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호

“한국-대만 단교 20년 아픔 딛고 경제·문화 협력해 상호발전 이뤄야”

왕진핑 대만 입법원장 단독 인터뷰

  • 대담·이인철 편집장 / 정리·송화선 기자

    입력2012-12-28 14:4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왕진핑(王金平) 대만 입법원장은 대만 정치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 1999년 우리나라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입법원장에 취임한 뒤 네 차례 연임을 거듭했다. 현재 14년째 입법부 수장으로 재임 중이다.
    • 1976년부터 37년째 대만 입법위원이기도 하다. 2012년 11월 성균관대는 정치적 업적과 글로벌 리더십 등을 평가해 그를 ‘SKKU Distinguished Fellow’ 1회 수상자로 선정했다.
    • 시상식 참석을 위해 서울을 찾은 왕 입법원장을 신동아가 단독으로 만났다.
    “한국-대만 단교 20년 아픔 딛고 경제·문화 협력해 상호발전 이뤄야”

    한국과 대만 간 교류 확대의 필요성을 역설한 왕진핑 대만 입법원장.

    “성균관대의 ‘SKKU Distinguished Fellow’ 첫 수상자로 선정된 데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이 상을 받도록 막후에서 성원과 지지를 보내준 한국의 선배·동료, 그리고 우리 대만 국민에게 감사합니다. 한국과 대만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저의 지위와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양국 관계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왕진핑 입법원장(72)은 ‘SKKU Distinguished Fellow’ 수상 소감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SKKU Distinguished Fellow’는 성균관대가 학문 및 사회 활동 등에서 뛰어난 성과를 낸 개인에게 주는 상이다. 그러나 왕 입법원장은 개인의 영광에 대해 결코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이 수상이 한국과 대만의 끈끈한 우의는 결코 끊길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왕 입법원장의 이번 방한은 개인 자격으로 이뤄졌다. 11월 29일 시상식을 포함해 3박 4일간 한국에 머무는 동안 그는 입법기관 수장으로서의 공식 의전을 받지 못했다. 1992년 8월 단교 이후 우리나라에서 대만은 국가가 아닌 탓이다. 한중수교 당시 우리 정부는 중국과 ‘하나의 중국’ 원칙에 합의했다. 이듬해 제정한 ‘대만과의 교류협력에 관한 기본지침’ 등에 따르면 대만 입법원장은 원칙적으로 방한이 불허된다. 왕 입법원장은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맞춰 축하 사절을 이끌고 내한했다가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채 돌아간 일이 있다. 한국 언론에 내한 사실이 보도된 뒤 중국 측이 강력히 반발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대만 고위급 인사 대거 방한

    이런 과거에 비하면 왕 입법원장의 이번 방문은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이뤄졌다. 장관급인 양용밍(楊永明) 대만 국가안전회의(우리의 국가정보원) 부비서장과 왕즈강(王志剛) 대만 대외무역발전협회장 등 정·재계 인사가 동행했다. ‘대만·한국 국회의원 우호협회’회장인 린더푸(林德福) 입법위원 등도 방문단에 포함됐다. 이들은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국내 각계 인사를 ‘비공식적으로’ 만났다.



    왕 입법원장이 한국 언론과 인터뷰를 가진 것도 이례적인 일이다. 그는 표면상 한·대만 간 학술교류 차원에서 진행된 이번 방한 일정 동안 한국 국민에게 대만의 메시지를 최대한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따뜻한 황금빛 넥타이를 매고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질문에 답하는 모습은 친근해 보였지만, 한·대만 관계와 국제사회 내 대만의 역할 등에 대한 의견을 밝힐 때는 30년 넘게 입법부를 지켜온 노정치인의 경륜이 느껴졌다.

