지의 경제정책이 실패하고, 미국이 이러한 경제성장방침에 압력을 넣자 1964년 미국 고문관에게 자문을 구해야 했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는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보완정책을 작성했는데, 이로써 외연적 성장을 위주로 한 외자의존형 성장정책으로 전환된 것이다.

    1차계획의 원안은 수출지향적 공업화를 명시적으로 지향한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1차산업의 생산물과 합판 등 민간기업의 단순 가공품 수출 실적이 예상외로 급속히 목표치를 상회했기 때문에 1964년 2월 보완계획의 완성 시점에 수출지향적 목표가 맹아적 형태나마 일정부분 반영됐다.

    “수출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경제성장을 이룩하자 한국은 일본의 후방기지로서 세계경제의 분업구조 속에서 보세가공 등에 치중한 산업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5·16 이전에는 2000만∼3000만달러에도 못 미치던 수출실적이 1962년에는 5700만달러, 1963년에는 8300만달러에 이르렀다. 1963년에는 공업제품 수출이 32.4%로 수위를 차지했으며(단순 가공품 합판이 최대 수출품으로 등장), 비식용원료 30.4%, 식료품 및 생동물은 20.6%로 점차 비중이 낮아졌다.

    1963년 상반기에 이미 1차산업 생산물의 수출은 둔화되고 공산품 수출이 증대되는 추세가 나타났다. 1964년 2월의 수정안은 그러한 추세를 일정 부분 반영한 것이었다. 1963년 시정방침 경제정책의 12번째 항목에는 “수출산업은 외자도입에서 제제한(諸制限)을 배제할 것이고, 현유(現有)산업을 수출산업으로 전환할 것을 적극 조성할 것이며, 원료수출을 제한하고 가급적 제품수출로 전환”하자고 적혀 있다. 물론 아직 수출지상주의적 전환은 나타나지 않았는데 1963년의 시정방침에서 강조한 수출 장려도 수입 억제와 ‘외환 수급의 적정’이라는 소극적인 차원과 연결된 것이었다.

    수출 드라이브는 1965년 한일회담 타결을 전후한 시기에 본격 가동됐다. 박정희가 이후 자주 사용한 개념인 ‘수출입국’을 명확히 한 것은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시작 시점이 아니라 1964년 후반 이후였다. 5·16군사정변 때 발표된 혁명공약에는 ‘국가자주경제재건에 총력을 다한다’는 표현만 있을 뿐 수출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1962년과 1963년의 여러 연설에도 수출에 대해선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1960년대 초기의 수출지원정책은 1950년대 후반의 각종 지원정책을 정비 내지는 강화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 1964년 6월 수출진흥종합시책을 마련한 후 10월5일 박정희는 자립경제의 기초를 확립하는 제1과제가 바로 수출진흥을 통한 외화 획득이며 경제시책의 중요한 목표를 ‘수출제일주의’로 삼고 있다고 역설했다. 수출지원정책 중 1950년대부터 존속한 지원정책을 제외한 나머지는 1964년과 1965년에 새로 추가된 것들이다.

    민정(民政) 첫 해이던 1964년 전반기는 혼란과 시련이 끊이지 않던 시기였다. 이를 진정시킨 후인 1964년 후반기, 1965년 초에 이르러서야 수출지상주의 깃발을 확고하게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1965년 연두교서에서 ‘증산-수출-건설’이라는 구호를 내걸면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 처칠 총리가 외친 ‘수출 아니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호소를 인용했다.

    1964년 연두교서에서는 “정부가 수출진흥에 최대한 노력을 경주하고자” 한다고 언급했지만, 외환보유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소극적 방책의 일환으로 제기된 구호였으므로 1965년 연두교서의 적극적인 수출증대와는 차이가 있었다. 1차 계획 기간 중 1962년을 제외하고는 1963년부터 목표를 초과 달성했으며 1965년엔 1억7000만달러의 수출을 달성했다.

    이에 박정희는 수출 1억달러 달성 기념으로 1964년 12월5일을 수출의 날로 제정했다. 1965년 이후 수출주도형 개발정책이 본격 수행되는 과정에 수출에 대한 맹신이 싹텄으며 ‘수출은 성장의 엔진’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사생결단적인 구호가 등장했다. 따라서 1965년경부터 수출에 대한 강력한 드라이브가 걸렸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미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을 현실화할 것(원화의 50% 평가절하)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이에 직면한 한국 정부는 1964년 5월3일 공정환율을 달러당 130원대에서 255원으로 대폭 인상해 순응했는데 이것이 수출증대로 나가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 이전에는 원화의 달러에 대한 환율이 고평가됐으며 무역 및 외환의 제한, 차별관세, 저금리 등으로 수출보다는 수입 또는 수입대체산업이 유리해서 수출산업이 부진했다. 그런데 환율현실화 조치로 고환율 시대가 도래하자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판단하는 전기가 조성됐다.

