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호

동물萬事

케냐의 식인사자는 왜 성인 남자만 사냥했을까

식인사자 가죽, 두개골 소유권 다툼

  • 이강원 동물칼럼니스트

    입력2019-06-07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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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년 베를린회담으로 서구 열강의 ‘아프리카 땅따먹기’가 일단락된다. 본격적 수탈이 시작된 후 영국 식민지 케냐에서 굉장히 특이한 성격의 참사(慘事)가 발생한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사나운 야생동물인 수사자들이 수탈의 상징이던 철도공사 현장에서 사람을 공격한 것. 식인사자들은 절제를 몰랐다. 닥치는 대로 사람을 잡아먹었다. 케냐와 미국은 현재 식인사자들의 가죽과 두개골을 두고 소유권 다툼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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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 지도는 누군가 자를 대고 국경선을 그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실이 그렇다. 130여 년 전 열강(列强)의 대표들이 유럽에 모여 아프리카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열강은 아프리카가 가진 다채로운 특징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자국의 이해관계에 입각해 그렇게 선을 긋고 말았다. 

    1884년 11월 15일 신생 독일제국(German Empire) 수도 베를린에서 당대 유럽의 최고 실력자 오토 폰 비스마르크 주재로 특별한 의미를 가진 회의가 열린다. 왜 하필 독일 수도에 유럽의 열강이 모여 회의를 열었는지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독일은 오랜 기간 소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국토가 조각나 있으면 주변 강국의 간섭이 많게 마련이다. 독일은 프랑스 같은 주변 강국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9세기 초반 유럽 최강자는 프랑스제국(First French Empire)의 황제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이었다. 당시 프로이센왕국(Kingdom of Prussia)을 제외한 독일의 소국들은 프랑스제국이 주도한 괴뢰정부인 라인연방(Confederation of the Rhine)에 가입해 프랑스의 수하 역할에 충실했다. 독일로서는 수치스러운 역사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로이센왕국은 독일 통일을 꿈꾸었다. 통일 독일이 유럽 최강으로 굴기(崛起)할 큰 그림도 그렸다. 왕국이 선택한 길은 군국주의다. 프리드리히 1,2세를 거치면서 군국주의의 기반을 다진다. 



    독일 통일의 전기는 1862년 내각 총리로 비스마르크가 취임하면서 찾아온다. 그는 철혈재상(鐵血宰相)으로 유명하다. “통일을 위해 독일인의 철과 피가 필요하다”고 주창한 인물이다.

    통일독일제국의 탄생

    프로이센의 최대 장점은 강력한 군사력이었다.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에 반대하거나 부정적 견해를 가진 주변국을 하나씩 제압했다. 1864년 북쪽의 덴마크왕국과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 기세를 몰아 1866년 남쪽의 숙적 오스트리아제국까지 격파했다. 그러곤 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이던 프랑스 제2제국(Second French Empire)을 보불전쟁(Franco-Prussian War)을 통해 무찔렀다. 

    프랑스 처지에서 독일 통일은 매우 거북한 일이었다. 피할 수만 있으면 꼭 피해야 했다. 국경선 너머에 ‘통일독일제국’이라는 강력한 군국주의 국가가 등장하는 것은 프랑스에 악몽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프랑스는 독일 남부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통일을 방해했다. 

    보불전쟁 발발은 사실 시간문제였다. 예상과 달리 프로이센이 아닌 프랑스가 전쟁 시작 단추를 눌렀다. 1870년 프랑스는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포문을 열었다. 프로이센은 전쟁 준비가 완료된 상황에서 프랑스의 공격을 받았다. 전쟁은 이듬해 프로이센의 승리로 종결됐다. 프랑스는 황제인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마저 포로 신세가 돼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독일이 통일로 가는 길은 비스마르크의 말대로 프로이센 군인들과 그 주변국 군인들의 ‘피’로 열렸다. 통일의 주역인 비스마르크는 독일제국의 전신인 프로이센왕국 시절까지 포함해 28년 동안이나 총리 직책을 맡으며 통일의 기반과 통일 후 제국의 성장을 견인했다. 

    프로이센은 1871년 1월 파리에서 통일독일제국을 선포했다. 유럽 대륙의 중심 국가 자리는 프랑스에서 통일독일제국으로 넘어갔으며 파리 대신 베를린이 국제회의 장소로 각광받게 된다. 

