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호

문명의 십자로에 우뚝 선 ‘차탈 회윅’에 담긴 비밀

동서양의 접점 - 이스탄불과 아나톨리아

  • 고일홍| 서울대 HK연구교수·고고학 mahari95@snu.ac.kr

    입력2012-10-23 11: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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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의 십자로에 우뚝 선 ‘차탈 회윅’에 담긴 비밀

    터키 아나톨리아 전경

    연재를 시작하며

    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과 ‘신동아’는 역사학자, 문헌학자, 종교학자, 철학자, 건축학자 등으로 구성된 탐사단을 조직해 ‘문명의 십자로-이스탄불과 아나톨리아’를 주제로 터키지역을 탐사했다. 이 지역에는 동양과 서양이 교류하고 충돌해온 역사가 집약돼 있다. 인류 문명의 시원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이곳을 거쳐 유럽으로 흘러들어갔다. 고대에 이곳은 호메로스가 읊은 ‘일리아스’의 무대였고,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정복 전쟁을 시작한 곳이었으며,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로는 기독교 문명의 중심지였다. 근대 초 동로마제국이 오스만제국에 의해 멸망한 후로는 이슬람 문명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 양 대륙에 걸쳐 있는 국제도시 이스탄불은 이러한 오랜 영욕의 역사를 오늘날까지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기원전 8세기경 그리스인 비자스(Byzas)에 의해 건립돼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로마시대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로 불렸던 이 도시는 로마시대인 4세기 초부터 오스만제국이 멸망한 20세기 초까지 16세기 동안 대제국의 수도였다.

    ‘신동아’와 HK문명연구사업단은 지면을 통해 동서양 문명이 교차한 역사를 선사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 순서에 따라, 그리고 신화, 종교, 전쟁, 건축, 예술, 과학 등 여러 측면에서 입체적으로 조명하기로 했다. 문명권 사이의 새로운 관계 정립이 요구되는 이 시대에 동서양 문명 교류사의 중요한 현장을 돌아보려는 이 연재기획에 많은 독자의 관심과 동참을 기대한다.

    ‘아나톨리아’는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해당되는 커다란 반도 지역을 지칭하는 용어로, ‘동쪽’ 혹은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소아시아’라고도 하는 아나톨리아 지역은 오늘날 터키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나라의 동쪽, 즉 아시아 부분에 해당된다.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이 만나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아나톨리아 지역에는 예부터 이주, 교역, 정복전쟁 등의 이유로 많은 집단이 오고 갔으며, 그중 일부 집단은 그곳에 정착했다. 그 결과 ‘동서양 문명의 접점’이라 불리는 아나톨리아 지역에는 그러한 집단들이 남긴 수많은 유적지가 산재하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도 무려 아홉 곳이나 된다. 그렇다면 아나톨리아 지역은 얼마나 오래전부터 인류의 문화와 문명이 교차하는 지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일까? 그 해답의 열쇠가 되는 곳이 바로 차탈 회윅 유적이다.

    아나톨리아 고원의 남쪽에 있는 코냐(Konya)에서 남동쪽으로 50㎞ 떨어진 평야 한가운데 야트막한 구릉이 하나 솟아 있는데, 그곳이 바로 차탈 회윅 유적이다. 차탈 회윅은 이 지역의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6500년경 이후로 약 1000년 동안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인구를 가진 농경민 집단이 한곳에 계속 살면서 형성된 , 거의 도시 수준의 마을이었다. 이 농경민 집단은 진흙 벽돌로 잘 지어진 사각형의 주택에서 거주하다가 특이하게도 약 100년 주기로 오늘날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재건축’을 했다. 그런데 이들은 기존의 주택을 완전히 철거하지 않고 그것을 부수고 메운 다음, 그 잔해 위에 새로운 주택을 지었다. 그 결과 약 100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최초의 마을이 조성됐던 자리에는 높이 20m에 달하는 인공 언덕이 형성됐다. 즉, 이 마을 최후의 거주민들은 20m 고층 건물의 꼭대기 층에 살았던 셈이다. 그런데 한때 인구가 6000명에 달하던 이 마을은 기원전 5600년경에 이르러 갑작스럽게 폐기됐다. 그 확실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차탈 회윅 마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렸고, 그것의 물질적인 흔적인 인공 언덕은 자연 경관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한 상태로 약 7500년이 지나다가 1958년 영국인 고고학자 멜라트(J. Mellaart)와 그의 동료들이 차탈 회윅 유적을 발견하면서, 20m에 이르는 삶의 잔해에 숨어 있던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게 됐다.



