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호

항일무장투쟁시기의 김일성 빨치산부대

조선족 항일투사 李敏여사의 ‘60년만의 증언’

  • 이원섭 한겨레신문 논설실장

    입력2006-11-30 14: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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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일성이 광복 후 나이나 투쟁경력에서 한참 앞선 최용건이나 김책을 제치고 우두머리로 떠오른 것은 성격이 활달해 리더십이 있기도 했지만, 그가 동포들이 많은 동남 만주지역에서 독립된 부대를 오래 거느렸던 까닭에 직계 조선인 부하가 훨씬 많았던 것이 결정적 이유다.》
    항일독립투사 이민(李敏)여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89년 3월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哈爾濱)에 갔을 때였다. 국교수립 전이라 신문기자 신분을 드러낼 수 없어 한·중 경제협력 세미나에 참석하는 ‘동북아 경제를 연구하는 교수단’ 일행에 끼어들었다. 교수로 위장해 가짜 명함을 찍고, 대학교 연락처에 필자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대신 넣었다. 일행 대부분은 중국이 처음이었고, 저명한 농경제학자이며 중국 전문가인 김성훈 중앙대학교 교수(현 농림부 장관)만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한 경험이 있어 실질적인 단장이었다. 김 교수가 중심이 된 경제학 교수들의 중국 방문단에 필자가 따라붙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당시 중국땅을 밟아본 사람은 손을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중국 투자기업체의 담당자거나 중국을 연구하는 학자들 몇몇만이 간신히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사전에 안기부(현 국정원)의 허가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었다.

    하얼빈에서 만난‘김일성의 옛동지’

    한·중간 직항로가 없었기에 우리 일행은 일단 홍콩으로 갔고, 거기서 다시 요령성 심양(瀋陽)행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다. 그나마 홍콩에서 정보요원 접선하듯 만난 중국관리는 여권에 입출국 스탬프를 찍는 것이 아니라 잘 보관해야 한다며 비자를 대신할 허름한 종이쪽지를 내주는 것이었다. 심양에서, 길림성 장춘(長春)에서, 그리고 흑룡강성 하얼빈에서 잇따라 열린 경협세미나와 공장방문 등을 통해 시장경제를 배우려는 중국관리들의 열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일행이 마지막으로 들른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로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곳이다. 당시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장소는 아무런 기념비도 없었고 갈길 바쁜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악명높던 이시이부대는 자동차연구소로, 만주군관학교는 항공기술학원으로 변해 있었다. 하얼빈에서는 흑룡강성 삼강(三江)평원 개발 타당성 및 한국의 투자가능성을 논의했다. 그때 하얼빈에 묵으면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 이민 여사다.



    이민 여사는 10년간 흑룡강성 성장을 지낸 진뢰(陳雷·천레이)의 부인으로 조선족이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흑룡강성 부주석직을 맡고 있어 영향력이 매우 크다는 것이 소개자의 설명이었다. 이민 여사의 초청을 받아 점심식사를 함께 하면서 삼강평원이 바로 항일투쟁이 가장 치열했던 곳이었다는 이야기 끝에, 그가 젊었을 때 무장항일투쟁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바짝 흥미를 느낀 필자가 “혹시 그 당시에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웃으면서 옛 소련땅 하바로프스크 근처 비밀기지에서 ‘김일성 동지’와 3년 남짓 함께 지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지금이야 사정이 좋아져 평양을 오가는 사람이 많아지고, 소련이나 중국 쪽 자료가 공개되어 김일성의 1930년대 만주 항일투쟁이나, 중소국경을 넘어가 지낸 1940년대 소련령에서의 행적이 더러 알려져 있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1989년 당시만 해도 서대숙 박사(미국 하와이대학 교수) 등 몇몇 해외학자들의 글로만, 그것도 아주 간략하게 소개되었을 뿐이었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도 꺼릴 때다.

    15일간의 중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해 변화하는 중국을 다룬 특집 기획물 ‘현장에서 본 중국의 새선택’을 9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마지막회에 이민 여사 이야기를 소개했다. 국내 언론으로는 처음으로 그를 소개한 것이었다. 이민 여사 또한 필자 일행이 처음으로 만난 ‘남조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노태우 군사정권 시절이었다. 사안의 민감성 때문에 그의 항일투쟁 부분만 집중 부각하고 김일성 관련 부분은 지나가면서 한마디 슬쩍 언급하는 정도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민 여사의 사회적 지위로 보거나 말하는 태도 등을 볼 때 정확한 이야기라는 확신이 서기는 했지만, 혹시라도 정보기관에서 문제삼을 경우 방어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 흑룡강성에서 펴낸 ‘흑룡강 당대 명인록’에는 이민 여사의 항일투쟁기록은 기술돼 있었으나 김일성과의 사적인 관련 부분은 없었다.

    필자가 이민 여사를 다시 만난 것은 꼭 10년 7개월만인 99년 10월17일 서울에서였다. 이민 여사는 서울에서 개최된 서울 NGO(비정부기구)세계대회에 중국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했다. 한국 방문은 처음으로 흑룡강성 조선족 친목단체인 ‘하얼빈시 소수민족 부녀연의회’ 명예회장 자격이었다. 약속장소인 시내 호텔 음식점으로 들어서는 이민 여사를 보고도 필자는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10년만에 다시 만나는 것이니 분명 75살 일텐데, 노쇠하기는커녕 꼿꼿한 자세가 전혀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자그마한 키에 다부진 체구가 굳은 의지력과 합쳐져 나이든 것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았다.