    1884년 유럽 최고 실세 비스마르크가 주재한 회담은 후일 베를린회담(Berlin Conference)으로 명명된다. 콩고에서 벌어지는 열강의 각축 등 아프리카 문제를 해결하고자 회의가 소집됐다. 포르투갈, 벨기에, 프랑스 등이 탐험가와 군인을 보내 식민지로 개척하던 콩고에서는 영토 갈등이 진행되고 있었다. 베를린회담에서 콩고는 벨기에왕국 레오폴드 2세(Leopold II)의 사유지인 콩고자유국(Congo Free State)이 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식민지 경계선 긋기

    레오폴드 2세가 콩고자유국을 차지한 후 인구가 1000만 명 넘게 줄었다는 주장이 나올 만큼 콩고에 대한 식민 지배는 가혹했다. 원주민들은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강제 노동을 했는데, 목표량을 채우지 못하면 손과 발, 목이 잘려나갔다. 강제 노역과 신체 절단에는 어린아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콩고에서 벌어진 수탈과 악행의 역사는 영화 ‘레전드 오브 타잔’을 통해 일부 소개돼 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비단 콩고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다른 아프리카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열강 각국 사이에서 갈등이 조정되지 않으면 국지전 혹은 전면전이 발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래서 유럽 열강이 베를린에 모여 콩고를 비롯한 아프리카 문제를 토론할 국제회의를 연 것이다. 

    아프리카인을 제외한 상태에서 열강 대표들만 모여 아프리카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비도덕적이며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하지만 19세기는 논리나 도덕이 국제사회를 지배하던 시기가 아니다. 힘의 논리가 온 세상을 지배하던 약육강식의 시절이었다. 

    베를린회담의 목적은 명료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국경선을 최종적이면서 불가역적으로 확정하는 게 목표였다. 여기서 말하는 국경선은 독립국들 사이의 경계가 결코 아니다. 열강 각국이 점거한 식민지의 경계선을 가리킨다. 

    베를린회담이 열린 19세기 말 열강은 ‘배가 고팠다’. 과거에는 식민지 착취를 통해 비교적 쉽게 배를 불렸으나 주머니가 거의 비어가고 있었다. 아메리카 식민지 대부분이 독립전쟁 등을 통해 홀로 섰다. 배고픈 열강 처지에서는 지속적 경제 발전과 새로운 국부 창출을 위해 아메리카를 대체할 대형 식민지 개발이 절실했다.

    ‘총’ ‘칼’ ‘자’

    영화 ‘고스트 앤드 다크니스’. [ⓒIMDb]

    영화 ‘고스트 앤드 다크니스’. [ⓒIMDb]

    새로운 식민지 후보는 아프리카였다. 열강이 원하는 조건을 갖춘 약속의 땅이었다. 본국인 유럽에서 가까워 관리하기도 쉬웠다. 위기가 발생하면 본국에서 신속하게 파병하는 게 가능했다. 지하자원과 임산자원도 풍부했다. 

    잇속을 따질 때 주판알 튕기기는 누구나 간단하게 하지만 현실은 복잡하기 마련이다. 아프리카 곳곳에서 더 넓은 땅, 더 좋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열강의 치열한 다툼이 일어났다. 열강의 싸움은 먹이를 놓고 다투는 초원의 늑대나 사자와 다를 게 없었다. 

    베를린회담이 종료된 1885년, 아프리카에는 단 두 개의 독립국만 남는다. 다른 나라는 모두 열강의 식민지가 됐다. 유이(唯二)하게 남은 나라는 1847년 미국의 해방노예들이 서아프리카에 세운 라이베리아공화국(Republic of Liberia)과 유럽 침략군을 물리친 에티오피아제국(Ethiopian Empire)뿐이었다. 열강이 ‘총’ ‘칼’ ‘자’를 들고 아프리카를 삼켜버린 것이다. 

    베를린회담 이후 땅따먹기 경쟁은 일단락된다. 수탈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후 영국 식민지 한 곳에서 굉장히 특이한 성격의 참사(慘事)가 발생한다. 참사는 자연재해나 사람들이 벌인 어처구니없는 실수에서 비롯하게 마련인데 케냐에서 벌어진 사건은 성격이 사뭇 달랐다. 참사를 일으킨 주체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사나운 야생동물인 수사자들이었다. 희생자 대부분은 여성이나 어린아이가 아닌 신체가 건강한 성인 남성이었다. 