    차탈 회윅 유적의 발굴은 오늘날에도 진행되고 있으며, 아직 유적 전체의 10%도 채 조사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 유적에 대한 발굴이 이렇게 더디게 진행되는 것은 유적의 규모 자체가 워낙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개발로 인한 유적의 파괴가 걱정되지 않는 상황인지라, 1993년 이래로 세계 각국의 고고학자들이 매년 여름 한철 동안 최신 발굴 기법을 동원하며 그야말로 세밀하게 조사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쏟은 노력의 결과로 우리는 차탈 회윅의 마을에 거주했던 농경민 집단의 삶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됐다. 오늘날 고고학자들에게는 너무나 고맙게도, 당시의 거주민들은 주택을 폐기할 때 그 안에 담긴 자신들 삶의 흔적을 철저히 없애지는 않았다. 따라서 폐기된 주택들의 잔해를 조심스럽게 걷어내면서 고고학자들은 차탈 회윅 주민들이 어떠한 주택에서 살았는지뿐만 아니라, 그 주택 내 어느 지점에서, 그리고 어떠한 시설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었는지, 또한 죽은 자들의 시신은 어떻게 다루었는지, 심지어는 그들이 어떠한 종교생활을 했는지까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차탈 회윅의 주민은 누구인가?

    차탈 회윅 유적은 이렇듯 남부 아나톨리아 지역에 살았던 신석기 시대 농경민의 삶에 대해 추상적으로만 인식하지 않고, 그들이 느꼈을 삶의 희로애락에 생생하게 접근하게 해준다. 그런데 차탈 회윅 유적은 대부분의 터키 여행 안내서에서 특별히 강조돼 있지 않다. 따라서 그곳의 존재도 모르는 채 터키 여행을 다녀오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곳의 중요성은 일찍이 호메로스가 노래했던 트로이나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인 핫투샤 등 아나톨리아 지역의 유명 유적지에 결코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탈 회윅의 주민은 과연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살고, 무엇을 먹었으며, 어떠한 신앙을 가졌던가? 또한 그들의 이러한 삶의 방식은 어디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며, 이후 또 어느 지역으로 전파됐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하나씩 찾아나감으로써 우리는 아나톨리아 지방이 갖는 ‘동서양 문명의 접점’으로서의 면모에 대해 더욱 자세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나톨리아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부터다. 이곳의 구석기 주민들은 동굴에 거주하면서 수렵과 채집에 의존해 생계를 꾸려나갔고, 아나톨리아 남서부의 오쿠지니(Okuzini) 동굴에서 확인된 것과 같은 동굴벽화도 남겼다. 그런데 이러한 수렵-채집민이 신석기 시대에 들어와서 농경을 자체적으로 수용했던 것 같지는 않다. 즉, 이들이 차탈 회윅 유적을 남긴 농경민 집단의 조상일 가능성은 낮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차탈 회윅에 처음으로 정착한 주민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잘 알려져 있듯이 지구상에서 농경이 최초로 발생한 지역은 소위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불리는 곳이다. 마치 엎어놓은 초승달과 같은 이곳의 서쪽 지역은 이스라엘과 레바논, 시리아를 관통하고(이 세 곳을 합쳐 흔히 레반트 지역이라고 한다), 동쪽 지역은 이라크와 이란을 지나며, 그 정점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동남부에 자리하고 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농경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곳에 야생 양과 염소, 소, 돼지가 서식하고, 야생 밀과 보리가 많이 자라났기 때문이다. 즉, 야생 동식물 자원이 풍부한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자연적 환경 속에서 수렵채집민은 동물과 식물의 습성을 가까이에서 지속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그 야생종을 점진적으로 길들여나갔다는 것이 농경의 발생에 관한 대표적인 가설이다.

