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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 제안

“소위 민족주의자들이여! 당신네 자식이 선택하게 하라”

소설가 복거일의 영어공용화 주장 제2탄

  • 복거일 소설가

“소위 민족주의자들이여! 당신네 자식이 선택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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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거일씨는 2년 전 우리 사회에서 ‘영어 공용화론’을 처음으로 제기한 인물이다. “관공서의 공문서 등 일상생활에서 한국어와 영어를 공용하게 하자”는 그의 주장은 당시 엄청난 파장과 논란을 일으켰고, 그 후 여러 언론매체가 ‘영어 공용화론’을 다루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문제와 관련된 논쟁을 살펴보면, 논쟁 초기에 제기됐던 찬성과 반대의 논리가 다람쥐 쳇바퀴 돌듯 계속 반복돼 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로부터 2년 후, 그가 좀 더 강고한 논리로 무장하고 다시 한번 영어 공용화론을 들고 나왔다. <편집자>》
1. 영어공용 논의의 어려움

얼마 전 일본의 총리 자문기구가 일본 사람들의 부족한 영어 실력이 큰 문제임을 지적하면서 영어를 제2공용어로 삼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일본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큰 반향을 낳았다. 김대중 대통령도 일본의 이런 정책에서 배울 점이 크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영어 공용에 관한 논의는 실은 두 해 전에 우리 사회에서 먼저 시작했다. 영어 공용을 주장한 필자의 졸저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가 나오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논의에 참가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시 우리 정부는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이제 김대통령이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나타낸 터라, 영어를 공용어로 삼는 일은 상당한 운동량을 얻은 셈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삼는 일은 우리의 언어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올 터이므로 더할 나위 없이 중대한 사업이다. 당연히 그것은 시민들 사이의 합의를 바탕으로 추진돼야 한다. 그리고 시민들 사이의 합의는 진지한 논의들을 통해서야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영어 공용에 관해서는 진지한 논의가 무척 어렵다. 무엇보다도 영어 공용은 민족주의와 부딪치는 주장이기 때문에, 그런 논의에는 어쩔 수 없이 민족주의적 감정이 끼어들게 된다. 우리 사회처럼 민족주의가 거센 사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차분한 논의를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다행히 지난 두 해 동안 그런 감정적 태도는 많이 누그러져서 이제는 비교적 차분한 논의들이 나오고 있다.

또 하나 논의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영어 공용이 무척 크고 복잡한 사업이며 자연히 생산적 논의를 위해서는 참가자들이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지식을 지녀야 한다는 점이다. 상식에 바탕을 둔 논의에선 상투적 주장들만 어지럽게 나오고 얘기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따라서 영어 공용에 관한 논의를 위해서는 국제어가 등장하는 까닭과 과정, 국제어에서 영어의 위치, 민족어들의 앞날과 같은 주제들을 먼저 살피는 것이 바람직하다.

2. 정보전달 수단과 망(network)

국제어가 나타나는 것은 근본적으로 언어가 다른 정보전달 수단들과 마찬가지로 망(network)을 이룬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사용자가 한 사람일 때 정보전달 수단들은 별로 쓸모가 없다. 전보든, 전화든, 팩스든, 사용자가 적어도 둘은 돼야 비로소 쓸모가 생긴다. 사용자가 늘어날수록 물론 정보전달 수단의 가치는 커진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것을 이용하게 되면 망이 구성돼 사회의 신경조직 노릇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어떤 정보전달 수단의 가치는 그것이 망을 이룰 때에 비로소 제대로 드러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정보전달 수단의 가치는 사용자의 수보다 훨씬 빠르게 커진다는 점이다. 전화나 텔레비전의 가치가 커진 것을 돌이켜 보면 이 점이 이내 드러난다. 전화나 텔레비전을 가진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들 없이도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것들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제 전화나 텔레비전이 없는 사람들은 그저 불편을 겪는 것이 아니라 삶에 필수적인 정보들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망을 이룬 정보전달 수단이 지닌 가치는 무척 빠르게 커진다. ‘메트카프의 법칙 (Metcalfe’s Law)’에 따르면, 사용자에 대한 효용으로 정의되는 망의 가치는 대체로 사용자 수의 제곱에 비례한다. 이 법칙은 전산통신망에서 널리 쓰이는 ‘에더넷 표준(Ethernet Standard)’을 창안한 봅 메트카프(Bob Metcalfe)가 처음 주장했다. 과학평론가 조지 길더가 주장한 ‘정보우주의 법칙(Law of Telecosm)’에 따르면 전산기의 가격 대비 성능은 망에 연결된 전산기 수의 제곱에 비례한다. 따라서 비록 망의 가치가 꼭 사용자 수의 제곱에 비례해서 늘어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용자 수보다 훨씬 빠르게 늘어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3. 국제어라는 표준

언어는 그런 사정을 특히 또렷이 보여준다. 아주 적은 사람들이 쓸 때, 한 언어의 가치는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점점 많은 사람들이 쓰게 되면서 그것의 가치는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그 과정에 그것은 점점 정보전달에 좋은 상태로 진화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쓰는 언어는 큰 사회를 가능하게 하고, 문명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이 세상엔 여러 언어가 동시에 존재하므로 실제 상황은 좀 복잡하다. 단 하나의 언어가 표준인 국제어로 쓰이는 대신에 여러 언어들이 공존하므로, 이 세상에는 하나의 커다란 언어망 대신에 작은 언어망이 여러개 공존한다. 자연히 메트카프의 법칙이 가리키는 망의 이점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다.