    1930년대 東北抗日聯軍

    이민 여사 부부는 북한당국의 초청으로 평양을 여러 차례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환대를 받은 각별한 관계였기에, 서울행이 그만큼 어려웠을 것이다. 북한을 자주 오가며 그곳 사람들만 보아왔기 때문에 남한의 실상과 서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느끼는 감회가 달랐으리라.

    이민 여사의 개인사는 남한의 역사책에 빈칸으로 남아 있고 북한의 역사에서도 크게 왜곡돼 있는 1930년대 만주지역의 항일투쟁 실태를 상당부분 채워준다. 1920년대 김좌진 장군 등의 무장독립투쟁이 좌절한 뒤 민족주의 진영의 항일투쟁은 상해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일제에 쫓기면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윤봉길·이봉창 의사 등의 살신성인이 민족의 기개와 독립의지를 만방에 떨치고, 지속적인 투쟁으로 이어졌으나,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에는 일제의 압박이 심했다.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중일전쟁이 터진 후 중국 장개석 정부를 따라 이곳저곳으로 옮기며 중경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우파의 본격적인 군대조직이라 할 수 있는 임시정부 예하 광복군은 광복 직전에 창설된다.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에는 공산주의자들이 큰 몫을 했다. 특히 만주지방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진 무장투쟁은 거의가 항일 빨치산들에 의한 것이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좌익계열은 1928년 코민테른의 ‘일국일당노선’에 따라 중국공산당 휘하에 들어갔고, 그들과 연대해 만주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일컬어지는 부대가 그것이다. 동북항일연군에는 중국공산당원 뿐 아니라 조선인이 상당히 많았으며 고위간부에 특히 조선인이 많았다. 일제에 일찍 짓밟힌 탓에 항일투쟁도 중국인보다 훨씬 앞서 나갔기 때문이다.

    동북항일연군은 여러 차례에 걸친 조직개편 끝에 활동지역에 따라 최종적으로 1로군(東南滿지역, 총지휘 양정우), 2로군(吉東지역, 총지휘 주보중), 3로군(北滿지역, 총지휘 이조린)으로 재편된다.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던 두만강 건너편 동남 만주지역(간도 지방)은 ‘김일성 부대’ (1로군 제2방면군) 등 조선인 중심부대가 사실상 독립적인 군사활동을 펴기도 했으나, 거의 대부분 한·중연합부대로 군사활동도 함께 했다. 초기 한때 민족간 갈등이 불거져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항일이라는 공동 목표를 위해 중국공산당 기치 아래 함께 투쟁했던 것이다.

    李敏, 전설적 빨치산 여전사

    이민은 중국인 이조린(李兆麟·리자오린·일명 장수전) 장군이 총사령인 3로군 예하 부대에서 활동했다. 그는 1924년 흑룡강성 오동하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황해도 사리원 인근에서 살다가 고향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흑룡강성 삼강평원 지역에 정착했던 것이다.

    이민은 어려서 최용건(전 북한 부수상)이 세운 모범소학교에 다니다가 항일공작요원으로 숨어서 활동하던 아버지를 따라 무장투쟁부대에 들어갔다. 그때 그의 나이 12살이었다. 그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처음에는 유격대 병사들의 피복을 공급하고 다친 대원들을 간호하는 등 비전투원으로 일했으나, 형세가 몰리면서 차츰 본격적인 ‘전사’로 성장했다. 이민은 소총이나 기관총 사격은 물론 말 타기에도 익숙해져 완전한 전투원으로 임무를 충실히 해낼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1937년과 1938년 무렵 일본군의 토벌공세가 거세지면서 송화강 유역 삼강평원 일대의 부금이나 밀산, 완달산 등지에서 큰 싸움이 잦았는데, 아버지와 오빠는 이때 희생됐다고 한다. 항일연군 제3로군은 일본군을 피해다니며 싸우다 몰리면 수목이 울창한 삼강평원 늪지대로 들어가 숨었다. 일본군은 기병대가 주력이었기 때문에 울창한 밀림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늪지대에서 산나물을 캐먹고 오리알도 먹으며 포위한 일본군이 지치기를 기다리다가, 일본군 주력부대가 물러가면 다시 나가서 유격전을 펼쳤다는 것이다.

    1938년 완달산 격전에서는 부대원 24명이 일본군에 완전 포위된 상태에서 집중 공격을 받아 함께 생활하던 부대원 전원이 죽고, 마침 척후 임무를 부여받고 탐색활동을 나갔던 이민과 다른 여전사만 겨우 살아남았다고 한다. 자신이 몸을 숨긴 큰 나무뿌리 바로 위에서 남은 적을 찾기 위해 서성이는 일본군의 말발굽 소리가 어찌나 무서웠는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때 생각을 하면 소름이 끼친다고 한다.

    날이 갈수록 일본군의 공세는 치열해졌다. 일본군은 초토화작전을 펴면서 유격대가 숨을 만한 산림을 아예 불태워 근거지를 없애려고 했다.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날마다 일본군에 쫓기느라 지치기도 했지만, 투항을 권유하는 일본군의 교활한 귀순작전에 심리적 동요를 일으킨 대원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도 이민은 흔들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이민이 속한 부대는 결국 일본군에 쫓겨 1941년 국경선을 넘어 옛 소련령으로 들어간다. 이민은 그곳에서 김일성, 최용건, 안길, 강건, 최현, 김일, 최광 등 훗날 북한정권의 핵심이 되는 빨치산 대원들을 만나고 그들과 3년여를 함께 지낸다.