    정착생활의 뚜렷한 증거 - 텔 유적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신석기 시대 주민들은 기원전 9000년경부터 밀과 보리를 재배하고 소와 양, 염소를 사육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곡식 제분용 갈돌과 갈판의 존재를 통해, 또한 고고학 유적에서 높은 비율로 발견되는 어린 가축의 잔해를 통해 알 수 있다. 후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가축 사육의 중요한 특징은 매년 태어나는 동물의 50% 정도만을 선택적으로 (그것도 주로 암컷을) 사육하고 나머지는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는 이러한 선택적 사육이 기원전 9000년경부터 일어났다는 증거가 포착됐다. 기원전 1만2000년경 이전에 해당되는 유적들을 보면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되는, 다시 말해 잡아먹힌 어린 동물의 뼈는 20%에 불과한 반면, 기원전 8650년경의 유적에서는 어린 양의 뼈가 44~58%나 된다는 것이 확인됐다. 따라서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증거를 기반으로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는 기원전 9000년경에 농경사회로 전환이 이뤄졌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농경민은 이내 새로운 경작지와 목초지를 찾아 주변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농경과 그것에 동반된 새로운 삶의 방식이 확산된 것이다. 서쪽 지역으로의 확산에 대해 언급하자면, 두 개의 확산 경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경로를 따라 이주한 농경민은 아마도 레반트 지역의 해안가 지역을 출발해 바다를 가로질러 우선 키프로스에 도착한 다음, 그곳에서부터 다시 크레타와 그리스 본토의 남쪽 지역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경로는 레반트 북부 지역에서 시작해 아나톨리아 반도를 관통한 다음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어 발칸 반도로 이어지는 육상 경로인데, 바로 이 경로를 따라 이주하던 농경민 중 일부가 아나톨리아 고원에 정착했던 것이고, 그러한 정착 지점 중 한 곳이 바로 차탈 회윅이다. 다시 말해, 차탈 회윅 유적은 두 대륙이 만나는 아나톨리아 지역에서의 주민 이동이 가져온 매우 오래된 결실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차탈 회윅이 자리한 코냐 평원에 도착한 초기 농경민 집단은 챠르샴바 강의 지류가 지나가는 저습지대의 한가운데에 솟아 있는 마른 땅 위에 마을을 형성했다. 사실 최초의 마을이 정확히 어떤 형태였는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차탈 회윅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가 아직 최하층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마을 잔해를 통해 확인된 바에 의하면 주민은 단순한 관개시설을 이용해 밀과 보리를 재배했을 뿐만 아니라 완두콩도 키웠고, 열매로 술을 담그고 견과류를 짜서 식물성 기름도 얻었다. 또한 소와 양, 염소를 사육했을 뿐만 아니라 야생소의 일종인 오로크와 늑대, 여우 그리고 표범도 사냥했다.