    왕 입법원장은“양안(兩岸)의 장기적인 분할 통치 때문에 대만 외교는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 민주국가와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고, 실제로 많은 나라와 교류하고 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현재 대만은 미국을 포함한 세계 131개국과 무비자 여행 협정을 맺고 있다. 2009년에는 12년간 이어졌던 실패를 딛고 세계보건총회(WHA)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여했으며, 2010년 정부조달협정(GPA)에도 가입했다.

    한국과 대만 관계에도 최근 순풍이 불고 있다. 2012년 6월 양국 정부는 경제 분야 교류 확대를 위한 투자보장협정(BIT) 체결 협상을 시작했다. 같은 해 4월 서울 김포와 타이베이 쑹산(松山)공항 사이에 직항 항공편이 개통했고, 7월부터는 상호 무비자 방문기간이 종전 30일에서 90일로 길어지는 등 문화·관광 분야 협력도 확대되는 추세다.

    왕 입법원장은 “현재 대만과 교류하는 나라 중 어디도 그 이유로 중국과의 관계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목적 중 하나는 이런 내용을 한국 정부와 국민에게 알리고 양국 간 교류 확대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대만 단교 20년 아픔 딛고 경제·문화 협력해 상호발전 이뤄야”

    왕진핑 대만 입법원장의 SKKU Distinguished Fellow 수상 이후 축하연에서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는 왕 원장(왼쪽)과 백용기 서울·타이베이클럽 회장.

    대만이 이처럼 국제관계에서 자신감을 갖게 된 배경에는 2008년 마잉주(馬英九) 대만 총통 취임 후 이뤄진 중국과 대만 사이의 관계 개선이 있다. 마 총통은 천수이볜(陳水扁) 전 총통 시절 계속된 중국과의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겠다고 밝히며, 1992년 양안(兩岸)이 구두로 합의한 ‘공식(共識)’을 관계의 기초로 삼았다.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그 의미는 대만과 중국이 각자 해석한다’는 내용이다. 마 총통은 또 ‘不統 不獨 不武(통일도 독립도 추구하지 않으며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원칙도 밝혔다. 이에 따라 양국은 서로를 ‘중국’의 적통 정부로 여기되 상대의 통치권은 존중하며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됐다. 왕 입법원장은 “마 총통 취임 후 양안은 ‘양안경제협력구조협의(경제협력기본협정·ECFA)’를 비롯해 18개의 협정을 맺었고, 앞으로 더 많은 협정을 체결할 것이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꾸준히 협력하면서 평화로운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상태”라고 했다.

    “대만은 앞으로 국제사회와 선진 지구촌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합니다. 유럽과 미국 의회 등은 이미 대만이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와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등에 옵서버로 참여하는 것을 지지했습니다. 한국도 국제무대에서 우리를 위해 목소리를 내주면 좋겠습니다.”

    왕 입법원장의 바람이다.

    그는 한국과 대만의 경제 분야 협력 강화도 제안했다. 양국 경제는 이미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자료에 따르면 2011년 양국의 무역총액은 약 329억 달러. 대만은 우리나라의 6위 교역 파트너이고, 한국은 대만의 제4위 교역 대상국이다. 반면 상대국에 대한 투자는 미미한 상태다. 전문가들은 IT, 반도체 등 주력산업이 중복되는 데다 양국이 중국 시장을 놓고 경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에 대해 왕 입법원장은 “양국 산업이 닮은 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경제체제 면에서 볼 때 한국은 대기업이 막강하고 대만은 중소기업이 뛰어나기 때문에 한국 대기업과 대만의 중소기업이 협력하면 서로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양국 경제가 협력해야 하는 이유를 들며 한국과 대만의 ‘깊은 유대관계’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경제협력 강화

    “1970년대에 양국은 고속 성장을 거듭해 동아시아 지역 발전의 견인차 구실을 했습니다. 홍콩, 싱가포르와 더불어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에는 약속이나 한 듯 한국 , 대만 모두에서 민주화 물결이 일어나 대의정치가 실현됐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양국이 이룬 경제적, 민주적 성과는 괄목할 만합니다.”

