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羅), 량(梁), 려(呂), 렴(廉), 로(盧), 로(魯), 류(柳), 륙(陸), 리(李), 림(林)의 10개 성씨가 1996년 10월부로 주민등록증에서 사라졌다. 대법원이 성씨는 ‘두음법칙’에 따른다는 내용의 호적예(례)규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라면’은 있어도 ‘라’씨는 없다. ‘나’씨만 있을 뿐이다. 북한의 동생은 ‘리’씨인데 남한의 형은 ‘이’씨다. 우리 말글살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두음법칙은 없어져야 한다.
1592년 음력 4월13일 새벽 일본이 부산포에 쳐들어온 것을 배달겨레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고 부른다. 반면 침략자 일본은 이를 ‘문록전역(文祿戰役)’이라고 한다. 그해 일본 년호가 문록(文祿)이고 그들이 일으킨 전쟁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본에선 ‘경장전역(慶長戰役)’으로 쓰이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처럼 같은 사건을 나라마다 서로 다르게 부르는 것을 ‘력사용어 일방통행’이라고 한다. 바로 여기에는 어느 쪽이 침략했는지 알 수 있는 단서가 숨어 있다. 침략을 당한 쪽에서는 ‘란’으로 부르는 반면 침략한 쪽에서는 전쟁이라 칭한다. 북배달이 경인란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곧 침략을 자인하는 셈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경인란을 흔히 ‘6·25 동란’ 또는 ‘6·25 전쟁’이라 쓰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읽는 대로 적으면 ‘륙이오 전쟁’인데, 이를 통상적인 력사용어로 풀이하면 ‘륙’국과 ‘이오’국이 전쟁한 것이 된다. 청과 일본의 ‘청일전쟁’이나 러시아와 일본의 ‘러일전쟁’처럼. 또 전혀 엉뚱한 의미의 ‘유교전쟁’으로도 들린다.
그런가 하면 유엔군은 경인란을 ‘코리안 워(Korean War)’라고 부르고, 우리는 이를 ‘한국전쟁’이라고 번역한다. 이는 완전히 엉터리 번역이다. ‘코리안 워’를 정확히 번역하면 ‘코리아 사람 전쟁’이다. 다시 말해 ‘배달겨레끼리 벌인 전쟁’이라는 의미다. 이는 제3자가 사용하는 력사용어다.
그로부터 55년이 흘렀다. 그 사이 남배달과 북배달은 너무도 먼 나라가 돼버렸다. 한민족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이질적인 문화와 사회가 형성됐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말과 글이다. 심지어 성(姓)도 달라졌다.
전후 50년 만인 지난 2000년, 금강산에서는 역사적인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다. 이때 만난 남쪽 동생의 가슴에 달린 이름표에는 ‘이삼근’이라고 적혀 있고 북쪽 형의 이름표에는 ‘리원근’이라고 적혀 있었다. 분명 형제지간인데도 ‘이’씨와 ‘리’씨로 성씨가 달라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북쪽 표기가 옳다. 북쪽은 으뜸말과 으뜸소리를 굳게 지키는 프랑스식을 택해서 말글살이가 비교적 바르게 정착됐다.
‘李’자의 뜻과 음은 ‘오얏 리’다. 으뜸소리가 바로 ‘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에서 ‘李源根’은 ‘리원근’이라고 읽고, ‘行李’는 ‘행리’라고 읽고 쓴다. ‘李’자가 앞에 나오든 뒤에 나오든 상관없이 똑같이 ‘리’로 쓴다. 북한이 1992년 3월 발행한 ‘조선말 대사전’을 보면 일본말을 완전히 배제한 순수한 우리말로만 정리돼 있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이처럼 옛 으뜸말과 으뜸소리를 그대로 지켜 나가는 프랑스식 말글살이를 따르고 있다. 이를 지키지 않는 곳은 남한뿐이다. 남한의 말글살이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것은 두음법칙이다. 글자 첫소리에 ‘ㄹ’과 ‘녀·니’가 오면 이를 ‘ㅇ’과 ‘여·이’로 바꿔서 쓰고 읽도록 한 것.
한글학자인 리숭녕씨가 이를 처음 주장했고, 리희승씨와 최현배씨가 이에 동조하면서 정해진 법칙이다. 자신의 이름을 ‘리승만’으로 고집했던 대통령도 결국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예를 들어 ‘녀석’은 되는데 ‘녀자’는 안 된다. ‘년놈’은 되는데, ‘년세’는 안 된다. ‘놈’을 ‘옴’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도대체 뭐가 기준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런 게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전통적인 우리의 말글살이 규칙을 파괴하는 것이다. 말글살이를 만든 세종대왕이 ‘녀자’ ‘년세’라고 썼던 것을 굳이 바꿀 이유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으뜸소리 무시한 오류
엄연히 존재하는 으뜸소리를 사용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합리적이다. 단적인 예가 한글로 한자자전을 찾을 때다. 한자자전에서 ‘女’자를 찾으려면 ‘녀’자로 들어가야 한다. ‘여’자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럴 리가 없다’고 할 때 사용된 ‘리’는 한자 ‘理’다. 한자 첫소리의 ‘ㄹ’은 ‘ㅇ’소리로 표기하라는 두음법칙은 이 대목에서 뒤틀리게 된다.