    이 참사는 가상의 섬인 스컬 아일랜드의 초대형 고릴라인 킹콩이나 아프리카 밀림에 사는 ‘유인원의 왕 타잔(Tarzan of the Apes)’처럼 꾸며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이 더 컸다. 이 사건은 세 차례에 걸쳐 영화로 제작된다. 1996년 개봉한 작품은 제6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향편집상을 수상했다. 

    1996년 작 ‘고스트 앤드 다크니스’는 영국 식민지 케냐에서 사자들이 일으킨 참사를 배경으로 한다. 영화의 수준은 보통 출연 배우의 면면만 봐도 알 수 있다. ‘고스트 앤드 다크니스’의 주연은 두 명인데 영국군 중령 존 헨리 패터슨 역할을 맡은 발 킬머의 비중이 더 높다. 그는 1995년 ‘배트맨 포에버’에서 배트맨 역할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배트맨, 슈퍼맨 같은 영화에서 슈퍼 히어로 역할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최고 인기 배우여야 가능하다. 또 다른 주연은 마이클 더글러스였다. 

    ‘고스트 앤드 다크니스’에서 두 주연 배우의 연기는 잘 부각되지 않는다. 숨어 있는 주연이 있기 때문이다. 러닝타임 내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연기를 한 배우들은 사람이 아니다.사자들은 영화에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고스트(Ghost)와 다크니스(Darkness) 역할을 한 수사자들이다. 고스트와 다크니스는 귀신과 어둠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참사 당시 사람들이 녀석들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귀신과 어둠

    고스트와 다크니스의 활동 무대는 케냐의 차보(Tsavo)다. 차보에는 지금도 수많은 야생동물이 서식한다. 영국은 생태학적 중요성을 인정해 1948년 차보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했다. 케냐에서 규모가 가장 큰 국립공원으로 면적이 2만900㎢에 달한다. 경상북도(1만9000㎢)보다 크고 경기도(1만175㎢)의 두 배가량이다. 

    사자는 무리를 이뤄 생활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우두머리 수사자들을 중심으로 암사자와 새끼들이 ‘프라이드(pride)’라고 불리는 무리를 이룬다. 사자들은 먹잇감으로 체구가 큰 대형 발굽동물을 좋아한다. 물소, 얼룩말, 영양의 일종인 누(Gnu) 같은 대형 동물 성체는 몸무게가 수백㎏에 달한다. 사냥감 무게가 이 정도는 돼야 사자 무리가 배불리 먹을 수 있다. 

    떠돌이 수사자 중에는 더러 혼자 사는 녀석도 있으나 고스트와 다크니스처럼 짝지어 다니는 게 더 일반적이다. 수사자, 암사자, 새끼사자로 이뤄진 프라이드에 속하지 못한 수사자들이 같이 사는 것은 그 나름 이유가 있다. 혼자 생활하는 것보다 무리를 이루는 게 안전에 유리한 데다 사냥 성공률 또한 높일 수 있으며 프라이드를 구성할 기회도 잡을 수 있다. 

    만약 고스트와 다크니스가 체구에 걸맞은 먹잇감인 발굽동물을 열심히 사냥하고 잡아먹었다면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천수를 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녀석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다. 사람도 사냥했다. 

    모든 동물은 생존 본능(instinct for survival)을 가졌다. 본능이 행동을 지배한다. 야생동물 DNA에는 사람을 공격하는 게 생존에 유리하지 않다는 점이 각인돼 있다. 고스트와 다크니스가 왜 사람 사냥을 전문적으로 했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어떤 이들은 두 녀석이 덩치 큰 얼룩말이나 물소를 사냥하다가 턱을 다쳐 비교적 손쉬운 사냥감인 사람을 선택했다고 주장한다. 다른 이들은 녀석들이 철도 공사장 인근에서 우연히 인육(人肉)을 맛보고 그 맛에 빠져 식인(食人)을 전문으로 하게 됐다고 본다. 

    케냐의 일부 전문가들은 우역(rinderpest·牛疫)을 원인으로 지목한다. 고스트와 다크니스가 활동한 19세기 말 차보에서 우역이 창궐해 사자의 주식인 발굽동물 수가 줄었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우역은 치사율이 높은 바이러스성 전염병이다. 소는 물론이고 물소나 기린, 멧돼지 같은 동물도 감염된다. 우역이 원인이라면 고스트와 다크니스는 사람 사냥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식인에 나섰다고 할 수 있다.