    왕 입법원장의 설명이다. 그는 “이런 공통점을 바탕에 둔 양국이 현재 ‘한·대만 투자보장협정’을 추진 중인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라며 “이 협상을 조속히 마무리 짓고 ‘한·대만 기상협력협정’ 과 ‘한·대만 자유무역협정’ 등에서도 소기의 성과를 거둔다면 양국 관계가 더욱 발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근 10여 년간 한국은 아주 눈부신 발전을 이뤘습니다. 저는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고 추앙받는 것을 잘 압니다. 한국의 발전을 축하하고 존경하며,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산관학(産官學) 협력과 대기업의 성공에 대해 경탄하고 있습니다. 또 한국이 세계 각국과 FTA를 맺은 것에 대해서도 경탄합니다.”

    왕 입법원장의 말이다. 그는 “개인이 발전하려면 반드시 존경할 만한 라이벌이 필요한데, 한국은 대만이 절대적으로 존경할 만한 협력 파트너이자 라이벌”이라고 했다. 그는 이번 방한기간에 삼성인력개발원을 방문해 전시관 등을 돌아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밝혔다.

    왕 입법원장이 ‘경탄’한 대상은 또 있다. 대만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불고 있는 한류 열풍이다. 그는 구체적으로 “한국 드라마는 대만 주부 생활의 일부분이 됐고, 한국 스타들은 대만 젊은이의 우상”이라고 소개했다.

    “3년 전 적도 부근 날짜 변경선에 위치한 키리바시공화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현지 방송국도 없는데 집집마다 비디오와 TV 를 구입해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었습니다. 한국 문화의 매력이 언어의 장벽을 넘어 세계 곳곳에 전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대만의 한류 열풍

    이야기를 이어가던 왕 입법원장은 “한국 가요나 드라마 중 아는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곧장 ‘강남스타일’을 언급하며, 싸이의 말춤을 흉내 내듯 가볍게 몸을 흔들어 보였다. 웃음 띤 얼굴로 후렴구 ‘강남스타일~’을 흥얼거리기도 했다.

    “이 노래를 들으면 아주 흥이 납니다. 이 외에 드라마 ‘대장금’과 ‘성균관스캔들’도 잘 압니다. 한국의 문화 콘텐츠에는 창의력과 자신감이 가득합니다. 그런 연예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세계적인 유행을 주도하면서 한국 경제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만·한국 국회의원 우호협회’ 명예회장을 맡는 등 대만 입법원 내의 대표적인 ‘친한파’로 꼽히는 그는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 보였다. 각종 현안에 대해 막힘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특히 “입법원장 취임 뒤 한국 정치계 및 재계, 학계 인사를 두루 만났다”며 김영삼 전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과의 인연에 대해 들려주기도 했다.

    왕 입법원장이 박 당선인에게서 받은 인상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념이 확고하고 여러 방면에서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는 것. 그는 “대만 입법원을 방문했을 때 두 번쯤 만났는데, 세계의 보편적인 가치인 민주, 자유,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왕 입법원장은 이어 한국 의회와의 정치 교류에도 관심을 갖고 있음을 피력했다. 대만 입법원은 한국 못지않게 여야 간 대립과 갈등이 심한 것으로 유명하다. 회의 도중 여야 의원이 육탄전을 벌이기도 한다. 이에 대해 왕 입법원장은 “대만의 양대 정당은 주장과 이념이 많이 다르다. 특히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종종 충돌이 발생한다. 하지만 가능한 한 협상과 소통으로 해결하려 한다”고 밝혔다. 그는 최근 한국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국회 개혁’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며 대만 입법원에서 있었던 개혁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왕 입법원장에 따르면 첫 개혁 요구는 1991년 나왔다. 1949년 국민당이 대만으로 천도하기 전부터 의원을 했던 이들에 대한 퇴진 요구였다.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 40년 이상 의원직을 유지했던 이들이 퇴진했다. 왕 입법원장은 “이후에도 225명이던 의원 정수를 113명으로 줄이고, 비례대표 공천 때 여성할당제를 실시하는 등의 개혁이 이뤄졌다”며 “대만 입법원은 지금도 의사(議事)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 중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 한국 국회와 많은 의견을 나누고 싶다”고 밝혔다.

