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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장편소설

둔주곡(遁走曲) 80년대

제1부 / 제국에 비끼는 노을 | 7화. 봄 같지 않은 봄의 오후

  • 이문열

둔주곡(遁走曲) 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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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때 한쪽은 추진력은 강했지만 절대 믿을 수 없고 양심도 없고 잔인하고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쪽은 사람의 모습에 짐승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1982년 7월, 한국 주재 미 고위 외교관이 본국 언론에 보낸 서한의 한 구절.
[일러스트·박용인]

[일러스트·박용인]

1.
어떤 기대 또는 선입견 탓이었을까, 새마을 특급열차가 서울역 구내에 들어설 때부터 역 광장 쪽의 무언가 차가우면서도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까닭 모를 불안까지 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일부러 고속버스를 타지 않고 기차로 서울역에 내렸는데…. 실망에 가까운 그런 기분은 기차에서 내려 역 구내를 빠져나오면서 점점 더 심하게 그를 몰아대더니, 집표구를 나와 텅 빈 서울역 광장으로 들어서면서부터는 묘한 적막감 같은 것으로 다가왔다. 

통신사 유인물에도 학생들의 자발적 회군(回軍)이라는 말이 있긴 했지만, 그리고 새마을호 객실에서 들은 방송에서도 대학들은 대부분 학내에서의 토론으로 열기를 식히고 있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지만, 벌써 오후 1시를 넘겼는데도 여전히 텅 빈 광장을 보자 조금은 허탈한 기분까지 들었다. 아무리 시위 지도부의 결정이라 해도 어제까지 10만 시위대가 몰렸다는 광장이, 그리고 저녁 6시 무렵에는 시내버스를 몰고 전경들에게 돌진해 다수한 인명사고까지 낸 살기 띤 열정 혹은 광기가 하룻밤 새 이렇게 평온과 적막으로 시치미를 뗄 수 있는가. 

그는 무언가 속은 것 같은, 아니면 놀림당한 것 같은 기분으로 건너편 대우빌딩 쪽을 살폈다. 대학 시절 5층 높이로도 웅장하기 그지없던 건물이 있던 자리에 몇 해 전 새로 들어선 20여 층 현대식 고층빌딩이 새삼 위압적으로 다가들었다. 그러나 평소에도 사람의 왕래가 끊이지 않던 빌딩 앞 보도는 말할 것도 없고, 건물 옆으로 난 몇 가닥 골목 입구나 인근 높고 낮은 건물 그늘에도 그날따라 이상하리만치 인적이 뜸해, 그가 머릿속에서 그리고 왔던 광경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서울역 광장 주변을 연출하고 있었다. 

한참을 둘러봐도 특별하게 의미 있는 다중의 흔적이나 은밀한 이합과 집산의 기미를 찾지 못한 그는 옛날 포장마차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섰던 곳에 들어선 몇 개의 가판대를 보고 그리로 가보았다. 역 구내의 홍익회 매점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그 가판대들 가운데서 그의 물음에 대답을 잘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찾고 있는데, 선 채 음식을 먹게 되어 있는 목로 같은 곳에 방금 라면을 끓여낸 중년 사내가 쭈뼛거리며 다가가는 그에게 흘깃 눈길을 보냈다. 

“여기 콜라 한 캔 주시오. 거북선 한 갑도요.” 

그는 대뜸 그렇게 주문해놓고 중년 사내가 그것들을 내오자 값을 치르면서 눈을 맞추기 바쁘게 물었다. 

“어제 그렇게 요란스러웠다는데 오늘은 어째 조용하네요. 오전에도 이랬어요?” 

“뭐 건물 그늘이나 골목 어귀 같은 데서 몇 명씩 모여 빼꼼빼꼼 내다보는 눈길은 더러 있었지만, 데모라고 할 만큼 떼 지어 나온 학생들은 없었어요. 용케 한 무더기 모여 웅성거리다가도 경찰기동대 아이들이 덮칠 기미라도 있으면 꽁지가 빠지게 내빼버리고. 내 기억에 오늘 플래카드에 대학 이름 밝히고 나선 대학교는 하나도 없었지, 아마.” 

“뉴스로 본 거지만, 굉장했다면서요. 어제. 호왈(號曰)십만이었다던데….” 

“오후에 한창 기세가 올랐을 때는 호왈백만인들 못 불렀겠어요? 그런데 요새 대학생들 참 영악해요. 우리도 어제 학생들이 지도부 결정에 따라 제 발로 돌아갔다는 말은 들었지만, 오늘 정말로 이리 쥐 죽은 듯 조용할 줄은 몰랐지요. 어디나 호전적인 극단파들이 있었을 텐데. 걔네들이 모든 짐은 최규하 대행 정부와 신군부 사람들에게 떠맡겨버리고 학내로 돌아가 느긋하게 농성하며 기다릴 줄도 아는 게 정말 신통하지 않아요?” 

“시내버스로 경찰기동대와 전경을 덮쳐 깔아 죽인 일에 연루될까 봐 자제하는 줄 알았는데, 오늘 일을 그렇게 해석하는 방법도 있군요. 모든 걸 정부와 계엄군에게 떠맡겨버리고 학내로 돌아가 느긋하게 기다린다, 라….” 

