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호

‘혼밥판사’의 한끼 | 곰탕

푹 곤 고기 조각처럼 부스러진 사실관계

  • 정재민 전 판사, 작가

    입력2019-06-13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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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판은 상처로 시작해서 상처로 끝난다. 당사자들 상처에 비할 순 없지만 판사도 상처를 입는다. 그럴 때면 나는 혼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곤 한다. 정갈한 밥 한 끼, 뜨끈한 탕 한 그릇, 달달한 빵 한 조각을 천천히 먹고 있으면 울적함의 조각이 커피 속 각설탕처럼 스르륵 녹아버리고 위로를 받는다. 그러면서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고 해서 법정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맞은 편 빈자리에 앉은 누군가에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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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밤늦게까지 판결문을 썼다. 지엽적 쟁점까지 거론하면서 당사자들이 치열하게 다투는 바람에 기록이 수천 페이지로 불어나 판결문 쓰기가 까다로운, 판사들의 은어로 ‘깡치’라 불리는 사건이었다. 판결문이 50페이지를 넘어섰다. 금요일 오후부터 주말 내내 투자했지만 읽는 사람은 검사와 피고인뿐이다. 그나마 둘 중 한쪽은 불만을 가질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간에 일단 판결문을 완성하고 나니 후련했다. 내 자신에게 상(償)을 주고 싶었다.

    내게 상을 주려다 벌을 받다

    그 상이라는 것이 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이었다. 밤중에 자전거를 타는 것이 위험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너무 타고 싶었다. 개천가에 난 자전거 도로를 따라 자전거가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한밤중이라 인적이 드물었다. 모처럼 공기도 맑았다. 학창 시절 음악을 들으며 자전거 타고 등하교 하던 일도 떠올랐다. 휴대전화를 꺼내 그 시절 즐겨 듣던 015B의 음악을 틀었다.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면서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달리니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았다. 

    으악! 내 자전거가 도로 위에 불쑥 튀어나와 있던 돌부리에 걸리더니 앞으로 빙글 돌았다. 몸이 허공에 붕 뜨는가 싶더니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급작스러운 움직임에 상황 판단도 잘 되지 않고 무엇을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큰 충격의 파도가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통증이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큰 고통 때문에 작은 고통이 멀게 느껴졌다. 내 자신에게 상을 주려다 벌을 받은 셈이다. 

    산책 내지 조깅을 하며 간간이 지나치는 사람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고는 그냥 지나갔다. 휴대전화로 119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머리맡에 떨어진 전화기까지 손이 닿지 않았다. 나는 잠시 모든 것을 체념하고 반듯하게 누웠다. 밤하늘에 흩어진 소금처럼 흰 별들이 보였다. 칵테일 잔 끝에 걸린 레몬 조각 같은 노란 달도 떠 있었다. 윤종신의 노래를 들으면서 땅바닥에 드러누워 밤바람을 맞으며 밤하늘을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때 어떤 남자가 어둠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저기 괜찮으신가요.” 아니, 요즘 세상에 이런 사마리아인이 있나 해서 쳐다보니 낯이 익었다. 우리 법원 직원이었다. “아니, 계장님!” “아니, 판사님!” 선한 사마리아인 직원 덕분에 나는 무사히 택시를 타고 응급실로 갔다.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보니 갈비뼈 두 개가 부러지고 손목과 팔에도 골절이 있었다. 왼쪽 팔에 통째로 깁스를 했다. 갈비뼈 골절은 별수 없다고 해서 병가를 내고 꼼짝도 못한 채 집 침대에 누워 있었다.



    “먹으면 뼈 잘 붙는다”

    기침을 하거나 웃을 때마다 갈비뼈에 통증이 몰려왔다. 이럴 때 떠오르는 흔하디흔한 깨달음, 예를 들면 ‘건강이 참 소중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보다 앞서 떠오른 것이 곰탕을 먹고 싶은 마음이었다. 파가 둥둥 떠 있는 뿌연 국물에 소의 살과 연골이 몰캉몰캉 씹히는 곰탕. 소뼈를 고아낸 국물이라 그걸 먹으면 뼈가 잘 붙는다고, 내가 어릴 적 다칠 때마다 어머니는 곰탕을 끓여주며 말씀하셨다. 

    어릴 적에도 다치는 건 주로 자전거 때문이었다. 시장에서 쌀을 싣고 나르는 큰 자전거 뒤에 올라갔다가 고꾸라져 머리가 깨져 아직도 큰 ‘땜빵’ 자국이 있다. 자전거를 타다가 차에 치인 적도 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곰탕을 끓여주셨다. 곰탕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다른 순진한 아이들도 그랬겠지만, 나는 그 재료가 곰인 줄 알았다. 커다란 국통 안에 들어가 있는 뼈다귀가 곰발바닥인 줄 알았다. 그 뒤 푹 고아냈기 때문에 곰탕이라고 한다는 말을 몇 번 들었지만 진짜 그런 건지 아직도 확신이 없다. 