    이민 부대에 앞서 김일성은 1940년 말에 국경을 넘어 이곳에 와 있었다. 일본의 토벌작전이 가장 심했던 동남만주 지역에서 투쟁하던 1로군은 소부대 단위로 뿔뿔이 흩어진 가운데 전 부대가 궤멸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절망적 상황에 일본군 토벌대의 맹추격을 받던 김일성 부대는 1940년 말 국경을 넘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항일연군 지도자급 중에서는, 부대가 궤멸되기 전에 국경을 넘어 피하는 ‘결단’을 가장 먼저 내린 셈이다. 연락이 두절된 상황이긴 했지만, 상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 결정이었기 때문에 약간의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련측과 연락이 없는 상태에서 월경했기 때문에 소련군에 억류되어 취조를 받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주보중 2로군 총사령과 이조린 3로군 총사령이 신분을 보장해 풀려난 것으로 중국측 자료에 나와 있다. 주보중의 2로군과 이조린의 3로군 주력부대도 그뒤 국경을 넘게 되는데, 3로군 가운데 북만주의 김책은 한참을 더 버티다 1943년 말 국경을 넘어 1944년 1월에 하바로프스크에서 합류한다.

    소련령에 들어온 동북항일연군은 한때 ‘동북항일연군교도려’란 이름으로 있다가 ‘88특별저격여단’이란 이름으로 소련 赤軍에 편입한다. 소련군은 일본 관동군과 벌일 일전에 대비하고 향후 동북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펼치기 위해 일본군에 쫓겨 국경을 넘어온 항일투쟁 세력들을 지원했던 것이다.

    88여단의 위상을 놓고 동북항일연군과 소련측 사이에는 큰 갈등이 있었다. 소련측은 동북항일연군 조직을 해체해 소련군 각 부대에 나누어 편입시키려고 했던 반면에, 항일연군측은 중국공산당의 지시를 받는 독자적인 조직으로 남아 있기를 원했기 때문에 심각한 갈등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형식상 소련 적군에 편입해 각종 지원을 받되, 항일연군 조직을 그대로 유지해 독자적 위상을 갖도록 결정됐다. 항일연군측의 주장이 많이 반영된 셈이다. 이 과정에 소련측의 대표자였던 왕신림(王新林·일종의 암호명으로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사람이 바뀔 때마다 제2대 왕신림, 제3대 왕신림으로 불렸다)이 교체되는 혼란을 겪기도 했다.

    88특별여단의 주요 지휘부는 여장 주보중 소좌(후에 중좌로 승진), 정치 부여장에 이조린 소좌, 부여장 시린스키 소좌, 참모장은 샤마르첸코 소좌, 부참모장은 최용건 대위로 사령부가 구성됐다. 단위 부대로 제1교도영은 1로군을 기초로 편성돼 영장 김일성 대위, 정치 부영장 안길 대위, 부영장 마리체프로 구성됐고, 제2교도영은 2로군 2지대를 기초로 편성돼 영장 왕효명, 정치 부영장 강건 상위(후에 대위로 승진), 부영장 아다모프였다. 제3교도영은 3로군을 중심으로 편성돼 영장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허형식, 정치 부영장은 역시 도착하지 않은 김책, 부영장은 사포지니크였다. 그리고 제4교도영은 2로군 5지대를 중심으로 편성돼 영장 시세영, 정치 부영장 계청, 부영장은 지레노프였던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다. 이른바 부(副) 자리를 소련군인들이 차지했다.

    그러나 88여단은 오랜 투쟁을 통한 단결력을 과시해 제2로군 총사령이던 주보중의 지휘 아래 제3로군 총사령이던 이조린이 함께 이끌었고 부참모장이던 조선인 최용건이 이들과 주로 논의했다고 한다. 이조린은 부인이 죽자 조선족 김백문과 재혼했는데, 김백문은 아직 생존해 있으나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한다. 최용건은 주보중과 중국 운남 군관학교를 같이 나온 인연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였고, 항일투쟁 때도 줄곧 주보중 밑에서 참모장으로 일해 부대 안에서 각종 실무를 관장하고 조정하는 실력자였다고 한다.

    제1교도영장을 맡은 김일성은 직속 부하가 많은데다, 제1로군 지도부가 모두 일본군에 잡혀 죽고 살아남은 지휘자 가운데 직책이 가장 높았기 때문에 사실상 1로군을 대표하는,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1·2·3로군을 고루 배려하고, 정치적으로 중국·조선인 간 갈등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주보중은 김일성을 각별히 대우했다. 주보중은 중요한 문제를 이조린, 최용건, 김일성과 주로 상의했는데, 조선족과 상의할 민감한 일이 있으면 김일성과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러한 증언들은 김일성이 소련군에 의해 갑자기 세워진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그밖에 조선인 가운데 간부급으로 아직 도착하지 않은 김책이 거물급이었고, 김일성과 함께 생활한 안길 대위, 주보중 부하로 신임이 각별했던 강건 상위가 어린 나이에도 중책을 맡았으며, 김일성과 보천보 전투를 함께 치른 최현 상위가 두각을 나타냈다.

    김정일 백두산 출생설의 내막

    이민은 88여단에서 생활하면서 김일성의 부인으로 여성 빨치산 대원 중 맏언니 격인 김정숙을 친언니처럼 따르면서 매우 가깝게 지낸다. 이민은 김정숙과 같은 소대에서 생활하고 장백지구에 지하공작도 같이 다니고 학습과 연예활동도 함께 했다. 여성 대원들은 낮에는 사격 총검술과 함께 주로 무전교육을 받았으며, 스키훈련 낙하산훈련도 받았다. 부대 생활에서 여성 대원들은 막사를 따로 썼기 때문에 밤에도 김정숙과 한 막사에서 같이 지냈다. 김정숙처럼 대원 가운데 결혼한 사람이 있더라도 남녀가 각기 막사를 따로 쓰며 헤어져 생활했다.

