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순위청약 1가구에 4만6000명 몰려…"앉아서 5억 버는 셈"
9·13대책으로 대출 막혀 청약 포기자 속출
文 정부 2년 새 청약제도 11번 수정
미계약 알짜 아파트 무순위청약으로 ‘줍고 또 줍고’
‘줍줍’ 막겠다며 청약 예비당첨자 5배로 확대…효과는 글쎄
채권입찰제 도입 등 청약제도 전면 수정 필요
9·13 부동산 대책 이후 분양 시장이 무주택자 위주로 재편되긴 했으나 여전히 서민들에게 새 아파트는 그림의 떡이다. 또한 최근에는 여전히 뜨거운 분양 열기와 달리 청약 미계약이 속출해 분양 시장에 혼란을 주고 있다.
미계약이 속출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9·13 대책 이후 대출규제가 강화된 데 있다. 서울 등 투기과열지구에서는 주택담보대출비율(LTV) 60%, 총부채상환비율(DTI) 40%로 대출이 제한돼 실수요자들이 신규 분양에 참여하기가 현실적으로 힘든 상황이다. 9억 원 이상 아파트의 경우 대출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청약에 당첨되더라도 대출의 벽에 부딪혀 계약을 포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청약 부적격자에 의한 미계약 물량도 늘고 있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민경욱 의원(자유한국당)이 국토교통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8월까지 5년간 아파트 부적격 당첨건수는 총 13만9681건이다. 이 중 청약가점과 무주택, 세대주 등을 잘못 기입한 경우가 6만4651건(46.3%)으로 가장 많았고 재당첨제한 5만8362건(41.8%), 무주택세대 구성원의 중복 청약·당첨이 5420건(3.9%)으로 뒤를 이었다.
부적격으로 판정돼 당첨이 취소되면 향후 1년간 청약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가점 계산 등을 잘못해 실수로 청약을 넣었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면 3~5년간 청약의 기회를 박탈당할 수 있다. 또한 부적격 당첨자들 때문에 정작 자격을 갖춘 청약자들이 당첨 기회를 놓치는 상황도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청약 부적격자가 늘어난 데는 청약제도가 수시로 바뀐 탓이 크다. 지난 2017년부터 지금까지 2년만 놓고 보더라도, 주택청약제도 전반을 규정하는 ‘주택공급에 관한 규칙’은 무려 11번 수정됐다. 청약자가 규칙 개정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국토교통부에 유권해석을 요구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지난해 분양한 단지 중 분양가가 시세보다 4억 원 가까이 낮아 흥행몰이를 한 서울 서초구 ‘래미안 리더스원’도 전체 당첨자 가운데 15%가량이 부적격자로 판명돼 미계약분이 나왔다. 대부분의 부적격자는 가점 항목을 잘못 입력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마포 소재 한 공인중개사 대표는 “청약제도가 하도 여러 번 바뀌다 보니까 꼼꼼히 알아보지 않은 상태에서 분양 공고만 보고 덜컥 청약에 지원했다가 낭패를 보는 사람이 많다”고 지적했다. 40대 후반의 직장인 박모 씨도 “우리나라 청약제도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은퇴 후에도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지 못하는 건 아닌가 싶어 불안하다”고 토로했다.
무순위청약이 청약제도 왜곡
이처럼 청약 미계약분이 급증하자 건설사들은 미분양 대비책으로 ‘무순위청약’ 카드를 꺼내 들었다. 새 아파트 공급은 신혼부부 등의 특별공급과 청약통장 1, 2순위자를 대상으로 한 일반공급으로 나뉜다. 무순위는 1, 2순위와 상관없이 특별·일반공급 후 남은 미계약 물량에 대해 청약이 진행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잔여세대 추첨’이란 이름으로 미계약 물량에 대한 추가 분양이 이뤄졌는데, 과열 경쟁과 투명성 논란이 계속되자 올 2월 정부가 이를 무순위청약으로 제도화했다.이로써 건설사는 청약에 당첨되고도 계약하지 않는 미계약분에 대비해 1~2순위 청약에 앞서 인터넷 홈페이지 ‘아파트 투유’를 통해 미리 청약 신청자를 받을 수 있다. 무순위청약은 청약통장도 필요 없고 19세 이상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또한 청약통장을 사용하지 않으니 나중에 다른 아파트에 추가로 당첨돼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
이러한 혜택 덕분에 무순위청약의 열기는 금세 뜨거워졌다. 올 4월 11일 서울에서 처음으로 사전무순위 접수를 한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한양수자인 192’의 경우 전체 모집가구(1120가구)의 10배가 넘는 1만4000여 명이 몰렸다. 서대문구 ‘홍제역 해링턴 플레이스’와 노원구 ‘태릉 해링턴 플레이스’도 무순위 접수에서 각각 평균 33.5대 1과 61.9대 1의 경쟁률을 나타냈다.