    상공부는 그간 산만하게 시행되던 제반 수출지원책을 1964년 6월24일 통합 정리해 수출진흥종합시책을 마련하고 1965년부터 시행함으로써 정책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 종합시책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수출지원정책의 전범이 되고 있다.

    초기의 수출진흥은 상공부 작품

    한국경제 도약의 지렛대, 박정희의 수출 드라이브

    수출 유공자를 표창하는 박정희 대통령.

    이는 고환율을 초래한 “환율 및 외환제도 개혁(1964. 5. 3)을 계기로 당초 수출목표인 1억500만달러를 1억2000만달러로 수정하는 한편, 무질서한 기존 지원책을 지양하고 수출능력 육성, 수출구조 고도화 및 국제경쟁력 강화 등 본격적이고 적극적인 수출 드라이브를 전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항구적인 수출증대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수출진흥에 관련된 모든 지원대책을 동원”하려는 것이었다. 종합시책은 경제정책에 관한 한 모든 것에 앞서는 최우선, 최상위에 있었다.

    수출업체는 조세나 금융상 지원뿐만 아니라 외교와 정보수집 등 다방면의 편의를 유기적이고 종합적으로 제공받기에 이르렀다. 1965년을 시발로 매년 이러한 시책 수립은 반복됐는데, 상공부가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1964년 이후 수출진흥을 위한 정책적 의의가 가미된 수출계획이 수립돼 수출 드라이브 추진축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평가됐다.

    한편 박정희는 상공부 초도순시에서 수출의 애로점을 시정하기 위해 1965년 매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개최할 것을 지시했다. 그밖에 행정면에서의 지원책도 적극 강구됐다.

    이렇게 1964년 중반부터 한국 정부의 주체적 결단에 따라 수출지향 정책이 추진됐으며 수출 드라이브는 성장엔진으로 평가받았다. 당시 ‘돌격내각’이라 불린 정일권 내각에서 저돌적인 추진력을 가진 장기영 부총리와 수출장관이라는 별명을 가진 박충훈 상공부 장관(차관은 김정렴) 등이 그 추진세력이었다.

    박충훈은 1961년 8월부터 1963년 2월까지 상공부 차관을 역임한 후 바로 그해 8월까지 장관직을 수행했으며 1964년에 수출산업공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1964년 5월11일 상공부 장관에 재임명돼 박정희에게 임명장을 받는 자리에서 박충훈은 “수출만이 살길이다. 앞으로 나라 전체가 수출제일주의를 국가의 최우선 정책으로 삼고 매진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통령 각하께서 총사령관으로 진두지휘하셔야 한다”고 말했고 박정희는 쾌히 응낙했다고 한다.

    따라서 1964년 5∼6월, 즉 1964년 중반이 중요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상공부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동안 1964년 11월 수출 실적이 1억달러에 달했으며 결국 박정희는 1965년 신년사를 통해 본격적으로 수출드라이브를 걸었다. 박충훈의 표현대로 상공부가 주관하는 수출 드라이브의 총사령관은 박정희였으며, 오원철의 표현대로 국시(國是)는 ‘수출제일주의’, 정책은 ‘공업입국’이었다.

    사실 상공부는 1962년 3월5일에 의결된 수출진흥법에 따라 해외시장 개척을 전담하는 대한무역진흥공사(대한무역진흥공사법은 4월24일 제정 공포. 대한무역진흥공사는 수출시장 개척과 정보 수집에 큰 몫을 담당했다)를 설립했으며 수출진흥 5개년계획을 1962년부터 수립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상공부가 이 작업을 주도했음에 비해 박정희는 적어도 1962년 중반의 시점에서는 이에 대해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편찬한 한국군사혁명사 자료편의 다른 항목에는 박정희 의장의 연설이 많이 소개된 데 비해 무역(수출산업)진흥 항목에는 단 두 편의 자료가 소개됐으며 모두 상공부 장관의 담화다. 따라서 초기(1962∼1963년)의 수출진흥은 거의 상공부가 독자적으로 판단해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환율의 현실화와 함께 1960년대 전반에는 각종 수출지원정책이 크게 강화됐다. 수출종합시책으로 기존의 수출진흥위원회가 개편됐다. 1964년부터 1965년까지 그 후 10년에 걸쳐 실시된 대부분의 수출진흥책의 토대가 구축돼 수출유인체제가 완비됐으므로 이 시기가 수출드라이브를 거는 데 가장 중요한 시점이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이 수출 드라이브를 일방적으로 종용했다는 가설은 맞지 않다. 오히려 한국의 정책당국자들은 일본의 산업화 과정에서 배웠다고 할 수 있다. 1964년 3월 한일회담 청구권 대표위원으로 참여한 김정렴은 일본의 수출지향적 산업화에 감명받아 한국경제도 일본과 같이 수입대체산업 육성에 안주하지 말고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수출지향적 공업화에 착수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장기영(당시 한일회담의 비밀 막후교섭 담당, 1964년 5월 부총리 역임)에게 올렸다고 한다.