    김정숙은 조용한 편이었으나 매우 자상한 성격이어서 어린 이민에게 잘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민은 김일성의 첫째아들 유라(김정일의 어릴적 소련식 아명)와 둘째아들 슈라(1947년 멱감다 익사) 형제의 어릴 적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김정숙이 낮에 훈련받으러 갈 때 아이들을 탁아소에 맡겼다가 일과후 데리고 오곤 했다는 것이다. 이민은 김정일이 어릴 때부터 군사놀이를 즐겼다고 회상했다.

    김정일이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는 북한의 주장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나 연구가들은 김정일 신비화 우상화 작업의 하나로 치부하며 무게를 두지 않는다. 김정일이 태어난 1942년이면 김일성이 소련령 하바로프스크 훈련기지에 있을 때인데 어떻게 백두산에서 탄생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민 여사는 다르게 말한다. 김정숙이 41년 초여름 여대원들과 함께 백두산 밀영에 가서 조선국내와 장백지구 혁명조직들을 지도하는 공작사업을 했는데, 다음해인 42년 2월 그곳 귀틀집에서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훈련기지에서 통신원을 통해 전해 듣고 다같이 환호성을 올렸다는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런 이야기를 당시에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이민은 김정숙을 직접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전해 들었다는 김정일 백두산 출생이야기가 어느 정도 신빙성을 지니고 있는지 가늠하기는 힘들다. 이민은 이듬해인 43년 봄 훈련기지에서 김정일을 품에 안고 온 김정숙을 맞이했다고 말했다.

    하바로프스크 생활은 이민에게 중대한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왔다. 인생의 동반자로, 정치적 동지로 50년 이상 해로하면서 일생을 함께 지낸 남편 진뢰를 그곳에서 만나 결혼했기 때문이다. 진뢰는 이민보다 7살 위였다.

    이민 준위와 중국인 진뢰 소위가 연애한다는 소문이 부대에 퍼졌다. 항일투쟁을 하는 부대에서 남녀간 문제는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자칫하면 혁명열기와 군기를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비밀을 지키려고 애썼지만, 이민이 진뢰 소위와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쫙 퍼지자 이민은 상사에게 불려가 엄한 추궁과 비판을 받았다. 상대가 중국인이어서 더욱 설명하기가 난처했다.

    김일성의 후원으로 진중결혼

    한때 이민의 소학교 교장이던 최용건도 이민을 불러 크게 꾸중하면서 마음을 되돌리려고 애를 썼다. 조국이 광복하면 다같이 고국에 돌아가 함께 지내야 할 텐데, 중국인과 결혼해 혼자 떨어지면 어떻게 하려느냐고 간곡히 말렸다고 한다. 막상 최용건 본인은 중국인 왕옥환과 결혼했는데, 이처럼 간곡히 말렸던 것은 이민의 나이가 스물밖에 안돼 진뢰와 차이가 나기도 했지만, 진중생활에서 군기를 확립한다는 뜻이 컸을 거라고 이민은 설명한다.

    더욱이 진뢰는 중국공산당 내부 노선투쟁에서 소수파인 조상지파에 속한 거라고 알려졌기 때문에 주위의 반대가 컸다. 주변에서 이런저런 압력과 추궁을 받으며, 이민과 진뢰는 일제가 패망하면 그때 자유롭게 만나자고 약속하고 교제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녀 관계가 무 자르듯 되는 것이 아니어서 상심이 매우 컸다.

    그런데 이들의 결합에 김일성·김정숙 부부가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민과 함께 생활하면서 진뢰와의 관계가 젊은이들이 흔히 지나가듯 무책임하게 연애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아는 김정숙이 사정을 딱하게 여기고 김일성에게 말해 곤경을 벗어나고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고 한다. 김일성이 이 문제를 다룬 간부회의에서 동지간의 진정한 사랑은 혁명열기를 더욱 높일 수 있으며, 중국인과 결혼하는 것이 조·중우호에도 도움이 된다고 적극 감싸준 덕분에 이례적으로 진중결혼 허락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마침 진뢰는 김일성 밑에서 정치교양원으로 일을 했기 때문에 양쪽 모두를 잘 아는 김일성이 적극 나섰을 것이다.

    1943년 섣달 그믐날 진뢰와 이민은 갑자기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민의 회고에 따르면, 당에서 부르더니 두 사람을 결혼시키기로 결정했으니 그날로 당장 혼례를 치르라고 했다. 이날 함께 결혼 명령을 받은 것이 최광·김옥순 부부와 다른 한쌍이었다. 조선과 중국의 유격대원들이 참석해 축복하는 가운데 세 쌍의 유격대원들이 군복 가슴에 꽃을 달고 한날 한시에 결혼식을 올렸다. 김일성은 축사를 통해 어려운 투쟁 속에서 맺은 사랑은 길고 영원해야 한다면서 사랑이 깊을수록 투쟁을 더 잘해야 한다고 격려했다.

