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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무장투쟁시기의 김일성 빨치산부대

조선족 항일투사 李敏여사의 ‘60년만의 증언’

  • 이원섭 한겨레신문 논설실장

항일무장투쟁시기의 김일성 빨치산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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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일성이 광복 후 나이나 투쟁경력에서 한참 앞선 최용건이나 김책을 제치고 우두머리로 떠오른 것은 성격이 활달해 리더십이 있기도 했지만, 그가 동포들이 많은 동남 만주지역에서 독립된 부대를 오래 거느렸던 까닭에 직계 조선인 부하가 훨씬 많았던 것이 결정적 이유다.》
항일독립투사 이민(李敏)여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89년 3월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哈爾濱)에 갔을 때였다. 국교수립 전이라 신문기자 신분을 드러낼 수 없어 한·중 경제협력 세미나에 참석하는 ‘동북아 경제를 연구하는 교수단’ 일행에 끼어들었다. 교수로 위장해 가짜 명함을 찍고, 대학교 연락처에 필자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대신 넣었다. 일행 대부분은 중국이 처음이었고, 저명한 농경제학자이며 중국 전문가인 김성훈 중앙대학교 교수(현 농림부 장관)만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한 경험이 있어 실질적인 단장이었다. 김 교수가 중심이 된 경제학 교수들의 중국 방문단에 필자가 따라붙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당시 중국땅을 밟아본 사람은 손을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중국 투자기업체의 담당자거나 중국을 연구하는 학자들 몇몇만이 간신히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사전에 안기부(현 국정원)의 허가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었다.

하얼빈에서 만난‘김일성의 옛동지’

한·중간 직항로가 없었기에 우리 일행은 일단 홍콩으로 갔고, 거기서 다시 요령성 심양(瀋陽)행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다. 그나마 홍콩에서 정보요원 접선하듯 만난 중국관리는 여권에 입출국 스탬프를 찍는 것이 아니라 잘 보관해야 한다며 비자를 대신할 허름한 종이쪽지를 내주는 것이었다. 심양에서, 길림성 장춘(長春)에서, 그리고 흑룡강성 하얼빈에서 잇따라 열린 경협세미나와 공장방문 등을 통해 시장경제를 배우려는 중국관리들의 열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일행이 마지막으로 들른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로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곳이다. 당시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장소는 아무런 기념비도 없었고 갈길 바쁜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악명높던 이시이부대는 자동차연구소로, 만주군관학교는 항공기술학원으로 변해 있었다. 하얼빈에서는 흑룡강성 삼강(三江)평원 개발 타당성 및 한국의 투자가능성을 논의했다. 그때 하얼빈에 묵으면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 이민 여사다.

이민 여사는 10년간 흑룡강성 성장을 지낸 진뢰(陳雷·천레이)의 부인으로 조선족이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흑룡강성 부주석직을 맡고 있어 영향력이 매우 크다는 것이 소개자의 설명이었다. 이민 여사의 초청을 받아 점심식사를 함께 하면서 삼강평원이 바로 항일투쟁이 가장 치열했던 곳이었다는 이야기 끝에, 그가 젊었을 때 무장항일투쟁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바짝 흥미를 느낀 필자가 “혹시 그 당시에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웃으면서 옛 소련땅 하바로프스크 근처 비밀기지에서 ‘김일성 동지’와 3년 남짓 함께 지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지금이야 사정이 좋아져 평양을 오가는 사람이 많아지고, 소련이나 중국 쪽 자료가 공개되어 김일성의 1930년대 만주 항일투쟁이나, 중소국경을 넘어가 지낸 1940년대 소련령에서의 행적이 더러 알려져 있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1989년 당시만 해도 서대숙 박사(미국 하와이대학 교수) 등 몇몇 해외학자들의 글로만, 그것도 아주 간략하게 소개되었을 뿐이었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도 꺼릴 때다.