    미국이 관여한 건 한국 상공부가 1964년 말 수출주도형 모델을 구체화할 때 모스트(Amicus Most)라는 미국 사업가(그는 이 일을 하기 전에 AID(국제개발처·미국의 대외원조실시기관)의 자문역이었음)가 도움을 준 정도다. 미국의 강권에 따라 재정안정화 정책을 시행할 때 한국 정부는 긴축정책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인플레이션 억제보다 수출증대에 주력했다. 상공부는 경제안정을 위해 재정안정계획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수출확대에 더 주력했던 것이다.

    1964년말 미국의 AID는 1965년의 재정안정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었지만 상공부는 수출증대 방안을 마련하고 있었다. 미국의 원조 감소에 따른 외자도입의 부진과 국내의 열악한 저축상황에 직면한 박정희 정부는 수출과 외자유치가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수출지향적 산업화 전략은 박 정권이 적극 선택한 것이었다.

    이 전략이 성공한 데는 무엇보다도 박정희의 선택이 중요했지만, 기업가·관료의 호응과 노동자·농민의 피와 땀이 그 못지않게 중요했으며,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쌓고 한국을 자본주의 발전의 쇼윈도로 만들려는 미국의 도움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인이었다. 따라서 그때의 성공은 대외적 호기를 잘 이용한 우리 국민 모두의 유기적 성과였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까지도 수출지향적 산업화가 확고히 자리잡은 건 아니었다. 1966년까지 섬유, 식료품, 연초, 의료 등 수입대체 산업이 여전히 선도산업 이었다. 1차계획 기간 중 화학비료 공업이 확충됐으며 시멘트공장이 들어섰고 정유공장, 비스코스 인견사 공장 등도 건설됐다. 2차계획 기간에는 섬유, 합판, 가발, 신발류 등 경공업이 주로 진흥됐으며 점차 중화학공업에 눈을 돌렸다.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고 포항제철은 1970년 4월에 기공식을 열어 1973년에 준공됐다. 따라서 1960년대 초반은 수입대체가 주류를 이루다가 1960년대 후반에는 변화 조짐이 보였으며 1970년대에는 수출지향적 산업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1966년 7월에 작성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6대 중점목표 중 하나인 수출 항목에 대해서는 “7억달러(상품수출 5.5억달러)의 수출을 달성하고 수입대체를 촉진해 국제수지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기반을 굳힌다”고 기술돼 있다.

    지나친 대외의존적 경제구조

    2차 계획기 수출도 1차 계획기와 같이 국제수지 개선을 위한 수출이었으며 수입대체를 위한 면이 있었다. 1965년에는 1)소비재 경공업과 2)중화학공업 3)기간 시설 확충이라는 3차원의 자립적 수입대체 공업화가 국제수지 개선 차원에서 이루어지면서 소비재 경공업 중심의 수출진흥이 동시에 추진됐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수입대체와 수출진흥은 병존, 양립했으며, 전혀 모순되지 않는 한국 산업화의 양축이었다.

    수출입국이 추진되기 시작한 1964년 중반 민족 내부의 상황은 그렇게 밝지만은 않았으나 대일(對日)청구권 자금 확보와 베트남전 참전 등에 따른 외부 자금 확보 덕분에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수출 드라이브 정책은 민족 내부의 결단으로 시작된 면이 있지만, 민족 내부의 치밀한 계획과 노력보다는 외적인 자금확보에 힘입어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선택은 독자적으로 했지만 그 집행은 미국 등의 외국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이 점에서도 한국 정부의 독자성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렇다고 근대화를 추진한 우리 민족 내부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건 적절치 않다. 다른 나라들은 자금확보에 성공하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었으며 확보하고서도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한 경우가 성공한 경우보다 더 많으므로 우리 민족의 저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한국경제 도약의 지렛대, 박정희의 수출 드라이브
    이완범

    1961년 출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한국정치 전공)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 미국 조지타운대 및 하버드대 방문학자

    現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 교수(남북한 현대사)

    저서: ‘38선 획정의 진실’ ‘한국전쟁: 국제전적 조망’ ‘1980년대 한국사회 연구’


    그런데 이러한 정책전환에 부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의 원조 감축과 외환보유고 감소에 대처하기 위해 수출지향적 개발전략을 택한 결과 농업개발과 식량자급, 국내 지하자원 개발 등 국내산업 육성에 대한 투자배분이 상대적으로 축소돼 오늘날 지나친 대외의존적 경제구조를 갖게 된 것이다. 1997년의 IMF 위기가 그 대표적인 후유증이다. 경제학자들은 비슷한 위기가 언제라도 되풀이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또한 박정희가 암살당했을 때 거대한 외채 앞에 대한민국은 거의 망할 지경이었고 이후 정권이 이를 힘겹게 극복했기에 한강의 기적이 가능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렇지만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이 수출 드라이브를 걸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수출 3000억달러라는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하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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