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법 미비한데 출범 강행한 정부
銀産분리로 발목 잡는 국회
자본금 조달 위한 ‘플랜B’가 없던 KT
심성훈 케이뱅크 은행장이 2017년 9월 27일 서울 종로구 케이뱅크 광화문 사옥에서 열린 ‘케이뱅크 중장기 경영전략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스1]
케이뱅크의 설립을 주도한 건 KT다. 그런데 KT가 보유한 케이뱅크의 지분은 8%였다. 지금도 KT는 10%의 지분만 갖고 있어 우리은행(13.79%)에 이어 2대 주주에 머물러 있다. 기존 금융사가 아닌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이 은행업을 하게 해 금융산업의 혁신을 이루겠다며 만든 게 인터넷전문은행인데, 최대주주가 우리은행인 셈이다.
불안한 출발
이와 같은 구조가 만들어진 건 관련 규제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인터넷전문은행이 출범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은행법에서는 KT와 같은 산업자본이 은행 지분을 마음대로 보유할 수 없도록 돼 있다. 이른바 ‘은산(銀産)분리’ 원칙에 의해서다. 산업자본은 은행의 의결권 있는 지분을 4% 이상 보유하지 못하도록 돼 있다. 의결권 미행사를 전제로 하면 최대 10%까지 보유할 수 있다.이에 케이뱅크 출범 당시 심성훈 케이뱅크 행장은 “인터넷전문은행 특례법 통과에 희망을 걸고 있다”고 말했다. 특례법은 기존 은행에는 은산분리 원칙을 유지하되, 인터넷전문은행에만 규제를 일부 완화해주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왜 관련법이 제대로 마련되지도 않았는데 출범을 강행한 것일까. 우리나라의 경우 그간 은산분리 원칙에 의해 인터넷전문은행 설립이 번번이 무산됐었다. 그러다 보니 당시 금융 당국은 일단 출범부터 시키고, 이후 국회를 설득해 법을 만드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에서 인터넷전문은행이 출범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은산분리 원칙은 정치적으로 워낙 첨예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케이뱅크의 대출 중단은 이 ‘불안한 출발’에서 기인했다. 은행이 대출을 해주려면 일정 비율의 자본금이 필요하다. 그런데 은행의 ‘사실상’ 주인인 KT가 자본금을 투입하는 길이 막혀 있었다. 결국 자본금 부족으로 추가 대출을 계속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 횟수가 벌써 17번에 이렀다.
그런데 인터넷전문은행 특례법은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9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특례법에는 ICT 주력기업에 한해 인터넷은행 지분을 34%까지 보유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궁지에 몰렸던 케이뱅크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호재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KT가 케이뱅크 지분을 34%까지 확대하겠다며 금융위원회에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신청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일이 꼬였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공공분야 전용회선 사업 입찰 담합을 벌인 것으로 드러난 KT와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세종텔레콤 등 네 업체에 대해 시정명령과 과징금을 부과하면서다. 특히 KT에 대해서는 담합을 주도했다고 판단, 검찰에 고발조치까지 했다.
새 주인 혹은 다른 주주
금융위는 검찰 수사와 재판 결과에 따른 벌금형 여부와 수준이 확정될 때까지 KT가 신청한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통상 검찰 수사와 기소, 재판이 수년에 걸쳐 진행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KT가 케이뱅크의 대주주가 되는 것은 당분간 어렵게 됐다.업계에서는 벌써 KT가 케이뱅크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나오는가 하면, 일각에서는 KT가 아닌 새로운 대주주를 찾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일단 금융위와 케이뱅크는 새 대주주를 찾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며 부인했다. 어쨌든 케이뱅크는 KT 대신 새 주인을 찾을지, 아니면 다른 주주를 영입해 시간을 벌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다. 결정이 미뤄지면 대출 서비스가 지속적으로 중단될 가능성이 있고 상황은 갈수록 악화될 수밖에 없다. 대출은 은행의 가장 중요한 수익원이다. 이처럼 케이뱅크 출범 초기 조금 꼬여 있는 것으로 보이던 실타래는 갈수록 심하게 꼬이고 있다.
왜 이렇게까지 됐을까. 이해관계자 모두의 실책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무리하게 인터넷전문은행 출범을 밀어붙인 정부, 은산분리 원칙이라는 틀에 갇혀 발목을 잡은 국회, 무작정 법 개정만을 바라봤던 KT 모두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먼저 금융 당국의 실책을 짚어보자. 금융위는 관련법이 제대로 마련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인터넷전문은행을 출범하는 강수를 뒀다. 금융권에 인터넷전문은행이라는 메기를 풀어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의도는 좋았다. 그러나 케이뱅크의 사례를 보면 금융 당국이 무리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법하다.
실제 금융 당국이 다소 무리한 흔적도 보인다. 인터넷전문은행 사업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케이뱅크에 특혜를 줬다는 의혹이 그것이다. 당시 금융감독원은 우리은행이 케이뱅크의 대주주가 되기에 부적격하다고 판단했는데, 금융위가 새로 유권해석을 내리면서 인가를 결정했다는 점이 단적인 예다. 특혜 여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으나, 금융 당국의 일처리가 깔끔하지 못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이 케이뱅크를 금융산업이나 시장 논리로 보지 않고 오랜 기간 정치적인 이슈로 만들어왔다는 점도 악재였다. 은산분리 원칙을 두고 갈등하느라 시간을 지체한 것부터가 그렇다. 박근혜 정부 당시 야당의 일부 의원들은 정부가 인터넷전문은행을 시작으로 은산분리 원칙을 서서히 완화시키려 한다며 특례법 제정 등을 강하게 반대해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문재인 대통령이 규제 완화에 대한 의지를 내비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야 합의로 법이 통과됐다.
실책과 남 탓
KT에 대한 특혜 논란이 이어지는 배경에도 정치적 요소가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KT는 박근혜 정권과 유착한 것으로 지적받아 왔다. 현 정부와는 첨예하게 갈등하는 모습이다. 일각에서는 금융위가 현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케이뱅크의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중단한 것 아니냐는 해석까지 나온다.마지막으로 당사자인 케이뱅크의 실책을 보자. 케이뱅크 옆에는 비슷한 시기에 출범한 카카오뱅크라는 비교 대상이 있다. 케이뱅크가 삐걱대는 사이 카카오뱅크는 순조롭게 자본을 늘리며 탄탄하게 성장하고 있다. 비슷한 조건에서 시작한 카카오뱅크의 행보를 보면 케이뱅크가 처한 상황이 반드시 대외여건 탓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KT 같은 거대 기업이 금융업이라는 주요 산업에 진출하면서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아이러니다. 관련법이 늦게 제정될 경우 자본 확충은 어떻게 할 건지 플랜 B가 없었던 게 아니냐는 의구심 또한 지울 수 없다. 결국 KT도 케이뱅크도 다른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상황이다. 케이뱅크에 남은 선택지는 얼마 없다. 일단 의결권이 없는 전환우선주를 발행하는 식으로 당장 400억 원 가량을 조달할 여력이 있다. 이에 더해 신규 주주 영입을 추진하는 ‘투트랙 전략’에 박차를 가하는 모양새다. 우리은행이 자금 조달을 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케이뱅크 관계자는 “전환주 발행의 경우 조만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또 케이뱅크에 관심이 있는 기업들과 접촉을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자본 확충 문제를 정비하고, 또 상품 리뉴얼을 마친 뒤 대출 서비스를 재개할 예정”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