    최광은 광복 후 조선인민군에 들어가 계속 군생활을 했으며, 1988년 인민군 총참모장을 지냈다. 한때 실각했다가 오진우가 사망하자 95년 10월 인민무력부장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1년여만에 사망했다. 김옥순은 같은 유격대원이던 첫남편이 죽자 최광과 재혼했는데, 성격이 활달하고 똑똑해 북한 여맹위원장을 지냈다. 진뢰-이민 부부는 같은 날 결혼식을 올린 인연으로 최광-김옥순 부부와 특히 가깝게 지냈다. 이들은 식을 올린 뒤 부대에 하나뿐인 병실로 가서 신방을 꾸몄는데, 방이 하나 뿐이어서 방 가운데 줄을 매달고 천을 늘어뜨려 방을 둘로 나누어서 첫날밤을 보냈다.

    김일성과 최용건·김책의 위상

    최광의 처 김옥순은 김정숙과도 매우 가까웠다. 1949년 김정숙이 해산하다 죽고, 김일성은 공무가 바빠서 가정을 돌보기 어려웠을 때, 김정숙의 부탁을 받아 김정일을 돌봐준 것이 김옥순이었다고 이민은 증언한다. 김정일이 유치원에 다닐 때도 김옥순 집에서 다녔기 때문에 사이가 각별했다는 것이다. 한때 숙청됐던 최광이 재기해 인민무력부장이 됐을 때 김정일과의 각별한 관계 때문에 큰 힘을 발휘할 것으로 알았는데 일찍 죽고 말았다고 이민은 아쉬워했다.

    김일성이 광복 후 나이나 투쟁경력으로 볼 때 한참 선배인 최용건이나 김책을 제치고 무리의 대표로 떠오른 데 대한 이민여사의 분석은 시사하는 바 크다.

    김일성이 1937년 보천보 전투를 통해 국내에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었고, 성격이 활달해 리더십이 있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독립된 부대를 오래 거느리고 있어서 직계 조선인 부하가 가장 많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일성이 동포들이 많은 동남만주(1로군) 지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길동지역(길림성 동쪽 북만주 지역·2로군)에서 활약한 최용건이나 더 북쪽인 북만주(3로군)지역의 김책에 비해 부대원 가운데 조선인이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김책이나 최용건은 중국인 부하들이 많았으며 참모 역할을 많이 했기 때문에 직계 부하들이 적었다고 한다.

    당시 88특별여단의 조선인은 많을 경우 300명에 달했는데, 이 가운데 180명 가량이 김일성 부대원이거나 김일성 부대와 합동 군사작전을 자주 폈던 1로군 소속이었다. 이민 여사는 김일성이 김책·최용건을 제치고 떠오른 또다른 이유로 이들 각자와 소련 및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도 작용했으리라고 추측했다. 항일혁명 투쟁에 일찍이 뛰어들고 중국공산당에도 앞서 입당한 최용건과 김책은 독자적 군사활동을 주로 펴온 김일성보다 훨씬 중공당과 가까웠다고 한다. 이에 소련군이 최용건이나 김책을 꺼리고, 나이는 훨씬 어리지만 비슷한 서열로 리더십이 있는 김일성을 선호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증언했다. 더욱이 김책은 소련이 강력히 권하는데도 88여단에 합류하기를 거부하다 가장 뒤늦게 들어와 껄끄러운 측면이 있었다고 한다.

    김책은 김일성에 비해 9살이 많은 1903년생인데, 사리판단이 공정하고 신중해 특히 중국공산당 내에서 신망이 높았다. 그는 중국인들이 많은 북만주의 3로군 지역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며 항일투쟁을 벌였는데, 평소 언행이 신중해 중국인들도 매우 어려워했다. 3로군 내부에서 투쟁노선 등을 놓고 갈등이 생기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 김책이 조정역을 훌륭히 해내며 처신을 바로 해서 중국공산당 안에서 평가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 당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연안 중국공산당 본부와 긴밀한 연락이 안 되는 상태에서, 초기에 3로군 총지휘를 맡았던 조상지가 중국공산당 본부의 노선을 비판하며 독자적인 행동을 하려고 해서 이조린 김책 등과 마찰이 심각했는데, 김책이 이조린을 지지하면서도 일을 무난히 수습해 위기를 넘기게 됐다는 것이다. 이민 여사는 굳이 비유하자면 중국의 주은래(周恩來) 총리와 성격이나 역할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김책은 북만주 지역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면서 소련령으로 넘어오라는 88여단 지휘부의 지시를 거부했다. 그는 “누군가 근거지를 지키는 사람도 있어야지 모두 버리고 소련 땅으로 가면 이곳은 누가 지키느냐”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이면에는 동북항일연군이 88특별여단으로 편성되면서 소련군에 사실상 편입하는 것은 당 노선에 맞지 않는다는 강력한 거부의 뜻이 들어 있었다.

    항일연군 지휘부에서는 일본군의 맹렬한 공세로 희생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훗날을 생각할 때 고급 간부들이 버티다가 죽으면 전략적 손실이 너무 크다면서 국경을 넘어올 것을 강력히 종용했다. 김책이 계속 말을 듣지 않자 지휘부가 김책의 후임자를 일방적으로 파견하기에 이른다. 결국 김책은 가장 늦게 1943년 말 소련국경을 넘어 88여단에 합류하고, 후임으로 파견된 중국인 간부는 일본군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고 말았다.

    최용건 역시 투쟁 경력이 화려하다. 그는 김일성보다 12살 많은 1900년생으로 좌익계 조선 혁명가 중 가장 연장자에 속한다. 그는 이승훈이 세운 기독교계 오산학교(당시 교장 조만식)에 다니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운남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후 황포군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했다. 당시 황포군관학교에는 장개석이 주도하는 국민당원들과 손을 잡은 중국공산당의 주은래 등이 있었다. 최용건은 1927년 광주(광동)코뮌 폭동에 참가했다.