    이렇듯 풍부한 식량 자원을 바탕으로 차탈 회윅의 주민들은 한곳에 계속 머물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한 지점에서 근 1000년 동안 존속된 마을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현재까지의 조사 내용에 따르면 차탈 회윅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여느 농촌 마을 혹은 도시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우선 이곳에는 거주용 주택만이 들어섰던 것으로 보이며, 뚜렷이 ‘공공건물’이라 여길만한 건물의 흔적은 아직 확인된 바 없다. 물론 그 ‘주택’ 중 일부는, 내부의 양상으로 미루어 볼 때, 사당과 같은 성격을 가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최소한 외관상으로는 건축물의 차별화가 포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고고학자들은 차탈 회윅 사회를 완전한 평등사회로 보고 있다. 차탈 회윅 마을의 또 다른 특이점은 주택의 성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흙 벽돌로 지어진 이 주택들은 마을의 초기 단계부터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아마도 인구밀도가 높아지자 주택들은 점점 더 밀집됐고, 나중에는 아예 외벽이 연결되었다. 참고로 이렇게 된 데에는 마을의 입지가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 마을이 애초에 저습지대 한가운데에 있는 마른 땅 위에 조성됐기 때문에 옆으로 확장하기는 힘들었을 것이고, 한정된 공간 내에 점점 더 많은 집을 짓다 보니, 결국에는 벌집 형태의 마을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차탈 회윅 주민들은 주택의 천장에 구멍을 뚫어 이것을 출입구이자 채광창이자 환풍구로 사용하기에 이르렀고, 또한 주택들이 연결된 옥상은 마을의 도로 및 광장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문명의 십자로에 우뚝 선 ‘차탈 회윅’에 담긴 비밀

    1 예리코 유적에서 나온 회반죽을 입힌 두개골 2 인류 최초의 지도인 ‘차탈 회윅 지도’ 3 차탈 회윅 마을의 복원도

    흑요석 교역망의 중심

    이 개별 주택의 내부 공간에 대한 조사내용을 보면 무엇보다도 벽에 회칠을 했다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차탈 회윅의 주민들은 주택의 모든 내벽은 물론 바닥 위에 조성된 단상에도 하얗게 회를 발랐다. 따라서 주택의 내부는, 비록 지붕에 나 있는 구멍 하나만을 통해 햇빛이 들어왔어도, 생각보다 훨씬 더 밝고 쾌적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이 현미경을 이용해서 잔존 주택 벽체의 단면을 관찰한 결과, 이러한 회칠은 여러 차례에 걸쳐, 그리고 주기적으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차탈 회윅 유적의 입지 자체가 이러한 회칠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즉, 농경지와는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저습지대에 마을을 계속 유지했던 것은 경작지와 목초지로 매일 오고 가는 번거로움이 있기는 하지만 바로 이곳의 저습지대에서 회벽의 원료가 되는 백악(白堊) 성분이 가미된 진흙 상태의 이회토(泥灰土)를 구할 수 있다는 편리함을 중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차탈 회윅의 주민들은 이렇게 정성스럽게 관리하던 주택을 주기적으로 폐기하고 그 위에 새로운 주택을 지었다. 현재까지의 조사 성과에 따르면 이러한 폐기와 재건축의 과정은 총 18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이 18개 층을 이루는 주택 잔해가 차곡차곡 쌓이면서 차탈 회윅 유적이 만들어졌는데 고고학자들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형성된 인공 언덕을 ‘텔(tell)’이라고 한다. 참고로 ‘텔’은 이 지역의 언어로 ‘언덕’을 의미한다. 사실 농경민 집단이 한곳에 정착했다고 텔 유적이 무조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텔 유적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수백 년에 걸쳐 한 지점에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주택의 주기적인 폐기와 재건축이라는 결코 보편적이지 않은 현상이 일어나야 한다. 결국 텔 유적은 독특한 거주 방식이 낳은 산물로 볼 수 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거주한 농경민들은 그러한 삶의 방식을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유럽 지역에서도 위에서 언급된 농경 확산의 두 번째 루트를 따라 이러한 텔 유적이 확인된다. 즉, 북부 그리스와 발칸 반도 그리고 북쪽으로는 헝가리 평원으로 연결되는 지역에 걸쳐 신석기 시대부터 조성된 텔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텔 유적의 분포를 통해 주택의 반복적인 재건축을 동반했던 독특한 삶의 방식이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처음 등장해 차탈 회윅 주민들에 의해서도 영위됐을 뿐만 아니라, 아나톨리아 지역을 거쳐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에 있는 유럽 남동부 지역으로까지 확산됐음을 알 수 있다.