    곰탕은 먹는 재미도 있다. 꼬리곰탕은 입으로 쪽 빨아 당기면 뼈다귀에 붙어 있던 흐물흐물해진 고기가 쏙쏙 들어온다. 양지 곰탕은 고기를 건져내서 수육처럼 기름장이나 마늘장에 찍어 먹으면 고소하기 이를 데 없다. 고기를 오래 삶지 않으면 질기고 너무 오래 삶으면 퍽퍽하다. 도가니탕은 말캉말캉하면서도 탱글탱글한 물렁뼈를 우물우물 씹는 재미가 있다. 도가니는 소의 무릎 관절이다. 도가니탕에 들어가는 도가니는 여기에다가 관절에 연결된 힘줄들과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는 뒤꿈치의 힘줄들도 섞어 넣는 게 보통이다. 

    뜨끈한 곰탕에 파를 듬뿍 넣고 소금도 넣고 후루룩후루룩 먹고 싶다. 도가니를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고 싶다. 엄지와 검지로 꼬리뼈 조각을 들고 고기를 빨아먹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곰탕을 해줄 어머니가 세상에 안 계신다. 아내가 마음먹으면 곰탕을 만들어줄 수야 있겠지만 집에서 종일 곰탕을 끓이는 건 사실상 어렵다. 나가서 사 먹으려 해도 몸이 불편하니 나갈 수 없다. 몸을 조금 움직일 수 있게 되면 나가서 곰탕을 먹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사골을 고아낸 국물을 마시고 도가니 물렁뼈를 먹으면 어머니 말대로 뼈가 금세 붙을 것 같아서다.

    곰탕집 성추행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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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이른바 곰탕집 성추행 사건이 있었다. 어떤 남성이 곰탕집에서 곰탕을 먹고 나가다가 앞에 지나가던 여성의 엉덩이를 만졌다는 이유로 강제추행죄로 기소된 사건이다. 증거로는 당시 상황을 촬영한 곰탕집 안 CCTV가 있는데 화면만으로는 남성이 여성의 엉덩이를 만졌는지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 만약 만졌다면, 1.3초 안에 만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1심에서 징역 6개월의 실형이 선고되고 2심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그러자 그 남성의 아내가 억울하다는 취지로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이에 많은 사람이 동조하면서 큰 화제가 됐다. 

    나도 진실은 모른다. 내가 직접 재판하지 않았고, 기록을 보거나 증인 진술을 직접 들은 적도 없다. 그래서 이 사건의 어느 한쪽 결론을 지지할 생각이 결코 없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다만 얼핏 간단해 보이는 이 사건에 대한 판단 뒤에 얼마나 많은 절차와 법 원리, 고려 사항이 숨어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마치 곰탕 한 그릇 뒤에 스무 시간 사골을 끓이고, 고기를 썰고, 고명을 만들고, 뚝배기를 데우는 작업이 숨어 있는 것처럼. 

    만약 남성이 여성의 엉덩이를 만진 적이 없는데 유죄 판결이 났다면 그의 아내 글에서 볼 수 있듯 한 사람의 인생과 한 가족의 명예가 산산조각 난다. 반면 그 여성이 추행을 당해 자기 돈으로 변호사까지 선임해 국가에 처벌을 호소했는데 그 가해자에 대해 무죄판결이 나면 그 억울함도 만만치 않다. 가해자로부터 파렴치한 범죄를 당한 피해자가 큰마음을 먹고 고소를 했음에도 가해자가 면죄부를 얻고 유유히 빠져나갈 때의 그 참담한 마음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이 사건에서 진실은 너무 간단하다. 두 가지 중 하나다. 남자가 여자의 엉덩이를 만졌거나 만지지 않은 것이다. 그중에 무엇이 진실인지는 당사자들이 확실히 알고 있다. 그러나 제3자인 판사가 판단하기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판사로서 재판하다 보면 이런 갈림길 앞에 서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판사가 되기 전에는 판사의 일이 주로 법 위반을 판단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판사가 되고 보니 대부분의 시간은 법리 논쟁에 답을 다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어떤 사실이 있었는지 확인하는 데 할애됐다. 재판의 승패나 유무죄 판단도 대부분 사실 확정에서 판가름 난다.

    고기 조각 맞추기

    판사가 되기 전에는 증거를 찬찬히 살펴보고 논리적으로 따지면 손쉽게 사건의 진상을 알아낼 수 있을 줄 알았다. 드라마 속 셜록 홈스처럼 말이다. 순진한 착각이었다. 아무리 기록을 여러 번 본다고 해도 확신을 갖고 판단할 수 없는 사실관계가 지천에 널려 있다. 

