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을 경계로 나뉘는 남쪽 멕시코 소노라주의 노갈레스(위)는 도로망도, 상수도도, 법질서도 엉망이다. 반면 담장 이북 미국 애리조나주 노갈레스시 주민들은 상수도는 물론이고 공공보험, 교육제도 등 국가로부터 다양한 혜택을 받고 있다.
한국 사회는 공부 경쟁에서 승리한 이들에게 충분한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결과에 따라 사람을 줄 세우고 대우를 달리한다. 극소수의 ‘개천용’이 증명했듯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결과도 바뀔 수 있다.
문제는 양극화다. 가진 자들은 계속해서 자원을 투입하고 결실을 향유한다. 못 가진 자들은 투입할 자원이 없으니 향유할 결실도 없다. 그러니 공부 경쟁에 투입할 수 있는 자원이 다르다. 개천용이 주목받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개천에서 용이 나기 어려운 사회여서다. ‘출발선’이 다른 레이스를 하면서도 공부를 비롯해 각종 측정 가능한 ‘능력’을 제일의 가치로 섬긴다. 당연히 이 제도 속에서 이득을 볼 수 있는 있는 자들에게는 제도를 바꿀 유인이 없다. 정작 이 구조적 문제가 종종 간과된다. 공정이 곧 능력주의로 변질된 탓이다.
우리나라가 ‘성공’한 국가의 대열에 들 수 있었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서 말하듯 포용적 경제제도와 포용적 정치제도를 일구는 데 성공해서다(책과 별개로 나는 박정희식 모델이 극소수에 특혜를 몰아주고 대다수 노동자는 저임금에 시달렸다는 점에서 ‘포용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포용성은 붕괴하고 있다. 계층 사다리는 무너졌고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은 상식이 됐다.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라지만 중산층을 자처하는 이들은 30년 전 대비 20%나 줄어들었다. 개천용지수(부모의 학력·소득 수준과 자녀의 성공 여부)는 주저앉았다. 한 국가 내에서 어느 한쪽은 계속 파이를 차지하고, 어느 한쪽은 자리를 잃고 있다는 점에서 명백히 ‘착취적’이다.
사유재산권 침해, 공공서비스 붕괴, 일당독재 같은 극심한 수준의 착취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 자본이 붕괴하고 있다. 제도가 합리적으로 작동할 것이라는 믿음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기저에는 소수가 인센티브를 독점하고 있다는 박탈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자괴감 등이 버무려져 있다. 인센티브 일색의 포용적 제도에 앞서 인센티브를 따먹는 사람의 대다수는 누구인지 재고해봐야 한다.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