그렇게 국제어가 없는 상태에서 나오는 손실은 무척 크므로 여러 언어 대신에 하나의 국제어를 통용시키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나온다. 그러나 그런 표준화의 이익이 모든 사람에게 고루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국제어로 선택된 언어를 이미 써온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큰 이익을 본다. 자연히 언어들은 국제어라는 표준의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한다.

그러면 공존하는 여러 언어 가운데 어떤 언어가 표준으로 선택되는가? 이 문제를 살펴볼 때에도 ‘메트카프의 법칙’은 좋은 지침이 된다. 어떤 망의 가치는 그것을 쓰는 사람들 수의 제곱에 비례하므로, 다른 언어보다 쓰는 사람이 많은 언어는 점점 더 우세해진다. 그리고 우세한 언어를 쓰는 것이 유리하므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그것을 쓰게 돼 호순환이 나온다.

어떤 이유로 한번 표준으로 선택된 것은 다른 것들에 비해서 대단히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경제학자들이 ‘망 경제(network economy)’라고 부르는 현상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미 표준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가장 나은 것은 아니더라도 번창하게 마련이다.

고전적 예는 철도의 궤간(軌間)이다. 19세기 초엽 영국에서 증기기관차를 이용한 철도수송이 막 발전하기 시작했을 때, 수립했던 표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궤간의 표준이었다. 당시 철도 발전을 주도한 조지 스티븐슨은 타인사이드의 탄전에서 말이 끄는 철도를 이용해서 실험을 했는데, 그는 그 철도의 궤간인 4피트 8과 1/2 인치를 그대로 답습했다. 당시 이삼바드 킹덤 브루넬이 7피트의 광궤를 완성했고 그것이 더 효율적임을 증명했지만 이미 깔린 철도를 이용한 스티븐슨의 궤간이 표준으로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래서 영국 탄전의 말이 끄는 철도의 궤간 규격은 증기기관차를 이용하는 철도에서도 세계적 표준이 됐다.

또 하나 널리 알려진 예는 타자기의 자판이다. ‘QWERTY 체계’라고 불리는 현행 자판은 원래 19세기 중엽에 타자봉들이 서로 얽히는 현상을 줄이는 데에 무게를 두고 설계됐다. 그런데 그것은 배우기가 쉽지 않고 속도도 느리다. 그래서 개량된 자판이 속속 나왔지만 사람들이 이미 QWERTY 체계를 쓴다는 사정 때문에, 새로운 체계를 쓰려는 사람이 없어서, 개혁의 시도들은 번번이 실패했다.

기술이 점점 빠르게 발전하면서 근년에는 그런 예들이 훨씬 자주 나왔다. 잘 알려진 예는 전산기다. 소비자들은 모두 표준에 맞게 만들어진 기계와 운영체계를 찾았다. 그것에 맞는 프로그램이 많이 있을 터이고 다른 기계들과 잘 연결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 시장에 나와 표준의 자리를 차지한 것들은 기계든 운영체계든 호순환의 덕을 입었고 독점적 이익을 누렸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전산기 운영체계인 DOS와 윈도스(Windows)는 대표적 예들이다.

4. 지금의 국제어는 영어다

역사적으로 국제어들은 모두 제국의 출현에 힘입었다. 제국의 성립은 잠재적 망 경제의 크기를 단숨에 늘리며, 제국은 그런 잠재적 이익을 실현할 의욕과 능력을 갖춘 정치체제다. 아람어, 한문, 그리스어, 라틴어, 아랍어는 제국의 성립에 힘입어 국제어가 된 대표적 예들이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는 언어들은 그것이 나타나고 진화한 역사적 배경 덕분에 모두 나름의 특질을 지닌다. 자연히 그것들은 예외없이 국제어로는 바람직하지 못한 특질을 여럿 지니게 마련이다. 그래서 근대에는 국제어를 일부러 만들려는 시도가 여러 번 나왔다. 에스페란토어가 대표적 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인공어(artificial language)들은 널리 쓰이지 못했다. 망 경제의 이점을 누릴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제어에 필요한 장점을 아무리 많이 갖추었더라도 당장 배워서 쓸 데가 없으므로 인공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은 아주 적을 수밖에 없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이미 상당한 기반을 가진 언어 가운데 어떤 이유들로 인해서 임계 질량을 넘은 언어가 국제어의 자리를 차지하게 마련이다.

현대에는 19세기 영국 중심의 평화(Pax Britannica)와 20세기 미국 중심의 평화(Pax Americana) 덕분에 영어가 그런 임계 질량을 얻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영어는 국제어의 자리를 차지했고 이제는 망 경제의 이익을 제대로 누리고 있다. 물론 그런 이익은 앞으로 점점 커질 것이고, 영어는 국제어로서 자리를 더욱 굳힐 것이다.

특히 큰 뜻을 지닌 사실은, 지금 거의 모든 지적 산물이 영어로 쓰이거나 번역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영어로 번역되기 전에는 어떤 저작도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근년에 인터넷이 중요한 통신 경로로 자리잡으면서 이런 추세는 더욱 심해졌다. 현재 세계의 전산기들에 저장된 정보의 80%는 영어로 수록돼 있고 인터넷을 통해 전파되는 정보의 70% 내지 80%가 영어로 표현돼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인터넷을 통해 전파되는 정보들 가운데 과학적 주제들은 거의 모두 영어로 표현돼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 사회에서 과학과 기술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이 사실은 영어의 앞날을 예고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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