리숭녕씨는 두음법칙을 쓰는 이유에 대해 ‘첫소리에 ㄹ소리를 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동요 중에 이런 노래가 있다. ‘리~리~리 자로~ 끝나는 말은….’ 하나도 힘들지 않다. 우리가 흔히 먹는 ‘라면’이 있는데도 ‘羅’씨를 ‘나’씨로 표기하라는 이유는 또 뭔가. 오히려 혼란만 초래할 뿐이다.
두음법칙과 비슷한 예가 ‘쇠고기’라는 단어의 변형이다. ‘牛’의 으뜸소리는 ‘소’다. 필자는 ‘쇠고기’는 ‘철사고기’로 오해할 소지가 있으니 으뜸소리를 써서 ‘소고기’가 맞다는 견해를 오래 전부터 피력해왔다. 그런데 한글학자 리희승씨는 “내가 자랄 때 쇠고기라고 했다. 내가 하는 말을 표준으로 한다”면서 ‘철자법’이라는 책을 내놓았다. 그리고 한글학회는 리씨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이를 ‘맞춤법’이라며 ‘쇠고기’로 표기하도록 권장했다.
그렇다면 ‘염소+고기’는 ‘염쇠고기’여야 하는 것 아닌가. 리씨가 고인이 된 지금도 ‘쇠고기’라는 표기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소고기’와 병용되고 있다. 또 신문사와 방송사 기자는 여전히 쇠고기를 고집하고 있다. 하지만 기자들 중에 정육점에 가서 “쇠고기 달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리희승씨라면 몰라도.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으뜸소리를 표기한다. 대표적인 나라가 프랑스다. 그들은 ‘Descartes’라고 표기하고 ‘데카르트’로 읽는다. 발음하거나 들을 때 ‘s’소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소리를 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표기에서는 으뜸소리 ‘s’를 굳게 지킨다. 발음은 자유지만 표기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전통과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에스프리’라고 발음하면서 ‘esprit’로 표기해 ‘t’를 버리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하지만 우리는 몇 사람의 학자에 의해 표기가 좌우되고 있다. ‘님’은 그대로 쓰면서도 ‘님금’은 읽기 불편하다고 ‘임금’으로 바꿔버렸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두음법칙이라는 이름으로.
집현전 7학사 하옥사건
이들 학자는 역사적 사실까지 왜곡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와 관련한 ‘세종실록’ 기록 중 일부다.
‘癸亥 12月,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이를 직역하면 “1443년 세종 25년 12월, 이 달에 왕이 친히 28자를 만들어 알렸다”로 된다.
하지만 리숭녕씨는 이를 “집현전 학사들이 훈민정음을 만들어서 세종에게 바쳤다”고 풀이했다. 세종은 이를 반포했을 뿐이라는 것. 이런 잘못된 번역은 이후 초등학교 교과서에 그대로 실렸다.
실제로 세종은 중국 황제가 모르도록 집현전 학자들에게만 이를 살며시 전해줬다. 왕이 뜻을 폈다면 ‘반교문(頒敎文)’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세종실록 어디에도 ‘훈민정음 반교문’은 나오지 않는다. 또 ‘훈민정음’이라는 한자로 정리한 책도 만든 적이 없다.
세종이 비밀리에 제일 먼저 간행을 지시한 책이 바로 ‘룡비어천가’라는 ‘조선 님금노래’ 책이다. 이 또한 세종이 직접 만들어놓고는 권제와 정린지, 안지가 지어서 올린 것으로 꾸몄다.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는 이들 3인이 한글을 사용할 줄 몰랐다는 것. 또 룡비어천가 제1장을 보면 ‘해동 륙룡이 나라샤’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신하들이 만든 것이라면 능지처참을 당할 중죄를 지은 것이나 다름없다. 륙룡이라면 ‘목조(이안사)-익조(이행리)-도조(이춘)-환조(이자춘)-태조(이성계)-태종(이방원)’을 의미하는데, 정작 주상전하인 세종을 빠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종이 지은 것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집현전 학자들은 오히려 한글 사용을 반대했다. 당시 기득권자이던 집현전 학자 7명은 한글 사용을 반대하는 소(疏)를 올리는가 하면 세종의 설득에도 아랑곳없이 대들다가 의금부에 잡혀간 적도 있다. 그것이 바로 ‘집현전 7학사 하옥사건’이다.
세종은 집현전의 학자들이 한글사용을 반대할 것으로 예상하고 집현전 대제학을 임명하지 않는 등 나름의 대책을 세우기도 했다. 결국 세종 32년(1450) 2월, 세종이 승하할 때까지 대제학 자리는 공석이었다.