    ‘교류협력 기본 지침’

    시종 차분하게 인터뷰에 응하던 왕 입법원장이 딱 한 번 자리를 고쳐 앉은 건 “대만 사회 일각에 여전히 단교로 인한 반한감정이 남아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다. 그는 “대만 내에서 종종 한국 제품과 문화 콘텐츠 등에 대한 불매운동이 벌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자 즉시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다. “20년 전 한국과 대만이 단교했을 때 많은 대만인이 안타깝게 생각한 건 맞다. 이후 냉각기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 발전상의 필요에 의해 양국 관계는 회복됐으며, 지금은 아주 긴밀해졌다”는 설명이다. 동석한 비서실장의 가방을 가리키며 “저것도 한국 제품이다. 매우 품질이 우수하고 디자인이 세련됐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의 바람은 한국이 1993년 제정한 ‘대만과의 교류협력에 관한 기본지침’을 검토해 현 상황에 맞는 방향으로 개정했으면 하는 것이다. 왕 입법원장은 “우리는 양안의 안정과 평화 유지만이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의 번영과 평화 수호를 이루는 길임을 잘 알고 있으며, 지난 20년 사이 양안 관계는 크게 달라졌다”며 “한국 정부가 대만과의 정부 간 교류에 여러 제한을 두고 있어 양국 관계 발전에 어려움이 많은 만큼, 변화된 상황에 맞춰 양국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한국과 대만은 민주정치 체제와 자유시장경제 등 세계 보편의 가치를 함께 실현하고 있는 가장 가까운 형제이자 우방국”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왕 입법원장이 밝힌 자신의 외교 철학은 ‘좋은 인연을 두루 맺고, 세계와 손 잡자(廣結善緣 接軌世界)’이다. 양안 관계의 훈풍에 따라 한국과 대만 관계, 나아가 대만의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이 어떻게 변화될지 주목된다.

    한국-대만 단교 20년史

    친구 관계서 절교, 다시 친구로


    서울·타이베이클럽 등 민간교류 활발


    “한국-대만 단교 20년 아픔 딛고 경제·문화 협력해 상호발전 이뤄야”

    1992년 8월 24일 서울 명동 대만 대사관에서 열린 하기식에서 대만의 국기 청천백일기가 내려가는 모습.

    1992년 8월 24일 오후 4시, 서울 명동 대만대사관에서는 ‘청천백일기’를 내리는 ‘하기식’이 열렸다. 한국과의 국교 단절로 대사관을 비워주게 된 직원과 화교 등 수천 명은 대사관 내 쑨원(孫文) 동상 앞에 모여 ‘忘恩負義(망은부의·은혜를 잊고 의를 저버렸다)’ ‘Long Live ROC(중화민국이여 영원하라)’ 등의 글귀가 적힌 플래카드를 든 채 눈물을 흘렸다. 진수치(金樹基) 당시 주한 대만대사는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 외무장관은 한중수교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다가, ‘한중 외교관계에 상당한 진전이 있다’고 밝힌 지 불과 이틀 만에 일방적으로 단교 의사를 통보했다”며 분노했다.