    만용(蠻勇)의 끝

    미국 시카고 필드뮤지엄에 전시된 차보의 식인사자들. [ⓒThe Field Musuem]

    미국 시카고 필드뮤지엄에 전시된 차보의 식인사자들. [ⓒThe Field Musuem]

    고스트와 다크니스는 사람 사냥에 탐닉했다. 녀석들에게 희생된 사망자 수가 140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 고스트와 다크니스의 주요 사냥터는 열강의 아프리카 수탈의 상징과도 같은 철도공사 현장이었다. 1890년대 영국은 인도양에 접한 케냐와 내륙의 우간다를 연결하는 동아프리카철도를 건설하고 있었다.
     
    21세기 대규모 공사 현장에서는 중장비를 최대한으로 투입해 공기(工期)를 최대한 단축한다. 공기가 짧아야 남는 돈이 많다. 100여 년 전 아프리카의 공사 현장은 달랐다. 대부분의 고된 일을 성인 남자의 근육으로 해결했다. 공사 인력 중에는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에서 건너온 노동자가 많았다. 지금도 아프리카 곳곳에는 영국인을 따라 아프리카로 왔다가 그곳에 정착한 이들의 후손이 적지 않다. 공사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면 몸이 극도로 피곤하게 마련이다. 일과를 마치고 이불을 덮으면 이내 잠이 든다. 사자 처지에서 깊이 잠든 건설 노동자는 쉬운 사냥감이었을 것이다. 

    고스트와 다크니스는 절제를 몰랐다. 동물이 아무리 힘이 세도 사람을 건드리면 무사하지 못한다. 만용(蠻勇)이다. 맹수의 신상에 좋지 않다. 사람들은 당하면 결코 참지 않는다. 자신이 당한 것보다 더 심하게 복수한다. 수많은 사람을 죽인 고스트와 다크니스도 1896년 12월 영국군 중령 존 헨리 패터슨에게 죽임을 당한다. 사람을 건드렸으니 사람에게 당한 것이다. 

    패터슨 중령의 앞선 근무지는 인도였다. 그가 케냐로 온 이유는 사자를 사냥하기 위해서였다. 철도공사 공기가 식인사자 때문에 수개월 넘게 늦어지고 있었다. 겁을 먹은 노동자들이 근무지를 이탈했기 때문이다. 

    사냥꾼과 낚시꾼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과시욕이 그것이다. 실력과 담력을 자랑하려면 사냥한 동물이 크거나 용맹해야 한다. 유럽까지 악명이 퍼진 고스트와 다크니스를 사냥한 영국인도 과시욕이 강했다. 패터슨 중령은 사자 사냥 과정을 기록한 ‘차보의 식인사자들(The Man Eaters Of Tsavo)’을 출판해 명성과 부를 얻었다. 차보 사자들의 가죽과 두개골을 미국의 한 박물관에 팔아 당시로는 거금인 5000달러를 벌었다. 

    패터슨 중령이 박물관에 판매한 사자의 가죽과 두개골을 두고 미국과 케냐가 소유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 한국 정부가 외국 정부나 박물관에 문화재 반환을 촉구하는 것과 유사한 형태다.

    케냐-미국 식인사자 가죽 두개골 소유권 다툼

    2007년 9월 국립케냐박물관 대변인은 고스트와 다크니스의 가죽과 두개골을 케냐로 반환하라고 미국 박물관에 요구했다. 논지는 간결했다. 차보의 식인사자들은 케냐의 유산이므로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상징물과 관련해 소유권이 걸린 문제는 다툼이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차보의 사자들은 아직도 영국인 장교에게 그 가죽과 두개골을 구입한 박물관에 있다. 관람객들은 죽어서도 여전히 위풍당당한 녀석들을 보면서 무시무시한 사건을 떠올린다. 

    최근 미국 시카고 필드뮤지엄(The Field Museum)을 찾았다. 한국에는 시카고자연사박물관으로 알려진 곳이다. 수많은 동물 박제가 전시돼 있었으나 두 마리의 사자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예상과 달리 겉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암사자다.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멋진 검은 갈기(mane)가 없다. 혹서 지역에 사는 수사자는 종종 갈기가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 갈기 없는 수사자들이 존 헨리 패터슨 중령이 사냥한 차보의 식인사자다. 고스트와 다크니스는 지금도 박물관을 지키면서 관람객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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