15일간의 중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해 변화하는 중국을 다룬 특집 기획물 ‘현장에서 본 중국의 새선택’을 9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마지막회에 이민 여사 이야기를 소개했다. 국내 언론으로는 처음으로 그를 소개한 것이었다. 이민 여사 또한 필자 일행이 처음으로 만난 ‘남조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노태우 군사정권 시절이었다. 사안의 민감성 때문에 그의 항일투쟁 부분만 집중 부각하고 김일성 관련 부분은 지나가면서 한마디 슬쩍 언급하는 정도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민 여사의 사회적 지위로 보거나 말하는 태도 등을 볼 때 정확한 이야기라는 확신이 서기는 했지만, 혹시라도 정보기관에서 문제삼을 경우 방어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 흑룡강성에서 펴낸 ‘흑룡강 당대 명인록’에는 이민 여사의 항일투쟁기록은 기술돼 있었으나 김일성과의 사적인 관련 부분은 없었다.

필자가 이민 여사를 다시 만난 것은 꼭 10년 7개월만인 99년 10월17일 서울에서였다. 이민 여사는 서울에서 개최된 서울 NGO(비정부기구)세계대회에 중국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했다. 한국 방문은 처음으로 흑룡강성 조선족 친목단체인 ‘하얼빈시 소수민족 부녀연의회’ 명예회장 자격이었다. 약속장소인 시내 호텔 음식점으로 들어서는 이민 여사를 보고도 필자는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10년만에 다시 만나는 것이니 분명 75살 일텐데, 노쇠하기는커녕 꼿꼿한 자세가 전혀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자그마한 키에 다부진 체구가 굳은 의지력과 합쳐져 나이든 것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았다.

1930년대 東北抗日聯軍

이민 여사 부부는 북한당국의 초청으로 평양을 여러 차례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환대를 받은 각별한 관계였기에, 서울행이 그만큼 어려웠을 것이다. 북한을 자주 오가며 그곳 사람들만 보아왔기 때문에 남한의 실상과 서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느끼는 감회가 달랐으리라.

이민 여사의 개인사는 남한의 역사책에 빈칸으로 남아 있고 북한의 역사에서도 크게 왜곡돼 있는 1930년대 만주지역의 항일투쟁 실태를 상당부분 채워준다. 1920년대 김좌진 장군 등의 무장독립투쟁이 좌절한 뒤 민족주의 진영의 항일투쟁은 상해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일제에 쫓기면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윤봉길·이봉창 의사 등의 살신성인이 민족의 기개와 독립의지를 만방에 떨치고, 지속적인 투쟁으로 이어졌으나,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에는 일제의 압박이 심했다.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중일전쟁이 터진 후 중국 장개석 정부를 따라 이곳저곳으로 옮기며 중경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우파의 본격적인 군대조직이라 할 수 있는 임시정부 예하 광복군은 광복 직전에 창설된다.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에는 공산주의자들이 큰 몫을 했다. 특히 만주지방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진 무장투쟁은 거의가 항일 빨치산들에 의한 것이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좌익계열은 1928년 코민테른의 ‘일국일당노선’에 따라 중국공산당 휘하에 들어갔고, 그들과 연대해 만주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일컬어지는 부대가 그것이다. 동북항일연군에는 중국공산당원 뿐 아니라 조선인이 상당히 많았으며 고위간부에 특히 조선인이 많았다. 일제에 일찍 짓밟힌 탓에 항일투쟁도 중국인보다 훨씬 앞서 나갔기 때문이다.

동북항일연군은 여러 차례에 걸친 조직개편 끝에 활동지역에 따라 최종적으로 1로군(東南滿지역, 총지휘 양정우), 2로군(吉東지역, 총지휘 주보중), 3로군(北滿지역, 총지휘 이조린)으로 재편된다.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던 두만강 건너편 동남 만주지역(간도 지방)은 ‘김일성 부대’ (1로군 제2방면군) 등 조선인 중심부대가 사실상 독립적인 군사활동을 펴기도 했으나, 거의 대부분 한·중연합부대로 군사활동도 함께 했다. 초기 한때 민족간 갈등이 불거져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항일이라는 공동 목표를 위해 중국공산당 기치 아래 함께 투쟁했던 것이다.