    당시 우리 정부가 대만 측에 최후의 순간까지 한중수교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대만대사관 등 대만 정부의 한국 내 재산 문제 때문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1991년 동아일보에 따르면 서울 명동 대만대사관의 가치는 시가 3200억 원에 달했다. 우리 정부는 1883년 청국(淸國) 공관으로 출발해 해방과 함께 국민당 정부 소유가 된 이 건물을 한중수교 후 중국 측에 귀속시킬 뜻을 갖고 있었다. 반면 대만 측은 이 재산을 중국에 넘기지 않기 위해 한중수교가 진척될 경우 사전에 매각할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공식적으로 우리 정부에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단교 통보로 이를 미처 처리하지 못한 채 한국을 떠나게 되자 대만이 느낀 분노는 한층 커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세계 각국은 대만과의 국교를 중단했다. 하지만 재산을 처리하는 방식은 각각 달랐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1979년 미중수교 당시 대만정부가 자국 대사관저를 주미 대만친선협회에 1달러 가격에 매각하는 것을 허용해 사실상 대만이 재산권을 유지하도록 했다. 사우디아라비아도 1990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대사관을 ‘대만무역대표부’로 개칭해 그대로 사용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대만은 한국의 처사에 크게 반발했고 항공기 운항 금지, 한국산 과일 수입 거부, 자동차 수출 쿼터 취소, 국토개발사업 한국 업체 참여 불허 등의 보복조치를 취했다.

    한국 정부도 한중수교 당시 합의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대만과의 교류협력에 관한 기본지침’과 ‘대만인사 주요 접촉 허용원칙’ 등을 제정해 양국 교류를 제한했다. 아·태정책연구원이 발간하는 ‘아태포커스’ 2009년 5월호에 일부 공개된 이 지침의 내용을 보면 △청와대, 총리실 소속 공무원 : 원칙적으로 대만 공무원과 불접촉 △외교통상부, 통일부, 국방부 소속 공무원 : 차관보급 이상은 원칙적으로 양자 접촉 불허(국장급 이하는 비공식 접촉 가능) △여타 부처 소속 공무원 : 차관급 이상은 대외보안 전제하에 사안별로 비공식 접촉 허용(차관보급 이하는 비공식 접촉 가능) △양측 정치인 상호 방문은 비제한. 다만 우리 국회의장, 여당 대표의 대만 방문은 자제. 대만 측 국민대회의장, 입법원장, 여당대표 방한은 원칙적으로 불허 △대만이 회원인 국제기구(WTO, APEC) 등에서 양자 접촉은 국제기구 관련 문제 토의 목적인 경우 가능 등으로 규정돼 있다.

    이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고, 1948년 8월 13일 정부 출범 전 공식 수교를 맺었던 한국과 대만의 ‘형제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어긋나게 됐다. 단교 1년여 뒤인 1993년 11월과 1994년 1월 각각 주(駐)타이베이 한국대표부와 주(駐)한국 타이베이대표부를 설치하고 비공식적인 교류를 재개했지만, 2005년 3월에 이르러서야 양측의 항공 정기노선이 재개됐을 만큼 냉각기는 오래갔다.

    2002년 한국과 대만의 민간외교 활성화를 위해 결성된 ‘서울·타이베이클럽’백용기 회장(거붕그룹 회장)은 “대만대사관 하기식 날, 평소 알고 지낸 대만인을 위로하기 위해 현장에 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이 오랜 친구를 일방적으로 내치는 모습이 부끄러웠고, 나라도 나서서 대만인의 마음을 위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뜻있는 지인들과 함께 대만 주요 인사가 한국을 방문하면 환영행사를 열고, 대만 기업인의 한국 산업시찰을 주선하며, 대만이 태풍 모라꼿으로 피해를 입었을 때는 성금을 전달하는 등 ‘좋은 친구’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왕진핑 입법원장 등 대만 정·재계 관계자들과 친분을 쌓아 이번에 왕 입법원장이 ‘SKKU Distinguished Fellow’를 수상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한국과 대만의 관계는 이 같은 민간의 노력과 양국의 경제·통상 차원의 필요에 의해 차차 개선되기 시작했다. 한류 열풍도 관광·문화 등 민간 교류를 활성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현재 대만 98개 대학과 한국 185개 대학이 자매결연을 했으며, 양국의 유학생 수는 매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인터뷰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