    조선인 혁명가들이 200명 정도 참가했던 이 폭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많은 혁명가가 죽었을 때 최용건 등 살아남은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만주로 파견된다. 화요파로 파견된 최용건은 길림성과 흑룡강성 등에 소학교, 농민학교 등을 여러 개 세우면서 교육사업을 하고 이곳을 혁명 근거지로 삼아 조직적으로 항일세력을 키운다.

    이민 여사는 어려서 최용건이 세운 모범소학교를 다니던 기억을 이야기했다. 제법 학교 규모가 커서 중급반 고급반까지 있었고 건물도 2층이었으며, 학생이 많을 때는 1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저녁에는 농민들을 모아 야학을 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최용건이 교장이었으나 얼굴을 보기는 힘들었고, 황포군관학교 생도로 최용건을 따라온 젊은 선생들이 가르쳤다고 한다. 최용건은 이러한 항일 근거지 학교들을 돌아다니면서 항일투쟁을 했다.

    당시 항일투사들은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가명을 여러개 썼는데, 각종 기록에 최석천이란 이름으로 나오는 사람이 바로 최용건이다. 김지강이라는 가명도 썼다. 최용건은 동북항일연군 시절이나 88여단 시절에도 직접적인 군사활동 보다는 이론가형으로 정치교육 등 당 쪽의 고위 직책을 주로 맡았다. 그는 광복 후 북한 정권에서 부수상을 지냈다.

    보천보전투후 김일성에 현상금 1만엔

    이에 비해 김일성은 주로 야전 빨치산활동에 주력했다. 김일성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런대로 알려져 있어 중복을 피하지만, 동북항일연군 시절에도 일선 지휘관으로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병사로 출발했을 테지만, 점차 두각을 나타내면서 지휘관이 되고 여러 차례의 성공적 전투를 통해 동남만 지역에서 강력한 부대로 알려지게 됐다. 그는 동북항일연군이 연대틀을 갖추고 1·2·3로군으로 재편되자 제2군 3사장, 6사장 등을 지내며 독립적인 단위 부대장으로 인상적인 군사활동을 펴나간다.

    김일성이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1937년 보천보 전투다. 보천보는 압록강변의 작은 마을로 총 가구 300호에 1400명 가량 살고 있었는데, 이중 일본인이 26가구 50명 가량이었다고 한다. 불과 20km 떨어진 곳에 혜산진이 있다. 김일성 부대는 현지 공작원들과 연계해 치밀한 사전준비를 한 뒤 6월4일 압록강을 건너가 마을을 점령했다. 주재소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항일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연설하는 등 24시간을 점령했다가 삐라를 뿌리고 철수했다.

    혜산진에서 일본군 수비대가 출동해 뒤를 쫓았으나 오히려 사상자를 내고 도망쳤다. 만주의 항일무장세력이 조선땅에 쳐들어와 잠시나마 마을을 점령한 것은 처음있는 일로 김일성의 이름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당시 동아일보 등은 호외를 내고 김일성 일파와 최현 일파의 보천보 습격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은 일본군의 제1표적이 됐는데 그의 목에 현상금 1만엔이 걸렸다. 김일성부대는 동남만 지역에서 이리저리 쫓겨다니며 유격전을 펴 일본 토벌군을 괴롭혔는데, 1940년 일본군에 쫓기다 맞닥뜨린 마에다 중대를 치열한 교전끝에 섬멸해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지리적으로 조선과 가까워 치열한 전투를 가장 많이 치렀던 제1로군은 대부분의 지휘부가 일본군에 잡혀 죽거나 투항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간부 중에서 김일성은 중국인과 조선인을 통틀어 1로군에서 가장 높은 지위였다

    지휘부가 희생될 때마다 살아남은 자들로 새로 지휘부를 구성해야 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1로군 제2방면군의 총지휘를 맡게 됐다. 88여단에서 총지휘자 주보중이 김일성을 예우한 것도 이런 전과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책을 깍듯이 대한 김일성

    김일성은 혁명 선배들 중에서 특히 김책을 존중했다고 한다. 광복 후 자신이 최고 지도자로 떠오른 뒤에도 김책만은 깍듯하게 대했다는 것이다. 차를 타고 가다가도 길에서 마주치면 먼저 차에서 내려 인사를 할 정도였다. 6·25전쟁이 터지자 김책은 전선사령관을 맡는다. 유엔군이 참전하고 전세가 역전돼 미군기의 평양 공습이 잦아지면서, 다른 간부들은 모두 평양 북쪽으로 피했다. 그러나 김책은 전선사령관으로 평양에 남겠다고 자청해 지하 방공호에서 지휘하다가 1951년 사망했다. 김일성은 이에 대해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김책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쟁중임에도 김일성이 평양에 와서 직접 김책의 빈소를 지켰다고 한다.

    동북아 항일투쟁사를 연구하고, 흑룡강성에 중국 최초로 중국공산당역사연구소를 만들어 소장을 지낸 조선족 김우종 교수는 이민 여사가 방한할 때 함께 와 조선말을 잊어버린 이민 여사의 말을 통역해주었다. 그는 북한을 자주 방문해 조선역사연구소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잦은데, 평양에서 들었다는 김일성과 김책에 얽힌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그의 사무실에 커다란 금고가 하나 놓여 있었다. 김정일이 그것을 열어 보니 낡아서 색이 누렇게 변한 김책의 사진이 한장 들어 있었다고 한다. 다른 혁명 동지들이 많이 있는데도 유독 그의 이름을 따서 김책시(함흥시)와 김책공대를 명명하는 등 각별히 예우를 해준 것도 이런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김책의 아들 김국태는 지금 간부담당 비서로 김정일 체제의 핵심에 포진해 있다.