그로부터 460년 뒤인 1910년(경술)에 나라를 잃으면서 한글은 또다시 위기를 맞는다. 그리고 광복 후 한글학회가 만들어지고 세종의 업적이 뒤늦게 평가받으면서 한글이 뒤늦게 부흥하는 듯했지만 오히려 더 훼손되고 말았다.
으뜸소리 지켜야 충돌 적어
급기야 1996년 10월, 대법원 판사 13명이 “사람 이름 성씨 적기는 두음법칙에 따른다”는 내용을 담은 ‘호적례규’를 발표했다.
이 례규의 적용을 받게 된 ‘ㄹ성씨’는 라(羅), 량(梁), 려(呂), 렴(廉), 로(盧), 로(魯), 류(柳), 륙(陸), 리(李), 림(林) 10개. 이 성을 사용하는 사람은 어림잡아 1000만명에 가깝다. 이처럼 많은 국민이 자신의 성씨를 빼앗긴 채 살아가야 할 처지가 된 셈이다.
이를 끝까지 거부한 집안도 있다. 안동 하회마을의 풍산류씨(豊山柳氏) 집안이다. 조선 선조 때 류운룡(호 겸암)과 류성룡(서애) 형제가 이곳에 터를 잡은 후 지금까지 전통을 이어온 풍산류씨는 지금도 ‘류’씨를 고집하고 있다.
필자는 1977년부터 두음법칙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우리의 으뜸소리를 지키자고 주장한 바 있다. 필자의 주장을 정리하면 이렇다.
▲‘羅(라)’씨의 경우 으뜸소리 ‘라’를 그대로 사용하면 ‘那(나)’씨와 충돌이 생기지 않는다. 굳이 괄호 속에 이 두 성씨를 구분하기 위해 한자를 적지 않아도 된다. ‘梁(량)’씨와 ‘楊(양)’씨, ‘呂(려)’씨와 ‘余(여)’씨, ‘林(림)’씨와 ‘任(임)’씨도 마찬가지다.
▲‘盧’ ‘魯’는 두음법칙상 ‘노’로 읽고 쓰지만 영문으로 표기할 때는 모두 ‘Ro’다. 이 두 글자의 으뜸소리도 ‘로’다. 굳이 이를 ‘노’씨로 부르고 영문표기를 ‘No’로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柳’의 으뜸소리는 ‘류’다. 이를 사용하면 으뜸소리가 ‘유’인 ‘’씨, ‘劉’씨 등과 충돌이 줄어든다. ‘李(리)’씨와 ‘異(이)’씨, ‘伊(이)’씨도 같은 경우다.
실제로 두음법칙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모든 성씨가 으뜸소리를 써왔다. 남한 정부 초창기 대통령과 부통령의 이름을 ‘리승만’과 ‘리기붕’으로 썼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신문사에 ‘리승만’이라고 써서 보내면 ‘이승만’으로 모두 고쳐버린다. 이것이 인권 침해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훈장엔 ‘려’씨, 주민증엔 ‘여’씨
필자는 2005년 10월4일 리용훈 신임 대법원장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리 대법원장이 1996년 호적례규를 발표한 13명의 대법원 판사 중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공개서한 내용 중 일부다.
‘성씨 적기는 인간의 기본권입니다. 법보다 우선하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자신의 이름을 자기 마음대로 적지 못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를 법적으로 규제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1998년에 65세 정년퇴직할 때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훈장에는 이름이 ‘려증동’이라고 적혀 있더군요. 그런데 관청에서 발행하는 주민등록증의 이름은 ‘여증동’입니다. 그나마 은행통장은 ‘려증동’으로 발급받을 수 있어 다행입니다.
‘두음법칙’은 국회를 통과한 법이 아닙니다. 두음법칙을 만든 사람은 서울대 리숭녕 교수입니다. 그가 일제 강점기 때 경성제국대학을 다니면서 일본 교수로부터 ‘ㄹ소리 버릇’을 배웠고, 그것을 조금 바꿔서 두음법칙이라고 만들어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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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월, ‘연합뉴스’가 펴낸 ‘한국인물 사전’은 그동안 받아온 고통을 조금이나마 씻겨줬습니다. 라종일(羅鍾一) 려증동(呂增東) 류갑종(柳甲鐘) 리영희(李泳禧) 림영철(林永喆) 등을 원래 성씨대로 표기해줬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한양대 서정수 명예교수가 “남북 언어학자 모임에 다녀왔는데, 남한에서 시행하고 있는 두음법칙을 없애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며 서울에서 열릴 세미나에서 필자가 평소 주장하는 두음법칙 폐지론에 대해 발표해달라고 부탁했다. 기회가 된다면 필자는 그곳에서 두음법칙이 사라져야 할 당위성을 다시 한 번 피력할 것이다.