    셜록 홈스 같은 소설이나 수사 드라마에는 아귀가 딱딱 맞는 완벽한 증거가 존재한다. 그런 소설과 드라마의 재미는 그러한 증거의 퍼즐 조각을 하나하나 맞춰가는 데 있다. 그러나 판사 앞에 오는 현실 사건은 늘 증거가 부족하다. 증거가 충분하면 사건이 법정까지 왔겠는가. 현실의 법정에서 증거들은 퍼즐 조각이 아니라 곰탕 속 고기조각 같다. 몇 조각 없고, 아귀가 서로 안 맞을 때가 많고, 다 모아도 소머리나 꼬리 전체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을 때가 많다. 

    곰탕집 성추행 사건을 둘러싼 이런저런 말 중에 귀담아들을 부분도 있지만 오해도 있다. 피해를 당했다는 여성의 말 외에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여성의 말 자체가 증거다. 물론 그 말을 어느 정도로 믿을 것이냐는 신빙성은 별개 문제다. 이것은 형사소송이 민사소송과 다른 점이다. 민사소송에서는 원고와 피고의 말이 주장일 뿐 증거가 아니다(물론 당사자 본인을 신문해 그것을 증거로 삼는 절차가 있지만 실무상 잘 하지 않는다. 신문을 해봤자 원래 하던 주장을 되풀이하며 우기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증거가 없거나 부족한 부분은 논리와 상식으로 메워 넣어야 하는데 여기서 판사의 가치관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다. 피해자 진술을 어느 정도 믿을 것이냐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가령 형사재판에서 누구에게 맞아서 상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전치 2주짜리 진단서를 내는 경우가 많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은 이를 절대 인정하지 않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이 허위 진단서를 발급받은 것이라 주장한다. 2주짜리 진단서는 환자가 의사에게 가서 말로만 아프다고 해도 끊어주는 경우가 적잖은 것도 사실이다. 이럴 때는 누구 말을 믿어야 하는가. 이혼 재판을 할 때 머리채를 잡아당긴 폭력의 증거라면서, 머리카락 수십 가닥을 찍은 사진을 제출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러면 상대방은 욕조에 남아 있는 머리카락을 들고 사진을 찍은 것이라고 반론한다. 이럴 때는 또 누구 말을 믿어야 하는가. 

    제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법학의 대가라 해도, 대법관이나 대법원장이라 해도, 이런 사실을 확실하게 안다고 말하기 어려운 때가 많다. 판사를 더 위축시키는 것은 바로 당사자는 진실을 안다는 사실이다. 훤히 다 알고 있는 학생들 앞에서 확실하게 모르는 무엇인가를 아는 척하며 가르쳐줘야 하는 선생이 되는 기분이다. 분명히 답이 존재하는 그 사소한 사실 한 조각조차 온전히 알 수 없다는 사실. 그 사실이 한 판사를, 한 인간을 한없이 작게 만들 때가 있다. 서글프게도.

    나는 도가니탕, 아내는 꼬리곰탕

    사고를 당하고 일주일 지나 몸을 일으킬 정도가 되자마자 나는 깁스한 왼팔을 휘적거리면서 동네 뒷골목의 곰탕집으로 향했다. 한자리에서 35년을 영업한 유서 깊은 집이다. 삼겹살이 먹고 싶다는 아내를 다음에 오겹살, 칠겹살을 사주겠다며 어르고 달래 곰탕집으로 유인했다. 가는 동안 도가니탕을 먹을지 꼬리곰탕을 먹을지 고민하느라 입 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도가니탕을 시키고 아내는 꼬리곰탕을 먹도록 유도했다. 둘 다 맛을 볼 참이었다. 깁스를 하지 않은 손으로 국자를 들고 깍두기를 퍼서 접시에 올려놓고 깍두기 국물을 몇 번 부었다. 깍두기가 달고 시원했다. 옆구리 갈비뼈가 아픈 것도 잊고 껄껄 웃다가 통증을 느꼈다. 아직 곰탕은 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싱글벙글이다. 열댓 시간 고아낸 곰탕 한 그릇에 사십 몇 년 된 사람의 고단한 마음이 단번에 녹아내린다는 사실. 그 사실도 한 인간을 한없이 작게 만든다. 이번에는 유쾌하게.



    정재민 | 혼밥을 즐기던 전직 판사이자 현 행정부 공무원. ‘사는 듯 사는 삶’에 관심 많은 작가. 쓴 책으로는 에세이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소설 ‘보헤미안랩소디’(제10회 세계문학상 대상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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