    항일연군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와 투쟁하다 죽은 지휘관이 많지만, 그중에는 배고픔과 추위, 좌절감을 견디지 못하고 일제에 투항해 이름을 더럽힌 지도자도 많다. 일제는 투항한 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이들을 이용해 동지들 토벌에 이용하는 악랄한 수법을 썼다. 이 때문에 항일투쟁 조직의 비밀 아지트가 습격당하는 등 조직이 급속히 무너지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투항자 가운데 가장 아까운 인물로 전광을 들 수 있다. 제1로군 조직에서 김일성보다 지위도 높고 선배격인 운동가다. 님 웨일즈가 중국공산당 본부가 있던 연안에서 우연히 만난 한 조선혁명가의 일생을 그린 작품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이 가장 존경하고 극찬하면서 투쟁을 함께 하려고 했던 독립운동가 오성륜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전광은 최용건과 동갑인 1900년생으로 함경북도 온성에서 태어나 김원봉의 의열단에 가입해 테러리스트로 활동하다 일제에 체포됐으나 탈출했다. 베를린을 거쳐 모스크바로 가서 동방근로자공산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중국에 와 황포군관학교에서 러시아어 교관으로 활동했다. 김산(장지락)과 함께 광주코뮌 폭동에 참가했고, 그뒤 만주로 파견돼 ML파 일원으로 항일공작을 하다가 동북항일연군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했다.

    각종 기록을 보면 중요한 회의마다 참석자로 전광이란 그의 가명이 나온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고비를 견디지 못하고 1941년 일본군에 투항한다. 동지들을 배반하고 누구보다 찬란했던 투쟁경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한 것이다. 그는 일본군에 협력해 이름을 바꾸고 살다가, 광복 후 신분이 탄로났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처형당하지는 않았고, 47년에 병사했다고 한다.

    이민 여사는 항일연군이 소련국경을 넘기 직전 전향자가 속출했는데, 이는 일제가 교활하게도 투항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선전요원으로 썼기 때문에 배고픔과 좌절을 이기지 못해 배반자들이 나오게 됐다고 말한다. 김일성도 훗날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추위와 배고픔, 강행군은 참을 수 있었지만 배반한 동지들 때문에 버티기가 힘들었다고 이 당시를 술회한 바 있다.

    1945년 8월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88여단 요원들은 각기 중국과 조선으로 향하게 된다. 이민 여사는 조선인 동료들과 헤어져 제1진으로 남편 진뢰와 함께 하바로프스크를 떠났다. 일제가 항복한 뒤 조선인 동료들은 대부분 조국으로 돌아가고, 주보중이 특별히 지명한 몇몇 조선인 동료들은 중국 내전에도 참가한다. 진뢰 부부는 하얼빈으로 갔고 그곳에서 공산당원으로 내전에 참여하는 등 활약한다. 중국공산당이 승리한 뒤 진뢰는 흑룡강성 성장을 오래 지내면서 중국 동북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된다.

    그러나 중국이 문화혁명 등 대란에 휩싸일 때마다 진뢰-이민 부부도 노선투쟁에 휘말려 숱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가장 고생스러웠던 것이 문화혁명 때다. 이때 많은 사람이 갖가지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갔는데 진뢰 역시 반혁명분자, 주자파, 특무라는 올가미를 쓰고 꼬박 7년간 옥살이를 했다고 한다. 지주집안 출신으로 대학을 다닌 인텔리인데다 강청 등의 소위 ‘4인방’과 노선이 달라 홍위병들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민 여사 역시 진뢰의 부인인데다 조선족이라는 점 때문에 ‘조선 특무’라는 혐의를 쓰고 5년동안 감옥에 갇혀 사는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그는 토굴에 갇혀 지낸 세월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다고 회상한다. 당시 홍위병들은 북한 김일성을 비판하는 등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문혁기간 내내 조선족이 고통을 많이 겪었다.

    진뢰·이민 부부는 광복 후 김일성의 초청으로 1983년과 1992년 평양을 방문해 각별한 환대를 받았다. 83년 9월 흑룡강성 친선대표단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은 일행을 접견해 오전 내내 항일투쟁하던 시절 이야기를 나누고, 중국에 살고 있는 동료들의 안부를 일일이 물으면서 극진히 대접했다. 김일성은 의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축배까지 들었다고 한다.

    92년 4월 김일성의 8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축하단을 이끌고 방북했을 때도 하바로프스크 시절 함께 생활하던 동지들 중에서 살아있는 여대원들을 모두 모이게 해서 이민과 만나게 해주었다. 평양 청류관에서 만났는데 김옥순, 박경숙, 박경옥, 리영숙, 리숙정 등 당시 동지들은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이민은 회고한다. 남자 동지들은 술 담배 때문에 일찍 죽었으나 여대원들은 대부분 살아 있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김일성을 우상화하면서 항일투쟁역사를 철저히 김일성 중심으로 왜곡하고, 특히 중국공산당 휘하에서 활동한 동북항일연군 시절의 투쟁을 조선혁명군의 독자적 투쟁으로 강변하는 북한에서, 김일성이 자신의 내력을 너무도 잘 아는 진뢰-이민 부부를 환대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주민들에게 학습시키는 공식적인 역사와 지도자의 개인적 만남은 별개인 것일까.