    차탈 회윅에는 당시로서는 믿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수의 주민이 살았다. 이 글의 초반부에서는 아주 보수적인 계산법에 따라 그곳의 인구를 6000여 명으로 소개했으나, 마을의 최전성기에는 무려 1만 명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렇다면 차탈 회윅에서 이러한 대규모 인구를 지탱했던 경제적 기반은 무엇이었을까? 농경에만 의존해서 그러한 기반을 확보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특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이 흑요석 교역이다.

    흑요석은 검은색 계열의 화산석으로, 규산이 많이 포함돼 있어 그것을 깨뜨리면 마치 두꺼운 유리와 같은 파편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을 가공하면 금속 날 못지않게 날카롭고 정교한 돌날을 만들 수 있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이러한 흑요석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 그런데 흑요석은 화산 활동의 산물인 만큼 그것의 원산지는 매우 한정돼 있으며, 그 결과 화산석에 대한 수요는 광범위한 고대 교역망의 성립을 가져오기도 했다. 차탈 회윅의 경우에는 그곳으로부터 동쪽으로 140㎞ 떨어진 곳에 하산 닥(Hasan Dag) 화산이 있다. 차탈 회윅 주민들은 그곳에서 흑요석을 채취할 수 있었고, 그러한 흑요석의 교역을 통해 레바논의 삼나무나 지중해 해안가의 조개껍데기 등을 확보함으로써 그들의 건축과 문화와 미술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차탈 회윅 주민들의 죽음

    당시 주민들이 하산 닥의 화산지대에서 나오는 흑요석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일부 학자들에 의해 인류 최초의 지도라고도 불리는 ‘차탈 회윅 지도’를 통해 알 수 있다. 기원전 6200년경 사당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는 한 주택의 북벽과 동벽에 그려진 이 벽화에는 근경에 벌집 모양의 차탈 회윅 마을이 묘사돼 있고, 원경에 두 개의 봉우리를 가진 하산 닥 화산이 그려져 있다. 참고로 오늘날에도 차탈 회윅 유적에서 하산 닥 화산이 보인다고 한다. 화산의 봉우리 중 하나는 흑요석의 원료가 되는 용암을 분출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하산 닥은 당시에 활화산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그림은 하산 닥에 대한 경외심과 공포를 동시에 표현한 것으로, 차탈 회윅 주민들의 흑요석 숭배 신앙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흑요석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당시 주민들이 그것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차탈 회윅은 흑요석을 바탕으로 한 거대한 장거리 교역망의 한 거점으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흑요석의 주요 수출 지점이었던 차탈 회윅은 아나톨리아 지역뿐만 아니라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아우르는 장거리 교역망의 한쪽 끝을 이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교역망의 반대편 끝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남쪽으로 1000㎞ 떨어져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예리코(구약성경에 나오는 여리고성)였던 것으로 보인다. 요르단 강가에 위치했던 예리코의 신석기 시대 마을 역시 텔을 형성했는데[그 유적의 정확한 명칭은 틸 아 술탄(Tell el Sultan)이다], 이곳의 주민들은 가까이에 있는 사해로부터 당시로서는 아주 귀한 방수 재료였던 역청(瀝靑)을 확보해 이것을 수출하고 그 대신 차탈 회윅에서 온 흑요석을 얻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최첨단 원료에 대한 수요를 기반으로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남부 레반트 지역으로 이어지는 장거리 교역망이 형성됐고, 이 교역망을 통해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종교도 확산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차탈 회윅에서 죽은 자들은 어디에 묻혔을까? 놀랍게도 그들은 산 사람들과 공간을 나누어 썼던 것으로 보인다. 즉, 차탈 회윅에서는 주택의 바닥(특히 화덕이 있던 자리) 아래에서뿐만 아니라, 단상 아래에서, 심지어는 침대 시설 아래에서도 인골이 발견되는데, 인골의 상태를 보면 시신을 쭈그린 자세로 꽁꽁 싸맨 다음 바구니에 담거나 돗자리로 돌돌 말아 산 사람들의 공간에 함께 묻었던 것이다. 한편 해체된 상태의 인골들도 종종 발견되기 때문에 마을 외곽에 풍장(風葬)을 한 다음 뼈를 다시 추려오는 이차장(二次葬)의 풍습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단순한 풍장이 아닌 조장(鳥葬)이 행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조장의 증거는 차탈 회윅의 ‘독수리 사당’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7번 사당의 경우 두개의 벽면을 따라 거대한 독수리 일곱 마리가 그려져 있는데, 각 독수리의 펼쳐진 날개 길이가 무려 150㎝나 된다. 이 독수리들은 여섯 명의 사람 위를날고 있는 것으로 표현돼 있는데, 그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머리가 없다. 따라서 학자들은 이 벽화가 사람의 머리를 쪼아 먹는 독수리 신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6번 사당의 벽화에는 두 개의 목조탑 위에 앉아 있는 독수리들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한쪽 탑에는 독수리 두 마리가 사람의 머리를, 그리고 또 다른 탑에는 거꾸로 매달려 있는 머리가 없는 사람을 독수리 두 마리가 앉아서 내려다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조장은 기원 전후 무렵 조로아스터를 믿었던 페르시아인들의 매장 풍습이기도 했으며, 또한 쿠르드족의 매장 풍습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독수리 사당 벽화들을 통해 아나톨리아 지역과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의 문화적 전통 속에 조장이 전해져왔으며,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8000년 전에는 차탈 회윅 유적에서, 약 2000년 전에는 페르시아에서, 그리고 이후로도 쿠르드족 사이에서 계속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국제적 공동연구 진행 중