가판대 주인의 말을 그가 그렇게 받자 가판대 주인이 갑자기 무안한 듯한 얼굴로 더듬거리며 받았다. 

“에이, 그거, 나도 들은 말이에요. 실은 오늘도 학생들 서울역 앞 데모 가지고 다 아는 성스럽게 떠드는 거, 이게 벌써 세 번째예요. 요즘은 손님처럼 데모 구경 나온 사람도 많아 지난 주일 그 사람들이 커피믹스 잔 들고 떠드는 얘기 들은 것만도 열 번은 넘을 거예요. 긴급조치가 풀려 그런지 대한민국 성인 남자는 모두 정치평론가가 다 되었고….” 

서울의 신문사와 잡지사와 출판사의 동시 호출을 받아 그달치의 금토 하루 반 출장과 2박 3일 상경 길에 오르면서, 그가 굳이 기차를 탄 것은 전날 서울역 광장 일대에서 그 규모로 한 정점을 찍었다는 학생 시위대를 가까이서 한번 바라볼 수 있을까, 해서였다. 5월 들어 거리로 뛰쳐나오기 시작한 대학생들이 그 한 주일 서울역 광장으로 몰려들면서, 그는 대학 시절 동급생들에게서 느꼈던 것보다 더한 괴리감과 이질감으로 그들 새로운 세대의 시위 양태를 궁금히 여겼다. 그런데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면 따로 시간을 내 그들이 몰려드는 서울역 광장을 찾아봐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우정 기차를 탄 것이었다. 

한 번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적은 없지만, 1969년 겨울 그가 서울을 떠나기 전까지 보고들은 학생시위는 언제나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는 데서 시작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해산하면서 끝이 났다. 4·19 막바지에 경무대나 이기붕의 집으로 몰려간 것을 마지막으로, 그 뒤의 학생시위는 기껏 거리 행진과 경찰과의 투석전 그리고 연행과 도주가 절정이 되었고, 끝은 대개 어렵게 버텨낸 대오의 캠퍼스 귀환과 해산으로 마무리됐기 때문이다. 그 뒤 후문으로 들은 유신 시절의 학생시위도 그 이상의 일탈은 없었던 것 같았다. 강화된 대학 교련이나 서슬 푸른 유신의 위하(威哧)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더듬어가다가 그는 문득 대학 시절 마지막으로 겪은 학생시위의 한 변형과 이제는 목가적으로 들릴 만큼 온건하게 기억되는 그 시절의 어떤 별난 시위와 그 진압 과정을 떠올렸다.


언젠가, 아마도 3선 개헌 반대 시위가 시들해갈 무렵의 일일 것이다. 누군가 학교 담 안쪽에서 예고 없이 학교 옆 4차선 도로를 지나가는 대통령과 경호 차량 행렬 앞쪽으로 시멘트 벽돌 한 장을 내던진 일이 있었다. 잔자갈 섞인 굵은 모래를 접착 강도가 떨어지는 시멘트에 말아 대강 찍어 여름 볕에 바짝 말린 불량 혹은 날림 벽돌이 아니었던가 싶다. 넓은 길 한가운데까지 날아가 저만치 다가오는 대통령 호위 차량 앞에 떨어지는데, 흙덩이처럼 풀썩 먼지를 내며 부스러져 사방으로 흩어지는 게 마치 허술한 폭발물 불발탄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런 느낌이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경호팀을 자극해 과잉 충성을 촉발해서인지,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는 그 일은 뜻밖으로 거창하고 요란스럽게 발전했다. 

대통령이 탑승한 차가 그때까지의 차선을 버리고 다른 차선으로 바꿔 학교 앞을 지나치고, 잠깐 멈칫했던 선두 오토바이 기동대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따라갈 때만 해도 그 돌발적인 일은 그냥 별거 아닌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앞서가던 오토바이 몇 대가 뒤로 처져 학교 정문 쪽으로 되돌아가고, 이어 뒤따르던 경호 차량 두 대가 소리 없이 서더니, 거기서 무장병력 몇이 뛰어내려 그들 오토바이를 세우고 기다리던 기동대와 합세하면서 일이 터졌다. 

어디서 어떻게 어떤 명령을 수령했던지 그들은 곧 두 조로 나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기동대 복장을 한 조는 원래 휴교령으로 정문에 배치돼 있던 몇 명 경계병과 합세해 교문을 장악하고, 검은 양복을 입은 다른 조는 학교 안으로 뛰어들어 후문부터 막았다. 그리고 나머지도 호루라기를 불며 학교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달려가는 게 아마도 단과 대학 전체를 봉쇄하려는 것 같았다. 

그 무렵은 그가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인가 하는 시험으로, 4년제 대학을 졸업하지도 않고 법대 3년을 수료하지 않아도 사법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따낸 직후라 심사가 복잡할 때였다. 고시 준비를 핑계로 학교를 때려치울 구실은 마련했지만, 막상 학교를 떠나려니 다시 홀로 걸어야 할, 기약 없어 멀고 고단할 길이 갑자기 아득하고 막막해졌다. 그래서 3선 개헌 반대 데모로 휴교 중인데도 집으로 내려가지 않고, 시험 준비를 핑계로 얻은 하숙집에 눌러앉아 대학에서의 마지막 두 달을 그야말로 ‘무모하게’(그때 그들에게 무료한 것은 바로 무모한 것이었다) 죽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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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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