    이에 앞서 진뢰-이민 부부는 1964년 김일성이 중국 동북지구를 방문할 때 하얼빈에서 주은래 총리와 함께 영접한 적이 있었다. 1945년 하바로프스크에서 헤어진 뒤 19년 만의 만남이었다.

    김일성사망 때 만난 김정일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 진뢰·이민 부부는 하얼빈에서 승용차를 타고 평양까지 조문하러 갔다. 김일성 사망 소식을 듣고 하얼빈 혁명기념관에 조문소를 차려 조선족들이 조문을 하게 했는데, 뒤늦게 조문방문 요청이 승인되어 18시간을 줄곧 달린 끝에 평양에 도착했다.

    7월20일 장례추도대회가 끝난 직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면담한다고 해서 추도대회장인 김일성광장 휴게실에서 그를 만났다. 깊은 조의를 표하자 김정일은 감사하다면서 앞으로도 예전처럼 자주 방문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이민 여사는 자신도 모르게 김정일의 손을 잡아 자신의 뺨에 갖다대는 무례를 범했는데, 그 옛날 김정숙 동지의 얼굴과 함께 어릴 적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고 술회한다.

    김정일은 그때까지 외국 사절을 접견하면서 사진을 공개한 적이 없는데 진뢰 부부 접견사진은 이례적으로 로동신문에 공개됐다. 이날 김정일은 진뢰 부부를 만나고, 이어 이탈리아 국제관계 연구소 총서기 장 카를로 엘리아 바롤리를 접견했는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정일동지가 이들을 접견했다는 기사와 함께 접견사진이 1994년 7월21일자 로동신문에 실려 있다.

    진뢰 부부는 1998년 9월 공화국 창건 50돌에 다시 초청을 받아 27일간 북한에 머물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계속 지방을 순시하는데 평양에 오면 특별면담을 할테니 기다리라고 해서 하루이틀 있다보니 한 달이 됐다는 것. 그 사이 옛날 하바로프스크 시절 동지들도 만나고, 금강산과 묘향산, 개성 등 각지를 구경했으며, 이민 여사 부모의 고향인 황해북도 은파군 양동리도 방문했다.

    이민 여사가 한국을 방문하기까지에는 이런 저런 마음쓰임이 많았을 것이다. 김일성 부자와 특별한 관계라는 것이 한국행을 오히려 더디게 했을 것이다. 그는 한국의 발전상에 대해 많이 듣고 텔레비전을 통해서도 보았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까 훨씬 화려하고 특히 문화시설과 위생시설이 훌륭하다고 말했다. 세계 각국에서 비정부기구 대표단이 참가한 서울 NGO대회도 인상이 깊었을 것이다.

    항일운동사 보완에 소중한 내용들

    호텔 음식점에서의 짧은 만남만으로는 이민 여사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나 한국방문 느낌을 충분히 들을 수 없었다. 특히 그의 개인사는 우리 역사에서 소홀히 다루거나 왜곡해서 전하는 1930∼1940년대의 내용을 보완하는데 적지 않은 보탬이 될 것이 분명했다. 새로 들을 이야기도 많고 확인할 내용도 많았다. 항일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글 가운데 몇몇 부분은 사실과 다르고 몇몇 부분은 충분히 기술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필자는 일정이 빡빡한 이민 여사를 졸라서 한번 더 만나자고 요청했다. 그래서 이민 여사와 김우종 교수가 김성훈 농림부 장관의 배려로 한국의 농촌을 둘러보고, 한우사육단지와 젖소사육 목장, 축산물 종합처리장(LPC), 미곡종합처리장(RPC) 등을 방문·견학하는 승용차에 동승하게 되었다. 12시간 이상 한 차에 나란히 앉아서 미심쩍은 사항을 물어보고 확인하는 일을 했다.

    이민 여사는 가는 곳마다 열심히 설명을 듣고 이것저것 묻기도 하면서 수첩을 꺼내 꼼꼼히 메모했다. 쓴 지가 너무 오래되어 한국말을 거의 잊어버렸지만 최근 공부를 다시 해서 일상적인 말은 조금 알아듣는다고 했다. 나이를 초월하는 그 열정은 놀라웠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용인 민속촌이었다. 그는 이곳저곳 들르는 곳마다 어릴 적 살던 곳과 똑같다면서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널뛰기를 보고도, 괴나리 봇짐을 보고도, 집 모양이나 헛간 등을 보고도 바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듯 즐거워 했다.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항일투쟁을 하다 일본군 손에 죽은 아버지나 오빠 생각도 나는 듯 했다.

    하루종일 한 승용차로 다니면서도, 그가 답변하기에 난처해 할 것같아 애써 뒤로 돌려 두었던 질문을 헤어질 때 쯤 던져보았다. 북한 동포들의 어려운 식량사정 등을 내쪽에서 먼저 들먹이고 나서, 함께 혁명활동을 했고 특별히 가까운 사이이기도 한데 지금의 어려운 북한사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로서는 답변하기에 매우 곤혹스러운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어서 통일이 돼야 한다. 남북이 함께 잘 살아야 한다. 지난날을 너무 따지기 보다는 민족의 장래를 생각해야 한다”고 우회적으로 대답했다. 그는 남쪽에서나 북쪽에서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역사가 정확히 기술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면서 역사기록은 정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원고는 지난해말 본지 편집실에 도착했으나, 편집사정상 필자의 양해를 얻어 3월호에 게재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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