    마지막으로 차탈 회윅에서는 주택의 바닥 아래에서, 그리고 종종 마을의 다른 곳에서 사람의 두개골이 발견된다. 그런데 이는 그냥 두개골이 아니라 마치 살을 붙이듯 표면에 회반죽을 입히고, 또한 산 사람의 혈색을 재현하듯이 그 위에 황토로 색칠한 두개골이다. 이와 같은 두개골을 왜 산 사람들의 공간에 묻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의례적 행위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산 사람의 모습을 한 두개골을 묻는 행위는 흥미롭게도 아나톨리아 지역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 대신 시리아와 특히 예리코 유적에서 많이 확인되는 행위다. 따라서 차탈 회윅과 레반트 지역을 연결했던 장거리 교역망을 따라 의례적 요소도 전파됐음을 알 수 있다.

    차탈 회윅 유적의 발굴은 국제적인 공동연구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즉, 터키의 셀주크 대학과 이스탄불 대학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독일, 남아프리카, 그리스 등에 있는 대학의 연구자들도 발굴에 참가하고 있으며, 발굴을 주도하는 단장 이안 호더(Ian Hodder)도 스탠퍼드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는 영국인이다. 한편 차탈 회윅 유적의 발굴을 후원하는 단체들의 구성 또한 매우 국제적인데, 정유회사 쉘을 비롯해 보잉, 아이비엠, 비자 등과 같은 회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참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차탈 회윅과 같이 인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유적이 한국 영토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전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기에 앞서 ‘한국인의 위대한 유산’으로 인식돼 한국 정부와 한국 고고학계가 조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필자는 지난해 주(駐)한국 이스탄불문화원 원장인 후세인 이지트 씨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위와 같은 상황, 즉 차탈 회윅 유적 발굴이 소위 ‘외국’학자들에 의해 주도되는 상황에 대해 터키 국민이 불만을 표명하지는 않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그분은 뜻밖의 답변을 했다. 차탈 회윅 유적이 터키 사람들의 소유물이 아니라 전 인류의 자산인 만큼, 전 세계 학자들이 그것을 함께 발굴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답이었다. 이는 한국에서 고고학을 하는 필자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또한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답변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한편으로, 국경을 뛰어넘는 차탈 회윅 유적의 전 인류적인 중요성을 확인케 하는 답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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