하지만 과거 극소량에 불과했던 미계약 물량이 갑자기 늘어나자 무순위청약의 허점이 금세 드러났다. 수억 원의 현금을 바로 동원할 수 있는 현금부자들 위주로 청약의 기회가 돌아가게 된 것. 세간엔 ‘줍줍’이라는 은어까지 생겨났다. ‘줍줍’은 말 그대로 (미계약분을) ‘줍고 또 줍는다’는 뜻이다. 무주택자의 내 집 마련을 위해 청약제도를 강화했지만 정작 무주택자들은 대출 규제에 묶여 청약을 포기하고, 현금부자들만 ‘어부지리’하는 꼴이 돼버렸다. 실제로 홍제역 해링턴 플레이스의 경우 무순위청약에 총 5835명이나 몰렸지만 최종 계약 단계에서는 또다시 대출 규제로 인해 100가구가 계약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건설사는 희망자에 한해 현장 추첨으로 분양을 진행했는데 그 결과 미계약 물량 전체가 현금 조달이 가능한 사람들에게 넘어갔다.
예비당첨자 확대가 부동산 투기 부추길 수도
지난 4월 사전무순위 접수를 실시한 청량리역 한양수자인 192 모델하우스 내부. [더피알 제공]
예비당첨자 비율을 공급물량 대비 5배로 정한 이유는, 지난 2월부터 진행된 5곳의 아파트 청약경쟁률이 평균 5.2대 1로 수요가 공급보다 5배 정도 높다는 점 때문이다. 예비당첨자 비율은 법령 개정이 필요 없고 국토부와 지자체가 협의만 하면 된다. 황 과장은 “투기과열지구에 한해 예비당첨자 상한선을 500%로 늘리기로 각 지자체장과 협의했다”고 밝혔다. 현재 부동산 투기과열지구는 서울·과천·분당·광명·하남·대구 수성·세종(예정지역) 등이고 5월 20일 이후 입주자모집공고 단지부터 확대된 예비자당첨 비율이 적용된다.
하지만 이 역시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예비당첨자를 늘리면 더 많은 사람이 청약에 뛰어들어 경쟁률을 높이고 이는 곧 부동산 투기를 부추길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점수가 부족하더라도 현금 조달이 가능한 사람에게 청약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인데 과연 그 수요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인원을 많이 늘린 만큼 계약 확률이 높아지겠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일반청약으로 분양 물량을 다 소진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줍줍(무순위청약)’은 또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한 시중은행에서 시민들이 대출상담을 받고 있다. [뉴스1]
실제로 올 초 분양한 서울 ‘e편한세상 광진 그랜드파크’ 사례를 보면 우리나라에 ‘젊은 현금부자’가 얼마나 많은지 쉽게 알 수 있다. 이 단지는 모든 평형 분양가가 9억 원을 넘어 중도금 대출이 불가능한데도, 예비당첨자의 82%가 20~30대였다. 심 교수는 “예비당첨자 수를 늘린다고 현금부자에게 유리한 조건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서히 고개 드는 채권입찰제
한편 ‘입주물량의 5배’는 상한선일 뿐 의무는 아니다. 따라서 건설사가 비교적 쉽게 미분양을 해소할 수 있는 ‘무순위청약’을 두고 굳이 예비당첨자 수를 늘리는 방안을 선택할 지 미지수다. 건설업계 한 관계자는 “법적으로 규정된 1·2순위자가 청약하고 남은 물량을 처분하는 방식까지 정부가 재단하는 것은 민간 기업에 대한 과도한 침해”라고 밝혔다.한편 청약이 ‘로또’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부동산 시장의 혼돈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로또 청약은 정부의 분양가 규제에 따라 분양가상한제를 적용하면서 청약에 당첨되면 시세보다 저렴하게 아파트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생겨난 신조어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가격을 낮추다 보니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기 수요가 증가하고 반대로 실수요자의 당첨 가능성은 낮아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많은 부동산 전문가가 현 청약제도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이유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로또 청약을 조장하는 지금의 행태 역시 ‘포퓰리즘’의 일환”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청약제도는 과연 어떤 형태로 재편돼야 할까. 일부 전문가들은 ‘채권입찰제’를 제안한다. 채권입찰제란 주변 시세보다 저렴하게 아파트를 분양받은 사람이 분양가와 별도로 추가 채권을 매입하도록 해 시세차익의 일부를 국고로 환수하는 제도다. 예를 들어 아파트 시세가 9억 원인 지역에서 7억 원짜리 아파트를 분양할 경우 시세 차익 2억 원 범위 내에서 채권(국민주택채권)을 많이 매입한 사람에게 아파트를 분양하는 식이다. 그렇게 조달된 자금은 정부가 서민 주거 안정 재원으로 활용하게 된다.
채권입찰제는 지난 1990년에 적용됐다가 사라진 후 2006년 노무현 정부 시절 분양가상한제와 함께 도입됐다. 당시 경기도 성남 판교신도시와 2007년 분양한 고양시 일산2지구에 적용됐다가 2008년 금융위기 여파로 집값이 하락하면서 2013년 폐지됐다. 채권입찰제를 도입하면 청약 당첨자가 가져갈 이익을 국가에서 환수하기 때문에 청약 과열로 인한 집값 상승을 방지할 수 있다는 의견이 많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채권입찰제를 통해 시세차익이 줄어들면 투기 수요가 꺾이고 다주택자들의 갭투자 또한 어려워질 것”이라며 “투기 수요가 차단되면 부동산 시장은 안정된 양상을 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심교언 교수 역시 “수요가 줄어들면 가격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채권으로 생기는 수익으로 서민주택 공급을 늘릴 수 있다는 점이 상당한 이점”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