李敏, 전설적 빨치산 여전사

이민은 중국인 이조린(李兆麟·리자오린·일명 장수전) 장군이 총사령인 3로군 예하 부대에서 활동했다. 그는 1924년 흑룡강성 오동하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황해도 사리원 인근에서 살다가 고향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흑룡강성 삼강평원 지역에 정착했던 것이다.

이민은 어려서 최용건(전 북한 부수상)이 세운 모범소학교에 다니다가 항일공작요원으로 숨어서 활동하던 아버지를 따라 무장투쟁부대에 들어갔다. 그때 그의 나이 12살이었다. 그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처음에는 유격대 병사들의 피복을 공급하고 다친 대원들을 간호하는 등 비전투원으로 일했으나, 형세가 몰리면서 차츰 본격적인 ‘전사’로 성장했다. 이민은 소총이나 기관총 사격은 물론 말 타기에도 익숙해져 완전한 전투원으로 임무를 충실히 해낼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1937년과 1938년 무렵 일본군의 토벌공세가 거세지면서 송화강 유역 삼강평원 일대의 부금이나 밀산, 완달산 등지에서 큰 싸움이 잦았는데, 아버지와 오빠는 이때 희생됐다고 한다. 항일연군 제3로군은 일본군을 피해다니며 싸우다 몰리면 수목이 울창한 삼강평원 늪지대로 들어가 숨었다. 일본군은 기병대가 주력이었기 때문에 울창한 밀림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늪지대에서 산나물을 캐먹고 오리알도 먹으며 포위한 일본군이 지치기를 기다리다가, 일본군 주력부대가 물러가면 다시 나가서 유격전을 펼쳤다는 것이다.

1938년 완달산 격전에서는 부대원 24명이 일본군에 완전 포위된 상태에서 집중 공격을 받아 함께 생활하던 부대원 전원이 죽고, 마침 척후 임무를 부여받고 탐색활동을 나갔던 이민과 다른 여전사만 겨우 살아남았다고 한다. 자신이 몸을 숨긴 큰 나무뿌리 바로 위에서 남은 적을 찾기 위해 서성이는 일본군의 말발굽 소리가 어찌나 무서웠는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때 생각을 하면 소름이 끼친다고 한다.

날이 갈수록 일본군의 공세는 치열해졌다. 일본군은 초토화작전을 펴면서 유격대가 숨을 만한 산림을 아예 불태워 근거지를 없애려고 했다.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날마다 일본군에 쫓기느라 지치기도 했지만, 투항을 권유하는 일본군의 교활한 귀순작전에 심리적 동요를 일으킨 대원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도 이민은 흔들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이민이 속한 부대는 결국 일본군에 쫓겨 1941년 국경선을 넘어 옛 소련령으로 들어간다. 이민은 그곳에서 김일성, 최용건, 안길, 강건, 최현, 김일, 최광 등 훗날 북한정권의 핵심이 되는 빨치산 대원들을 만나고 그들과 3년여를 함께 지낸다.

이민 부대에 앞서 김일성은 1940년 말에 국경을 넘어 이곳에 와 있었다. 일본의 토벌작전이 가장 심했던 동남만주 지역에서 투쟁하던 1로군은 소부대 단위로 뿔뿔이 흩어진 가운데 전 부대가 궤멸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절망적 상황에 일본군 토벌대의 맹추격을 받던 김일성 부대는 1940년 말 국경을 넘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항일연군 지도자급 중에서는, 부대가 궤멸되기 전에 국경을 넘어 피하는 ‘결단’을 가장 먼저 내린 셈이다. 연락이 두절된 상황이긴 했지만, 상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 결정이었기 때문에 약간의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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